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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충만(요7:37-39 행2:1-4) 20200531 성령 강림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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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2 17:40 조회 6,515 댓글 0
 
                      성령의 충만(요7:37-39 행2:1-4)         2020. 5. 31 성령 강림 주일


성경을 구분할 때에 구약은 성부 하나님 시대, 복음서는 성자 예수님 시대, 사도행전 이후의 서신서를 비롯한 신약의 나머지 부분은 성령 시대의 기록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성경 구분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꼭 맞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이신 성신의 역사는 그 어느 시대, 그 어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든 골고루 다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이란 그 열매를 보면 안다. 에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못된 나무는 나쁜 나무를 맺는다. 가시나 엉겅퀴에서 무화과와 감람 열매를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돌 감람나무에서 참감람나무 열매는 구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옛 성품과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기를 사모하는 자들은 누구나 다 성령 받기를 사모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그 좋은 것이란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보면 안다.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은 그 시간 사용이 다르다. 주로 가는 곳이 다르다. 돈을 쓰고 재물을 쓰는 것 보면 다르다. 대인 관계도 다르고 평소의 관심 분야도 다르다. 성령 받은 사람,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뭘 봐도 다르다. 그 생각이 다르고 그 입의 말이 다르고 그 매사가 다르다. 130년 전에 이 땅에 와서 낯설은 아시아 동쪽의 작은 반도 국가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하려 했던 선교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성령의 감동과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일하게 하심을 따라서 이 땅에서 와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헌신적으로 사역한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120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나니 이제는 더 이상 이 땅에서 예수의 모습을 뵐 기회가 없었다. 그 승천 현장을 목격한 11사도들을 비롯한 120성도들의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게 되었다. 

사람은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는 바를 얻게 마련이다. 내가 원하고 바라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얻게 된다든지 무슨 일을 성취하는 경우란 없다. 

바다에 나가서 낚시를 하거나 그물을 던져야 물고기를 잡는 것 아닌가. 산에 가야 산삼을 캐거나 송이 버섯을 발견할 것이 아닌가. 밤낮 집안에만 있고 구들만 베고 누워 베개를 친구 삼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란 없다. 

예수께서는 성령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사모하라는 교훈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의미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는다는 현상을 목이 마른 자가 충분한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여 설명해 주셨다. 그렇지 않나. 목이 말라 목이 타들어가는 이에게는 물이 필요한 것이다. 목 마른 자에게는 물이 최고다. 목이 말라 보았는가. 수술을 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수술 후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기까지 물도 못 마시게 하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밤새 목이 타들어가고 혀가 짝짝 말라 들어가고 물을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을 때의 경험 말이다. 짝짝 마르는 입술에 물만 조금 발라 주어도 순간 살 것 같은 그런 타들어 가는 목마름의 경험 말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후에 삼일 만에 마실 물의 문제를 심각하게 경험하였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반석에서 물이 터쳐 나오게 해서 기갈을 해결해 주셨다. 이런 경험이 사십년 내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공급이 아니면 하루도 버티고 살 수 없는 환경이 광야 생활이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임재를 타는 목마름 가운데 마음껏 흡족하게 마실 수 있는 물과 같은 것으로 쉽게 깨닫도록 설명해 주셨다. 맞다. 예수가 해답이다. 예수가 대답이다. 예수면 된다. 예수면 모든 문제의 해답이 그 분 안에 있다. 예수는 모든 것의 충분조건이다. 예수 안에는 부족함이 없다. 예수 안에는 결핍이란 없다.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충만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그 현상을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설명에 그칠 뿐이다.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충만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세계이고 체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재 경험이 없이 성실함으로 혹은 자기 열심에 의해서 교회 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해 보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면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은혜를 알게 되고, 감격이 있다. 성령 받고 나면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에 회개와 감동과 깨달음과 결단과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성령 받은 사람은 누가 내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기도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성령 받은 사람은 그 누군가에게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믿는 예수, 내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고 싶고 전해 주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 성령 받은 사람은 봉사하고 싶고 섬기고 싶고 좋은 일 하고 싶고 충성하고 싶고 끊임없이 헌신하고 싶어진다. 성령 받기 전에는 주의 일에 인색하던 사람이 성령 받고 나면 자꾸만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싶어진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뭐든지 좋은 것을 상대방에게 계속하여 주고 싶고 더 주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성령 받고 나면 그 전에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내 일상생활 중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구체적으로 체험되기 시작한다. 성령 받고 나면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행하셨던 각종 기사와 이적과 은혜로운 천국 비유의 말씀들이 새록 새록 깨달아지고 내 삶에 체험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내 일상생활 중에 내 곁에, 내 안에 함께 계신 주님으로 체험되기 시작한다. 

성령 받고, 은혜를 받고 나면 습관적으로 예배 시간에 늦게 오거나 습관적으로 별로 급한 일도 없으면서 예배가 끝나기 전에 살짝 빠져나가는 습관도 바뀌게 된다. 

우리는 성령에 관한 말씀을 하도 많이 들어서 많이 알고 있다. 올해도 어김 없이 성령 강림 주일을 맞았다.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의 말씀을 중심으로 ‘성령 충만’ 이런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주 안에서 성령을 목말라 하라.
목말라 한다는 현상은 갈망하는 것이다. 갈망(渴望)이란 “간절하고 애타게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그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고 염원하게 되면 밤과 낮의 구분이 없다. 상황과 여건에 좌우되지 않는다. 물불 가리지 않게 된다. 

요즘 우리나라는 전국 어디를 가나 관개 수로 설비가 거의 다 제대로 잘 되어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홍수가 나면 물바다가 되고 가물면 논바닥이 거북이 잔등처럼 쩍쩍 갈라지고는 했다.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면 잘 자라나던 논 밭의 농작물들이 물바다에 수장되어 버린다. 반대로 몇 달이 지나도록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한창 농사철에 농작물들이 다 타들어 가고 농부들은 물과의 전쟁을 벌인다. 

목축생활도 물론 그러하지만 농경 문화권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다는 것은 그 해 농사의 흉작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른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믿는 것,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성령 받고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 가는 생활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냥 물 흘러가는 대로 되는대로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의 신앙 태도를 갖고는 성령의 충만을 경험할 수가 없다. 

물론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내 등 따뜻하고 내 배 고프지 않고 내 집안에 당장 애걸복걸할 긴급한 기도 제목이 없다면 그 누가 금식 기도를 하고 그 누가 철야기도를 하며 그 누가 작정 기도를 하겠는가. 그렇다고 일부러 뒤숭숭한 가정환경과 심란한 내 인생길을 원할 필요야 없겠지만 어찌 산다는 것이 평생동안 만사가 내 뜻대로 내 원대로 척척 돌아가는 법이 그 어디에 있나. 

이 세상에 생의 우여곡절을 겪지 않고 사는 인생이 그 누가 있겠느냔 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이란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사람이 항상 좋은 일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경험하게 된다. 최근에도 친구 목사의 교회에서는 이천 공장 화재 사건의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겪은 후에 뉘 늦게 장례식을 치루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그렇지 않나. 누가 질병을 원하겠나. 누가 사고를 원하겠나. 누가 불행한 일을 겪기를 원하겠나. 누가 자녀가 속 썩이기를 원하겠나. 누가 남편이 아내에게 원수처럼 여겨지길 원하겠나. 누가 아내와 남남 같은 서먹한 관계로 살기를 선택하겠는가. 누가 시댁의 ‘시’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불행한 관계로 살아가길 원하겠나. 누가 사무실 동료나 선 후배 중에 그런 인간하고 날마다 대면하며 살아야 하는 환경을 선택하겠나. 누가 거래처에 그런 비인간적인 상대방과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길 원하겠나.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별의 별 인간, 별의 별 상황, 별의 별 사건, 별의 별 꼴들을 다 겪으며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이란 예수의 말씀은 그런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만이면 만의 별의 별 일들이 다 많은 세상에서의 ‘인생의 타는 목마름’과 같은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초막절 끝 날에 하신 교훈의 말씀이다. 초막절이 무엇인가. 광야 생활을 하던 선조들의 고난을 회상하며 자원하여 초막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그렇지 않나. 광야 40년의 세월이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을 내어 주지 않으시면 단 하루도 버티고 살기 힘든 여건이 광야생활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란 그런 의미이다. 
“목 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 곳에 생명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
(526장 “목마른 자들아” 1절)

내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사나. 이런 인간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며 사나. 이런 고민과 사면초가 가운데 갇혀 지내던 그 어떤 누구라도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나면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인 것이 깨달아지게 된다. 내가 달라지고 내가 변화되고 내가 새로워지고 나면 환경이 다르게 보이고, 상대방이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세상은 어제도 그랬고 지난해도 그랬다. 내가 문제이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을 받고 나면 세상은 일순간에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이 변하기만을 바라서는 안된다. 내가 변해야 한다.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이란 말씀은 그런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목 마른 상태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예수께로 나아와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해답이 풀리기 시작한다. 


생수의 강과 같은 성령이 넘쳐 흐르게 하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과거에 시골에서는 우물 물을 길어다 사용하였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의 잔소리 중의 하나는 늘 물좀 아껴 쓰라는 것이었다. 먼 우물에서 물을 이고 지고 길어다 사용하는 일은 날마다의 하루 일과 중의 일과였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요즘 대한 민국 천지에 도시나 농촌이나 집안에서 수돗물 공급을 받지 못하는 가정은 거의 없다. 이런 환경이 저절로 주어진 것 같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대단한 삶의 질의 향상이 아닐 수 없다.

예수 만나기 이전의 상태가 물을 길어다 마시고 쓰던 생활이라면 예수 만나고 성령 받은 후의 생활이란 집안에서 온수와 냉수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환경과 같은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셨다. 박수 무당 이단 사이비 교주에게 넘석 거리지 말고 예수께 나와야 한다. 예수 만나야 한다. 성령 받아야 한다. 예수 제대로 믿어 보라. 예수 안에서 성령 충만한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해 보라. 그 기쁨, 그 만족, 그 감사, 그 행복, 그 충만함이란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 이 기쁨 주신 주신 것 오 이 기쁨 주신 것 
오 이 기쁨 주신 주신 것 아멘 할렐루야 주만 찬양해”

이런 찬양을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안다. 살아가다 보면 기쁨이 사라지는 때가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 슬픔, 어려움, 고난, 두려움, 괴로움,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답답함, 무기력이 파도처럼 밀려 들고 더 이상 못 버틸것과 같은 어둠에 휩싸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와 간증이 무엇인가. 그런 슬픔, 그런 괴로움, 그런 답답함 중에서도 나도 알 수 없는 생수의 강이 내 배에서 넘쳐흐르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수가성 여인이 그런 운명의 사람이었다. 지난날 다섯 남자와 살아 보았다. 지금의 남자도 오가다 눈이 맞아서 함께 사는 남자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남들 눈을 피해서 남들이 물을 긷지 않는 대낮에 뙤약볕 아래서 물을 길으러 다니고는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수가성 우물 가에서 예수를 만났다. 메시아를 만난 것이다. 낯 설은 유대 남자가 자기에게 물 한 바가지를 원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그냥 낯 설은 유대 남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예수를 만난 것이다.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였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이 말씀이 이 수가성 여인으로 하여금 전혀 변화된 새로운 운명의 삶을 출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인은 예수께 요구하였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요구에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런 대화의 과정 중에 이 여인은 자기 앞에서 말씀하고 계신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야 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 여인의 운명은 변화되었다. 삶이 바뀌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이 여인으로 인해서 그 마을 사람 전체가 수가 성의 우물가로 예수를 만나러 나갔다. 아마 그 때까지 이 여인과 동거하던 그 남자도 함께 갔을 것이다. 예수 만나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가 배에서 넘쳐 흐르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올 2020년 성령 강림절이 그런 절기가 되길 축원한다.

마지 못해 끌려다니듯이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목마른 자가 해갈의 기쁨과 만족을 체험한 것 같은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은혜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은혜의 체험이 계속 될 수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 7장 18, 19절에 반복되는 주님의 강조가 있다. “믿는 자”라는 강조이다.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믿음 생활이다.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지극히 인본적인 것이다. 스스로 점검해 보라. 내 신앙 생활은 내 기준으로 믿어 보려고 씨름하는 인본적인 신앙생활인가.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믿는 자로서의 신앙생활인가를 자문해 보라.

예수는 늘 말씀하셨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네 믿음이 크도다.”“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이만한 믿음의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도다.”“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믿는 자의 성령 충만을 항상 사모하는 믿음의 주인공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성령의 임재를 유지하라.
성령의 충만이란 절대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과거에 경험한 은혜의 경험, 성령 체험만을 이야기 하고 지금은 시들한 상태로 살아가는 그런 상태를 성령 충만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령 충만은 지속적이고 계속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맛있는 산해진미를 배 불리 먹었어도 네 다섯 시간 지나면 다시 공복이 되는 법이다. 사람은 하루 세끼 먹고 살게 마련이다. 물론 두 끼 혹은 하루 한끼 정도로 해결하고 사는 이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여하튼 날마다 그 무엇인가를 먹고 에너지를 공급 받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성령 충만이란 과거의 은혜를 받은 혹은 은혜를 깨달은 그 추억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성령 충만이란 바람과 같은 성령,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신비한 임재 체험과 더불어서 방언도 하고 각종 은사를 체험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과거의 어느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내 일상 생활 중에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은혜의 수위를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그 핵심이 예배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과 예수와의 대화 중에 예배에 대한 대화가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게 된 이 수가성 여인에게 예배 생활의 소중함을 교훈해 주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성령의 충만을 유지하는 비결은 예배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감염에 대한 두려움은 순식간에 예배 생활을 무너트리고 흐트러 놓았다. 예배가 없는 신앙 생활을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가는 곳마다에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예배드렸다. 제사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나중에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였다. 예배 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순종 예수는 그런 순종의 제물로 골고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무덤에서 사흘 만에 살려 내신 것이다. 

성령 충만이란 예배가 대답이다. 아니 이 바쁜 세상에 언제 그렇게 예배, 예배 하며 살아갈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요즘 어느 장로님이 코로나로 인해서 그 잘 되뎐 경영이 멈추어 서 버린 상태에서 하루도 빠짐 없이 몇 달째 새벽 기도를 드리면서 나에게 말했다. “목사님 신학교에라도 가고 싶습니다.” 아니다. 예배 생활이 불 붙는 것은 신학교 다니는 것 이상이다. 신학교가 믿음을 불붙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생활, 예배 생활이 대답이다. 요즘 신명기 34장 분량의 말씀을 마무리 해 가고 있다. 몇 달 동안 나누어 차근 차근 묵상해 왔다. 대하드라마를 대한 느낌이다. 그렇게 고단한데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기도하고 출근하는 이들이 있다. 실시간 영상으로 송출되고 자료가 남아 있어도 늦게라고 그 날의 말씀 묵상을 함께 묵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안다. 

어느 장로의 간증이다. 청년 때에 예수 믿어 보려고 은혜 받아 보려고 소문에 듣고 한얼산 기도원에 갔다. 이천석 목사님. “하나님 입장 바꿔 놓고 생각 좀 해 보세요.”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밤새 기도하다가 ‘바꿔 놓고’를 반복하는데 방언을 받았다. 지금은 은혜 생활 잘하는 장로가 되었다. 기도가 힘이다. 기도에 길이 있다. 기도해야 성령 받게 되고, 기도와 말씀에 붙잡혀야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된다.

날마다 조금씩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말씀 묵상, 기도 생활, 예배 생활을 지속적으로 계속하는 것처럼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없다. 베드로 사도를 보라. 성령 충만 받고 말씀 전하여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 받고 예수께 돌아오는 은혜를 체험한 주인공이다. 그런 베드로인데 사도 요한과 함께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기도 생활을 계속하지 않았나. 그러던 중에 제 9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려고 가다가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걷지 못하는 걸인이 고침 받게 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예배를 회복하자. 예배 생활을 회복하자.  말씀, 기도, 찬송, 봉사, 전도, 섬김, 충성, 헌신 그 모든 바탕은 성령의 충만함이다. 성령 충만해 지면 두려울 것이 없다. 성령 충만이 대답이다. 성령 충만하여 각 사람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주인공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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