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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바라는 항구(시107:23-32) 2019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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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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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7-16 15:17 조회 8,484 댓글 0
 
                   그들이 바라는 항구(시107:23-32)     2019. 7. 14


35년 전에 개척교회를 시작한 20대 중반의 초년병 목회자 때에 지방의 선배 교역자들을 따라서 홍도에 간 적이 있다. 새해 목회를 준비하고 계획할 겸 지방 단합을 위한 행사였다. 아침과 저녁 그리고 깊은 밤까지 예배드리고 목회 세미나를 하고 낮에는 등산도 하고 배도 타고 산책도 하고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당시 기억에 숙소도 허술하고 화장실이나 세면장 시설도 열악했다.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움은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푸른 바다, 맑은 물, 상큼한 공기, 기암절벽, 산과 나무와 숲과 꽃과 새들과 푸근하고 구수한 인심...며칠이 금방 지났다. 금요일에 목포항을 거쳐서 육지로 돌아 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목요일 밤부터 거센 파도와 함께 일기가 고르질 않았다. 금요일 뱃길이 끊기고 말았다. 핸드폰 없던 시절이니까 전화하려면 섬에 있는 간이 우체국에 가서 줄을 서서 교환수를 통해서 이용하던 시절이다. 서로 교회에 상황을 전달하고 전화로 주일 예배 주보 자료를 전달하느라 부산한 목요일과 금요일을 지냈다. 문제는 토요일에라도 육지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였다. 토요일 아침이 되어도 바람과 파도는 점점 더 거세지기만 했다. 무리한 출항 계획으로 여객선이 아닌 짐을 싣는 커다란 상선을 이용해서 목포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홍도에서 목포 항구까지의 거리는 107km이다. 육지에서 자동차로 달려도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적지 않은 배가 앞뒤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좌우로 흔들거리는데 갑판에까지 파도가 덮쳐들었다.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만 같았다. 멀미하는 정도는 말할 것도 없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 왔다. 

마태복음 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장면이 떠올랐다. 예수와 제자들이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난 장면이다. 예수는 주무시고 계셨다. 갑자기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를 깨웠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께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시며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초기에 있었던 이 일로 제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놀라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며 서로 말하였다. 

홍도(紅島)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 홍도리에 속한 작은 섬이다. 그 주변의 작은 섬 20여개를 포함해서 ‘천연기념물 170호’로 지정된 천연 보호구역이다. 저녁노을이 지면 섬 전체가 붉게 보인다고 해서 ‘홍도’(紅島)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답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섬이 홍도이다. 

흰색 꽃이 피는 백동백과 풍란을 비롯해서 무려 540여 가지의 다양한 특이 식물들이 자생하는 곳이다. 54종류의 각종 새들이 섬 전체를 주인처럼 넘나들며 살아간다. 231가지의 동물과 곤충들의 보금자리이다. 섬 전체가 동식물의 보고(寶庫)이다. 200여 가구에 550여명이 살아간다. 해산물은 소라, 전복, 해삼, 멍게, 우럭, 농어, 멸치, 오징어, 다시마, 돌미역, 돌김이 유명하다. 밭에는 주로 감자, 콩, 보리, 마늘을 심는다.  

작지만 섬 전체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섬이다. 남해의 소금강이라 불리운다. 면적은 6.42㎢이다. 배를 타고 20여km의 해안선을 따라서 섬 한 바퀴를 돌아보면 깎아지른 단애(斷崖)의 ’홍도 10경’이라고 불리는 기가 막힌 기암괴석의 절경을 보게 된다. 그 기괴함이 신비하고 아름다워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가장 높은 깃대봉은 해발 368m이니까 높낮이의 기복이 큰 산지로 형성되어 있는 절경이다. 

연평균 기온은 14.1℃이다. 1월 평균기온은 2.4℃, 8월 평균기온은 28℃이니까 서울에서 느끼는 겨울이나 여름 날씨와는 전혀 다르다. 매년 내리는 비의 양도 1,123㎜이니까 적지 않은 비가 내린다.

홍도 방문을 마치고 토요일 오전에 위험천만한 항해를 계속해서 배가 목포항에 도착하였다. 요즘이야 호화롭고 크고 빠른 호화여객선이 발전했지만 그 때의 형편으로는 참으로 위험한 항해였다. 바다는 날씨가 고요할 때의 바다이지 일단 바람이 거세지고 파도가 높이 일기 시작하면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곳으로 돌변하고 만다. 

시편 107편의 본문이나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을 비롯한 276명의 승선객들이 겪었던 유라굴로 광풍 가운데에서 밤과 낮을 구분할 수 없이 보름 동안 죽을 번한 고생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시편 107편의 탄생 배경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뒤로 하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극심한 고난을 겪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감사시 혹은 찬송시로 구분하는 시편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지난 6월 한 달 내내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대하였다. 이미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패망하고 남 유다마저도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형편에서 언제 바벨론의 밥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을 경고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 타락이었다. 하나님은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유다의 임금과 왕족과 백성들이 되길 원하셨다. 그러나 제사장, 선지자들을 포함하여 너나 할 것 없이 남 유다의 거의 모든 백성들이 영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을 버렸다. 

주전 586년에 남 유다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임금이 보낸 군대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나라의 쓸 만한 젊은이들은 모조리 쇠사슬에 묶인채로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바벨론 포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솔로몬 때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은 불바다가 되었다. 성전의 그 귀한 것들을 모조리 다 집어 가 버렸다. 성전 낭실의 두 놋 기둥까지 가져가 버렸다. 우리말에 “기둥뿌리까지 뽑아 간다.”는 표현처럼 모조리 싹 쓸어 가 버렸다. 그리고 70년 세월이 흘러갔다. 황무하고 황량하던 예루살렘으로 포로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이는 마치도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은 감격과 같은 기적이었다. 시편 107편은 그러한 시대 배경을 통해서 탄생된 시편이다. 


광풍과 높은 파도 가운데 있는 그들.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매 구절마다 환난, 고통, 위험, 위기, 불안, 두려움, 초조 등을 느끼게 하는 표현들이 반복된다. 

23절부터 27절까지만 보아도 그렇다. 
큰 물에서 일 한다.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킨다.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른다.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린다.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진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가 그렇지 않나. 평안할 때도 있고 편안한 순간들이 없지 않지만 뒤숭숭한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하지 않나. 인생은 마치도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가 휘몰아 치는 어려운 환경의 먼 바다 위에 일엽편주(一葉片舟)와도 같다.

사람이 아무리 강해 보이고 대단한 것 같아 보여도 홍수, 쓰나미, 지진, 극심한 가뭄 등의 자연 재해가 닥치면 속수무책인 경우가 허다하다. 질병으로 무너질 때 보면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메르스 같은 전염병이 번져 가기 시작하면 현대 의학을 총 동원해서도 몇 달씩 초긴장이 되고 만다. 전염병에 감염되면 의사라도 죽어 넘어간다. 

전쟁이 벌어지고 나면 한 나라의 국민으로 하루를 평안한 환경에서 일상생활을 누리며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지 실감하게 된다. 요즘 세계적인 난민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보면 내 나라에서 국가의 안정된 치안과 경제 혜택 가운데서 일정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 받으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가를 알 수 있다.

내가 병들어 보고, 내가 환자복 갈아입고 병원에 입원해 보고, 내가 수술대에 누워 보면, 하루 한 순간의 건강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경험하게 된다. 

내 가족 중에 누군가가 응급실을 향하게 되고, 중환자실에 드러눕게 되면 하루하루의 가족의 일상생활이 엉망이 되고 만다. 더군다나 가족 중의 그 누군가에게 죽음이 찾아오고 나면 내 목숨 혹은 내 가족의 생명이란 것이 내가 지키고 내가 보존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 앞에서 절대자를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인생이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시편 107편은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다가 멸망한 후에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로 지내야 했던 참혹하고 암담한 날들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07편 4-7절에도 보면,

광야의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마르고 영혼이 피곤하고
근심과 고통 중에 있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고난을 묘사하고 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경험하였거나 6.25 전쟁과 가족들의 죽음과 마을 사람들 간에 이념으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살상을 경험해 본 이들은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1. 4후퇴와 같은 처절한 피난길을 겪은 이들 또한 전쟁의 고난과 그 충격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살아가다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나 환난이나 고통이나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고난의 배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시편 107편  25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시편 107편은 언제 어느 누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쓴 시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시편 기자의 고백 속에 지난 날 동족들이 겪은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 우연한 역사의 과정이 아니라 여호와의 명령으로 일어났던 광풍이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광풍이 원인이 되어서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바다 물결이 솟구쳐 덮쳤다는 것이다.

유다는 군사력이 약하고 바벨론은 군사력이 강해서 유다를 함락하고 예루살렘이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던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자 바벨론의 군대가 바다 물결처럼 유다 땅에 덮치고 예루살렘 성에 덮쳤다는 고백이다. 

고통 중에 부르짖는 그들.
사람이 평소에는 별로 ‘하나님. 하나님.’ 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살아가다가도 다급해지고 위급해 지면 하나님을 찾게 마련이다. 이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찾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겪고 있는  환난이나 고통이나 고난과 역경을 극복할 수 없을 때에 부르짖어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본문 시편 107편 28절을 보라.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라고 하였다.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다 고난과 고통과 시련과 역경과 환난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마련이다. 

지난 2001년 9월 11일에 미국 맨해튼 남부에 위치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이슬람 비행기 테러범들에 의해서 불바다가 되었다. 같은 날 워싱턴 DC의 국방부 건물인 팬터곤에도 항공기 자살 테러가 있었다. 

이 테러로 세계무역센터에서는 2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경제 계통의 우수한 자원들이 순식간에 참담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건물이 불바다가 되었다. 워싱턴DC의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에서도 순식간에 125명이 죽었다. 4대의 자살 테러범들에게 납치된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총 256명 전원이 사망했다. 뉴욕 소방관 343명이 죽고 뉴욕 경찰 84명이 죽었다. 뉴욕 항만국 직원 23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것은 전쟁에 버금가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재난이었다. 그 때 죽임 당한 3130명은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했을 때에 죽은 사망자 2330명보다도 800명이 더 많은 수자였다.

테러 직후 미국의 전체 영공이 봉쇄되었다. 당시 미국 영공을 비행 중이던 4,200여 대의 모든 비행기를 강제로 가까운 공항마다에 착륙시켰다. 미국을 오가는 모든 국제 항공선박도 차단됐다. 바다에서도 뉴욕 항이 봉쇄됐고, 여객선과 화물선이 대피한 뒤 항공모항 전단이 뉴욕 항에 입항했다. 전국에 비상휴교령이 내려졌다. 전쟁 분위기였다. 

태러가 일어나던 9월 11일은 화요일이었다. 5일 후인 9월 16일, 주일 예배 때에 평소에 텅텅 비던 미국의 교회들마다 예배자들로 가득 가득 차고 넘쳤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와 같은 찬송을 부르며 예배당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예배 드렸다.

911 테러 직후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국무 위원들을 비롯한 측근들은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 모여 후속 조치를 논의했다. 전 세계의 눈과 귀가 캠프 데이비드에 쏠려 있을 때였다.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합심해서 기도하였다. 존 애슈크로프트 법무장관이 피아노로 "Amazing grace"(나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405장)를 연주하자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 안보 보좌관은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고 주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구하며 찬송하였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목사의 딸로 성장한 믿음이 분명한 재원이었다. 그날 한 기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 무엇을 했나요” 그녀가 대답하기를 “사람들은 내가 기도할 때 탈레반을 쳐야 하는지, 후세인을 제거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나의 기도의 내용은 ‘이러한 결정을 내 뜻과 의지로 결정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소서’라는 한 가지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전해진다. 

창세기에 보면, 사라의 몸종 하갈이 여주인의 허락으로 아브라함의 아기를 임신하였다. 그러나 사라의 학대에 못 이겨서 임신 중인 하갈이 광야의 샘물 곁으로 도망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광야로 내어 쫒긴 적이 있었다.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놀리고 괴롭히는 현장을 목격한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충동질해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쫓았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던 하갈과 이스마엘은 내 쫓길 때 가지고 나온 가죽 부대의 물도 다 떨어졌다.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을 저만치 광야의 관목덤불 아래 두고는 이만치에서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하며 소리 내어 울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였다. 이스마엘은 이스마엘 대로 울고 있고 하갈은 하갈대로 울며 탄식하고 부르짖고 있었다. 

생각하여 보라. 그렇지 않나. 그 지경에서 하갈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어린 아들 이스마엘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고난 중에, 고통 중에, 시련 중에, 환난 중에, 근심 중에 누구에게 부르짖게 되는가.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을 포로 생활하던 유다 백성들은 그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부르짖는 나날을 지내며 연명하며 지내 왔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고난과 고통과 환난과 슬픔과 근심 중에 바알에게 빌지 말고 앗세라 상 앞에서 빌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금이나 은이나 돌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우상 앞에 빌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여호와.
믿음의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간구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시편 107편 28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광풍을 고요하게 하시고 물결도 잔잔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부르짖는 이들에게 평온함을 주셔서 기쁨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찬송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부르짖는 백성들을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신다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두려움, 질병,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부르짖는 길 말고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친히 교훈해 주셨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하여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惡行)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城)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城邑)을 치료(治療)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平安)과 진실(眞實)이 풍성(豊盛)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淨)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赦)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讚頌)과 영광(榮光)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福)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福)과 모든 평안(平安)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3:2-10)

우리 모두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되 우리가 바라고 소원하는 항구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 해 주시고 영원히 찬송 받으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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