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요16:1-15) 20200301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3-01 19:05 조회 8,848 댓글 0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요16:1-15)      2020. 3. 1


성령은 살리는 영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가시기 전에 “내가 떠나가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보혜사(保惠師)란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는 ‘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또 다른 보혜사를 처음으로 언급하셨다.

영문성경의 KJV에서는 Comforter(위로자)로, NIV와 RSV에서는 Counselor (상담자)로, NRSV에서는 Advocate(변호사)로, NASB에서는 Helper(돕는 자)로 번역하고 있다. 한글성경의 개역한글판과 표준새번역판에서는 ‘보혜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판에서는 ‘협조자’로, 가톨릭성경판에서는 ‘보호자’로 번역하고 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10:10)

코로나 19는 감염된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바이러스이다.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코로나 19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된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그래서 긴장하는 것이다. 어서 지금의 이 사태가 안정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요한복음 16장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의 긴 비유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예수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비유하셨다.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다. 성도가 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께 말씀으로 붙어살면 얻게 되는 유익을 열 가지로 말씀하셨다. 

좋은 포도 열매를 많이 맺는다.(5)
능력을 부여 받게 된다.(5)
밖에 버려지지 않는다.(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8)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8-10)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11)
주와 교제하는 친구가 된다.(15)
구하는 것마다 다 받게 된다.(16)
주의 택함 입은 자가 된다.(19)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27)

예수께서는 세상이 믿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그 이전에 예수를 미워하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5장 20절에 보면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5장 23절에 보면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다.  이런 말씀과 더불어 16장을 시작하는 말씀이 무엇인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失足)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실족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지 않나. 가정과 사회와 교회 생활 중에 그 누구라도 인간관계에 실족하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길 바란다. 재물과 일과 사람 앞에서 실족하는 경우가 없길 바란다.

자전거는 자동차 운전보다 처음에 배우기가 훨씬 어렵다. 자동차는 네 바퀴로 가지만 자전거는 두 바퀴로 가기 때문에 처음에 균형 잡기가 쉽질 않다. 그러나 아무리 익숙해진 자전거 운전이라고 자전거는 내릴 때도 조심해야 한다. 자전거는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면 자친 대형 사고가 될 수도 있다. 편리하지만 사고의 위험이 높다. 인생살이가 자전거 타기와 같다. 넘어질까 하고 늘 조심해야 한다. 실족하지 않도록 매 순간 주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 교훈하였다. 예수께서는 출교하고 죽이는 박해까지도 예고해 주셨다. 그런 일을 자행하는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기는 날이 다가오리라고 예언해 주셨다. 

그렇지 않나. 지난 이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핍박을 박고 박해를 받고 순교의 길을 걸어 왔는가. 

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비장한 각오를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이 말씀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끝으로 밤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새벽을 맞으셨다. 그리고 어두운 새벽에 예수를 찾아 나선 가롯유다에 의해서 로마 병정들에게 결박당했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끌려가셨다. 그 곳에서 이러 저러한 심문을 당하시던 예수는 본디오 빌라도 앞으로 이송되었다. 유다 지역을 통치하던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유대 백성들의 함성을 못 이기고 예수를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예수는 그런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만찬을 끝으로 몇가지 더 교훈해 주신 내용 중의 일부가 오늘의 본문이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강조해 주셨고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시면 때가 되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이라고 정한 것이다. 


세상을 책망하신다.
성령이 오시면 세 가지를 책망하신다고 하셨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다. 이 세상에 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가르침을 받기에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들로 가득하다. 

사람이 사람을 책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간에도 함부로 책망하면 관계가 서먹해질 수 있다. 더군다나 사회 생활 중에 누군가의 잘잘못을 책망하는 것은 더욱이나 조심스러운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효과를 보기는커녕 사람을 잃은 경우가 허다하다. 

미국 택사스 주 스톤브라이어 교회의 담임 목사이고 달라스 신학교 총장을 지낸 미국인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강해 설교가인 척 스윈돌(Charles R. Swindoll) 목사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는 “인사이트 포 리빙”(Insight for Living)이라는 기독교 라디오 방송 진행으로도 미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한번은 "그리스도인은 교통신호부터 철저하게 지켜야한다"고 어느 주일 설교 시간에 예를 들었다. 그런데 그 주일 오후에 교회에서 나와 집으로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깜빡 다른 생각을 하던 중에 교차로를 건너다 신호를 위반하게 되었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지만 이미 신호를 위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현장을 교인 한 사람이 걸어서 지나다가 스윈돌 목사가 교통신호를 위반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목사 자신도 교통신호를 위반한 사실을 순간적으로 알았고 찝찝한 맘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 교인이 전화를 해서 그 이틑 날 점심 식사 시간에 뵙기를 원한다고 연락이 왔다. 마침 월요일 점심시간에 별 약속이 없기에 약속을 하긴 했는데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하나님께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이튿날 식당에 가보니 그 교인과 다른 교인 몇 분이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척 스윈돌 목사는 미리 준비한 목걸이를 목에 걸고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써 있었다. 

교인들이 다 큰 소리로 웃으면서 목사를 맞이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목사는 다시 뒤로 한 바퀴 돌아섰는데 등 뒤에는 더 큰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나를 쳐라”

사람이 사람을 책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라도 아들딸을 책망하는게 쉽지 않다. 또 책망한들 책망한다고 해서 금방 천사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잘못하다 보면 사이만 점점 서먹해지고 말 수도 있다. 그래서 속앓이를 하고 꾹꾹 참으면서 지내고는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신 후에 성령을 보내셔서 세 가지로 세상을 책망하시겠다고 하셨다. 

그 첫째가 죄에 대한 책망이다. 
예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실 때 꼭 설명을 붙여 주셨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셨다. 죄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대속할 대속(代贖)의 주님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불신앙이 죄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믿지 못하는 것이 죄다. 십계명을 범하는 것도 죄이지만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냄을 받도록 하셨는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우리나라에 단군을 믿고 숭배하는 단군교란 것이 있다. 단군에 관한 이야기는 설화일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단군을 숭배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불교 천년, 유교 오백 년동안 큰 영향을 받아 왔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백성들의 생각의 저변에는 미신이 자리 잡고 있다. 우상 숭배에 젖어 있다. 유교에서는 부모 제사 드리지 않는 자식은 불효자로 여긴다. 

기독교의 강조는 무엇인가. 부모께서 살아 계실때에 효도할 것을 강조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 중의 다섯 번째 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명 중에서 첫째이다. 부모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 살인하겠나. 부모 공경하는 사람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겠나. 보모 공경하는 사람이 도적질하겠나. 부모 공경하는 사람이 남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겠나. 부모 공경하는 사람이 남의 것 탐내겠나.

부모 공경할 줄 안다는 것은 사람답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 말에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지”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도덕이고 윤리고 인문학이고 문화고 미풍양속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다.”라는 죄에 대한 정의는 그 이상의 문제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죄 즉 ἁμαρτια(하마르티아)라는 헬라어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을 말한다. 과녁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서는 신앙생활이 죄에서 자유함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그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이다. 

앞서 언급한 미국의 척 스윈돌 목사는 목회자들과의 성경 연구모임과 기도 모임에서 서로 정기적으로 일곱 가지 질문을 늘 진지하게 나누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 지난주 당신의 명예를 실추시킬 우려가 있는 대인관계를 한적은 없는가?
2. 재정적인 문제에 성실하지 못한 점이 있었는가?
3. 성적 유혹에 빠지도록 자신을 방치한 적이 있었는가?
4. 성경공부와 기도에 적정한 시간을 할애하였는가?
5. 가족과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는가?
6.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것들을 충실히 수행하였는가?
7. 이상의 항목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 있는가?

우린 이런 찬송을 부르고는 한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죄 사함을 받은 은혜의 사람답게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켜 나가는 믿음생활의 승리자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또 하나는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다. 
10절에 보면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 당시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런 사악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붙잡혀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께서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사십일 후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 때가 되면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는 어리석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착각한 의의 성취를 위한 열심 때문에 죽임 당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그와 같은 어리석은 불의를 통해서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하고 사악한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이룩하시려는 영원한 의를 이룩하셨다. 그것이 십자가의 승리이며 부활의 영광이다.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의 역설이다.  

세 번째,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다. 11절에 보니까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임금’이란 사탄의 세력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를 기억한다.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고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림이 일어났다. 그래서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 때 베도르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재차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 말씀을 깨달고 회개하기 시작한 무리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날 세례를 받은 자들의 수가 삼천명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 많은 유대이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였다.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하기를 힘썼다. 이것이 무엇인가. 죄의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성령의 임재 앞에서 대적자들이었던 유대인들이 변화받고 성령 충만해진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가운데 이런 은혜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계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진리의 영이란 거짓이 없는 영이란 말씀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는 거짓이나 불의나 악이 없는 지고지선의 상태이다. 하나님 자신이 진리의 근본이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하시고 보내신 성령은 흠과 티가 없는 진리의 영이시다. 왜냐하면 성령 자체가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령 받은 성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마치도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며 양들은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나. 지난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간 신앙의 선배들 중에서 잘못된 이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만약에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길로 벗어나고 탈선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령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길 원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일마다 때마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3. 1절 기념일을 맞이할 때마다 잊지 않고 유관순 열사를 기억한다. 1902년 생이다. 18살이던 1920년 9월 28일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숨졌다. 그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재 여사는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에 앞 장 서다가 현장에서 일본 군대에 의해서 살해당하였다. 그날 만세 삼창에 앞장 서던 유관순은 왼쪽 허버지와 머리에 일본 경찰의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체를 등에 업고 일본 강찰 파견소를 찾아가서 파견소장에게 항의 하였다. 유관순은 오히려 만세삼창 주모자로 체포되어 천안 헌병대를 거쳐서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공주지방 법원의 일본 재판장 앞에 선 유관순은 당당하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 일본인은 우리 땅에 몰려와 숱한 동포를 죽이더니 마침내 나의 부모까지 죽였다. 대체 누가 누굴 죄인으로 몰아 심판한단 말이냐”

유관순의 오빠 유관옥 또한 공주 영명학교 학생 신분으로 독립 운동과 만세 삼창에 앞장섰다. 17살이던 유관순은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 죄로 5년 형을 언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 온갖 고문과 학대가 이어졌다. 얼굴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면회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곱던 17세 소녀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고 퉁퉁 붓고 피멍이 든 얼굴로 끊임없는 고문과 학대를 버텨 내야 했다. 

지난 해 늦 가을, 고향 교회 110년사 역사책 발간 예배 때 강화도 고향교회에 갔었다. 그 곳에서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하신 김종우 목사의 손녀이신 권사님을 만났다. 할아버지 김종우 목사의 할아버지인 김용하 전도사가 앞장서서 세운 교회가 나의 고향교회이다. 그 같은 해에 스크랜튼 선교사와 데이밍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나의 고조부가 마을의 초가집, 기와집을 짓는 목수였는데 예배당을 앞장서서 건축하였다는 설명도 들었다. 그날 만난 권사님은 아버지를 통해서 전해 들은 유관순 열사 장례식에 대한 비화를 전해 주었다. 

3.1 운동이 일어난 그 다음 해인 1920년 9월 28일에 유관순은 숨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이다. 이화학당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서대문 형무소에 몰려가서 시체를 내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선교사들은 이 악날한 일제의 만행을 미국과 외국 언론에 전하겠다고 항의하였다. 겨우 시체를 건네받았다. 보름이 훨씬 지난 그해 10월 14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극비리에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그 장례를 집례한 그의 할아버지 김종우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유관순의 시체는 여러 토막으로 토막토막 잘려 있었고 그것을 찾아 맞추어 차마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프고 충격적이고 억울하고 비통한 장례식을 치루었다. 멀리 이태원 공동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해방 8년 전인 1937년에 이태원 묘원 지역에 택지로 개발되면서 유관순의 유골은 사라지고 말았다. 일제에 의해서 파 헤쳐지고 의도적으로 그의 유골을 흔적조차 지워 버린 것이다. 

세월이 흐른 오늘 날 일본은 대한민국의 유관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저들의 숨길 수 없는 만행에 대하여 숨을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유관순 그는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 36년의 식민지의 만행의 중심에서 연약한 소녀의 몸을 던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염원한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우린 오늘과 같은 역사적인 날을 맞으면 이런 찬송을 부리고는 한다. 586장 <어는 민족 누구게나>라는 찬송이다. 그 1절 가사는 이렇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시대의 조류에 야합해서 비굴하게 연명하며 사는 기생충 같은 인생이 아니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성령 안에서 담대한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예수의 생애는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성취하기 위한 생애였다. 지난 주일에 묵상한 요한복음 13장 31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때가 언제인가. 유월절 만찬 식탁 맞은편에서 예수께서 건네 주신 떡 한 덩어리를 받아 먹은 가롯 유다가 그 자리를 떠나 버린 직후에 하신 말씀이다. 아니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일이 어떻게 예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이 되었단 말인가. 

하나님은 인간의 배신이나 배반까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이룩하는 길로 바꾸어 가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제자였던 가롯 유다에게 배반 당하시고 붙잡혀 대 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끌려 나가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 그 결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런데 그 모든 고난과 죽임 당하신 사건들이 나중에 예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에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일이었다. 예수께서 지금 여기 14절에서 말씀하시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시리니”라는 예언의 말씀은 역사 중에 성취된 예언의 말씀이 아닌가. 요한 사도가 성령을 통하여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독사조’의 영광 즉 죽임 당하시고 부활 승천으로 이어진 영광이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령의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광을 드러내는 일들로 가득하다. 

지내 놓고 보면 지난 십 년 동안에 별의 별 수모를 다 겪고 별의 별 오해도 다 받는 날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동체를 이룩하게 하신 우리 모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오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도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계속하여 이루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성취하시고 하나님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영이시다. 

지난 2월 25일, 화요일 오전에 법무사를 통해서 예수사랑교회의 부동산을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에 무상 증여하는 재산 편입을 마쳤다. 우리 교회의 모든 재산은 그 어는 것 하나도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지난 135년 동안 이 땅에 뿌리를 내려온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의 재산으로 영원히 관리되고 보존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곳에서 영혼을 구원하고 사로가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에 힘써야 할 것이다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의 백성들을 양육하는 일에만 전념해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2장 3절에 보면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갖 지혜와 지식의 모든 감추어진 보화를 만방에 드러내고 증거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어수선한 이 계절에 성령 충만한 은혜의 사람들로 담대하고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2024 속장 워크숍최고관리자
2024 어르신 나들..최고관리자
2024 어버이 주일최고관리자
2024 상반기 커피..최고관리자
성도의 부모 공경(행..최고관리자
"어머니"최고관리자
"요게벳의 노래"최고관리자
"성도의 부모공경"최고관리자
"어머니의 넓은 사랑..최고관리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어..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