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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이것을 알지니(약1:17-27) 202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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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9-04 14:26 조회 6,424 댓글 0
 

 너희가 이것을 알지니(약1:17-27)           2021. 8. 29



야고보서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쓴 편지이다. 예수를 낳은 동정녀 마리아가 나중에 요셉과 결혼하여 낳은 여러 명의 동생들 중의 하나이다. 유다서를 쓴 유다도 마리아가 낳은 예수의 아우요 야고보의 형제이다. 야고보는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 목사격인 기독교 최초의 감독이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에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유대인 신도들은 주변 나라의 처처로 흩어졌다. 저들에게 공개적으로 편지한 야고보의 편지가 야고보서이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지 15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주후 40년대 중후반 즈음에 썼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야고보서는 믿음을 실천하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信行一致

신행일치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강조가 아니다. 그렇지 않나. 말만 많고 행함이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의 양과 염소의 비유의 가르침처럼 배고파하는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이 말라 하는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을 나누는 것이 사랑이고 믿음이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야고보는 편지의 서두에서 시험 극복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다. 믿음으로 시련을 잘 극복하며 참고 견디고 인내하다 보면 그 열매와 상급이 귀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나.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길이 그러하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다. 


요즘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탈레반 세력은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1% 정도인 기독교인을 색출해서 박멸하는 것이 목표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슬람근본주의 집단인 ‘탈레반’은 파슈토어로 ‘학생들’이란 뜻이다. 탈리반‘(Taliban)이라고도 한다. 소련군이 철수하고 공산정권이 붕괴되자 아프가니스탄은 과거에 우리나라가 6. 25 동족 전쟁을 벌인 것처럼 내전이 일어났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이 혼란스러웠던 1990년대 중반에 출현해서 이슬람교 율법을 철저히 신봉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장악하였다. ‘탈레반’이란 이름은 구성원이 대부분 ‘마드라샤’라는 이슬람 신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인 데서 유래했다. 


마드라샤는 1980년대에 파키스탄 북부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 세워진 이슬람 신학교이다. 저들은 아프가니스탄 내의 비이슬람 문화 흔적을 모조리 파괴하고 있다. 심지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역사의 흔적까지 파괴하는 악행을 자행하고 있다.  


야고보 당시에 흩어져 생활하던 기독교인들 중에는 환난과 핍박을 견뎌내야 하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각오해야 했다. 그런 저들에게 야고보는 믿음을 믿음답게 지켜나가기 위해서 시험을 참고, 시련을 견디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시련을 견디어 낸 자에게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시험을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학생들이 공부한 후에 시험을 보는 시험 즉 ‘test’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시험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찾아 온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는 그런 시험을 말한다. 그것은 시험이라기 보다는 ‘유혹’즉 ‘temptation’에 가깝다. 미혹하는 것이다. 시험은 극복해야 하지만 미혹은 분별하고 유혹은 피해야 한다. 가령 창세기의 요셉은 어느 날 갑자기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나이 17살 때 일어난 사건이다. 요셉은 그런 충격적이고 불운한 운명을 견뎌 냈다. 시련을 견뎌 낸 것이다. 나중에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노예 청년 요셉을 유혹했다. 요셉은 그 현장에서 도망쳐 빠져나갔다. 여주인은 요셉의 겉 옷자락을 붙잡아 당겼다. 남편이 돌아온 후에 ‘이 옷의 주인인 노예 녀석이 나를 유혹했다.’고 거짓말했다. 주인 보디발은 바로 임금 곁의 고위직이었다. 오늘날로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 정도의 지위였다. 아내 말만 들은 보디발은 땀내 풍기는 그 옷의 주인인 노예를 색출해서 요셉을 왕궁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끊임이 없는 시련과 시험을 잘 극복해 나가던 요셉을 왕궁 감옥에서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자리로 인도하셨다. 감옥에 갇힌지 이년 째 되는 어느 날 요셉은 임금 바로 앞에 불려 나갔다. 하나님은 언제나 요셉과 동행하셨다. 감옥에서 만났던 임금의 떡 맡은 관원장이 꿈의 해석자 요셉을 기억하고 왕 바로에게 요셉을 소개하였다. 하나님은 그 날로 요셉을 애굽의 제 이인자로 삼으셨다. 인생의 시련과 시험을 잘 감당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를 존귀하게 하신다. 그게 야고보서 1장 12절에 나오는 교훈이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대개의 시험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성경 구절이 바로 야고보서 1장에 나온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이와 같은 교훈에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내용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지니’라고 하였다. 야고보는 무엇을 깨달아 알고 믿음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들.

사람들은 욕심에 끌려 미혹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일확천금을 꿈꾼다. 복권 가게 문 앞에서 매주 줄을 늘어선다. 혹은 사기, 횡령, 공금유용, 배임, 탈세, 허위 변칙 증여, 공문서 위조, 허위 이중장부 작성 등의 변칙으로 인해서 범죄에 빠지게 된다. 발각되면 감옥에 갇히게도 된다. 대 기업의 총수라도 몇 년씩 감옥에 갇혀서 수형 생활 하는 경우를 본다. 


14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하였다.


반면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들은 그 나중이 귀하고 복되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호칭하였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는 어둠의 아비가 아니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우주의 질서를 다스리시는 빛들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이 표현은 대단히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한 표현이다. 태양계는 공전과 자전에 의해서 달이나 지구에 그림자가 있다. 그 밝기가 계절의 변화와 함께 낮과 밤이 변하고 또 변한다. 그러나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의 뜻을 따라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믿는 믿음의 사람들을 자녀로 낳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인간의 몸을 가진 인류의 첫 열매이시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복되고 영원한 열매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주를 믿고 섬기는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내려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이 말씀은 13절과 대비를 이루는 가르침이다. 악의 근원인 사탄 마귀는 끊임이 없이 인생을 시험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13절은 분명하게 교훈한다.


첫째,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아니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  


반대로 빛들의 아버지이신 사랑의 주님은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내려 주신다. 예수께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히키려는 것뿐이다.”(요10:10)라고 경고하셨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는 ‘도둑’이란 사탄 마귀를 일컫는 말이다. 반대로 예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우리는 항상 좋으신 하나님,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위로부터 내려 주시는 빛들의 아버지”를 찬양하며 살아간다. 



온전한 선물이란 우리 각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의 믿음을 성숙하게 하신다. 성화(Sanctification)되게 하신다. 점점 거룩해져 가게 하신다. 이것이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그를 믿는 믿음의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온갖 좋은 은사이며 온전한 선물이다. 


예수의 비유처럼 아들이 떡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 달라는데 뱀이나 전갈을 주는 아비가 없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그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그 좋은 것이란 성령을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려면.

19절에서는 듣기를 속히 하라. 말하기를 더디 하라.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하였다. 이런 강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1절에서는 모든 더러운 것을 내버리라. 넘치는 악을 내버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더러운 것’이란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넘치는 악’이란 각 사람의 마음에 가라앉아 있던 온갖 욕망이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가리킨다. 사람이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각양 욕망이 없는 사람이란 없다. 문제는 그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삼가며 살아가느냐가 숙제이다. 그렇지 않나. 잠을 자고 싶은 것 다 자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다 마시고, 하고 싶은 일 다하며 산다면 사람이 무엇이 되겠는가. 별의 별 욕망이 내 안에서 고개를 들더라도 그 욕망을 매 순간 다스리고 절제하며 살아야 올바른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이는 어른이나 아이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나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면 21절 후반부의 가르침처럼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교훈을 따라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18절에서는‘진리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21절에서는 ‘영혼을 능히 구원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라고 하였다. 25절에서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하여‘ 온유(溫柔)함으로 받으라’고 하였다. 이는 “겸손하고 복종하는 마음가짐으로 받으라”는 뜻이다. 맞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든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온유함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나.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란 그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니 차이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는 변함과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지난 수요일 밤 예배 시간에 이범진 전도사는 마가복음 12장 28-3절을 강해하였다. 그 내용은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신 내용이다.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이 한결 같아야 하는 것에 대하여 교훈해 주셨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네 이웃을 네 자신가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것을 교훈해 주셨다. 그 때에 서기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실천은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을 드리는 것 보다 나은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이어 갔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그가 지혜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칭찬해 주셨다.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자동차 도로에 있는 속도 제한과 교통 신호를 지키도록 처처에 설치된 CCTV를 대하는 운전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예를 들었다. 대개의 운전자들은 CCTV에 찍힐 위험이 있는 곳에서만 속도를 지키고 그 외의 지역이나 그 곳을 벗어나면 곧 바로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위리 나라가 처처에 CCTV가 많이 설치 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 감시망을 벗어 나는 곳에서는 교통 법규를 100% 철저히 준수하는 운전자는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이런 예를 들었다. 맞다. 그렇지 않나. 혹시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아닌가. 악의 근원이 마귀 사탄은 우리의 귀에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그 정도는 괜찮아.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잖아. 너만 혼자 예수 잘 믿는 척 하지 말아. 사람이 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잖아. 너만 유별나게 예수 잘 믿는 척 하지 말아.”이렇게 유혹하면서 우리 속에 매 순간 일어나는 욕심과 죄에 대하여 타협하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묵상하고 되새겨서 나의 일상생활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지혜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25절에 ‘실천(實踐)하는 자’라는 표현을 주목하라. ‘실천’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실천이란 실제로 행하는 것”이 사전의 정의이다. 물론 야고보서에서 수십 번 반복하여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실천’이란 단어를 쓰면 뭔가 더 분명하게 강조하는 느낌이 들지 않나.



예수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하였다. 예수는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쓴 잔을 피하지 않았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개인, 가정, 직장, 학교, 사업의 현장 등의 일상생활 중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인가 질문하고 그 대답을 따라서 순종하여야 한다. 


말에 신중하여야 한다. 말에 실수가 없을 수는 없으나 그 실수의 회수를 줄여 나가야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나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3:2)고 하였다. 또한 함부로 버럭 화를 내면 안 된다. 그 순간에 마귀가 끼어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한다. 물론 예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 크게 분노하신 적이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그런 모습을 예로 들면서 자기의 다스리지 못하는 순간의 분노에 대하여 합리화하려고 하면 안 될 것이다. 가정도, 직장도,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어디서나 함부로 화를 내면 안된다. 성질을 부리고 성내는 것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이들은 교회 안에서도 일꾼으로 세우기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에 싯딤에 머물 때에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였다. 모압 여자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인 우상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남자들을 청하였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모압 여자들 곁에 가서 함께 먹고 그들의 우상 앞에 절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남자들을 보고 진노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백성의 수령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라 그래야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서 떠날 것이다”


모세는 그 즉시 백성들에게 명령하였다. 모압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인 바알브올을 숭배하고 그 앞에 절한 자들을 죽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하나님의 진노는 백성들 중에서 24,000명이 염병으로 죽게 하셨다.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여호와의 성막 문 앞에 모여서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중에서도 여전히 모압 여인을 자기 장막에 들여서 음행을 일삼는 자가 있었다. 시므리라는 이름의 시므온 지파의 족장이었다. 그가 상대한 모압 여자의 이름은 고스비였다. 아론 제사장의 손자인 비느하스는 손에 창을 들고 시므리 족장의 장막에 쳐들어 가서 음행하는 현장의 남녀를 창으로 내려 찔렀다. 남녀는 그 현장에서 창에 찔려 죽임 당했다. 민수기 25장에 그 사건의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비느하스의 이와 같은 의분의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성전 청소 사건과 같은 의분의 장면으로 평가한다. 이 날 하나님은 번져 가던 염병을 멈추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비느하스의 의분에 대하여 평가하셨다. 비느하스의 질투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염병으로 멸하시려던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비느하스의 창을 빼어든 의분은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한 일이라”고 까지 높이 평하셨다. 그 때 하나님은 “내가 그에게 내 평화(平和)의 언약(言約)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민25:12-13)고 선언해 주셨다. 하나님은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의 후손에게 이와 같은 언약을 지켜 주셨다. 우리는 민수기 25장 12절의 ‘평화의 언약’이란 하나님이 표현에 주목하여야 한다. 대제사장을 통한 대속의 언약은 엘리 제사장 때 이외에는 예수께서 이 땅을 다녀가신 주후 1세기 때까지 이어져 내려갔다. 민수기 25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속죄’(贖罪)라는 용어도 사용하셨다. 맞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총과 속죄의 은혜를 찬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를 다스리고 분노를 다스리며 성 내기를 더디하되 하나님 안에서 떳떳한 분노와 공의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나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즉, 정작 분노해야 할 때에 비겁하게 처신하지 말고 용기 있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는 길에 나설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경건하려면.

22, 23, 25절에 반복되는 강조는 ‘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이제는 말을 그만하고 ‘혀를 재갈 물리라’고 하였다.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게 날마다 많은 말씀들을 듣는 것만으로 끝내지 말라고 하였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마치도 자기 얼굴을 거울로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누구나 날마다 거울을 본다. 그러나 거울 앞에서 물러나면 자기 얼굴이 생각나나. 물론 자기 얼굴 생김새를 누구나 안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서서 자기를 볼 때와 거울 앞을 떠났을 때에 생각하는 자기 얼굴이 어찌 같을 수가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 들여다 보듯이 대하지 말고 실천하며 살라, 행하며 살라는 강조이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삶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삶인가. 야고보는 분명하게 강조한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화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하였다. 


26절에서 언급하는 ‘경건’은 종교적으로 경건한 척하고 겉으로 드러내는 형식적인 경건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반면에 27절에서 말씀하는 경건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경건을 교훈하는 것이다.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이다.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갖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내 뒤에 경찰차가 따라오면 운전할 때 기분이 어떤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아직 할 일이 많지만 선교를 강조하고 선교 헌금 생활을 강조하고 속회로 모일 때마다 속회 헌금 드리는 것을 모두 다 모아서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교 현장에서 그 후원금이 빵 한 덩이도 되고, 한 잔의 물도 되고, 한 컵의 우유도 될 수 있다. 한 벌의 옷도 될 수 있다. 선교지의 어린이들의 손에 들려지는 공책 한권, 연필과 지우개, 크레파스와 장남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상비약 한 봉지가 될 수도 있다. 혹은 남편 없이 어린 자녀를 키우는 여인에게 건네지는 한 벌의 부라우스가 될 수도 있고 한 켤레의 운동화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다. 우리가 성찬식때마다 성찬 헌금을 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여하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는 분도 있다. 그러나 성찬의 은혜와 그 의미를 생각하면 성찬식때마다 예물을 드리고 그것을 모아서 선교와 구제를 위하여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다. 


긴 시간 연습을 잘 해서 예배 시간에 올려 드리는 찬양 한 곡도 경건한 삶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천천 만만의 수양의 기름보다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그 현장의 손길을 참으로 정결한 삶이요 더러움이 없는 경건 생활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답답하고 위축되는 코로나 정국이 계속되지만 25절의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의 가치가 무엇인지 깨달아 알고 믿는 신자답게 살아가자. 세상을 이기며 빛들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실천해야 하는 행실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가자.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로 살아가자.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알고 행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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