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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기도하고 찬송하라(약5:13-18) 202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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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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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9-26 20:54 조회 334 댓글 0
 

e                       기도하고 찬송하라(약5:13-18)         2021. 9. 26



성경은 기도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구약의 하나님이 쓰신 모든 사람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성경을 어느 정도 아는 이들은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이사야, 에스겔, 엘리야, 엘리사, 에스더, 느헤미야 등등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들의 기도 생활이 생각나지 않나. 


무드셀라의 아버지 에녹은 65세에 아들 무드셀라를 낳았다. 그 이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아들 낳던 해에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믿음의 선진들을 다룬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에녹의 믿음을 평가하였다. 창세기 5장 22절에 보면 에녹은 “무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한 “‘동행’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질문해 보게 된다. 에녹이 삼백년을 하루하루 어떤 생활을 하였기에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였을까. 아마도 그것은 에녹의 기도 생활에 대한 다른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 제자들과 무리 곁에서 지내는 일과 외에는 늘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은 기도이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있기를 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서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영화도 보고, 늘 함께 지내기를 원하고 좋아한다. 동행한다는 것은 이처럼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은 기도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다. 


기도 생활은 골방기도처럼 하나님과 나와 독대하는 것이다. 나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기도다.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며 살아가는 증거가 기도 생활이다. 


기도 생활을 하지 않는데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밥 먹기 전에만 잠깐 눈 감고 기도하는 그런 정도의 기도 생활을 갖고 기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야고보는 야고보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떤 기도 생활을 강조하고 있나.

 

 

고난 당할 때에 기도하라.

맞다. 사실 사람이 평안하고 별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별로 기도의 부담을 갖지 않는다. 일상이 순조롭고 평안한데 금식하며 기도하고 밤을 새워 가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고 걱정과 고민과 근심거리가 마음을 맷돌처럼 짓누를 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건강할 때야 그렇지만 내 몸이 병들어 보라. 내 마음이 알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우울에 빠지고 불면증으로 고생해 보라. 공황장애 증상이 몰려오고,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지고 심장이 쿵꽝 쿵꽝하고 느껴질 정도로 뛰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듯이 누구라도 절대자의 도움을 의지하게 된다. 


야고보는 고난 당할 때에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고난’이 무엇인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내가 믿음으로 살아 왔고 지금 믿음으로 살아가고있는 것 같지만 정작 내게 고난이 닥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하나. 평상시에 그렇게 하나님, 하나님 하며 살아 온 것 같은데 정작 고난이 닥치면 낙심하고, 낙담하고, 원망하고, 실의에 빠지고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반응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고 해서 고난이 없나. 예수 잘 믿는다고 해서 시험이 없나.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으며 살고 예수를 의지하며 사는 것 같애도 정작 어려움을 겪게 되면 고민에 빠지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누구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걱정과 근심과 염려와 낙담의 수렁에 깊이 깊이 빠져 들어가서 아예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빠져 들어가서는 않된다는 점이다. 기도로 이겨내야 한다. 


우리가 겪는 고난과 시련은 각 사람마다 정도가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고난이 없이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게 나 자신에게 오는 고난이든 아니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오는 고난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가난이나 실직이나 질병의 문제이든 혹은 불의의 사고로 인한 어려움이든 아니면 남에게 설명할 수조차 없는 기가 막히고 속상한 일을 겪으며 억울하게 지내는 그 무엇이든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려서 시골에서 자랄때에 안채와 바깥 행랑채가 있고 그 사이에 안 마당이 있었다. 안마당 툇마루에 아침마다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았다. 뉴스도 나오고 노래도 나오고 일기예보도 들을 수 있었다. 아침마다 하는 라디오 드라마가 있었다. <즐거운 우리집>이란 제목의 드라마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나눕시다 명랑하게. 일년은 삼백 육십 오일.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어도 우리 집은 언제나 웃으며 산다”이런 주제가가 아침마다 안마당을 가득채웠다. 쿨시스터즈 세 자매가 부르던 주제가이다. 동양라디오에서 1964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25년간 8000회를 방송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 기억에 세상 사람 살아가는 것을 참으로 별의 별일이 다 많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보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 그런 이야기가 드라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내 이야기이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집 건너 한집마다 고난과 시련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낙담과 고민과 걱정과 근심과 괴로움과 한숨이 있다. 


사극(史劇)에 보면 이런 일들은 왕의 주변에도 있었다. 왕이라고 늘 행복하고 늘 좋고 늘 평안하고 늘 건강하고 늘 희희낙락(喜喜樂樂)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너 식구 모여 사는 한 집에도 별의 별 일이 다 많은데 한 나라의 왕으로 지내려면 나라 안에 어찌 별의 별 일이 없었겠나. 왕을 중심으로 왕비와 후궁과 처첩사이에 어찌 갈등과 시비와 미움과 경쟁이 없었겠나. 더군다나 대신들 사이에 얼마나 밀고 당기는 권력 다툼이 대단하였겠나.


그런 면에서 보면 고난이 없는 인생이란 없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왕이든 평민이든 누구에게나 다 고난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이야 무당을 찾아 다니고, 점을 보고, 굿을 하고, 조상 묘를 옮기기도 한다. 이사를 가기도 한다. 그러나 고난이란 것이 이사 간다고 해결되나. 이민 간다고 해결되나. 물론 이사나 이민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니 조금은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난, 시련, 아픔, 슬픔, 괴로움, 시련, 역경이란 것은 파도가 밀려 오는 것과 같아서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거세게 밀어 닥치는 강한 바람과 파도 앞에서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우리가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묵상하나. 태어난 지 석달 만에 갈대 상자에 담겨서 나일강에 던져진 아기 모세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인용하나. 그러나 정작 내 운명이 요셉이 되어 보라. 내 아들 요셉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다른 열 아들에게 속아서 긴 세월을 지내던 야곱의 입장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라. 


모세 이야기는 어떤가. 태어난 지 석달째에 겪은 일이니 모세는 그렇다 치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그날 나일 강에 떠내려가는 동생 모세를 담은 갈대 상자를 따라 갈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삼개월을 숨겨 키우던 아들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강에 흘려 보내고 난 그 직후의 모세의 엄마 아빠의 심정은 어땠을까. 비롯 노예의 가정이지만 집 안에 미리암도 있고 세살 짜리 아론도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데 막내 아들 모세를 태어난 지 세달 만에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떠내려 보내던 그 날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런데 몇 시간 후에 미리암이 집안으로 헐레 벌떡 달려 와서 하는 말이 “나라의 공주가 동생 모세를 갈대상자 안에서 건져 내어 안고 있는데 젖 먹일 유모를 찾고 있으니 엄마가 가면 좋겠어요”라고 말할 때에 엄마의 심정은 어떠했고 아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렇게 시작된 모세의 이야기는 모세가 120살에 하나님 앞으로 가가까지 기긴 그의 생애를 중심으로 성경이 기록되고 있다. 왜 모세 이야기를 하는가. 모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모세는 고난 중에 기도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여건 중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기도하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세의 기도 중에 아말렉가 전투를 벌이던 광야에서 여호수아는 아멜렉과 마주하여 싸우고 산 꼭대기의 모세는 종일토록 두 손을 들고 기도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중에는 지친 모세를 돌 위에 앉게 하고 형 아론과 미리암의 남편인 매형 훌이 양쪽에서 손을 맞잡아 치켜들고 기도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기도는 생각이 아니다. 기도는 염려가 아니다. 기도는 기도이다.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쉬는 동작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늘 숨을 쉬며 살아가듯이 기도는 일상이어야 한다. 감기에 걸려서 코가 몹시 막히거나 하면 숨을 쉬는 동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실감하게 된다. 이처럼 기도가 부담스러운 것은 건강한 영적 상태가 아니다. 병든 증거이다. 숨을 쉬는 동작이 자연스러워야 하듯이 기도하는 일상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면 않된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기도 생활을“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시지 않고 기도 생활을 늘 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찬양이며 경배이며 감사이며 주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서 나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 가기를 염원하는 간구의 긴긴 여정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밤이 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매어 달린 상태에서 죽어가시면서도 기도하셨다.


맞다. 우리는 늘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며 살다가 기도하며 생을 마감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고난 중에도 기도하고 역경 중에도 기도하고 슬픔 중에도 기도하고 그 어떤 시련 중에서도 기도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시다. 



즐거울 때에 찬송하라.

야고보는 기도와 찬송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기도가 찬송이고 찬송이 기도이다. 기도에 곡조를 붙인 것이 찬송이다. 찬송은 곡을 붙여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기도는 찬송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염려나 탄식이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해 나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내용으로 채워 나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기도자의 마음가짐을 갖고 찬송생활을 계속하여야 한다.


과거에 어느 기도원에서 기도하는데 밤새워 긴긴 시간 기도 대신에 찬송을 계속하여 부르는 이를 보았다. 불 꺼진 깜깜한 기도원 저편 구석에서 밤새도록 찬송하고 또 찬송하는 기도자를 보았다. 그는 찬송 그 자체가 기도였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진심을 담아 찬송할 수 있다면 무슨 다른 기도가 더 필요한가.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338장 4절)라고 찬송하지 않나. 


256장 찬송가의 가사를 짓고 곡을 붙인 이는 오소운(1931- ) 목사이다. 그의 자서전,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에 보면 그는 14살 때부터 작사, 작곡을 하였다. 평생 수 많은 찬송가를 작사 작곡하였다. 어린이 찬송가 100곡을 지었다. 34살 때인 1965년에 작곡집 <할렐루야>를 출간하였다. 373곡의 찬송가를 작사 작곡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의 자서전에 보면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기나리라~~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되리..”라는 찬송의 가사도 오소운 목사의 작품이다. 1988년 스크랜턴 대부인으로부터 경기도 용인에 살던 할아버지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큰 아버지와 아버지가 장로가 되어 아리실 교회를 세우고 섬겼다. 10남매 잃고 두 누이 태어나고 오소운이 태어났다. 믿음의 뿌리가 되라고 신근이라 지었다. 조선 신학교 때 김정준 박사가 엘리야의 손바닥만한 구름 이란 뜻의 작은 구름 소운(小雲)이라고 작명해 주었다. 


옛날 선교 초기, 조선에 온 미국인 선교사가 보니 양반들은 모두 머리에 갓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하여 한 유식한 양반에게 물어보았다.

"그 머리에 쓴 것이 무엇이요?" "갓이요." "아니 갓이라니. 갓(God)이면 하나님인데 이 나라 사람들은 머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니 하나님의 영이 이미 임했다는 것 아닌가.”


선교사가 또 물었다. "그러면 이 나라 이름이 무엇이오.”양반을 한자로 글자로 쓰며 설명해 주었다. 


"朝鮮이요. [아침 朝 + 깨끗할 鮮] 이렇게 씁니다.” 라고 대답하며 글자를 써 보였다. 그 선교사는 더욱 깜짝 놀라 "깨끗한 아침의 나라, Morning calm의 나라란 말이 맞습네다.” 라고 말하고는 조선의 ‘朝'자를 풀이해 달라고하였다. 양반은 천천히 글자를 쓰면서 대답했다. "먼저 열十 자를 쓰고 그 밑에 낮이라는 뜻의 날日자를 쓰고 또 열十 자를 쓰고 그 곁에 밤이라는 뜻의 달月 자를 썼습니다. 이렇게요.”


설명을 듣고 있던 선교사는 [십자가十  날일日  십자가十  달월月] 이라고 놀라워하며 중얼거렸다. "낮(日)에도 십자가(十)  밤(月)에도 십자가(十), 하루종일 십자가 라는 뜻입네다”그리고 또 말했다. "鮮자도 풀이해 주시오.”

"물고기 魚 옆에 양 羊 자를 씁니다.”선교사가 다시 놀라며 말했다.

"물고기는 초대 교회의 상징인 ‘익투스'로‘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고, 또 羊은‘하나님의 어린 양' 이니  鮮 자는 완전히 신앙고백을 담은 글자입니다.”선교사는 감탄하여 말하길 "朝鮮이라는 나라는 이름부터가 낮이나 밤이나 십자가만 바라보며‘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이신 어린 양'이라는 신앙 고백적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아니합니까. 조선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복음의 나라입니다.”하고 감탄을 하며 선교사가 또 질문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 사람을 영어로는 어떻게 쓰나요?”"Chosen People이라고 씁니다.”

"와우. 선택된(Chosen) 사람들(People)이라고요. 조선은 과연 동방의 선민(選民), 선택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지만 늘 기도하고 늘 찬송하자.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고 찬송하자. 괴로우나 즐거우나 기도하고 찬송하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기도하고 찬송하자. 기도하고 찬송하며 사탄마귀가 떠나간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걱정, 근심, 염려, 불안, 고난, 두려움, 초조, 낙담, 낙심, 슬픔, 괴로움, 초조, 우울이 떠나가고 나도 알 수 없는 감사, 기쁨, 소망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를 감싸고 인도해 주신다. 


우리는 오늘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찬송을 불렀다. 2-3절 가사에 보면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자 누군가”라고 찬송하지 않나.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 없이 낙심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기도 생활과 찬송 생활의 감격을 회복하는 가을, 그런 나날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였다. 서로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한 사람을 부르지 말고  장로들을 부르라고 하였다. 내가 했다. 내가 고쳤다 그런 말 하지 않도록 여럿이 모여 기도하도록 여러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였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강조하였다. 서로 죄를 숨기지 말고 고백하며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로 든 것이 엘리야 선지자이다. 기사와 이적과 기도의 사람 선지자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강조하였다. 무슨 말인가. 엘리야라고 해서 다른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들려 올리음을 받은 영의 사람 엘리야도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던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엘리야가 기도하니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다시 그가 기도하니 마른 하늘 끝에서 손바닥 만한 구름이 보이기 시자하였다. 일곱 번을 계속하여 기도하니  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젊은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유능한 사람,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 인기 있는 사람 다 좋지만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다. 서로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을 하나님은 오늘 날도 찾고 계시다. 진심을 담아 서로를 위하여 중보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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