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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예수께 합당한 자(마10:34-39) 0417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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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4-17 17:44 조회 20,815 댓글 0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이다. 평화의 왕으로 호산나 찬미 가운데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다. 그리고 며칠 후에 유월절 양으로 붙들리셔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삼일 만에 빈 무덤만 남겨 놓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다른 종교에서도 의와 선과 진실은 강조한다. 악과 불의와 거짓을 설파하는 종교는 이 땅에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부활 신앙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종교도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소개할 수 있는 종교란 없다. 예를 들면 불교의 극락세계라는 것은 가상의 세계이다. 불교의 윤회(輪回)관을 들어 보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어떻게 사람이 다음 생에 소나 돼지나 말이나 혹은 더 형편없는 짐승으로 윤회하여 태어난다는 말인가. 다음 생애에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더 나은 신분의 인간으로 혹은 현재보다 더 못한 신분으로 환생할 수 있다는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불교의 시간관이란 돌고 도는 윤회적 시간관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적인 시간관이다. 시작과 끝이 있다. 처음과 나중이 있다. 알파와 오메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일생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번 왔다가 한 번 가면 그만인 나그네 인생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 앞에 대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의 발견인 것이다. 정부적인 차원에서 무슨 한미 무역 협정 체결을 잘 마무리 하는 것도 중요하고 어디다가 국제공항을 한 곳 더 건설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국가 발전의 결정 사항 중의 하나이긴 하다. 그러나 인생이 절대 절명으로 각 사람들이 진정으로 고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씨름하고 대답을 찾아야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 이 세상에 와서 어떤 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말이다.

가족보다 예수를 더욱 사랑하는 자의 참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완성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는 곳 마다 사랑을 실천하셨다. 각색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귀신이 떠나가고 새 사람이 되었다.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 들렸던 불쌍한 사람도 깨끗함을 받았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도 고침을 받았다. 백부장의 중풍병 든 하인도 깨끗하게 나았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기적이 여기저기서 입 소문을 탔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12살 난 외동딸이 다시 살아 났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도 죽었다가 살아났다. 죽은 지가 나흘이요 이미 장례가 끝난 나사로를 돌무덤 앞에서 불러 내셨다. 죽은 나사로가 베로 동인채로 살아나서 무덤 안에서 걸어 나왔다. 벧세다 광야의 배고픈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그 시작은 어리 아이의 보리떡 다섯 덩이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였다. 이 모든 기사와 이적의 바탕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와 같은 기적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라도 끔찍이 사랑하셨다. 불쌍한 영혼을 그냥 지나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오해할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화평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시라고 스스로 선언 하신 것이다.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고 하셨다. 그래서 부자(父子)간에 모녀(母女)간에 고부(姑婦)간에 불화를 일으키신 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고 까지 언급하셨다. 아니 집안 식구라 원수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그 대답은 37절에 나온다.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이 귀하고 또 그래야 하지만 부모님을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아니 부모 사랑이나 아들딸을 사랑하는 자식 사랑보다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부모 자식 간에 인간적인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부모도 자식도 이 땅에서 영원히 함께 하는 관계는 아니다.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 관계요 부자 관계 혹은 모녀 관계라고 해도 그 관계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가족 관계를 영원하게 이어주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길이다. 마태복음 10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심각한 예언의 말씀을 하셨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아니 어느 누가 이런 결과를 예견하면서도 예수를 따를 것인가.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란 형제와 부모 자녀들이 원수처럼 달려들고 공격해 오는 그런 영적 전쟁의 시작인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지난주에 소개한 책, <레디컬>에는 사힐(Sahil) 부부의 간증이 나온다. 저들 부부는 다 인도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그런데 나중에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남편에서 복음을 전했다.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게 되자 주변 사람들로부터 죽인다는 살해 위협을 받게 되었다. 결국 저들은 그 위험을 피해서 정든 고향 마을을 떠났다. 몇해가 지나자 저들 부부의 믿음은 몰라보게 자라났다. 저들 부부의 소원은 고향의 가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었다. 저들 부부는 조심스럽게 고향의 친척과 가족들에게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상대편에서도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저들은 환영을 받으며 고향 마을을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아내만 며칠 더 남아서 친정 식구들과 옛 정을 나누고 있었다. 사힐의 아내는 모처럼 친정 부모님과 마주 앉아 친정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식사 자리에서 사힐의 아내는 식탁 의자에서 비스듬히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친정 부모가 딸의 밥에 독약을 넣어서 죽인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 위해서 이 정도의 도전을 극복하며 신앙 생활하려는 이들이 몇이나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배신을 당하고 미움을 받고 결국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하여 경고 하셨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고 하셨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모든 사람이란 전 인류를 말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족 혹은 정부 혹은 타 종교인 혹은 친구 심지어는 같은 신앙을 가진 이웃들로부터도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면 살수록 주변 사람들이 우리들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면 좋겠으나 주님을 닮아 가는 삶을 살아가려 하면 할수록 이웃이 우리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늘 미움을 받으셨다. 마태복음 10장 23절에,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한  나중 편지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고 주의시켜 주었다. 우리 주님 예수님 자신도 늘 배신과 증오와 핍박이 끊이지 않는 환경에서 이 땅을 살다 고난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 하신 후에 하나님의 곁으로 승천하셨다. 그 예수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형제보다 훨씬 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예수님께 합당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의 순종.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다. 여성들의 경우에 십자가를 목에 장식으로 매어 달고 다닌다. 물론 요즘은 목걸이를 한 남자들도 흔하게 볼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십자가는 단순한 그런 표식 이상인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도 잘 안다. 교회마다 강단에 걸어 놓은 네온 혹은 요즘은 LED의 배경 조명을 뒷받침한 그런 화려한 십자가가 전혀 아니지 않는가.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라.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신 것을 몰라서 핍박하고 잔해하던 그가 다메섹에서 변화되지 않았는가. 그 후의 사도 바울의 생은 전혀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아갔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이 이방에 전파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고 바친 위대한 사도요 이방 전도자가 되었다. 우리가 믿는 복음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역사였다. 십자가는 작고 귀엽고 앙증맞은 형상의 장식으로 반짝거리게 만들어서 하얀 목에 거는 그런 장식이 아니라 고난의 십자가요 죽음의 십자가의 희생의 십자가가 아닌가. 예수님은 그런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한 자가 아니라고 경고하신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란 무엇일까. 우린 자기 개인이나 가정환경의 불운함을 설명할 때에 ‘이것이 내가 평생 지고 가야할 십자가’라고 쉽게 말하는 이들을 만나보게 된다. 물론 그런 것도 십자가는 십자가일수 있다. 가난과 질병과 갈등과 쉽게 떨쳐 낼 수 없는 그 어떤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이 계속하여 줄곧 자신을 짓누르는 그런 십자가의 고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자기 십자가란 사명의 차원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성도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기 위하여 지고 살아가야 하는 나의 십자가란 무엇일까.

AD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기 이전까지는 실로 가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다는 것은 항상 순교의 위기 앞에 자신을 노출하고 살아야만 하는 불안이 있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결코 그런 환경을 불안으로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희생하고 그래서 고난을 달게 받아 들이기도 하고 그래서 순교자의 길을 떳떳하게 간 것이다. 초대 교회 300년간은 무려 열 번이나 바뀌는 자자손손 극심한 박해를 극복하며 지하의 예배처요 생활 근거지인 카타콤을 무려 640Km나 개발하며 그 곳에 은신하며 복음을 지켜 나갔다. 그리고 그 수를 가히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성도들이 가혹한 박해 앞에 죽어 가면서도 복음을 배반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굳센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

1956년 1월 8일에 에콰도르 정글에 사는 후아오라니족(Huaorani) 인디오 마을을 찾아간 짐 엘리엇(Jim Elliot, 1927-1956)과  네이트 세인트 등 다섯 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낯선 외부인을 만나면 창을 던져 살해 하는 와오다니족에 의해 도착하자 마지 죽고 만다. 나중에 짐 엘리옷의 부인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저들의 부인들이 다시 그 곳을 방문해서 선교를 시작한다. 저들은 여자들을 보호하는 풍습이 있는 부족이었다. 저들 살해당한 선교사들의 부인들에 의해서 그 곳이 복음화 된다. 몇해전에 ‘창끝’이란 책과 영화로 세상에 더욱 알려진 선교의 실화이다.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인 스티브 세인트가 그 곳에 가서 아버지를 이어서 선교하면서 현장 체험을 책으로 엮었다.
 
이런 전도와 선교 일화는 기독교 2000년 역사에 넘쳐 난다.

존 패튼(John Paton, 1824-1907)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10년 넘게 목회하던 저가 뉴 헤브리디스 군도에 사는 신인종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뜨거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미 그보다 20년 전에 다른 선교사 두 명이 그 곳에 복음을 전하려고 갔다가 식인종들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주의의 만류가 대단했지만 그는 그곳 뉴 헤브리디스 군도로 갔다. “때가 되어 죽으면 땅 속에서 벌레가 뜯어 먹든지 복음 전하다가 식인종에게 뜯겨 먹히든지 언젠가는 한번 죽을 것이 아닙니까.? 마지막 때가 되면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 군도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내와 갓난아기가 세상을 떠났다. 잔 패튼은 맨 손으로 땅을 파고 아내와 어린 자식의 시체를 땅 속에 묻었다. 세월이 여러 해 지나며 기적이 일어났다. 잔 패튼의 복음 전도에 의해서 그 식인종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나중 이 소식은 호주와 스코틀랜드 교회들에게 선교에 큰 도전이 되기 시작하였다.

예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라도 잃을 수 있는 자의 희생.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고 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북부의 바탁(Batak)이란 곳은 무슬림의 소굴이었다. 그 곳에 선교한다는 것은 마치도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은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부부 선교사가 헌신하려 했으나 붙잡혀서 토막 살해당하고 말았다. 몇 해 후에 또 다른 선교사가 그 곳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해 토막 살해당한 그들이 전하던 말과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온 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지금은 300만 명이 넘는 바탁 족들이 모두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한다. 예수 위해 살다가 예수 위해 죽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재산과 젊음과 재주와 은사와 역량과 열심과 용기와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이 복음을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도리어 얻게 된다. 영원히 얻게 된다. 후세에 두고두고 향기가 나는 아름답고 큰 미담의 주인공으로 교훈을 남기는 죽음은 그 뒤에 영원한 영생의 보상을 받게 된다.

20세기 초에 넉넉한 재산의 영국 부자가 있었다. 스터드( C. T. Studd, 1860-1931)가 그 주인공이다. 영국의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크리켓 선수로 명성을 날리던 대학 시절에 선교의 소명을 받고 캠브리지 7인의 한 사람으로 중국으로 건너가서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 복음화를 위해 일했다. 53세가 되던 1913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프리카 심장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기에령 콩고(옛, 자이레공화국)에 '아프리카 심장 선교회(The Heart of Africa Mission)'을 설립하였고, 이것이 'WEC 국제선교회(1918)'의 전신이 되었다. 평범한 한 사람의 비전으로부터 시작한 WEC 국제선교회(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는 복음주의적 국제 선교 단체가 되어 현재 50개국에서 모인 2,000여명의 선교사가 80여 개 국에서 사역하고 있다.

래리 크랩의 <영적 가면을 벗어라>(Inside Out)는 책에 보면 그런 도전으로 넘쳐 난다. 오늘 날의 교회와 성도들은 교회 생활을 마치도 군함이 아니라 호와 유람선의 여행자들처럼 대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교회와 성도의 교제라는 가면 뒤에 숨기고 진정한 회개나 헌신도 없이 적당한 헌신과 적당한 기독교인의 행세를 하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가면 뒤에 감추고 자신의 속마음과 실체를 드러내지도 않고 진정한 회개나 참회의 삶도 살아가려 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만족하며 위선과 가장과 이중성의 가면으로 자신을 가리고 숨기며 살아가는 현대의 교회와 교인들의 실상을 고발한다.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십자가 복음을 붙들어야 한다. 아니 십자가의 복음에 붙들려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 그래야 장래가 있게 된다. 그런 성도 그런 교회로 거듭나자. 그런 복음의 씨앗이 우리의 가슴마다 겨자나무처럼 자라나길 열망하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에 합당한 주인공인가 자신을 점검하자 그리고 주님의 제자다운 십자가 신앙의 주인공 답게 살자.

호산나 찬미 가운데 무리와 군중 속에 섞여만 있지 말고 골고다 언덕으로, 마가의 다락방으로, 그리고 땅끝 선교의 선봉에 서는 그런 성령 충만한 복음 전도자로 거듭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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