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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전심으로 감사하오며(시9:9-20) 2018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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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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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6-24 23:59 조회 13,778 댓글 0
 
                   전심으로 감사하오며(시9:9-20)           2018. 6. 24


오늘은 순교자기념주일이며 6.25 동족 전쟁이 일어난 지 68년이 되는 기념 주일이다. 유대인들은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Forgive, but Never Forget) 

는 교훈을 후손들에게 가르친다. 유대인학살 기념관에 새겨져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존 에프 케네디도 그와 비슷한 내용의 연설을 한 바 있다. “Forgive your enemies, but never forget there names."(여러분의 적들을 용서하십시요.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절대로 잊지 마십시요.” 왜 잊지 말라는 것인가. 과거의 교훈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과거의 억울함이나 실수나 잘못이나 죄나 악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난날의 교훈을 진정으로 가슴에 품을 줄 아는 사람은 어리석고 반복적인 죄와 악으로부터 피 뭍은 손을 씻고 거듭난 주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오늘은 시편 9편에 소개된 다윗의 감사 신앙에 대한 교훈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다 같이 시편 9편 1절을 읽자.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다윗의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이다. 

그 첫째는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 둘째는 주를 의지하고 찾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기에 감사한다고 했다.
또 하나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돌아보아 주시기에 감사한다고 하였다. 

6. 25 전쟁은 3년 1개월 즉 37개월 동안 계속된 전쟁이었다. 남북한과 미군과 유엔군과 중공군을 포함해서 군대와 민간인등 45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영화 ‘동막골 사람들’처럼 나라에 전쟁이 났는지, 난리가 났는지, 누가 피난을 가는지,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두메산골에서 봄이 오면 씨앗 뿌리고 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꾸어서 가을에 추수하며 겨우 내내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농한기를 지내며 온 나라가 전쟁의 격동기를 지내면서도 해가 뜨는지 달이 뜨는지도 모르며 안연하게 지낸 이들도 없지는 않다. 

왜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생각하면 감사하고 돌아보면 감사하고 크고 작은 범사에 감사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다음 주일에 지킬 맥추감사절은 유대인의 삼대 절기 중의 하나이다. 유월절과 맥추절과 장막절 즉 추수감사절이다. 맥추절은 유월절을 지낸 일곱 주 후에 지키는 절기여서 칠칠절이라고도 한다. 이 날은 모세 때에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하고 사도행전의 120여 성도들이 기도 하던 중에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날이기도 하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생일을 기억하여 감사를 표현하게 한다든지 혹은 자기의 생일 날 자기를 낳아 주신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도록 하신 것은 그 의미가 깊다. 생각하여 보라. 애굽의 노예 상태로 430년을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감격을 선물해 주신 분이 누구신가. 그러므로 유월절의 감사가 뜻 깊고 첫 열매를 먹게 하시는 맥추절의 감사가 귀하고 한해를 살아가면서 추수절을 맞도록 오곡백과와 풍성한 먹을거리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귀하고 감사한 것이다.


다윗은 언제 어떤 형편에서 이런 시편의 고백을 통하여 전심으로 여호와를 향하여 감사하는 감사를 표현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은 범사에 감사하는 감사의 사람이었다. 

지난주일에 묵상한 시편 20편의 내용처럼 다윗 시대 내내 전쟁의 위협과 전쟁의 불안은 끊임이 없었다. 물론 전쟁의 위협과 도전은 사울 왕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솔로몬 왕 때에도 여전하였다. 그러나 다윗 왕이 그 어떤 다른 왕들과 다른 것은 그는 매사에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1절에서 고백하는 대로 다윗은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갖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다. 다윗은 공의와 정직으로 세계를 심판하시고 만민을 판결하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찬송하고,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다.  

압제를 당하는 자의 감사.
유대인들은 압제를 많이 당한 민족이다. 수 없는 억압과 핍박과 고난을 당한 대표적인 민족이 유대민족이다. 한 반도에 살아가는 우리나라 남북한의 백성들의 그런 고난과 압제 가운데 긴긴 세월을 이기며 살아오려고 씨름한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에 압제 당하기를 원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나라나 민족은 전혀 없을 것이다.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부모가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어린 아들 딸들을 향해서 “너는 커서 지지리도 고생이나 많이 해라.” 그렇게 말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돌잔치 할 때에 돌잡이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뭔가. 미풍양속 중의 하나일수 있지만 그것은 복되고 잘 되라는 어린 아기와 자녀를 향한 축복이 아닌가.

결혼하는 신랑 신부가 폐백이란 것을 할 때에 밤이나 대추를 던져 주면서 하는 부모의 덕담도 그러하지 않나. 이 세상의 육신의 부모도 그러하거늘 만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하 만민 중에서 특히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주의 백성들을 압제에서 건지시고 환난에서 막아 주시지 않겠는가. 

구한말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 국가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운명 가운데 우리나라를 건져 주신 분이 누구이신가. 일제 36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억압과 핍박 가운데서 우리나라에 해방이 가능하게 해 주신 손길이 누구의 손길인가. 물론 독립을 위해서 피땀을 흘리며 생명을 바쳐 희생적인 삶을 살다가 죽어간 애국순국열사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해방과 광복의 기쁨도 잠시 잠깐, 동서와 남북의 이념 갈등으로 한 마을 사람들끼리고 물고 찢던 비운의 역사가 있었다. 형제끼리도 서로의 가슴에 총구를 들여대던 참담한 세월이 과거가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지금은 다르냔 말이다. 2-8절까지에 보면 다윗은 ‘이방 나라’를 ‘원수’ 혹은 ‘악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걸까. 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고 ‘정직’으로 판결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다윗의 마음을 꽉 붙드는 두 단어는 ‘공의’ 와 ‘정직’이었다. 그래서 그는 압제를 당하고 환난을 겪을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이 요새가 되어 주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내가 나를 지키며 살 수 있나. 복음 성가 중에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라고 찬송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잠시 잠간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하루를 살고, 한 주를 살고, 한 달을 살고, 한 해를 살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맞다.

그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창세기의 바로 왕 앞에 섰던 야곱의 고백처럼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3절에 보면 다윗은 “원수는 물러 갈 뿐만 아니라 주 앞에서 넘어지고 망한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시편 1편에도 그런 고백이 나오지 않나.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않고 그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 의인들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고 만다는 것이 시편 1편의 고백이며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성도된 우리들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란 고백 가운데 범사를 행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3절과 5절에 보면 다윗은 

“원수-이방 나라-악인”

이런 등식으로 세상을 바라다보고 있다. 그러면 다윗이 말하는 원수는 누구이며 이방 나라 백성들을 왜 악인라고 표현하고 있나. 세상을 바라다보는 다윗의 입장과 견해는 지극히 단순하다. 4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믿는 하나님은 의와 송사를 변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보좌에 앉으셔서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맞다. 개인이든 나라든 가족이든 민족이든 그 흥망성쇠의 배후에는 세상과 만민을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으시다. 

다윗은 자신이 겪은 그 어떤 사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다윗 자신이 이방 나라와 원수들의 악으로 인하여 압제를 당하거나 환난을 겪을 때에 그를 지키고 보호하시고 건지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마치도 요새와 같은 분이셨다. 

한 때는 십 수 년 동안 다윗에게 있어서 장인이며 나라의 임금인 사울이 다윗을 원수처럼 대하였다. 사울 왕은 다윗이 자기의 시야에서 사라지길 원했다. 다윗을 죽여 없애려는 사울의 자객들이 밤과 낮이 없이 다윗의 행적을 추적하고 다윗을 죽여 없애려고 하였다. 사울 왕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신하였다. 두려움 가운데 빠진 다윗은 수염에 침을 흘리며 대문짝에 몸을 그적거리며 미친 자처럼 행세하며 목숨을 부지해 나가야 했던 적도 있었다. 지내 놓고 보니 요새와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끊임없이 당해야 하는 압제와 환난 가운데서 그를 건질 힘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의 감사.
룻이 보아스를 통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로 태어난 막내아들이었다. 그런 다윗은 어려서부터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고 섬기는 겸허한 믿음 가운데서 자라났다. 엘라 골짜기에서 골리앗 장군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두려워하지 않고 골리앗을 향하여 외쳤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그리고는 물매 돌 하나를 던져서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죽이고 전쟁을 이겼다. 그 다윗이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다윗은 매 순간마다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용장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이름에 권세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성령의 이름으로 믿고 따르고 섬기고 선포하는 그 이름에 권세와 능력이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가 쫓겨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온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만나가 내려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메추라기가 공급된다. 

성령 받은 베드로도 요한 사도와 함께 늘 성령 충만을 위하여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였다. 하루는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 앞에 누군가가 늘 데려다 놓는 나면서 걷지 못하는 걸인을 만났다. 은과 금을 달라 하는 그에게 베드로가 선포하였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여기 베드로가 의지한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믿고 오른 손을 붙잡아 일으킬 때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40년 만에 일어나 걷고 뛰며 찬미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맞다. 하나님은 모든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찬송하고 선포할 때에 기적이 일어난다. <예수 이름으로>라는 복음성가가 있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우리 앞에 누가 서리요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늘 겸허하고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할 때에 기적이 일어난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룩하신 십자가 사건과 부활 승천 사건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모습으로 예수 믿는 이들을 색출하여 없애려고 찾아 다녔다. 

하루는 사울이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사건이다. 그 때에 하늘로부터 홀연히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땅에 엎드러진 사울은 그에게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물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대답해 주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그 사울이 성령 받고 변화되고 말씀의 사도가 되었다. 사울은 사도 바울로 변화된 이후에 이방 나라와 이방 도시의 처처를 넘나들며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사울은 그가 핍박하고 박해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예수 이름에 권세가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가 쫓겨 나간다. 예수 이름으로 죽은 자가 살아난다. 예수 이름에 왕의 권세와 죄를 온전히 사하시는 지극히 큰 대제사장의 권세가 주어져 있다. 예수 이름에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완성하고 성취하는 능력이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라는 찬양이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주신 능력으로 주가주신 능력으로 
주가주신 능력으로 일어 서리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성북동에서 스카이 웨이길로 산속 길을 달려서 세검정 언덕길을 향해서 내려 오다 보면 오른 쪽 부암동 산 자락에 CCC 본부 건물이 있다. 한국 CCC의 역사를 이룬 인물이 김준곤((金俊坤,1925-2009) 목사이다. 그는 1925년 전라남도 신안군의 지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무안농업실수학교(현 무안중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에서 일본군 징집을 피해 장기간 도피생활을 하였다. 그동안에 민족구원과 기독교사상에 심취했다. 1948년에 남산에 있던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동기생으로는 정규오 목사와 신복윤 목사 등 한국교회의 유명한 목회자들이 있었다. 목사안수를 받은 후 조선대학교 문학과에서 더 공부하였다.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목과 교장을 지냈다. 그는 풀러신학교 유학시절 CCC 설립자 빌 브라이트 박사를 만나 한국에서도 대학생선교회를 시작하라는 분부를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귀국하였다. 그 후에 한국 CCC를 창설하고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대학생 전도에 나섰다. 김 목사는 1958년 11월에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대학 동아리형식으로 모여 선교와 봉사활동을 하는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창설하였다. 그 후 CCC는 오늘 날 전국의 330개 대학에 1만 6천500명의 회원을 가진 대표적인 선교단체로 자라났다. 그 동안 CCC를 통해 복음을 받아 들인 청년 대학생들은 30만 명이 넘는다. 그 중에 수많은 이들이 목회자가 되었고 사회 각 분야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홍정길 목사, 하용조 목사, 정운찬 총리, 이광자 서울여대 총장, 주수일 칠성섬유 회장, 박세환 예비역 육군대장 등이 모두 다 CCC 출신 인사들이다. 예수 이름에 권세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주를 찾는 자들의 감사.  
다윗은 주께서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10절에 보라. 왜 다윗은 주를 의지한다고 고백하는가.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는 자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생각하여 보라. 임금 사울은 다윗을 버렸다. 버렸다기 보다는 죽여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윗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갔다. 시편 9편 13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주의 은혜를 아는 자가 주를 찬송하고 주의 은혜를 아는 자가 주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주를 찬송하고 그래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는 것이다. 

14절을 보라.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예수 때에도 보라. 예수의 소문을 들은 한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예수는 베드로 안드레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신 시간이었다. 산 아래의 아홉 명의 제자들의 아버지가 데리고 온 귀신 들린 아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다. 산 위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 그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아들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셨다. 소리를 지르고 경련을 하고 거품을 물던 중한 상태의 아들이 깨끗하여 졌다. 그 현장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보며 놀라워하였다.

이사야 55장 6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였다.

<전쟁과 평화>, <안네 카레니나> 등 수 많은 소설을 쓴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y, 1828-1910)는 50대에 분명한 회심을 체험하였다. 그 후에 쓴 책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구두장이 시몬과 천사 미카엘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까를 교훈적으로 쓴 단편 소설이다. 

그는 부요한 백작의 아들로 온갖 풍요로운 환경에서 그 당시 남자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다 하며 살았다. 즐기고 누리고 흥청망청 살았다. 그는 건강했고 부유했고 넉넉했다. 그런 그가 복음을 깨닫고 보니 지난날의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기대하신 삶의 모습에서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을 깨달았다. 그는 회심 후에 나중 30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씨름하였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주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자. 예수 향기 날리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자. 3000년 전의 다윗의 고백이 오늘 날 우리에게 여전히 도전과 은혜가 되는 것은 그는 한 평생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생으로 살기 위해 씨름하는 나날을 살아갔다. 물로 그에게도 처절하고 부끄러운 죄악과 범죄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를 뒤로 하고 주께로 한 걸음씩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며 주를 의지하고 날마다 주님을 찾는 구도자의 삶을 흠모하였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주께서 우리 모두의 전심으로 올려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시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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