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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미문의 기적(행3:1-10) 201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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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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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6-26 20:50 조회 9,742 댓글 0
 
                       성전 미문의 기적(행3:1-10)           2019. 6. 23


태어나면서부터 40여 년 간 걷지 못하고 구걸하며 지내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베드로가 믿고 선언한대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한 치유 받은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 앞에서 날마다 구걸하던 이 걸인은 하루 이틀 그 곳에서 지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 성전을 들고 나실 때에도 그 자리에 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정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고침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는 누구에게나 구걸하였고, 언제나 무언가 얻기를 구했다. 예수가 성전 미문 앞을 지나가실 때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더라면 이미 고침 받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후 승천하셨다. 약속하신 성령이 120여 성도들에게 임하였다.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지만 저들은 한 결 같이 정한 기도의 시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오르고는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제 구 시 기도 시간이었다. 우리의 시간으로 하면 오후 세시경이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고침 받고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이 걸인에 대한 내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시 읽고, 다시 묵상하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은혜가 되고 교훈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걸인을 주목(注目)한 베드로와 요한.
이 걸인은 어느 누구에게나 구걸하는 것을 일과로 하며 지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그였으니 구걸하기에 더욱 용이한 여건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면 세상 어디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동정심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3절에 보면, 그 날도 이 걸인은 성전에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가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하고 있었다.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최근에 날마다 성전에 기도하기 위하여 출입하였으니 이 걸인을 어제도 보았고 그저께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 날마다 무심히 지나치던 이 걸인을 오늘은 베드로 사도가 유심히 눈 여겨 보았다.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걸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를 보라.”

생각하여 보라. 역사란 그 무엇인가를 주목(注目)한 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온 것이다. 주목한다는 말은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보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나. 가정의 살림살이이든지 사회생활의 그 무엇이든지 다 마찬가지이다.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다 그러하다. 그 어떤 사안이나 시대적인 과제 앞에서 그 일의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보살피려는 이들이 역사의 공헌자들이 된다.
 
‘주목하다’를 영어로는 ‘pay attention’이라고 한다. 주의를 기울여 집중하여 살펴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걸인을 대할 때에 “너는 늘 거지로 살아 왔잖아. 너는 걸을 수도 없는 걸인이잖아. 너는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에 의해 이곳에 들려 왔고 여기서 남들에게 구걸하며 살아 온 거지이잖아.”이런 눈으로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에게 동전 한 두 개를 던져 주고 지나치고는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베드로는 달랐다. 베드로는 이 걷지 못하는 걸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세하게 그를 바라다보았다. 그를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를 보라.”

“우리를 보라”가 무슨 의미인가. 왜 베드로는 이 걸인에게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라고 요청한 것일까. 우리의 무엇을 보라는 뜻인가. 지금의 베드로는 과거의 베드로가 아니다. 성령 받은 베드로는 그의 가슴 속에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고 있었다. 예수의 심정으로 충만해 있었다. 예수의 영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넘쳐 나고 있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관심’(關心)과 ‘무관심’(無關心)의 차이는 매우 크다. 그 어떤 일이든 무관심한 이들은 매사에 별 관심 없이 그럭저럭 지나치고 만다. 그냥 벌어서 먹고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면 그뿐이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라도 관심을 갖고 주목하는 이들은 그 어떤 일이든지 예사롭지 않게 관찰하며 지낸다.
세월이 우리에게 대답을 주지는 못한다. 역사는 그 어떤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들에 의해서 변천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주목(注目)하는 힘이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양문 곁의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고 그 곁에 행각 다섯이 있었다. 그 안에는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등 수 많은 병자들이 누워서 물이 움직이길 기다리며 지냈다. 갈헐천이었던 것 같다. 소문에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인다고 들은 이들이 모여 든 것이다. 그 병자들 중에 38년된 병자가 있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 된 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기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 된 줄 아시고”라는 장면이 예수가 이 병자를 주목하신 장면이다. 38년된 병자가 예수의 주목을 받고 고침을 받고 늘 깔고 덮고 지내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예수의 주목을 받을 때에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모세 때에 열두 정탐꾼이 사십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 왔다. 보고 돌아 온 이들의 보고는 두 가지였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한결 같은 보고를 하였다.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거인인 아낙 자손을 보았습니다.”이처럼 열 명이 주목한 것은 점령하기 불가능한 상황들뿐이었다. 이런 내용을 전 해 들은 백성들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이 주목한 것은 다른 상황이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14:7-9) 사십 일 동안 같은 상황과 여건과 조건을 주목하고 돌아 왔으나 열 명의 정탐꾼들의 보고와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너무나도 달랐다. 우리가 아는대로 나중에 요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간 주인공은 하나님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바라다보며 사람도 새처럼 하늘을 날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이들이 있다. 사람이 비행기를 발명한 것이 1903년이니까 인류의 긴긴 역사와 비교하면 굉장히 오래 된 일이 아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행을 성공시킨 그 주인공인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는 오늘 날 감리교회의 전신인 미국 복음주의 연합형제교회의 주교의 아들들이었다. 저들 형제는 어려서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고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어려서 인쇄기도 제작하였고 자전거도 직접 제작하였다. 그걸로 돈도 벌었다. 저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주목한 것은 흰머리 독수리였다. 어떻게 나는지, 어떻게 방향을 바꾸는지, 어떻게 날아오르고 어떻게 다시 땅으로 내려앉는지를 주목하였다. 

1903년 12월 17일, 처음 비행은 12초였다. 2번째 비행은 59초 동안 243m를 비행했다. 저들 형제는 개발을 계속하여 5년 후에 5개월 동안 100회 이상을 비행하여 25시간 이상 공중에 떠 있었다. 이중 약 60번 정도는 승객을 태웠다. 1시간이 넘는 비행을 7번하였다. 결국 2시간 20분이라는 비행기록을 세웠다. 오늘 날의 최첨단 비행기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역사에 이처럼 남달리 새로운 원리에 주목한 이들의 피나는 노력과 수고의 열매를 우리는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받는 것도 이처럼 십자가의 대속의 원리에 주목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도 이런 면에서 보면 죄악에 빠진 인생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주목하시면서 일어난 구원의 시작이었다. 

사람이 말처럼 빠르게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할 수는 없을까. 사람이 바다 속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이동할 수는 없을까. 사람이 사람의 몸을 칼로 째서 열어 보지 않고도 오장 육부를 손바닥 드려다 보듯이 볼 수는 없을까. 이런 남들이 하지 않는 생각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그 어떤 일에 지혜를 모으고 관심을 집중해서 주목한 이들이 과학과 의학과 문명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이 걸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때에 베드로 사도는 달랐다. 이 구걸하는 걸인에게 주목하였고 그에게 말을 건네었다. “우리를 보라.”이렇게 건넨 말 한마디로부터 기적은 시작되었다. 

우리의 무엇을 보라는 말일까. 지금의 베드로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다. 이전에 비겁하게 처신하고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도망 다니고 숨고 하던 베드로가 아니다. 

지금의 베드로는 담대한 베드로, 성령 받은 베드로, 하늘로부터 능력이 덧입혀진 베드로, 예수의 부활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 하는 전혀 다른 베드로가 되어 있었다. 지금 베드로의 마음은 뜨겁고 식지 않는 복음 전파의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 곁에서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는 장면을 보아 왔다. 예수의 하루 일과 중에 각색 병자들이 고침 받는 치유의 기적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그런 베드로의 마음속에 이 불쌍한 거지를 바라 볼 때에 “만약 주님께서 이 걸인을 주목하여 보셨다면 얼마든지 고쳐 주셨을텐데.”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역사하시면 이 걷지 못하며 구걸하며 지내는 이 걸인에게 고침 받는 은혜가 임할 수 있을텐데.”하는 치유에 대한 열망이 그의 마음에 불처럼 일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 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베드로의 “우리를 보라”하는 이 대화의 시작은 장차 주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행하실 수많은 기사와 표적들의 가능케 하는 새로운 출발이 되었다.

지금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걸인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을 건네는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베드로, 이미 예수 부활 복음을 전파하여 3,000명 이상이 회개하고 세례 받는 현장의 중심에 있던 베드로이다. 그런 베드가 여전히 기도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가다가 이 걸인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모르드개는 부모를 일찍이 잃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안에서 존귀하게 쓰임 받을 에스더의 나중을 주목할 줄 알았던 시대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에스더도 위대하지만 불행한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내야 했던 고아가 된 에스더를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으로 주목했던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관심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사울 임금은 다윗을 제대로 몰라보았다. 장차 하나님께서 다윗을 얼마나 존귀한 역사적인 인물로 쓰실 것인지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사울은 당장 자기의 눈앞에서 다윗이 없어지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왕자 요나단은 달랐다. 요나단은 아버지 임금 사울의 생각과 달랐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면모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한 사람. 이 불쌍한 나날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구걸하며 살아가던 이 걸인을 베드로는 눈여겨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우리를 보라.”


무엇을 얻을까 구걸하던 걸인.
그 때까지만 해도 이 걸인의 관심은 구걸하는 것뿐이었다. 스스로 경제 능력이 없으니 당연히 구걸이라도 하여야 했을 것이다. 가난과 굶주림을 경험해 본이들은 가난이 무엇이며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안다. 헐벗어 본이들은 한 벌 옷의 소중함을 안다. 헐 벗이 본이들은 두 벌 옷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안다. 다 떨어진 신발 한 켤레로 버텨 본이들은 맨발로 살지 않고 신발을 신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안다. 

아프리카 오지인 남수단에서 의료 선교를 하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를 우리는 안다.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물 영화로 세상에 더 자세하게 알려진 인물이다. 그 장면에 보면 한센 병 환자 아이들을 위해서 타이어를 잘라서 샌들을 만들어 신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 대개의 사람들은 맨발로 살아간다. 배고프게 살아간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배고프고 굶주리고 헐벗는 열악한 환경에서 운명처럼 연명하며 하루하루 별 소망이 없이 살아간다. 의사였던 그는 그 곳의 그런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부도 가르치고 성경도 가르치고 악기도 가르치고 노래도 부리게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티셔츠 한 장이 고맙고 반바지 하나가 귀하다. 신발을 신을 수 있다는 것은 어색하리 만큼 낯선 축복이다. 질병과 장애와 가난이란 그런 것이다. 

5절에 보면, 성전 미문 앞에 있던 이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대개의 세상 사람들은 마치 이 걸인처럼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더 먹을까 무엇을 더 마실까 무엇을 더 입을까” 그런 관심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나. 

어쩌면 이런 모습은 부자라도 그렇다. 권력자라도 그렇다. 아무리 잘 난 사람,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소유에 집착하며 살아가면 그렇게 되고 만다. 더 배우고, 더 벌고, 더 모으고, 더 쌓고, 더 취하고, 더 누리고, 더 건강해지고, 더 오래 살고, 더 멋있어지고, 더 예뻐지고, 더 고와지고, 더 나아지고, 이처럼 끝이 없는 더... 더... 더...를 요구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소유에 대한 집착의 수렁이다. 

물론 국가가 발전하고, 기업이 발전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이 소유에 대한 집착에 빠져 들기 시작하면 천하를 다 가져도 만족스러워 할 사람은 없다. 

물론 가난한 이에게 있어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쓸 것을 구하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과도 같은 처절한 생존의 문제이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구걸하며 살아야 하고 걸을 수조차 없는 형편이다. 이 사람은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나이가 40여세쯤 되었다고 했다. 사십 여 년 동안 걸어 본 적이 없는 상태였다. 육체적으로 허약하고 경제적인 능력도 없이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는 신세였다. 답답한 처지에 그 누군가가 그를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까지 데려다 주니 거기서 날마다 구걸하며 몇 푼을 모아서 끼니를 해결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국제식량농업기구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북한의 식량 사정은 지난 10년 동안에 최악이라고 한다. 북한 인구의 40%에 가까운 1010만여 명이 요즘 식량 부족 상태를 겪고 있다고 한다. 만약에 인도적 차원의 식량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올 여름을 나기 위해서 굶주리는 인구는 수백만 명이나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가난과 굶주림은 언약의 조상 야곱과 그의 가족 70여명으로 하여금 애굽에까지 먹을거리를 찾아서 내려가게 하였다. 이처럼 가난과 굶주림과 배고픔을 겪어 본 이들은 가난과 굶주림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6월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었다. 난민의 날은 2000년에 유엔이 정한 날이다. 지난 해 말 현재 지구상에는 7,080만 명 이상의 난민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저들은 전쟁, 박해, 폭력, 종교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자신들의 나라에서 살아 갈 수가 없어서 난민 신세가 된 이들이다. 그들 중에서 3분의 2는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남수단, 미얀마, 소말리아 등 5개국 출신들이다.

장애나 질병이나 가난이나 배고픔이란 그런 것이다. 더군다나 억압 받거나 학대 받거나 무시 받거나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처절한 일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수도 서울에도 그런 이웃들이 없지 않다. 꽤 많다. 예수는 이 땅의 그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되 회개 하고 죄 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온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선물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된 기적.
걸을 수 없는 이의 소원은 걷고 뛰는 것이다. 말 못하는 이의 소원은 시원하게 말 좀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못 듣는 이의 소원은 속 시원하게 남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이야기 하며 살아 보는 것이다. 앞 못 보는 이들의 소원은 세상의 밝은 빛을 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장애란 그 어떤 부위의 장애이든 한 사람의 생을 처절하게 만들어 버린다.

최근에 이재서(1953-) 박사가 총신대학교의 신임 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과거의 강영우 박사처럼 청소년기 때에 갑작스럽게 앞을 못 보게 되었다. 절망 중에 죽으려고도 수 없이 했다. 그런 그가 절망의 구덩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시각장애인 학교에 다니던 고등부 시절이던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흥 집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받았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자신과 같은 장애우 사역을 위해서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미국에 유학해서 복지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미 신학대학 3학년 때에 ‘한국 밀알 선교단’을 조직하였다. 1979년에 시작한 그 선교단의 조직이 커져서 오늘 날은 21개 나라의 100여 곳에 지부와 시설을 두고 있다.  세계적인 장애인 선교 단체로 발전해 왔다. 비록 앞을 못 보게 되었지만 생의 목적을 새롭게 깨달은 후부터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참고 견뎌 내다보면 나에게 고난 속에 살아가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 사명을 향해서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다”고 말했다.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권세가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의미가 뭐라고 생각되나.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자라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자라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 걸을 수 없던 불쌍한 거지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권세가 있다. 능력이 있다. 치유의 은총이 임한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찬양이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날 향하여 달려드는 원수란 어떤 존재인가.
“너는 걸을 수 없어, 너는 일어 설 수 없어, 너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렇게 속삭여 오는 것이 원수의 계략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무엇인가. 지금 베드로는 무슨 믿음, 무슨 생각이 들었기에 이 걸인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말을 건넨 것일까. 베드로의 말을 들은 이 걸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자 베드로가 나서서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하였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그 순간에 기적이 일어났다. 이 걸인의 발과 발목에 그 즉시 힘이 들어갔다. 힘을 얻었다. 그래서는 뛰어 서서 걷기 시작하였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가 걷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였다.

이 기적 사건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성령 강림 이후에도 여전히 성령의 임재와 변화에 대하여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던 이들이 성전 안에 가득하였다. 그들 중에는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과 공회의 의원등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고착 상태에 있었다. 복지부동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늘 구걸하던 이 장애인을 벌떡 일으켜 세우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불신앙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고, 의심의 자리, 율법의 자리, 남을 비판하고 판단만 하는 자리, 소극적인 자리, 구경꾼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고침 받고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길 원하신다. 고침 받은 자답게, 힘을 얻은 자답게 간증하며 헌신하며 충성된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다. 받은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 두는 인생이 아니라 주인 오실 날을 기다리며 충성되게 일하는 다섯, 두 달란트 받은 자처럼 살아가길 원하신다. 약해도 부족해도 네게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충성된 종들로 살아가길 기대하신다. 

우리 각 사람이 영적으로 주저 앉아서 걷고 뛰지 못하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걷고 뛰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신앙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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