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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집안에 가득한 항기(요12:1-11) 202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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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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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16 13:28 조회 8,146 댓글 0
 
                  집안에 가득한 항기(요12:1-11)          2020. 2. 16

사람은 지나간 흔적이 남는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도 그런 의미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방금 전에 어떤 사람이 타고 내렸는지 짐작이 된다. 은근한 향기를 남기는 사람이 있고 역겨운 술 냄새와 음식 쓰레기 치운 냄새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성경의 역사로 하면 가인이 남긴 냄새와 그 동생 아벨이 남긴 믿음의 향기가 다르다. 쌍둥이였지만 형 에서가 남긴 냄새와 동생 야곱이 남긴 믿음의 향기가 다르다. 같은 왕이었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을 거역했던 사울 왕이 말년에 남긴 냄새와 고난과 역경의 긴긴 청년기를 보내고 30살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40년을 쓰임 받은 다윗 왕이 남긴 믿음의 향기가 다르다. 다윗에게도 욕망에 사로잡혀 범죄한 부끄러운 과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베게와 침상을 적시는 눈물의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합당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믿음의 향기로운 인생을 살아갔다. 그를 통해서 고백되고 기록된 시편의 그 많은 말씀들이 주는 감동은 가히 뛰어 넘을 역사에 또 다른 인물이 없을 정도가 아닌가.

가롯 유다는 예수의 부름 받은 12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사탄과 마귀가 그 마음에 들어가 예수를 팔아버린 배반자요 역사의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가롯 유다는 불순종과 거역으로 인하여 사탄의 조종을 받은 냄새나는 인생이 되고 말았다. 악취나는 생을 마치고 말았다. 

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거짓말하고 저주하고 도망가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그날 어딘가에 가서 숨어 버렸던 비겁자였다. 그러나 나약한 베드로가 회개하고 성령 받고 한번 말씀 증거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게 하는 성령 충만한 사도로 변화되었다. 그날 이후 베드로는 가는 곳곳마다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능력과 은혜의 사도의 삶을 향기나게 살아갔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후대에 두고 두고 향기로운 미담과 교훈을 남기는 인생이 있다. 그러나 반면에 후대에 그 자신과 후손들조차도 부끄러운 일에 거론되는 이들도 있다.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넘긴 이완용은 역사에 냄새나는 역적이요 구국일념에 앞장서던 송재 서재필,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월남 이상재와 이준 열사 같은 이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역사에 향기를 남기고 떠난 신앙의 거장들이었다.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언제 대하여도 항상 흐뭇한 미담의 주인공들이며 소망을 갖게 하고 헌신의 아름다움을 교훈받게 하는 향기로운 삶을 살다가 간 삼남매이다. 

평소에 예수께서는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를 친구로 대하셨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나사로와 예수의 관계가 친구의 관계인 것을 주변에 공공연하게 알리신 적이 있다. 

우리는 요한복음 12장의 본문에서 대개 순전한 향유 나드 한근을 예수의 발에 쏟아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은 장면을 대개 묵상하고 지나갈 때가 적지 않았다. 집안 가득하게 향유의 향기 진동하게 된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이 삼 남매와 예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말씀의 교훈을 다시 또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예수께서 살리신 나사로.
주변 분들 중에서 “나는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의 경우에 6. 25전쟁을 겪은 연세 들어가시는 어른들이 계시다. 저들은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의 목숨을 잃거나 자기 자신도 죽음의 위기를 경험하며 목숨을 연명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 외에도 중병을 앓고 여러번의 수술을 거치면서 다시 살게 되었다든지 혹은 산업 현장에서의 안타까운 사고로 혹은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는 병들어 고생하다 죽었다. 그런데 장례를 치른지 나흘 후에야 그의 무덤 앞에까지 찾아가신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명령하시자 나사로가 살아났다. 죽어 장사 지낸지 이미 나흘째인 나사로가 베로 몸을 동인채로 걸어 나왔다. 예수께서는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하셨다. 

우리들 중에 누군가는 이런 성경의 내용을 대하다 보면 “말도 안된다. 설마”하고 의심하고 의아해하는 이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게 된 예수를 통한 표적과 예수 자신이 죽임당하여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 장사 지낸 지 사흘 되던 날에 무덤에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부활 사건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기독교가 이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잡다한 종교와 다른 점은 ‘부활’이다. 예수의 부활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믿는 모든 믿음 생활이란 것이 다른 종교와 별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부활이 없다면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교양이나 도덕이나 윤리나 수양을 강조하는 세상 종교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게 하심으로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께서는 예수의 하시려는 일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모세의 때에 광야에서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 꼭대기에 높이 세웠던 일화를 인용하셨다. 우리는 대개 요한복음 3장 16절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앞의 두 구절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고 교훈해 주셨다.

생각하여 보라. 민수기 21장에 보면 광야에서 불평하던 백성들에게 불뱀이 나타나서 저들을 물었다. 죽어가는 무리를 바라보며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꼭대기에 높게 달라고 하셨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들이라도 그 장대 꼭대기의 놋 뱀을 바로 보면 살리라고 말하라고 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따랐고 그 놋뱀을 쳐다 보는 이들은 살았다. 이 역사적인 장면을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과 대비해서 말씀하셨다. 인자도 광야의 놋뱀처럼 높이 달릴 것인데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신다고 선포해 주셨다.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에게 따라다니는 말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 내 주신 나사로”이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려 내 주신 예수의 은혜를 입고 나니 늘 그를 부르는 표현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이다.

그런데 생각하여 보라. 오늘날 우리 각 사람이 그런 존재가 아닌가.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자들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간증이고, 이것이 고백이고, 이것이 설명이 필요 없는 사실이며 체험이다. 

우리나라에 복음 성가가 전해지던 초창기에 불리던 복음 성가 중에 <나 자유 얻었네>라는 복음 성가가 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주 말씀 하시길 쇠사슬 끊겼네 우리 자유 얻었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2. 나 구원 받았네
3. 나 성령 받았네
4. 나 기뻐하겠네

생각하여 보라. 기억하여 보라.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만 예수로 인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자인가. 아니다. 오늘 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각 사람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녀들이다. 

이걸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죄 사함 받고 구원받고 거듭나 영생하는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신앙생활인 것이다. 

우리가 믿음 생활, 신앙생활 한다는 게 무엇인가. 예수 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자 답게 살아가다가 때가 되어 주가 나를 오라고 하시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예수 안에서 예수와 더불어 낮이나 밤이나 집 안에 있든지 집 밖에 있든지 주와 동행하는 부활 승리의 신앙인답게 살아가길 축원한다.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의 집에 계신 예수의 소문을 들은 큰 무리의 유대인들이 베다니 마을에 찾아 왔다. 나사로의 집에 모여 들었다. 9절에 보면, 저들은 예수만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고 모여 들고 있었다. 그러데 그 다음 장면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나서서 예수도 죽이고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나는 사나 죽으나 나사로처럼 늘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살리심을 받은 증거와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나로 인하여 내 주변에 믿는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은혜를 누리며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는 신자다운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런 축복이 충만하길 축원한다. 


예수를 위한 잔치.
예수께서 나사로의 가정에 가시자 예수를 위한 큰 잔치가 벌어졌다. 그렇지 않겠나. 죽은 나사로를 예수께서 살려 주셨는데 훗날 예수께서 나사로의 집에 다시 방문할 기회를 가지셨으니 잔치할만도 하지 않겠나. 이 잔치는 성경의 표현 그대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잔치다.

나사로의 가정에서 펼쳐지는 이 잔치의 주인공은 나사로가 아니다. 마르다나 마리아도 아니다. 동네 사람도 아니고 예수 계신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큰 무리도 아니다. 이 잔치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 날 교회는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곳이다. 오늘날 예배는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시간이다. 교회는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고 간증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곳이다. 예배의 시간은 그 어떤 예배의 시간이든 그 모든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고 가정과 학교와 세상에 돌아가서 생활한다. 세상을 사는 일이 녹녹하지 않다. 죄와 악이 가득하고 끝없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헐떡거리며 살아간다. 이번 30대 초반의 젊은 한의사가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일가족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참담한 소식처럼 세상은 생각하는 것처럼 녹녹하지 않다. 공부를 많이했어도, 남이 부러워 하는 실력을 쌓았어도, 학위를 받고 자격증을 손에 쥐었어도 세상은 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돌아가질 않는다. 그래서 좌절하고, 그래서 절망하고, 그래서 답답해 하고, 그래서 한계의 벽 앞에서 허우적 대는 이들이 세상에는 넘쳐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그러므로 예배 시간은 사람이 영광을 받는 시간이 아니다.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집이 교회이고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시간이 예배 시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른이든 어린아이이든 청년이든 노인이든 예수를 위한 잔치자리에서 예수로 인해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서로 더불어 예수로 인해서 기뻐하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 

우리는 매주일마다 예배 시간에 모여서 예수로 인하여 천국 잔치를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예수로 인하여 영과 혼과 육에 흡족한 양식으로 배 불리 먹는 시간이 예배 시간이어야 한다. 예배는 잔치 자리와 같아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기도와 찬송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며 영혼육에 힘을 얻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며 소망을 말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서로 예수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시간이어야 한다.

몸은 좋은 침대에 눕고, 푹신한 소파에 앉으면 편할 수 있다. 바디 프랜드 같은 좋은 안마기로 안마를 받으면 몸이 편해질 수 있다. 환경과 여건이 좋으면 편안할 수 있다. 그러나 평안은 그렇게 주어 지는게 아니다. 음식도 그렇지 않나. 아무리 산해진미가 식탁에 가득해도 내 몸이 병들거나 내 마음에 기쁨이 없고 슬픔과 우울과 걱정 근심만 가득하다면 그 음식이 내게 무슨 유익인가. 내가 입맛이 없고 내가 밥 맛이 없고 내가 인생 살 맛을 잃었다면 아무리 귀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한 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나. 잠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20.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21.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0-22)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내 마음에 모시고 살고, 예수를 내 마음에 품고 살고, 예수와 항상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삶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를 무덤 속 죽음의 자리에 두려 하지 아니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명령하시듯이 죽음과 좌절과 절망과 어둠의 자리에서 빛과 승리의 영원히 행복한 자리로 불러내시고 살려내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나가서도 예수로 인해서 승리하는 삶을 이루며 살아가고자 하여야만 한다. 교회에 모여서는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자리에 둘러앉아 예배하고 함께 떡을 떼며 더불어 기뻐하고 더불어 위로하고 더불어 격려하고 더불어 힘과 용기가 되어 주고 더불어 주 안에 하나 된 삶을 살아가고자 해야만 한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그 복음 생활의 승리의 영광을 향기롭게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 

남을 무시하고 나만 잘 난 척하거나 이기적으로 나만 위하거나 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믿음의 사람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예수께서 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시고 새 생명을 얻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야한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감사하고 늘 감사하며 매 순간마다 예수를 위해서 잔치하는 인생으로 살아갈 줄 알아야만 한다.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그 잔치 자리의 찬송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436장 찬송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과 같은 찬송을 불러야 하지 않겠나.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안에 살리라.”

예수 안에서 초상집으로 살지 않고 날마다 잔치하는 천국 백성다운 삶을 가꾸어 가는 신앙 승리의 인생이 되길 간절히 축원한다. 


예수께 부어드린 마리아의 향유.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는 그 날 예수를 모신 잔치 자리에서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부었다. 그리고 엎드려서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다. 온 집안에 그 향유의 향기로 가득하였다.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가고 예수 팔아 버린 가롯 유다는 그걸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지 허비한다고 시비 걸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한 일은 예수의 장례를 준비해드린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찬해 주셨다. 

누가 예수께 순전한 향유 나드 한 근을 부어 드릴 수 있나. 그것은 값이 비싸고 귀한 것이었다. 인도 히말리야 기슭의 야생에서 자라나는 나르드 식물의 뿌리와 줄기에서 채취한 무척 귀하고 값비싼 향유가 나드 향이다. 그 귀하고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쏟아부어 드린 것이다. 뿐 만 아니라 마리아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유에 흥건하게 젖은 예수의 발을 닦아 드렸다. 이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과 같지 않나.

마리아의 삼 남매의 가정은 부모 이야기가 없다. 저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지 모른다. 성경은 그런 내용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나사로가 몇 살 때부터 두 여동생들과 함께 살아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사로는 예수께서 그를 친구 삼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아왔다. 더군다나 병들어 죽었던 자신을 예수께서 살려내주셔서 새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예수께서 오시니 마르다는 나서서 부지런히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잡수실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께 순전한 나느 향유를 부어 드렸다. 온 집안에 향유의 향기가 가득했다. 잔치 음식을 준비하는 맛있는 음식 냄새와 함께 웃음소리와 서로 대화하는 왁자지껄한 잔치 자리의 기쁨이 고조되었다.

맞다. 신앙생활은 예수와 더불어 예수 안에서 날 구원해 주신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생활이다. 나사로의 가정의 잔치의 절정은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예수의 발에 쏟아 부어드린 섬김이었다. 

우리 예수 사랑교회도 지난 10년 동안 누군가나 예수의 발치에 향유를 쏟아 붓고 엎드려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듯 하는 섬김의 주인공들에 의해서 여기까지 나아 왔다. 일일이 거론하면 가슴 뭉클하고 조심스러운 간증들이 우리들 가운데도 가득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우리 공동체 가운데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섬기며 예수께 끊임이 없이 새로운 향유 나드를 가져다가 부어 드리는 간증이 적지 않다.

예수의 몸된 교회의 발치에 향유를 쏟아 부어 드리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정성과 섬김의 마음을 담아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아 드리듯이 교회를 섬기는 가정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다. 

찬송가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 1820-1915)는 태어난 지 육개월 만에 의사의 실수로 실명하게 되었다. 95년 동안 평생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찬송가를 쓴 ‘찬송가의 여왕’이 되었다. 패니 크로스비의 가슴과 그가 쓴 찬송가에는 주님 사랑과 천국 사모로 가득했다. 패니 크로스비는 다시 태어나도 맹인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놀라운 고백까지 했다. 그가 천국에 이르러, 그의 눈으로 제일 먼저 보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패니 크로스비는 12,000여 개의 찬송시를 썼다. 그 중에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23개나 포함되어 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288장)  

이런 찬송의 가사가 그의 작품이다. 

그녀가 92회 생일을 맞았을 때 그는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데려오세요. 
그 사람과 악수하고 싶어요.” 

맹인 패니 크로스비는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날마다가 부활 체험이요, 날마다가 예수 위하여 잔치하는 날들이요, 매 순간이 예수 위하여 순전한 나드 향유를 쏟아 부어드리는 섬김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았다. 

그녀는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몸으로 전하면서 산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삶 전체가 향기로 가득찬 예수 중심의 섬김의 삶이었다.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 1949-)는 장래가 촉망되던 예쁜 소녀였다. 17살 때에 다이빙을 하다 보드에 머리를 부딪혀서 전신마비가 되었다. 올림픽 레슬링 선수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어려서부터 승마, 하이킹, 테니스, 수영 등 만능 스포츠 선수로 자라나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후에 그녀는 하나님과 자신과 모두를 원망하고 저주했다. 손이 마비되었으니 자살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전도자가 있었다. 처음에 자신을 저주하며 화를 내고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그러나 꾸준한 전도자의 전도를 받고 마음이 움직였다. 감사한 생각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그 후로 그의 몸에 지닌 장애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결국에는 보석으로 바뀌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이 그의 마음을 사로 잡기 시작했다. 

조니 에릭슨은 몸도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그런 그의 몸을 가지고서도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로,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찬송을 부르고 간증을 한다. 그에게 가능한 것은 숨을 쉬고 있는 것과 입의 움직임 뿐인데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들은 너무너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되었다.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격려와 도움의 손길을 펴며 살아간다. 그는 그의 날마다의 삶이 예수의 발에 향유 나드를 쏟아 부어 드리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조니 에릭슨은 자신의 고난과 연약함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바꾸어 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몸으로 전하면서 사는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생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는 꼭 그 안에다 꼭 'PTL'이라고 쓴다. 그 말은 "Praise the Lord" (주님을 찬양하라)는 뜻이다. 그녀가 사용하는 미술용 펜이 ‘질레트 컴페니’ 제품인 것이 그 회사의 사장에게 알려 졌다. 절망 속에 빠진 한 소녀가 자기 회사의 미술 펜을 이 사이에 악물고 그림을 그리니 보는 사람들에게마다 감동을 주었다. 그 회사는 그녀를 평생 그 회사의 명예 직원으로 채용했다. 매달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회사가 광고를 낼 때마다 이 소녀가 펜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집어넣었는데 그 광고 덕분에 학용품과 미술 용품이 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절망과 어둠 속에 전신이 마비된 한 여성에서 복음이 들어가니 그의 일상이 향기나는 생이요 예수께 향유를 부어 드리는 날마다의 삶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조니 에릭슨은 장애인을 위한 기독교 사역 단체인 ‘조니와 친구들 국제 장애인 센터’의 설립자이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다니며 뛰어난 구필화가로, 향기로운 예수 복음을 전하는 은혜로운 간증자요 명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예수를 믿고 예수로 인해 거듭나고 예수로 인해 죄 사함 받고 예수로 인해 나사로처럼 새 생명을 얻은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누이 동생 마리아처럼 날마다의 삶에서 나드 향유를 쏟아 부어 드리는 듯한 섬김과 향기로운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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