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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께 피하오니(시71:1-12) 2019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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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9-03 15:46 조회 8,979 댓글 0
 
                  내가 주께 피하오니(시71:1-12)            2019. 8. 25


숨고 피하려는 것은 본능이다. 병아리는 어미 닭이 위험한 상황을 알리면 어미 닭의 날개 깃 안으로 피하여 숨는다. 쓰나미나 지진을 사람은 체감하지 못하지만 동물들 중에는 위급한 상황을 미리 감지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피한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도 위급한 상황이 되면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는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다. 반면에 불의한 일이나 죄를 범한 경우에 자신의 범죄 사실이나 불의한 일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법망을 피하여 숨고 피해 보려고 허둥지둥하게 된다.  

어떤 상황을 피하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에 두려움을 느낀 아담과 하와는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다.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여 숨은 것이다.

창세기는 그 장면을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3:8)고 기록해 주고 있다.

사람이 어떤 때에 숨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어떤 상황에서 피하고 싶거나 숨고 싶은 경우는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내가 죄를 범하였거나 떳떳하지 못한 경우에 자기를 숨기고 싶어 하고 사건의 현장에서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내가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려 하고 공의와 정의의 편에 서서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경우이다. 나 자신은 이 세상을 정직하게 살아가고 싶지만 내 주변의 불의한 자들이나 악인들이 결탁하고 득세하여 나를 모함하고 공격한다. ‘너 혼자만 의로운 척하느냐’고 비난하고 대적하고 음해하고 욕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로 피하여야 할까. 어디로 피하여야 할까.

본문의 시편 기록자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라고 기도하고 있다. 

고향 마을인 나사렛 사람들조차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께서 한번은 고향 마을에서 안식일을 맞았고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마을의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어트려 죽여 버리려고 하였다. 그 때 예수는 그 위급하게 죽임 당할 상황을 피하셨다. 급하게 고향 마을을 떠나셨고 그 후로 다시는 고향을 방문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명자의 길을 걸으셨다. 

예수는 매 순간마다 불의한 상황을 피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고는 하셨다. 그런 가운데서도 순간순간마다 예수를 대적하여 죽여 없애려 하는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들의 위협과 음모를 극복해 나가셔야만 했다. 

우리는 예수의 생애 중에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에 대하여 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출입하시던 때의 장면과 일화들을 복음서 분량 중에 적지 않은 비중으로 기록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 마지막 유월절의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분부를 이룩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는 절규를 하셨다. 예수께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으로 피하여 맡기시는 절대 절명의 위탁의 순간인 것이다. 

악을 이기려면 선한 편으로 피하여야 한다.
거짓을 이기려면 진실의 편으로 피하여야 한다.
불의를 이기려면 정의와 공의의 편으로 피하여야 한다.
질병을 이기려면 나를 고치시는 회복자의 손길 안으로 피하여야 한다. 
가난을 이기려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는 공급자의 도움의 손길 안으로 피하여야 한다. 
억압과 결박을 이기려면 나를 자유하게 하시는 그 분의 전능하신 손길 안으로 피하여야 한다. 
어둠을 이기려면 빛 가운데로 피하여야 한다.
죽음을 이기려면 생명 가운데로 피해야 한다. 

시편 71편은 누가 쓴 시라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내용을 대하다 보면 아마도 다윗의 시편일 것이라는 생각이 선명해 진다. 아마도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나 아도니아의 반란 사건을 겪으면서 쓴 비탄시가 아닐까 여겨지게 된다. 왜냐하면 마치도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을 벗어나서 피신하던 다윗의 다급한 모습을 엿보게 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편 71편의 기록자는 4절에서, ‘악인의 손’,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이란 표현을 하고 있다. 10절에서는 ‘내 원수들’이라고도 하였다. 13절과 24절에서는 ‘대적하는 자’, ‘모해하려는 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20절에서는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겪는 중에서 “다시  살리시고 다시 이끌어 올리실” 주의 도움을 간구하고 있다. 

본 시편은 원수와 대적하는 자들로부터 쫓기며 불안하고 두려운 날들을 지내는 중에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간구하며 주께 피하는 신앙인의 겸허한 기도 내용을 담고 있다. 


여호와여 나를 영원히 구원하소서.
숱한 고난과 수치를 당하고 있는 시편 기자는 지금 겪고 있는 수치가 어서 지나가기를 기도하고 있다.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 하고 있다. 

주님의 의로 나를 건저 주세요.
주여 나를 풀어 주세요.
주의 귀를 내게 기울여 나의 기도 소리를 들어 주세요.
나를 구원해 주세요.
주님은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이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니
주께서는 나의 반석이시고 나의 요새이십니다.

라고 기도하고 있다. 
사랑하시는 이여.
요즘 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무슨 기도를 드리며 지내고 있는가.


어느 누구나 평안하고 행복하고 안일한 환경에서 다급한 기도를 드리는 경우란 없다. 지금 별일이 없고 지금 평안하고 지금 행복한데 금식하고 철야하고 부르짖고 주께 매어 달려 기도할 자가 있는가.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러나 4절에 보면 지금 시편 기자는 자신을 해하려고 달려드는 “악인이 손과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벗어나길 원하며 주께로 피하는 자의 간구를 드리고 있다. 

그렇지 않나. 사람이 질병이나 사건이나 사고나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억울하고 답답하고 속이 상하고 괴롭고 힘겨운 날들을 지낼 때에 간절한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피하고 싶은 열망을 갖는 것이 아니겠나.

우리는 이 시편의 내용 중에서 기록자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다. 3절에 보면, “주님은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 ‘항상’이란 고백이 중요한 고백이다. 어쩔 때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나, 어떤 경우, 어떤 상황, 어떤 형편 가운데에서나 항상 주님이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시기를 간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찬송가 390장에 보면 “예수가 거느리시니”라는 찬송의 후렴이 이렇다.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그 앞의 가사 3절에 보면, “괴로우나 즐거우나 예수가 거느리시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밤이나 낮이나 집 안에서나 세상 중에서나 매 순간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주께로 피하며 주의 구원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와 요새가 되소서.
동물의 세계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다. 세상에는 사자나 곰이나 호랑이나 자칼과 같은 맹수들도 많지만 아름다운 초식 동물들도 많다. 그 많은 맹수들 틈바구니 속에서 양과 사슴과 얼룩말과 기린과 코끼리와 같은 동물들이 번식해 가는 동물의 생태계를 들여 다 보면 창조자의 오묘한 손길과 섬세하신 섭리를 느끼게 한다. 맹수의 시야에서 피하고 숨지 않으면 초식동물들은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의 목숨을 보존할 수가 없다. 

사람이 선하게 살아가면 좋으련만 세상에는 악한 이웃들이 많다. 시편 71편 기록자의 고백처럼 세상에는 악인과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와 원수들과 나를 모해하고 대적하는 자들로 득실거린다.

그런 맹수의 도가니와 같은 세상에서 의롭게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더군다나 생명을 보존하며 안전하게 살아가기란 더욱 어렵고 불안하다. 

잠언 30장에 보면 잠언의 기록자는 땅에서 살아가는 작고 지혜로운 것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 첫 번째는 힘이 없어 보이지만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바위 사이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반에 대하여 언급한다. 임금이 없이도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번식하는 메뚜기 떼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다.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피하여 다니며 왕궁을 드나들며 살아가는 도마뱀의 모습도 관찰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떠한가. 질병 앞에서, 칼과 창과 활과 총포 앞에서 허무하게 피를 쏟으며 쓰러져 가는 인생의 허무함을 볼 때가 없지 않다. 어느 시대에나 불의하고 악한 자의 손길로부터 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어렵다. 시편 기자는 자기를 해하고 자신을 대적하며 모해하며 원수시하며 흉악하고 불의한 세력으로 달려드는 악인들 틈바구니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하고 있다. 

시편 71편 전체를 읽어 보면 이 기록자는 지금 나이가 꽤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9절에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고 고백하였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6절에 보면, 그는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택함을 받고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며 자라난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그의 신앙 고백의 절정은 5절에 있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6절 끝에 보니까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는 고백도 하고 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의 1절 가사는 이렇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 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

그렇지 않나. 우리가 부르는 또 다른 찬송의 가사처럼 “이것이 나의 찬송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일세”라고 늘 찬송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택하심을 받고 평생을 늙어 가며 주를 의지하며 살아갈 지라도 악인과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들과 원수와 대적자들의 모해를 수도 없이 겪을 수밖에 없다. 그 때 그 때마다 고난을 극복하며 환란과 시련을 감당하며 매 순간 여호와께로 피하는 겸손한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이기며 살아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주님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어 주십시오. 주님 나의 반석과 요새가 되어 주십시오. 주 여호와여. 주님은 나의 소망이십니다.”라고 말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생각하여 보라. 아무리 우리가 주여 주여 하고 살아갈 지라도 주님이 나를 외면하시고 주님이 나를 멀리하신다면 내 영혼이 얼마나 불행한 자일까. 

그런데 이 시편의 기록자는 어느 날 어느 한 순간이라도 주님을 잊은 적이 없다.  8절의 고백을 보라.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7절에서는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고 고백하였다. 

지금 이 시편의 기록자의 운명이 어떠한가. 11절을 보라.

그의 영혼을 엿보며 죽여 없애려는 원수들이“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고 수군거리고 있다. 

사무엘하 17장에 보면 아버지 다윗 왕을 반역한 압살롬을 추종하던 자 중에  아히도벨이란 자가 나서서 말하였다. 자기가 군사 12000명을 택하여 밤중에 다윗의 피신지에 쳐들어가서 다윗 왕만 쳐서 죽이면 역사는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설명을 듣고 있던 압살롬과 그 곁을 추종하던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가 다 아히도벨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고 압살롬의 나중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라는 기도는 언제하는 기도인가.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면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지 않으셨다면 애굽의 노예 요셉이 그렇게 존귀한 생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멀리 하셨다면 노예가 된 요셉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

본문 시편 71편을 묵상하다가 보면 이는 분명히 압살롬에게 쫓기던 다윗의 고백이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대하게 된다. 

그런 불안하고 초조하고 외롭고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답답한 지경에서 12절에 보니까 시편 기록자는 다급하게 계속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지금은 불안하고 지금은 쫓기고 있고 지금은 심한 고난의 늪에 빠져 있지만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기도하고 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반복해서 간청하며 기도하고 있다. 20절과 21절에 보면 “다시 살리시고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고 그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위로하실 것”을 소망하고 있다. 
생각하여 보라.
누가 야곱을 그의 형 에서의 보복하려는 창과 칼과 활로부터 건져 주셨는가.

누가 애굽의 노예였던 요셉을 바로 왕의 총애를 받는 애굽의 명 총리가 되게 하셨는가.

누가 살인자로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숨어 지내던 나이 80세의 모세를 불러 동족을 구원하고 출애굽하게 하는 선봉에 서게 하였는가.

누가 여호수아로 하여금 요단 강을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고 여리고 성을 눈 녹듯이 무너지게 하셨는가.

누가 다윗의 물맷돌 한 개로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해결하고 전쟁의 승리를 가져 오게 하였는가. 

누가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시대에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가 들어나게 하셨고 몰살당할 뻔한 유대인들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받게 하셨는가.

누가 바알과 앗세라 숭배자들 앞에서 엘리야로 하여금 번제단에 불이 내려 제물을 불태우며 우상 숭배자들을 그릿 시냇가에서 처형하게 하셨는가.

누가 십자가에 죽임 당한 예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례 된 하나님의 아들을 부활시키셨는가. 누가 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허락해 주셨는가.

주께서 나를 외면하시고 주께서 나를 버리시면 구원 받을 인생이 우리 가운데 단 한사람이라도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께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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