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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저를 도우소서(마15:21-28) 202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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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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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9-11 10:44 조회 48 댓글 0
 

                     주여 저를 도우소서(마15:21-28)          2021. 9. 5



사람이 평안할 때는 그 누군가의 도움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병이 들면 누구나 의사를 찾게 마련이다. 종합병원의 소문난 의사를 만나려면 몇 달 전에 예약하고 기다렸다가 3분 동안 만나 상담을 받고, 진료를 받고, 처방을 받기도 한다. 누구나 어려운 병에 걸리면 적절한 약을 구하려고 한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나서서 해결하면 되지만 정작 전문성이 필요한 일들은 전문가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변호사, 세무사, 법무사, 부동산 전문가, 의학 전문가, 상담 심리학자, 유아 교육 전문가, 청소년 문제 전문가, 가정 문제 전문가, 부부 문제 전문가 등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 받고 싶어 한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북쪽의 국경을 넘어선 지중해에 연접한 해양도시이다. 그 두 도시의 역사는 깊다. 다윗 왕 때인 3,000년 전에도 있었던 도시이다. 사무엘하 5장 11절에 보면 두로의 왕 히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에게 사절을 보내면서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더불어 보냈다. 그들은 왕이 된 다윗을 위하여 왕궁을 건축하는데 직접 참여 하기도 하였다. 그처럼 두로 사람들은 이미 그 당시에 뛰어난 건축술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관계는 아들 솔로몬 왕 때까지도 이어져 갔다. 두로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염색, 목재, 곡물, 기름, 포도주, 금과 은을 비롯한 보석 등을 채광하고 각종 생산물을 수출해서 막대한 부를 누려 왔다. 


본문에는 그런 얘기가 없지만 어떤 사료에 의하면 예수께 나와서 소리 지르던 이 가나안 여인은 부자였다고 한다. 부자는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백년을 놀고 먹어도 남을 만큼 넉넉한 부자들이라면 뭐가 아쉽겠나. 


그렇지 않나. 부자일 뿐만 아니라, 가족이 건강하고, 자식들이 잘 되고, 등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아쉬울 것이 무엇이 있겠나. 그래서 예수께서“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은 뭐가 아쉬워서 예수께 찾아온 것인가.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 


같은 본문을 기록한 마가복음 7장 25절에 보면 어린 딸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라. 차라리 내가 아프거나 내가 병드는 것이 낫지 자식이 아파봐라. 그것도 몸이 아픈 병이 아니라 사랑스런 어린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으니 집안 형편이 오죽하겠는가.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는데 부자면 뭘하고, 아무리 잘 살면 뭘하고, 아무리 사업이 잘 되면 뭘하겠나. 물론 그나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딸이 귀신에 들린 것보다야 나을 수 있다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많은 돈을 싸 들고 유명한 의사를 찾아다니고, 유명한 병원을 찾아다니며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고 딸을 고쳐 보려는 노력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사람이 귀신에 들린다는 상태는 심각한 일이다.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는 것이야 수술하고 세월 지나면 고쳐질 수 있고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귀신 들린 상태에서 귀신이 떠나가고 고침을 받는 것은 현대 의학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귀신 들렸다는 상태는 영적인 차원이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로 접근하고 영적인 해결점을 찾아 나서야 한다. 주님이 해결해 주셔야만 한다. 성령이 역사해야 귀신이 떠나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중의 하나가 각색 병자를 고치신 일이다. 그 중에서도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내시고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신 일이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신은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늘 사모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감히 접근하지 못한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 믿지 않는 이들의 영혼에 찾아 들어간다. 예수를 믿는 것 같기는 한데 모양만 신자 행세하며 그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의 없으면 그 마음을 귀신이 점령하게 된다. 


예수는 “어느 집에서 쫓겨난 귀신이 그 쫓겨난 집에 다시 찾아와서 집 안을 들여 다 보니 집안이 비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 그 귀신은 자기가 아는 일곱 귀신을 더 데리고 와서 그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러면 그 집의 나중 형편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비유를 교훈해 주셨다.


그렇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집에 세속적인 생각과 귀신이 좋아할 만한 육신의 욕망에 가득 찬 생각들을 내어 쫓고 성령으로 가득하게 채우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는 비우는 것을 교훈한다. ‘공’(空) 혹은 ‘허’(虛) 이런 강조가 불교의 교훈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우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다. 성령으로 채우고, 은혜로 채우고, 감사로 채우고, 주님 생각으로 채우고, 천국 소망으로 채우고, 사랑으로 채우고, 기쁨으로 채우고, 온유와 겸손으로 채우고, 용서로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2:5)고 교훈하였다. 


맞다. 신앙생활이란 내 마음에 예수의 마음으로 꽉 채우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에 가득하게 들어차게 된다. 자나 깨나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생각으로 가득차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내가 무슨 일을 좋아하게 되면 그 좋아하는 일에 대한 생각이 밤낮 나의 생각을 지배한다. 


그렇지 않나. 이처럼 사람이 무슨 걱정이나 근심이 있으면 그 근심이나 걱정이 하루 종일 내 생각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불면증으로 고생하기고 하고, 공황장애로 시달리기도 한다.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자살 충동에 빠지게도 된다. 


미국은 총기 사고가 많은 세계 최고의 나라이다. 미국에는 등록된 총기의 수만도 3억 9,300만 점에 이른다. 4년 전인 2017년 통계이다. 미국 인구가 3억 2,600만 정도인 것을 비교하면 인구수 보다 총기의 수가 훨씬 더 많다. 그 총기 사고의 70%가 스스로 자기 목숨을 해치는 경우이다. 이처럼 사람은 연약하고 부족하다. 자기 생명을 지키려고 마련한 총기로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해하는 불행에 빠지니 말이다.  


오랜 만에 복음서의 말씀을 접하고 있다. 오늘 본문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가복음 7장 24절 이하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거기서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 찾아와서 절하며“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요청한 이 가나안 여인의 요구를 제목으로 삼고 말씀을 묵상하려고 한다. 



소리 지르는 가나안 여인.

사람이 누군가와 말할때에 상대방이 알아들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기본 예절이다. 간혹 자기 귀가 잘 안 들리기 때문에 큰 소리로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 상황에 맞게 적당한 크기의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고 배려이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와 제자들이 지나는 가까이 다가와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마15:22)


마태복음 15장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앞부분인 1-20절까지의 내용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찾아와서 시비를 걸었던 내용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다.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간혹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았다. 장로들의 전통에 어긋난다는 지적이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간 음식은 배를 거쳐 뒤로 배설 되지만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것들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책망조로 교훈하셨다. 예수께서 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하고 엄중하게 교훈하셨다. 사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항상 시비를 걸려고 달려들 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사건 이후에 이어서 기록된 내용이 오늘의 본문이다. 예수의 동족이며 당연히 예수를 귀하게 알아보고 존귀하게 여겼어야 할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오히려 늘 예수를 배척하고 시기하였다. 그러나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향한 부르짖음이 달랐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가나안 여인은 두로와 시돈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던 유대인들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소문으로 들어서 알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주로 영접한 유대인들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믿음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직접 뵐 수 있는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그 때에 이 가나안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크게 소리를 질러가며 예수께 도움을 간청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마태복음 15장 앞 부분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크게 대비가 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저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수께 대한 불신앙을 지적하고 오히려 반대로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인의 예수를 향한 신앙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앞뒤에 대칭을 이루도록 기록한 것으로 짐작된다. 


예수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지른 이 여인은“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간청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아는대로 지금 이 가나안 여인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은 “내 딸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소리치지 않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다. 이는 딸의 고통을 어미의 고통으로, 딸의 아픔을 어미의 아픔으로, 딸이 겪는 슬픔과 충격과 어려움을 어미의 슬픔으로 끌어안고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딸의 문제를 나의 슬픔과 나의 충격과 나의 어려움으로 끌어안고 함께 괴로워하고 힘겨워하며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심정을 절절히 느끼게 하는 표현이 이것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요즘 어린 아들딸을 버리거나 죽이는 비정한 엄마 아빠 이야기도 없지 않지만 그런 경우는 예외로 하자. 정상적인 엄마 아빠라며 아들딸이 겪는 고통이나 고난이나 슬픔이나 충격적인 생의 사연을 곧 나의 일로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고 더불어 괴로워하고 같이 힘들어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우리는 여기서 그런 한 가정의 정상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흉악한 귀신에 들린 내 딸을 고칠 수만 있다면 소리 지르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한 말씀도 대답을 하지 않으시는 예수의 모습이 뭐 그리 당황할 일인가. 예수의 냉담한 반응이 뭐 그래 대수인가. “뒤에 따라 오며 소리 지르는 저 여자를 좀 어떻게 해서 보내시죠”하는 제자들의 매정한 태도가 뭐 그렇게 마음 상할 일인가.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고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수모, 그 어떤 모멸감, 그 어떤 무시, 그 어떤 난관,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다 감내하고 이겨낼 담력이 이 가나안 여인에게는 마음 속에 가득차 있었다. 



예수의 반응과 여인의 대답.

큰 소리로 소리 지른다는 것은 다급한 상황을 대변하는 것 아닌가. 이쯤 되면 예수께서도 가던 발걸음을 멈추어야 옳고 제자들도 예수께 어서 이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간청해야 맞을텐데 이 날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의 이 상황은 예수의 그 어떤 다른 날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예수께서는 소리 지르는 가나안 여인의 큰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너무나도 무정해 보이고 차갑고 쌀쌀맞아 보이는 예수의 모습처럼 비추인다. 더군다나 뒤늦게 대답하신 예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더욱 걸린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대답을 오해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4장 24-25절에 보면 이미 예수의 비유 말씀과 각색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간질 병자를 고치고, 중풍 병자가 고침을 받는 소문이 사방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예수의 소문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과 수리아 지역까지 점점 펴져 갔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실제로 같은 본문인 마가복음 7장 25절에 보면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 왔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이처럼 냉담한 듯한 반응을 보이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일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 34장 6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잃어버린 양’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맞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를 배척하듯이 저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어버린 양이 맞다. 집 안에 잃어버린 양이 있는 것이다. 나라 안의 동족인 유대인이 주님 보시기에는 잃어버린 양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는 유대인들의 구원 만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천하만국의 모든 백성들이 골고루 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하였다. 



예수의 칭찬과 축복의 선언.

예수의 냉담한 반응과 가나안 사람들을 차별하는 듯한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 앞에 와서 발 아래 엎드려 절을 하며 말하였다. 여기 절했다는 ‘προσκυνεω’(프로세퀴네오)는 잠시 엎드렸다 일어나는 동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하여 엎드려서 매어 달리는 모습을 말한다. 무시를 당하든지, 거절을 당하든지 상관없이 흉악한 딸이 고침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간절함이 묻어 나는 태도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절하면서 “주여 저를 도와 주세요.”라고 간청하였다. 여기서 ‘도와 달라’는 이 표현은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외침이며 부르짖음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하고 큰소리로 외쳤듯이 지금 예수 앞에 엎드려 절한 채로 “주여 나를 도와 주세요.”하고 간청하며 매어 달리는 것이다. 


이 때에도 평소의 예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대화의 내용을 접하게 된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15:26)


여기서 말하는 개는 길가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그런 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집안에서 많이 키우는 반려견을 말한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도 집 안에서 강아지를 키웠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아침에 빵을 먹는데 빵 부스러기가 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주인을 쳐다보는 강아지에게서 깨달음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강아지도 저렇게 주인에게 눈을 마주치고 원하고 바라는 것처럼 저도 주님께 마음을 고정하고 주님께서 눈을 떼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런 마틴 루터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1517년 10월 31일, 그로 하여금 종교 개혁의 불을 붙이도록 사용하기 시작하셨다.  


개 운운하는 예수의 대답에 이 가나안 여인은 전혀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 가나안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순간에 그의 딸에게서 흉악한 귀신이 떠나갔고 건강해졌다. 복음서에 이런 대단한 칭찬을 받은 주인공은 이 가나안 여인이 유일하다. 우리가 아는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도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느니라”(마8:10)는 칭찬을 받은 것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하고 극찬해 주셨다. 신앙생활, 기도 생활이란 믿음 생활이다. 내 안에 순간마다 일어나는 불신앙과 의심의 쓴 뿌리를 뽑아내고 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이 장면은 마태복음 14장 31절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 가던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비교가 된다. 베드로는 제자였는데도 이 때까지“네 믿음이 크도다”고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왜 믿음이 작으냐고,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을 받고 있었다. 직분이나 신앙생활 오래 한 것만 자랑하지 말고 예수께 “네 믿음이 크도다”하는 칭찬을 받으며 소원을 이루고 간증하는 복된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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