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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보내신 아들(갈4:4-7) 20201227 성탄절 후 제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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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1-07 21:53 조회 231 댓글 0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갈4:4-7)          2020 12. 27 성탄절 후 제 1주


신약성경의 첫 복음서인 <마태복음>의 1장 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이다.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대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2000년 후손이며 다윗의 1000년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은 75세까지 아들이 없이 살아가던 아브람을 말씀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에게 아들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주셨다. 세월이 흐르고 25년이 지난 아브람의 나이 100세에 90세된 아내 사라를 통하여 이삭이란 이름의 아들을 주셨다. 이삭이란 smile 즉 웃음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사라의 늘그막에 아들 이삭을 선물로 주셔서 저들로 하여금 웃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웃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성탄이 무엇인가.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 오 임마누엘”이처럼 하나님은 기쁨의 순간을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신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하고 찬송할 날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수 많은 천군 천사들의 찬양의 내용이 무엇인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맞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가운데 평화를 주신다. 그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신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사십에 결혼하고 이십년이 지난 후에 아내 리브가를 통해서 에서와 야곱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성경은 언약의 자손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고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아들 이삭을 아브라함이 낳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아브라함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해 주신 것이다. 쌍둥이 아들들 중에서 동생인 야곱이 형 ‘에서’대신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잇는 언약 자손이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다윗이 사울 왕의 대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에 그가 통일 왕국의 제 2대 왕이 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따라서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이루어 오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마찬가지이다. 마리아의 남편될 요셉이 자신의 아내로 약혼 기간을 보내던 마리아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겠나. 아니다. 그래서 곤혹스러워 하던 요셉도 가만히 약혼을 파기하려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어느 날 밤에 요셉에게 현몽하셔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장 18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1:20-25)

맞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사람의 계획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시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빌려서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 4장 4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의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찬 경륜을 따라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 ‘그 아들을 보내사’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강조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말씀한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말씀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여자의 아들로 태어나게 이 땅에 보내신 그 아들 예수를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贖良)하신 아들.
5절에 보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려고”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 속량이란 단어는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쓰는 독특한 표현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표현을 빌리자면 십자가의 마지막 말씀인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뜻이 그런 의미이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도 이미 속량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속량’(贖良)이란 ‘ἐξαγοράζω’(엑사고라조)라는 헬라어는 ‘되돌려 사다’라는 뜻이다. 노예를 제값을 주고 사서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줄 때에 쓰는 표현이다. “대가(代價)를 주고 다시 찾아 완전히 내것으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제용어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복음은 죄를 사함받게 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복음의 축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목적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들의 죄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속량에 대하여 로마서 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성도가 되는 것은 속량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량의 은총을 선물로 덧입는 것이다. 이 속량의 은헤를 깨닫고 복음을 영접하기 전에는 율법의 자녀일 뿐이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 것 같은데 예수를 통한 속량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율법의 종노릇하는 것이다. 종에게는 자유가 없다. 이것이 종과 아들의 차이다. 그렇지 않나. 아버지가 주인이지만 아들에게서는 아버지이다. 그러나 종에게 있어서 주인은 언제나 종을 부리는 주인일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주인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깨달아 지면 삶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의 모습이다. 일찍 유산 받아 가지고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였다. 주색잡기를 즐겼다. 빈털터리가 되었다. 거지 신세로 남의 나라에서 돼지 치는 곳에 찾아갔다. 돼지들 틈에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돼지 먹는 주엄 열매도 주는 사람이 없다. 그 때 자기 나라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처량한 자기 신세가 아버지 집의 종들만도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용기를 갖고 아버지 집을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돌아 온 아들을 버리지 않았다. 책망하지 않았다. 따뜻하게 영접하였다. 목욕시키고 새 옷 입히고 새 신 신기고 가락지 끼우고 송아지 잡아 잔치하였다. 아버지는 거지의 몰골로 돌아온 아들을 종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랑 받을 아들로 영접하고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환영해 주었다. 

이것이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것이 속량의 은총이다. 이것이 죄사함이다. 273장 찬송 < 나 주를 멀리 떠났다>의 1절은 이렇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속량 받는다는 것은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아버지의 속량하시는 사랑, 죄 사해 주시는 그 큰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305장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찬송을 부르며 눈물 콧물 흘리던 때가 언제인가.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이 그런 주인공이었다지 않나. 존 뉴톤은 아주 어린 시절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재혼하였고 어린 아들 존 뉴턴은 친척 집에 맡겨져서 지냈다. 그는 학대 받는 친척 집의 환경에서 탈피하기 위해 십대 시절에 도망쳤다. 영국 해군의 견습선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도망쳐서 아프리카로 달아났다.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 노예 상인을 만나 거기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루투갈 주인의 집에서 매우 혹독하고 잔인한 취급을 받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젊은 존 뉴턴은 죽기를 각오하고 해안으로 달아났다. 구조를 요청하는 불을 피웠는데 마침 영국으로 돌아가던 노예선에 발견되어 구조 받았다. 그 노예선에서 조수로 지냈다. 그러나 그는 그 노예선 안에서도 사고를 치고 말았다. 항해 중에 그는 독한 술인 럼주를 보관해둔 창고에 몰래 들어갔다. 그것을 선원들과 나누어 마시고 서로 취하고 말았다. 인사불성이 된 그는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 선원 중의 한 사람이 작살로 그를 찔러 물고기를 건져 올리듯이 건져 내주었다. 겨우 익사 상태에서 구조되었다. 그 사고로 엄청난 피를 흘린 그는 목숨을 구하기는 했지만 그의 넓적다리에는 주먹 크기만한 흉터가 남게 되었다. 

나중에 그는 아프리카를 오가며 노예를 사다 파는 노예상이었다. 그런데 존 뉴턴이 타고 있던 배가 스코틀랜드 근처에서 항해가 거의 끝날 무렵 큰 폭풍을 만났다. 배는 항로를 벗어나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점점 가라앉는 배 안에서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때 그는 어린아이였을 때 엄마에게 배웠던 성경 말씀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말씀들을 떠올렸을 때 그는 기적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거듭나게 되었다. 그 후로 23살 때인 1748년에 복음주의적인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완전히 회심하였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 남은 그는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30살에 영국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로 그는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 충만하게 가르치는 대 전도자가 되었다. 바로 이 존 뉴턴이 54살때인 1779년에 쓴 찬송가사가 기독교인들이 애창하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송가이다. 그 후로 그는 그 당시 평균 연령으로는 흔하지 않게 장수하였다. 82살까지 살아 남아서 처처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누구나 기독교인이 되려면 속량의 은총을 입어야 한다. 그리하지 않고는 교회 마당만 밟는 교인에 불과하다. 참 신자가 되고 참 성도가 되려면 속량의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다는 개인적인 체험이 있어야 신자가 되고 제자가 되고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名分)을 얻게 하신 아들.
5절 후반부에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라고 하였다. 맞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나면 더 이상 종이 아니다. 아들이 된다. 이것이 양자의 영을 덧입는 것이다. 아빠 아버지라 부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나이 100세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았다.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자라났다. 이것의 언약 자손의 영광이다. 이것이 아들의 명분이란 것이다. 엘리에셀은 평생 아브라함 곁에서 그림자처럼 일했다. 수종을 다 들었다. 그러나 엘리에셀은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의 종일 뿐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다. 종은 종이고 아들은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 중의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주를 믿는 자녀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껏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명분을 선물로 주셨다. 나는 어떤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떤가. 스스로 물어 보라.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그의 종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종과 아들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그러므로 율법에 매여 살고 율법에 갇혀 사는 더 이상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아들딸의 권세를 누릴 줄 알아야 한다. 아들딸의 권세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아들딸의 권세를 누려야만 한다. 이것이 예수 안에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육신의 아버지가 살아 있어도  세상 아버지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더 자주 부르며 산다.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 아버지”하며 살아간다. 그렇지 않나. 이것이 아들의 명분을 선물로 받은 성도의 특권이며 자랑이며 기쁨이다. <아바 아버지>라는 찬양이 무엇인가.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도우시고 힘주시는 아버지...

생각하여 보라. 내가 자랑스러운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이며 축복인가. 우리 각 사람이 세상의 아버지를 만나는 환경은 다 다르다.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고 영접하는 순간 우리 각 사람의 신분은 일 순간에 바뀐다. 이것이 양자됨의 영광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5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아들이 자기 아버지로부터 누리는 아들로서의 혜택 그런 정도와 비교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평범한 농부 이새의 여덟 번째로 태어난 막내 아들이었다.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되었으나 그는 왕이 되기까지의 30년간의 생이 고단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사울 왕의 칼과 창을 피하여 숨고 피하고 도망해야 하는 정처 없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태어나고 보니 그 시대의 이스라엘의 존경 받는 왕 다윗의 아들로 태어났다. 솔로몬은 왕자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의 신분으로 하면 다윗의 어린 시절과 솔로몬의 어린 시절은 비교할 수 없다. 그렇지 않나. 

신약 성경의 야고보서와 유다서의 기록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중에 남편된 요셉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들이다. 저들은 큰 형님인 예수를 곁에서 보면서 컸다. 그 영향을 받고 초대 교회 훌륭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담임목사 격이었다. 부모 잘 만나고 형님 잘 만난 신앙의 영향을 톡톡히 받아 누린 것이다. 이것이 아들의 명분이란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 여사의 남편 빌 클린턴(Bill Clinton, 1946-)은 1993년, 47살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재선에 성공해서 8년간 미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미국의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외동딸 첼시 클린턴(Chelsea Clinton, 1980-)은 아빠가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에 13살이었다. 빌 클린턴의 딸 첼시는 아들 없는 가정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외동딸로 자라났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났다. 이것이 아들의 명분, 아들딸의 명문, 자녀의 명분인 것이다. 

첼시 클린턴은 백악관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그는 활발하고 영특하였다. 첼시라는 이름은 어머니 힐러리 클린턴이 좋아하던 조니 미첼의 노래 에서 영감을 얻어 지었다고 한다. 첼시는 워싱턴 DC의 사립 명문 시드웰 프렌즈 스쿨를 졸업했다. 나중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딸 샤사 오바마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첼시는 17살에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하고 같은 해에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다시 옥스포드 대학교로 돌아가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대학교 연구소장, NBC 뉴스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현재 클린턴 재단에서 일하고 40살인 그녀는컬럼비아 대학교 겸임교수로 있다. 대통령 딸이라서 잘된 것인가. 아니다. 아들의 명분, 아들딸의 명분, 자녀의 명분을 잘 받아 누리고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갈 때에 그런 영광스러운 순간이 찾아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이란 예를 들자면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살아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 감사하라. 만족하라. 하나님의 아들딸의 영광스러운 권세를 깨닫고 누리며 그 은혜와 그 은사를 개발하며 살아가라.

 
아버지로 말미암아 유업(遺業)을 이을 아들.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에게는 아버지의 모든 소유가 그의 유업으로 이어졌다. 4천년 전의 아브라함은 그 당시 거대한 목축을 하던 족장이었다. 그 어마 어마한 아버지의 양과 염소와 소와 말과 약대로 인한 재산이 고스란히 이삭에게 유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물론 이스마엘이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에 붙잡혀간 소식을 듣고 되찾으려고 나섰다. 그 때에 집안에서 그의 말을 듣고 나서는 남자만 318명이었다. 창세기 14장 14절에 보면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라고 하였다. 오늘날로 하면 사설 경호요원과 같은이들이다. 그 숫자가 318명이라고 하니 그 당시 아브라함의 목축 규모가 얼마나 컸나를 짐작하게 한다. 

유업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지난 10월 25일에 78세에 세상을 떠난 삼성 이건희(1942-2020) 회장의 상속세가 거의 12조에 이른다고 한다. 그래도 그 자손들에게 7조 가까운 주식이 남고 에버랜드 재산도 어머 아마 한 지분으로 남는다. 이것이 아들의 명분을 누리는 혜택이다. 유업을 실감나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예를 드는 것 뿐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아들의 유업이란 그런 정도의 재산을 물려 받는 것 정도를 유업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7절 후반부에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자니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여기서 말씀하는 유업이란 하나님의 아버지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또 부르며 누리는 설명으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누리는 각양 은사와 은혜는 한  마디 말이나 한 두줄의 글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걸 절절이 깨달은 찬송시인이 고백한 고백이 무엇인가. 

304장 찬송가인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란 찬송의 찬송시를 쓴 프레드릭 레만(Frederick Martin Lehman, 1868-1953)은 독일에서 태어난 목사이다. 그의 가족은 프레드릭이 4살 때 미국으로 이민하여 아이오와 주에 정착했다. 11살에 예수를 영접하였다. 나사렛 교단의 목사가 되어 아이오와 주, 인디애나 주 등 주로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장이나 병원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틈만 나면 찬송시를 썼다. 43살 때에 가족이 미주리 주 캔저스시티로 옮겨 가 목회를 하면서 나사렛출판사(Nazarene Publishing House)의 탄생을 도왔다. 시와 복음성가에 많은 관심을 가져 수 백 곡의 찬송시를 썼다. <뭔가 다른 노래들>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5권이나 출간하였다. 그 중의 한 편의 찬송시가 우리에게 잘 알려지고 불려지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생각하여 보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건 가졌다고 부를 수 있는 찬송도 아니고 많이 배웠다고 부를 수 있는 찬송도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은혜가 되고 소망이 되고 늘 기쁘고 즐거워서 단 하루를 살아도 주를 찬양하고 단 한 순간을 살아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속자의 영광이 깨달아진 자의 찬송이 아닌가.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가 된 상속자의 특권과 자랑스러움과 영광스러움을 갖고 맘껏 주님을 찬양하며 한해를 마무리 하고 새해를 맞이하자.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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