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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찬송할 이유(벧전1:3-9) 202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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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4-21 22:24 조회 8,473 댓글 0
 
                         찬송할 이유(벧전1:3-9)             2020. 4. 19


주후 64년 7월 18일에 로마 대화재가 발생했다. 휴가 중이던 네로(Nero, AD 54-68) 황제는 휴가지에서 급하게 돌아와서 화재 진압에 앞장섰다. 이재민들에게 비상식량과 생필품을 지급했다. 로마 시내의 작은 기름 창고에서 불붙기 시작한 불은 삽시간에 시 전체로 번져갔다. 시민들에게는 황제 네로가 방화한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민심이 어수선해져만 갔다. 황제 네로는 민심 수습책으로 기독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를 믿는 사교집단인 기독교도들에 의해서 방화가 시작됐다는 헛소문이 퍼져나갔다. 네로 황제는 로마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기독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을 화형에 처하는 방법으로 제물로 삼았다. 12사도를 핍박하기 위해서 색출에 나섰다. 후대에는 이 엄청난 사건을 근거로 한 실화 소설과 영화도 수 없이 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쿼바디스’이다. 그 뜻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질문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도 베드로의 두 편지 중의 첫 편지인 베드로 전서는 주후 64년의 로마 화재와 네로 황제의 대 박해가 심각해 져 가기 직전에 씌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베드로는 이 두 편지를 끝으로 주후 68년 경에 순교 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기간에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제 1차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베드로는 그 당시의 성도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표현하였다. 1절의 여러 지명들은 대개가 아시아 지역에 있는 지명들이다. 물론 그 당시에 이미 기독교 복음이 바울에 의해서 유럽에 전파되어 퍼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도 이곳 저곳에 도시마다 지역마다 예수의 부활 복음인 기독교 복음이 전파 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 처처에 적지 않았다. 저들을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라고 표현한 것이다.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우리가 쓰는데 바로 ‘흩어져서 신앙을 지켜가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붙여져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칭호이기도 하다. 

2절 끝에 보면 저들을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도 하였다. 맞다. 성도는 부활 복음을 믿으며 열방에 흩어져 살아가는 이들이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가 미리 하시는 자들이다. 성령이 거룩하게 하신 자들이다. 그 부르심을 따라 순종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이다. 그 택하심을 받은 무리가 성도요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도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대박해가 시작되던 때에 사도 베드로는 앞날을 예견하듯 이 편지를 써서 흩어진 나그네 된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산 소망을 갖고 굳건하게 핍박과 환난을 이겨나가자고 독려하며 쓴 편지가 바로 베드로 전서와 그가 순교 당하기 전에 쓴 베드로 후서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찬송할 이유’라고 했다. 3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성도들은 왜 모일 때마다 찬송하는 것인가. 왜 혼자서라도 찬송하는 것인가. 왜 밤 낮 없이 찬송하며 살아가나. 성도들은 기뻐도 찬송하고 슬퍼도 찬송하고 즐거워도 찬송하고 괴롭고 답답해도 찬송한다. 잘 될 때에도 찬송하고 힘들고 어렵고 앞날이 막막할 때에도 찬송한다. 건겅할 때에도 찬송하고 병들고 힘겨울 때에도 찬송한다. 찬송은 주를 믿는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유이다. 찬송 생활은 예배 생활의 바탕이고 모든 일상을 지배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집에서도 찬송하고 운전 중에도 찬송을 듣거나  따라 부르거나 찬송하며 생활한다. 교호에 모여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찬송이다. 오늘처럼 주일 예배를 드리면 찬송하고 또 찬송한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을 믿는 것은 찬송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앙이 시들해 지면 그 특징이 무엇으로 나타나나. 찬송이 멈추어지게 된다. 이것은 신앙이 병드는 전조증상이다. 신앙이 불이 붙고 성령 충만해지고 삶에 활력이 넘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섬기고 누군가를 돌보고 성경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기도 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증거 중의 하나는 찬송생활이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에서 찬송할 이유가 무엇이라고 강조하고 있나.


거듭난 자의 산 소망.
베드로는 그냥 소망이라고 하지 않고 ‘산 소망’이라고 하였다. ‘living hope’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이다. 그렇다. 성도가 마음에 품고 사는 소망은 산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이다. 4절의 말씀처럼 ‘썩지 않고 더렵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소망’이다. 이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다. 하나님은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 그 많으신 긍휼이란 부족함이 없는 긍휼이며 언제나 넉넉하신 긍휼이시다. 생각하여 보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에 부족함이 있는가. 금요일에 비가 조금 뿌렸다. 물론 비가 내리니까 벚꽃이 거의 다 떨어지고 말았다. 목련이 볼썽 사납게 시들고 말았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나니 먼지가 사라지고 어제 얼마나 하늘이 푸르고 공기도 맑고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 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183장 빈들에 마른 풀 같이)라고 찬송하지 않나.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 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성도된 우리가 산 소망을 갖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에 근거한다. 성도된 우리가 거듭나게 해 주신 은혜를 입고 살기 때문에 산 소망을 갖고 사는 것이다. 

상호 중에 ‘엘피스’라는 상호가 있다. 그 엘피스라는 단어가 헬라어의 ‘소망’이다. 베드로는 1장 21절, 3장 5절과 15절에서 이 ‘소망’이란 단어를 거듭 사용하고 있다. 소망이 무엇인가. 소망은 지금 현재의 고난이나 역경이나 불행이나 질병이나 시련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성도의 이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품는 희망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산 소망( ζωσαν  ελπισ, 조산 엘피스)이란 환경과 여건에 의해서 재한 받지 않는 기쁨과 행복과 만족과 생명의 근원을 말한다. 

그 바탕은 부활 신앙이다. 추운 겨울과 요즘 같은 봄을 비교해 보아라. 소망이란 그런 것이다. 베드로는 이 살아 있는 생명력 즉 부활 신앙에 대하여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가령 베드로전서 1장 23절을 보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권력, 명예, 젊음, 미모, 인기, 재물 등등 생각하여 보라.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러나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하며 살고 산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이다. 

“내 맘의 주의 소망 되소서”(484)
“이 몸에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488장 1절)
“세상의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488장 3절)

지난 주일이 부활 주일이었다. 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있는가. 
다시 성경을 보라. 3절에 “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 산 소망은 성도가 찬송하며 살아가는 이유의 첫째이다. 


영원한 유업을 잇게 하심.
성도가 찬송하며 살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영원한 유업을 잇게 하시기 때문이다. 유업이 무엇인가. 부모에게서 이어지는 재산의 분깃이다. 부자에게서는 부요함이 유업으로 이어진다. 가난한 부모에게서는 가난이 대물림된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하신다. 이 유업은 이 땅에서 50년 100년 누리다가 다 두고 떠날 그런 정도의 유업이 아니다. 이 유업은 믿는 성도들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유업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유업은 애굽의 노예 백성으로 지내던 유대인의 역사로 하면 출애굽하고 광야 생활을 마친 후에 선물로 차지하고 누리게 되었던 가나안 땅을 말한다. 노예 생활과 가나안의 풍요란 상상할 수 없는 변화이다. 이 유업은 하나님 자신이며 영원한 생명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성도의 영광의 분깃이다. 이 유업은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거듭남과 구원 그 자체이다. 

이 땅의 기업은 썩고 더럽고 쇠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업인 유업은 영원한 것이다.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이 땅의 직장, 직업, 사업, 기업이 업종마다 분야마다 흔들리고 있다. 멈추어 서 버렸다. 학생들이 학교도 못 간다. 언라인 시대의 과학 문명 혜택이 아니라면 그나마도 모든 것이 멈추어 서 버릴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차라리 전쟁은 전쟁이 벌어진 곳에서 전쟁인데 이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전국적이고 세계적이다. 너나 나나 예외가 없다. 그래서 염려가 되고 두려운 것이 아닌가.

세상 유업이란 다 그런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편지를 쓸 그 당시의 로마의 상황이 그랬다. 불타고 죽고 죽이고 죽임 당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안개 정국이었다. 더군다는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언제 붙잡혀 처형되고 화형 당하고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될지 모르는 불안한 세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편지하고 있다. “하늘에는 영원히 예비된 유업이 있다”하고 말이다.  그 유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유업이다.” 

할렐루야!  이런 은혜가 마음에 가득하여 찬송하고 또 찬송할 이유가 충만하길 축원한다.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
성도된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목적은 영혼의 구원이다. 9절의 ‘영혼의 구원’이란 말을 오해하면 않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영혼이란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런 의미에서 ‘영혼의 구원’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즉 이 말은 주를 믿는 성도의 전인격적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5절에서는 이것을 ‘예비하신 구원’이라고 하였다. 5절을 자세히 보면 이 구원이란 것이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세적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연결된 영원한 것이다. 5절을 보자.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사용하는 ‘보호하심’이란 군사 용어이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 안에서 요새를 마련하고 만약의 경우에 시민들을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마련한 요새를 의미한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부자집의 지하 요새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인 성도들의 대적자인 사탄 마귀의 궤계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현재라는 시간은 그 주어진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였다. 그 구원의 완성은 골로새서 3장 4절 말씀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성도들은 불같은 시험을 이기며 살아가야 한다. 근심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믿음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것이다. 이 믿음을 잘 지켜 살아가면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는 보았다고 믿고, 만났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8절이 그런 강조이다. 예수 때에 예수를 본 자들, 만난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저들이 예수를 구주로 다 영접한 것 아니다. 벳새다 광야의 무리들이 예수로 인해서 배 불리 한끼 음식을 먹고 예수를 임금 삼고 싶어 했다. 그 무리들이 다 예수의 제자가 되고 부활 복음의 전파자가 된 것이 아니다. 무리는 무리일뿐이다.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장로들은 예수를 본 후에 오히려 시기하고 죽이려 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지 않았나.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은 예수를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다. 그러나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전하며 살아간다. 왜 그런가. 그게 믿음이다. 5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7절의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9절의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영혼의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과정일 뿐이다. 그 과정 중에 시험, 시련, 핍박, 환난, 곤고, 박해가 끊임이 없어 흩어진 나그네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예수를 보지 못하고 믿으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할렐루야. 이 말씀이 얼마나 정교하고 분명하고 확증이 되는가. 이런 은혜와 축복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드러나길 축원한다. 

우리 다 같이 찬송 40장을 힘차게 부르고 다 같이 기도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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