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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예수께서 하신 대답(막11:20-25) 2019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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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2-04 06:46 조회 10,649 댓글 0
 
                     예수께서 하신 대답(막11:20-25)       2019. 2. 3


올해는 4월 14일이 종려주일이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보시고 저녁나절에 베다니에 나아가서 주무셨다. 그 다음 날 아침에 길을 가시다가 시장하여 무화과 나무의 열매를 구하였다. 열매가 없자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날 예루살렘에 다시 들어가신 예수는 성전에서  매매 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어찌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고 책망하셨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하고 꾀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다. 날이 저물자 예수와 제자들은 다시 성 밖으로 나가서 그 밤을 지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지나다가 보니 어제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발견하였다. 

제자 베드로는 어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하고 상황을 아뢰었다. 그 날 아침에 예수께서 하신 세 가지 말씀이 오늘 본문이다. 
   

하나님을 믿으라.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말라 죽은 것을 아뢰자 예수께서 하신 대답이 이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예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맞다. 모든 생명체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다.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들과 배로 기는 것들과 물속의 물고기에 이르기 까지 모든 생명체의 생사화복이 주의 손 안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새끼 까마귀라도 먹이신다. 하나님은 들풀이라고 입히신다. 

우리는 까마귀를 별 볼일 없는 새로 여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까마귀를 예를 들어서 교훈하셨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눅12:24) 열왕기 상 17장에 보면 극심한 가뭄의 때에 선지자 엘리야는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서 지냈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동원하셔서 엘리야에게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날라다가 주어서 먹게 하셨다.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어찌 신앙생활이 가능할까. 우리가 알고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누가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나. 누가 지구를 이렇게 아름답게 지으셨나. 공중의 그 다양한 새들과 땅 위를 뛰고 달리는 수많은 동물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물속의 그 다양한 종류의 크고 작은 물고기는 누가 다 만들었을까.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는가. 진화되었다고 믿는가. 원숭이를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래 맞아 저것이 사람의 조상 맞아.”이런 생각이 자꾸만 드나.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 호흡하며 맥박이 멈추지 아니하게 하시며 한 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생명의 공급자가 누구이신가.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인가. 내 스스로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나. 우리는 누구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가. 우리나라의 명산마다 돌을 다듬어 만들고 황금 물을 입혀서 눈이 부시게 번쩍거리게 만든 우상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우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하며 3000배라도 절하며 빌면 그것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할 수 있는가. 

노아가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면 남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그 긴긴 세월동안 산꼭대기에 방주를 건설하였겠나. 노아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믿지 못했다면 방주 안에 들어가서 홍수 심판의 날과 홍수 후에 전개될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나갈 용기가 있었겠나. 

아브라함에게 그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의 연세 75살에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날 수 있었겠나.“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12:4)라는 말씀이 참으로 대단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상 숭배자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우상 숭배하며 살던 아버지 데라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늙어가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를 찾아와 만나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 수 있었을까. 이것이 믿음의 세계이다.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비롯한 다섯 왕들로 연합한 군대의 침략을 받고 붙들려 갔던 조카 롯을 구출해 났다. 연세 많던 아브라함에게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 두려운 경험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였다.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의 반응은 시큰둥하였다. 그래서는 “주께서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지금 자식도 없고 그래서는 늘 곁에서 그를 돕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로 하여금 상속자가 되게 하려고 한다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는 이런 말을 들으신 후에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이끌고 나가셨다. 하늘의 뭇별들을 쳐다보게 하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고 축복해 주셨다. 그 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다시 분명해졌다. 그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분명한 약속을 더  해 주셨다.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약속과 더불어 ‘애굽 강가에서 큰 강 유브라데’에 이르는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언약해 주셨다. 

4천년이 지난 오늘 날 오대양 육대주의 인간 역사를 움직이는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힘을 이룬 가문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전 세계에 1600만 명 정도이다. 저들은 미국 땅에 570만 명 정도가 산다. 1948년에 건국된 이스라엘 나라 안에 550만 명 정도가 산다. 그 외에 프랑스 영국 독일 호주 캐나다 러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지에 흩어져 산다. 

하나님은 저들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된 민족으로 붙들어 쓰셨다.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런 복이 입증되는 삶을 살아가게 하고 계신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동족인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인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와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앞장서서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저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모세의 율법은 깨달아 알면서도 율법과 선지서의 완성으로 보냄을 받으신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라 봤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가 말랐다. 뿌리까지 마른 무화과나무를 보고 질문하는 베드로의 질문 앞에 예수께서는“하나님을 믿으라”는 대답으로 대답하셨다. 맞다. 생명과 사망, 화와 복, 축복과 저주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면 나라라도 민족이라고 그 생명을 보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국가의 경계를 정하시고 민족의 흥망성쇠를 다루시는 전능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처럼 귀한 것은 없다. 이 세상에 우리가 영원히 믿고 의지할 그 무엇이 있나.

연세 들어가시는 어른들은 안다. 십대 이십대 때에는 얼굴에 크림 하나 로션 하나 바르지 않아도 피부가 탱탱하고 희고 뽀얗고 싱싱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 젊은 날의 기운이 다 어디로 갔다. 그 곧던 허리의 기운이 다 어디로 사라졌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나. 영원히 믿을 것이 있나. 젊음인가. 힘인가 미모인가. 재물인가. 돈인가. 땅 문서인가. 사회의 지위와 명예와 권세와 인기와 그 자랑하던 그 무엇인가. 인간 만사가 일장춘몽처럼 사라져 가지 않는가. 그러므로 영원히 우리가 믿을 분은 오직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뿐이시다. 

보아라. 역대 대통령 두 사람, 역대 대 법원장, 현직 도지사 두 사람 등등 줄줄이 보리 굴비 엮이듯 엮여서 구치소에 들어가 앉아 지내지 않는가. 이 세상에 영원한 권력이 있나. 영원한 명예가 가능한가. 뭘 믿고, 뭘 자랑하고, 뭘 사모하며 살고 싶나. 

찬송가 1장의 가사처럼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아멘”이것이면 족하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외에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그대로 되리라.
23-24절은 기도의 태도, 기도의 자세, 기도의 내용, 기도의 원리, 기도 응답의 비결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기도하느냐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본문의 기도에 대한 교훈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가는 것이다. ‘그대로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이는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에서 골고루 입증되어 왔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셨다. 예수의 제자들은 나가서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병을 고쳤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셨다. 각 동네에 둘씩 짝 지어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저들이 기뻐하며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18-20)

그렇지 않나.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며 이러 저러한 일을 경험한다. 그러나 기적 중의 기적이요 은혜중의 은혜는 우리 이름이 하나님의 나라에 기록되는 그것이 아닌가. 요한복음 3장 16절대로 하나님이 보내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멸망치 않고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는 그대로 되는 축복 중의 축복이요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닌가.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무엇인가. 왕인가. 대기업가인가. 별을 넷 단 장군인가. 수 만명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연예인인가. 물론 좋다. 우리교회의 성도들이 각 분야에서 존귀해지고 유명하고 유력하게 되길 바란다. 자녀 손손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게 대답은 아니다.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만다. 

예수사랑교회의 지난 9년을 뒤 돌아 보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한 결같이 불가능하게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9년 동안 물 위를 걸어오듯 날마다 해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며 지내왔다. 우리는 새로운 꿈의 공동체를 이루고 별의 별 은혜를 나누어 왔다. 별의 별 선한 일을 계속해 왔고 계속해 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가능하게 이루시는 수 많은 일들을 경험하며 주를 따랐다. 예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눅11:23)는 약속의 말씀이 입증되는 신비와 기적을 보며 여기까지 왔다.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시지 않았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눅11:24)

농사해 본 분들은 안다. 도심 생활 중에서라도 씨앗을 흙에 뿌려 본 이들은 안다. 화분에라도 씨앗을 심어 보면 안다. 배추 씨나 무씨를 심어 놓고 나면 얼마 후에 싹이 나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속이 꽉 들어 찬 탐스런 배추로 자라난다. 팔뚝 같은 무가 자라난다. 너무 신기하지 않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삽 십 배 육십 배 백배”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파종의 원리이고 식물의 원리가 아닌가. 

아들딸을 키우는 일들도 그렇다. 부모가 아들딸의 장래를 아나. 우리의 어린 자녀들의 장래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지난주에 하림의 김홍국 회장 일화를 다시 접했다. 그는 장로이다. 늘 기도하며 생활하시는 90이 넘으신 노모가 생존해 있다. 전라북도 익산 시골 출신인 김홍국은 10살 때 외할머니가 주신 병아리 10마리를 키워 장에 갔다 팔았다. 10마리의 병아리가 100마리가 되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새벽 같이 일어나 개구리를 잡아다가 끓여서 방앗간의 쌀겨를 얻어다가 버무려서 사료를 만들어 먹여 키웠다. 오늘 날 하림은 50개가 넘는 계열사에 10조원이 넘는 기업을 이루었다. 어려서부터 15리 길을 새벽마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 닭과 돼지 먹이거리를 실어 날랐다.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탐심으로 하면 안 된다. 욕심으로 하면 안 된다.  선한 마음으로 하여야 한다. 베푸는 마음으로 하여야 한다. 착한 목적으로 해야 한다. 내가 벌어 내 배 채우는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공부를 하든,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무역을 하든 무슨 생산업을 경영하든 무슨 유통업을 하든 수입을 하든 수출을 하든 그 바탕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마음 가짐이 있어야만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리라는 태도가 흔들리면 안 된다. 내가 벌어 내 입 겨우 채우는 그런 인생관 말고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려는 선교의 열정, 전도자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 

공부이든 연구이든 장사이든 직장생활이든 사업이든 그 무엇이든 뭘 하나를 하든지 하나님 안에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서 뭘 해 보겠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서 살아 보겠다는 것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대로 되리라’는 바탕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의 언약 안에서만 보게 되는 간증이고 증거인 것이다. 

주를 떠나면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처럼 되고 만다. 주께로 돌아 오고 아버지의 집으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그대로 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법이다. 아멘 할렐루야


용서하라.
그리고 이어서 해 주신 말씀이 용서에 관한 말씀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딸 삼아 주셨는데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춤을 추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일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라면 서로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나. 내 자식을 죽인 원수라도 용서하고 내 가족을 맨바닥에 떨어지게 한 사기꾼이라도 용서하고 그 어떤 크나 큰 죄와 악이라도 용서 못할 것이 어디 있겠나.

본문 25절을 주목해 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였다. 맞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마태복음 6장 9절 이하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다. 그 내용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 앞부분에 말씀하신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이란 말씀은 ‘불화와 다툼이 있거든’이란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왜 불화하며 어째서 다투며 살게 되나.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가족 간에 형제자매 간에 부부 간에 동서 간에 고부간에 서로 용서하지 못하면 집안 꼴이 뭐가 되겠나.

가족들 관계만 그런가.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렇지 않나.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집 나간 둘째 아들 비유가 무엇인가. 무한하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해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가. 유산 받아 남의 나라에 가서 주색잡기 즐기고 허랑방탕하게 살며 빈털터리가 되어 거지가 되어 돌아 온 아들을 누가 반겼나. 누가 용서했나.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가. 

하나님은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동산 나무 숲 사이에 숨어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라도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해 입히셨다. 

주를 믿는 성도라면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라면 용서하며 살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 속이는 자요 거짓말 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요한 1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19-21)

마태복음 5장 2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렇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화목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 서로 덮어주고 서로 가려 주고 서로 눈 감아 주고 서로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체험한 성도의 마땅한 도리이다.

용서하며 사는 가운데 천국을 미리 체험하고 맛보고 누리는 은혜의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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