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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난 지혜(약3:13-4:3) 202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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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9-26 20:52 조회 242 댓글 0
 

                      위로부터 난 지혜(약3:13-4:3)          2021. 9. 19



야고보서 3장의 앞 부분에는 말의 실수와 그 심각성에 대하여 교훈하였다. 사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라도 말에 실수가 전혀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하루를 살아도 말의 실수에 대하여 후회하고 아쉬운 마음을 갖고 생활하게 된다. 동물인 말은 재갈 물려서 주인의 요구대로 길들려 보려 한다. 바다의 배는 아무리 큰 배라도 키로 그 방향을 정하게 된다. 혀는 불과 같다. 성냥불 한 개피나 불이 꺼지지 않은 채 버리는 담배꽁초 한개피와 같은 작은 불씨가 엄청난 면적의 산을 태운다.


제 아무리 성자 칭호를 받은 그 누구라도 말을 온전히 길 들인 사람은 없다. 그러하다 보니 기도원 생활이나 ‘침묵수행’을 강조하게 되었다. 말로써 말이 많으니 차라리 가능하면 침묵하며 지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야고보는 “혀는 능히 길 들일 사람이 없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다.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 우리가 한 입으로 찬송도 하고 저주의 말도 한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한 말이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3:11)는 교훈이다. 


야고보서 3장의 12절까지는 말의 절제 생활에 대한 강조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으로 읽은 13절 이하의 내용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다스리는 참 지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15절에서 “땅 위의 것”이란 표현을 사용한 야고보는 17절에서 “위로부터 난 것”에 대하여 대비를 이루어 교훈하고 있다. 차례대로 말씀을 묵상하자.



땅 위의 것들이란 무엇인가.

땅 위의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고 하였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인가. 스스로 지혜로운 척 하고 스스로 총명한 척하지만 독한 시기, 다툼, 자랑, 진리를 거슬러 말하는 거짓말 등이 그렇다는 말이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만 계속될 뿐이다. <새번역성경>으로 보니까“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니까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의 것이라”고 하였다. 


<공동번역성경>으로 읽어 보니까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마음속에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을 품고 있으니 공연히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런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며 동물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약3:13-16)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과 교회를 중심으로 자녀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

5월달에만 ‘가정의 달’로 정하고 자녀 교육이나 가정의 소중함에 대하여 말하지 말고 날마다 이러한 주제의 묵상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청년과 어른인 우리도 날마다 순간마다 이것을 마음 속에 되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나. 세상은 나라 안과 밖에 이러한 땅에 속한 것들로 인해서 세속적이고 동물적이고 악마적인 일들이 넘쳐난다. 그 모든 사건들이 얼마나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가. 


지난 주중에 날마다 조금씩 묵상한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의 내용들이 그러하다. 내일, 월요일까지 묵상하면 21장 분량의 사사기를 마치게 된다. 우리는 사사기의 후반부의 내용을 통해서 레위인의 타락, 부부 생활의 부패, 첩을 맞아 들이고, 처녀인 딸을 불량배들에게 내어 주려 하는 장면을 보았다. 밤중에 몰려 다니는 동성애자들의 광란극도 보았다. 집단 강간의 장면도 보았다. 첩을 죽이고 12토막을 내어서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내는 장면도 보았다.   

지금 설명하는 내용이 요즘 어느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나온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사사기 18-19장에 나오는 성경의 내용이다. 왜 성경은 이런 비참하고 참담한 사건의 내용까지 담고 있을까.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사사 시대 말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 <대부>에서 접하는 내용들이 먼 나라의 옛날 이야기가 아니로 오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야고보는 편지한 것이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하여 그 증거와 열매를 주변에 보여 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고 교훈한 것이다. 이 악한 세상에서 시기, 다툼, 자랑, 거짓말을 버리고 선을 심어 선한 열매를 거두는 인생을 살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란 무엇인가.

 17절을 보자. “그러나 하늘에서 온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에는 평화를 사랑하고 너그럽고 양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약3:17)


순결하고 pure

평화를 사랑하고 peace-loving

너그럽고 considerate

양순하고 submissive

자비와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full of mercy and good fruit

편견과 위선이 없다  impartial and sincere.


첫째, 순결(純潔)이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흠결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그노테스’라는 ‘순결’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을 특징짓는 말이다. 

시편 12편 6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하였다. 


둘째, ‘평화를 사랑하고’라고 하였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두 번째는 ‘평화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성경의 역사가 그러하고 일류의 역사가 교훈하는 바가 그러하다. 히틀러나 뭇솔리니나 스탈린이나 히로히토나 김일성은 평화를 사랑한 사람들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 세력은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다. 이는 개인이든 가족이든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지혜를 덧입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평화를 사랑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온전한 천국의 평화를 선물해 주기 위해서 오셨다. 그것이 자녀됨이고 구원이고 죄 사함이고 영생이다. 십자가는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이었다. 죄와 사망은 예수의 생명을 이길 수 없다. 예수의 부활 생명 가운데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나게 된다. 예수는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성령의 열매로 선물해 주셨다. 


그 뒤에 이어지는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라는 말씀을 대하다 보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5장에서 편지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생각나지 않나. 여기서 교훈한 ‘긍휼’ 즉 ‘자비’란 ‘시기’에 반대되는 덕목이다. 선한 열매란 상대방을 긍휼하게 여기고 자비롭게 대한 결실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이다. 그렇지 않나.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각색 병자와 귀신 들린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셨다. 그 결과가 온전하게 고침을 받는 치유이다. 


우리는 지난 금요일 밤에 ‘천정은 자매’의 암 투병기를 간증으로 접하였다. 90여번의 항암 치료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복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과 전부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란 진리를 깨닫고 보니 암과 씨름과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간증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교회 오빠>라는 책과 다큐물의 영화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지금 건강하게 생활하니까 그렇지 병들어 보라, 아파보라, 병석에 누워 보라. 알 수 없는 고난과 환난과 역경과 중한 질병과 사고와 누명, 시기, 비난 앞에 서게 되면 비로서 위선의 옷을 훌훌 벗어 버린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위선의 옷과 가면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 앞에 나란 존재로 주님을 독대하게 될 때에라야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기대를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10월부터는 욥기를 묵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욥기의 내용을 안다. 욥기의 주인공인 욥이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의지하고 살던 재물, 지위, 인기, 명예, 건강, 가족, 배우자, 자녀 이 모든 것이 나의 소유인 것처럼 당연시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 모든 소중한 관계와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 때서야 “나란 존재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라는 자기 실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거창하게 키에르케고르, 헤겔, 칸트, 쟝 폴 사르트르, 스피노자, 하이덱거 이런 철학자나 사상가의 이론과 교훈을 상대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리가 성경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은 하라 그리고 말라는 수 많은 진리의 교훈을 통해서 인생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1905-1980)의 명언 중이 이런 것들이 있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인생은 출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다.

(Life is C between B and D)

(Life is Choice between Birth and Death).


약속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Commitment is an act, not a word.


프랑스인들은 장 폴 사르트르를 사랑했다. 사르트르는 드골 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 독재적 성향에 반대하며 반정부 입장을 고수했다. 1958년 프랑스 보호령인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알제리를 지지하는 투쟁에 가담했다. 그 반대 투쟁에 가담한 모든 사람이 일일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만은 제외되었다. 어떤 장관이 드골 대통령에게 그 이유를 묻자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르트르 자신이 프랑스이기 때문이지.”


사르트르는 한쪽 눈은 이미 세 살 때부터 보이질 않았다. 그 나마 한쪽 눈도 사팔뜨기였다. 키도 몹시 작았다. 그러나 언제나 넘치는 익살로 사람들을 곧잘 웃겼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상대방의 의도를 잘  파악할 줄 알아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었다. 또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싸울 때는 생명까지도 걸고 투쟁했다. 그는 사유재산제도를 반대하여 호텔에서 잠을 자고, 카페에서 일했으며,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신조 때문에 41살 때 마련한 집에서 16년 동안 사는 동안에 너무나 큰 심리적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70살 때에는 하나 뿐이던 왼쪽 눈마저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더 이상 독서도 못하고 집필 활동도 어려워졌다. 그리고 5년 후 폐기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쉬운 점은 그가 평생 무신론자로 살았다는 점이다.


해군 기술 장교였던 그의 아버지는 장 폴이 두 살 때에 죽었다. 그 뒤 그는 외가로 가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곁에서 지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원시림의 성자'로 알려진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큰아버지였다. 독일어 교사였던 외할아버지가 파리에 외국어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자 외손자인 장 폴도 파리에서 지냈다.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다. 외할아버지는 사르트르를 몹시 귀여워했다. 그에게 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심어주었다. 소르본느 대학의 독문과 교수였고 굉장한 독서가였던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서재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수 많은 책을 접했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이던 그는 아홉살이 되자 센 강가의 헌책방을 뒤져 모험소설을 비롯한 문학 서적을 500여 권이나 사서 읽어나갔다.


열 한 살 때에 어머니가 재혼하여 의붓아버지 밑에서 살았다. 그의 작품 가운데 유난히 자유를 주제로 한 것이 많은 까닭은 이러한 성장기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조금이라도 떠들며 장난을 치면 "애야, 조용히 해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혹은 "그것은 만지지 마라 우리 것이 아니니까” 하고 억압했다.


장성한 장 폴 사르트르는 철학, 문학, 예술, 정치, 사회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왕성한 지성의 힘을 발휘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불세출의 거장이었다. 특히 1964년, 59살 때에 자전적 소설 <말 Les Mots>을 써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최고의 명예와 그에 따라오는 5만 달러의 상금을 거부했다. “노벨상이 서구 작가들에게만 치우침으로써 그 공정성을 잃었다”는 것이 수상을 거부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 일은 그의 명성을 오히려 더욱 더 드높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흔히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을 말할 때 장 폴 사르트르를 항상 그 최고의 자리에서 거론해 오고 있다. 1980년 4월 15일에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 무려 25,000여명의 프랑스 국민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 신문들은 그의 장례식은 빅토르 위고의 장례를 연상시킨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동거, 계약 결혼을 주창하고 <제 2의 성>의 저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계약 동거 관계로 살아가며 자유 분방한 삶을 위해 자녀 낳기를 거부하였다. 날마다 술 마시기를 즐겨 하였다.


성경은 제 멋대로 살고, 내 멋대로 살아가고, 하고 싶은대로 하며 살아가는 것을 금한다. 그래서 이렇게 교훈하는 것이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잘못 구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소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기도한다. 우상 앞에서도 빌고 막연하게 피조물 앞에서 소원을 품는다. 인간 세상에는 동물의 세계와 비교할 수 없는 끊임이 없는 싸움과 다툼이 계속된다. 이 바탕은 욕심이다. 때론 살인도 한다. 시기하고 싸우고 다투는 일이 일상이다. 세상이 악하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이미 그랬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하나님께 제사드린 후에 쳐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다.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쳐 죽인 것이 인류 최초의 가정 아담과 하와가 목격한 충격이요 슬픔이었다. 야고보서 4장 1-2절은 그와 같은 인간의 악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러면서 기도 생활의 가치를 교훈하고 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하-3)


예수께서는 평생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의 기도의 주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소원이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에 따라 살아가고자하는 것이었다. 그 나중이 십자의 죽으심이요 부활로 이어진 것이다. 야고보도 기도의 사람이었다. 야고보의 기도는 선행으로 이어졌다. 행함으로 이어지는 생각과 말과 믿음의 힘을 강조하였다. 점점 험악해지는 세상에서 세상만 탓하지 말고 세상의 어둠을 이기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자. 세상을 사람 살만하게 하는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삶을 살아가자. 맞이하는 한가위, 추석에 가족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다움 품격을 지켜가며 생활하자. 주님의 은혜를 구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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