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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송축하는 자의 기도(시26:1-12) 2018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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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10-07 22:21 조회 11,217 댓글 0
 
              여호와를 송축하는 자의 기도(시26:1-12)    2018. 10. 7
   
 
시편 26편은 ‘비탄시’(悲嘆詩)라고 부른다. 다윗의 기록인 시편 26편의 내용을 대하면 누구나 다윗의 외로운 모습을 만나보게 된다. 그러나 다윗은 사면초가와 같이 둘러싸인 대적자들 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며 살아가는 굳건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윗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쓰러트린 후에 이스라엘 안에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대적자들의 위협이 끊임이 없었다. 사울 임금이 그러하였고 사울 곁에 끝없이 등장하는 정적들의 위협이 그러하였다. 

나중에는 아들 중에 그 잘난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는 모반 사건도 겪어야 했다. 다윗은 맨발로 왕궁을 벗어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 허리를 돌아 도피하는 기약 없고 정처 없는 날들도 겪어야 했다. 

그 후에는 세바라는 자가 일어나서 전국적으로 추종세력을 규합하고 임금 다윗을 대적하였다. 사무엘 하 20장에 나오는 사건이다. 사무엘하 20장 1절은 세바를 ‘불량배’라고 하였다.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는 “다윗 왕을 따라 봤자 무슨 분깃과 유업이 있겠느냐”며 백성들을 선동하였다. 생각보다 세바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커졌고 유다 사람들만이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다윗을 따를 뿐 온 나라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다윗은 주변의 신하들을 모아 놓고 “세바의 반역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보다 더 크게 다윗의 권위를 대적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즉시 요압 장군과 아비새 장군이 나서고 군대가 동원되어 세바를 추격하기에 이르렀다.  

세바는 그를 따르는 주요 세력과 함께 아벨 성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요압의 군대는 아벨 성 밖에 급하게 토성을 쌓고 세바를 척결하기 위한 전쟁을 계속하였다. 아벨 성에 숨어들어 가서 머무는 세바로 인해서 아벨 성이 불바다가 될 지경이 되었다. 이 모든 전쟁 상황을 불안하게 여긴 아벨 성 안의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큰 소리를 외치며 요압 장군을 만나기를 청하였다. 지혜로운 여인은“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느냐”고 애원하며 아벨 성이 세바와 그의 세력으로 인해서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요압 장군은 다윗 왕을 대적한 세바만 잡을 수 있다면 언제라고 평안히 아벨 성에서 물러가겠다고 약속하였다. 요압 장군을 만나고 돌아 간 지혜로운 여인은 그의 지혜를 믿는 백성들과 함께 성 안에 들어가서 세바의 머리를 베어 성 밖으로 내어 주었다. 베어낸 세바의 마리를 전달 받은 요압 장군은 나팔을 불어서 전쟁을 끝내고 따르던 군대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들의 성읍, 자기들의 장막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요압 장군은 목이 잘려 나간 세바의 소식을 임금 다윗에게 전하였다.  

시편 26편의 4-5절에 보면 다윗은“허망한 자, 간사한 자, 행악자, 악한 자”라고 반복하여 언급하는 대적자들로 인하여 늘 불안하고 초조하며 마음이 놓이지 않는 날들을 지낸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4-5절의 내용을 대하다 보면 마치도 시편 1편의 악인에 대한 묘사와 같은 내용들을 대하게 된다. 삼천년 전인 다윗의 때나 오늘 날이나 세상은 별 반 차이가 없다. 세상은 간사하고 악한 자들로 넘쳐 난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전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가고자 하여도 세상이 나를 그냥 내 모습 그대로 내어 버려두질 않는다. 

그래서 하는 말 중에“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세상에는 생각보다 악이 가득하다. 그야말로 악이 관영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노아의 때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노아의 때에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과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그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을 지어 놓으신 것을 한탄하셨고 마음에 근심하셨다. 

우리가 노아, 노아 하는 이유는 그런 당시에 세상 사람들 중에서 노아는 달랐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였다.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일을 그대로 준행하여 방주 건설하는 일을 완성하였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보면 노아의 신앙을 정리한 말씀이 나온다.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인 홍수 심판 예고를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였다.
노아는 홍수 심판 중에 아내와 세 아들들과 세 며느리를 포함한 여덟 식구의 모든 가족을 구원하였다. 
노아는 세상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똑똑히 목격하고 체험하였다.
노아는 그 결과 믿음을 따르는 의(義)의 상속자(相續者)가 되었다. 여기 히브리서 11장 7절 끝에 나오는 ‘의의 상속자’라는 말씀이 의미심장한 교훈의 말씀이다. 

노아의 믿음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 장에 기록된 믿음이듯이 다윗 또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시편 26편에서 고백하는 다윗의 믿음은 무엇인가. 12절에 보면 다윗은 “무리 가운데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26편 시편 전체의 내용은 다윗의 기도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다. 하나님을 송축하며 기도하는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나를 판단하소서.
다윗 시대에 다윗 주변의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떠나서 제 마음대로 행하고, 제 고집대로 살아가며, 자기의 힘과 능력과 지위와 권세를 의지하며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었을까. 그와 같은 모습은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대개의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의에 붙잡혀서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과 공로를 의지하고 살아가려 한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다. 다윗은 완전한 행실과 온전한 믿음으로 살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 왔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항하였사오며”라는 1절의 고백은 다윗이 완전한 자라는 표현이 결코 아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자가 있는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왜 다윗이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것일까. ‘완전함’이란 말은 ‘성실하다. 순전하다.’란 뜻이다.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허물과 부족함이 많은 인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절대 의지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다. 

열왕기하 20장 3절에 보면 히스기야 임금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한 기도 내용이 나온다.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항하게 한 후에 “여호와의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하고 기도하였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그러하지 않나. 서로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마음과 생각과 감정이 진실하게 통하는 사이에는 거리낄 것이 그 무엇이 있겠는가.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시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의 내용의 주인공과 같은 그런 사람 말이다. 대학로에 가면 시비에 이 내용이 새겨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사람이 그리워지고 찾고 싶고 만나고 싶듯이 하나님도 하나님만 완전히 의지하며 흔들림이 없이 주 만 따르는 그런 믿음의 사람을 택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길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새끼 나귀를 내어 준 베다니 마을의 나귀 주인이 그런 사람이었다. 예수의 머리에 향유 나드 옥합을 깨트려 부어드린 마리아의 믿음이 그러하였다. 가롯 유다는 주를 팔아 버리고 베드로를 비롯하여 나머지 11제자는 십자가 처형장으로 끌려가시는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다 도망가 숨어 버렸다. 예수는 혼자 외롭게 붙잡혀 온갖 고난을 다 당하셨다. 조롱하고 예수의 얼굴에 침 뱉고 손바닥을 때리고 따귀를 치고 옷을 벗겨 제비 뽑았다. 예수의 잔등에는 수도 없이 채찍질이 계속되었다. 피투성이가 되신 예수는 십자기를 어깨에 메고 가다 넘어지고 쓰러지며 골고다 언덕을 향하였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였지만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때로는 억지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은혜이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의 시체를 몇 시간 후면 시작될 안식일 이전에 헤롯의 허락을 받고 받아 내려 자기의 묘실에 장례한 아리매대 사람과 요셉과 관원 니고데모의 믿음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주를 의지하던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의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신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맨발로 왕궁을 벗어나 피신 길에 올랐다.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울면서 임금 곁을 지켰다. 생각하여 보라. 어느 날 갑자가 임금의 모습이 이렇게 초라해 진 것이다. 그런 다윗이 계속되는 피난 길 중에 도착한 곳이 마하나임이란 곳이었다.

사무엘하 17장 27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소바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무려 열 가지의 먹을거리를 바리바리 꾸려 가지고 나왔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바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그 때가 어떤 때인가. 압살롬을 따른 자들과 다윗을 좇는 자들이 서로 긴장관계를 가지고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압살롬의 세력들은 다윗 왕을 죽이고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정권을 장악하길 원하던 때였다. 만약에 소바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한 일이 압살롬의 세력들에게 알려지는 날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저들을 죽여 없애고 말 것이다. 그런데 저들이 감히 생명을 건 그런 일을 한 것이다.

사무엘하 17장 29절에 보면 “이는 그들 생각에”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 ‘생각’이란 것이 무엇인가. 이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복음이며 구원의 시작이다. 

예수 때에 벳세다 광야의 그 수많은 무리가 먹을 것이 없었다. 마가복음 8장 2절에 보면 저들이 광야에서 예수와 지낸지가 사흘째이고 먹을 것은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 때 저들 무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는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는 말씀과 함께 말씀을 이어 가셨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 놓고 감사하며 축복 기도를 하신 후에 나누어 주게 하셨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 생각, 그 마음, 그 불쌍히 여기는 그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건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말 한마디를 해도 덕이 되게 하고 힘이 되어 주고 격려가 되고 용기가 생기게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반면에 사사 건건 시시비비를 가리고 맥이 빠지게 하고 힘이 쏙 빠져나가게 하고 진이 빠지게 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 말고 그런 이들이 뒤섞여 있는 교회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가 더러 있다.

우리말에“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진실한 마음이 담긴 말 한마디의 힘은 그런 것이다. 하물며 지금 왕궁을 벗어나 도망 다니고 숨어 지내고 도피하는 하루하루 불안하고 초조하고 답답하고 초라하고 맥이 빠지는 불확실한 날들을 지내고 있는 다윗 왕과 그 곁의 무리들을 불쌍하게 여긴 세 사람, 소바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무려 열 가지의 먹을거리를 바리바리 꾸려 가지고 나왔다. 그냥 돈 몇 푼을 건넨 것이 아니다.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 온 것이다. 감동적이지 않나. 눈물 나지 않나. 

다윗의 곁에는 언제나 칼과 창을 품고 언제나 다윗을 죽여 없앨까 하는 대적자들이 적지 않았다. 반면에 이처럼 다윗을 진심으로 위하고 마음을 쏟아 사랑하고 존경하며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돌보고 챙기는 백성들이 나라 안에 처처에 가득하였다. 그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내 뜻과 양심을 단련(鍛鍊)하소서.
단련한다는 말은 귀금속을 제련하고 불순물을 제거하고 은과 금을 순도 높게 분리하는 것을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살피고 시험하셔서 다윗의 뜻과 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지 돌아보아 달라고 기도드리고 있다.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 
주께서 우리게 명하시니 그 명령 따라서 살아가리”

하는 218장 찬송의 가사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사람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생각을 아신다. 하나님은 한 평생 한 결 같은 믿음으로 주를 경배하며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을 주목하신다. 
사도 바울의 때에 바울 곁에는 그런 감동적인 동역자들이 적지 않았다. 바나바, 디모데, 디도, 마가, 실라, 누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등이 그러하였다. 

압살롬의 세력이 힘을 잃고 임금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 왕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때에 바르실래가 요단 강가로 임금 다윗을 배웅하기 위해서 나왔다. 바르실래가 누구인가. 얼마 전에 다윗 왕과 그 일행들을 불쌍히 여겨서 얼마나 시장하고 곤하고 목이 마를까 하고 열 가지의 먹을거리와 침상과 대야를 챙겨들고 다윗을 찾아 나섰던 소바와 마길과 또 한 사람이 바르실래였다.

그 당시 바르실래의 연세는 80세였다. 생각하여 보라. 80된 노인이 왜 다윗 왕과 그 일행을 돌아 본 것일까. 세상을 80년 정도 살았으면 이스라엘 백성의 한 사람으로 살면서 사울 왕 때에 나라 안팎에 일어났던 역사의 교훈을 가슴에 품고 지금 임금 다윗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무슨 뜻인지 역사적인 교훈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찾아 나섰던 노인이 아니겠는가. 

예루살렘을 향하던 다윗은 요단 강 가에서 다시 만난 바르실래에게 예루살렘에 함께 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본인의 나이를 말하면서 아들 김함이나 왕의 곁에서 충성스럽게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세월이 흘러 갔고 다윗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다윗은 죽을 날이 임박한 것을 알고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였다. 그 유언 내용 중에 열왕기상 2장 7절에 보면,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고 유언하였다. 

바르실래 라는 이름의 뜻은 ‘강철심장’(iron heart)이란 뜻이다. 바르실래는 연세 80이 되도록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으로 물에 물탄 듯이 술에 술탄 듯이 세상을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어간 촌 노인이 아니었다. 그가 늘그막에 죽으면 죽으리란 마음가짐을 갖고 침상과 대야와 무려 열가지의 비상 식량을 골고루 충분하게 준비해 가지고 왕 다윗과 그 주변 사람들을 찾아 간 것이다. 이것은 전쟁 중에 하늘이 내려 주는 양식과 같은 은총의 먹을거리였다. 임금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반역해서 숨어 다니고 도망 다니던 시절에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먹을거리를 챙겨다 대며 죽기를 각오하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80노인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을 비롯한 바르실래의 아들들의 나중을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사람도 사람과 의리를 지키거늘 하물며 인간의 생각과 느낌과 의지를 아시고 판단하시는 주께서 다윗과 같은 주의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시고 싶지 않으셨겠는가.

다윗은 고백한다. 3절에,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합니다.” 6절에, “내가 무죄함으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닙니다.”여기 ‘손을 씻고’라는 말은 제사장들이 성막과 성전에서 주를 섬기기 위하여 물두멍 앞에서 정결하게 자신의 손을 씻는 모습을 언급한 것이다. 다윗은 마치도 성막 안에서 주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손을 씻고 제단에 두루 다니며 주를 섬기듯이 주님을 믿고 따르며 섬기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7-8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다 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계시는 집을 내가 사랑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머무르는 그 곳을 내가 사랑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감사하며 높이며 주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지를 만방에 전하며 살고 싶어 하였다. 


나를 속량(贖良)하시고 은혜를 베푸소서.
다윗은 자기 주변에 사악하게 살아가고 뇌물을 즐겨 하며 생명을 해하려 하는 살인자들로 득실대는 열악한 환경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다.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다윗의 마음에도 언제나 불안은 있었다. 왜냐하면 마치도 벌떼처럼 다윗의 목숨을 빼앗아 삼키려고 달려드는 무리들이 끊임이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9절에 이런 기도를 드린 것이다.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과 같은 거짓과 악이 가득하고 죽음의 세력과 이단과 사이비의 미혹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속량의 은혜를 입혀 주셔서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이 땅에서부터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존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실 분은 오직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뿐이시다. 

올해도 남은 계절, 그리고 평생토록 주님의 속량하시는 죄 사함의 은총과 구원하시는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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