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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구주 예수의 탄생(눅2:8-14) 201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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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1-02 21:45 조회 14,643 댓글 0
 
 구주 예수의 탄생(눅2:8-14)             2017. 12. 24
 
인물이 태어나길 소망하는 기대는 어느 가정에나 있다. 그래서인지 태몽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사렛 동네의 마리아를 통한 예수의 잉태와 탄생은 불안과 초조의 연속이었다. 천사 가브리엘로 인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리아는 무서운 생각과 두려움과 불안을 가라앉히고 믿음을 고백하였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6) 그 후에 천사가 떠나갔고 마리아는 외롭고 무섭고 불안하고 두렵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며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씨름하였다.
 
마리아는 유대 산골 마을에 있는 친족인 엘리사벳의 집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 당시의 유대문화로는 결혼 전의 여성이 임신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었다. 그러하다 보니 마리아 자신의 불안뿐만 아니라 아들 예수가 태어나기 까지 마리아의 남편 될 요셉의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요셉은 장차 아내 될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숨긴 채로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1:20)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아내 될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아들 예수를 낳기 까지 신중하게 처세하며 마리아를 돌보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순종하였다.
 
예수께서 잉태된 곳은 나사렛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태어난 곳은 다윗의 고향 마을인 베들레헴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예언의 성취였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의 탄생 현장을 찾아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다. 그 밤에 천사가 들판의 목자들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자 목자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 때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하였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한 말을 자세히 보면 우리의 구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신 예수.
예수는 이 땅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만나는 것이 큰 기쁨의 사건이다. 예수 영접하는 것이 좋은 소식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과거 어느 순간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영적 체험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겠는가 상상해 보라.
 
엊그제 금요일에 지방 연합 기도회에 울산법대 이정훈 교수가 간증하였다. 불교에 심취하고 불교 대학을 나오고 군승이 되고 승려가 되고 불교에 몰입하면 인생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고 했다. 그의 대답은 ‘허무하다’는 것이었다. 불교에 몰입해 보고 심취해 보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 마음에 허무가 뼈속 까지 파고들었다고 했다. 그가 질문했다. 잠도 않자고 몇 날 며칠을 놀음을 하고 나면 좋을 것 같지만 그 대답은 ‘허무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복권에 당첨되고 실컷 돈 쓰고 실컷 놀고 실컷 맛있는 것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셔도 그 나중 대답은 ‘허무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한 시간 이야기 하는 중에 강조하는 것은 예수 만나기 전의 그 모든 것은 허무한 것이라고 했다.
 
예수 만나야 한다. 진정으로 예수를 체험해야 한다. 성탄절이 무엇인가. 예수를 다시금 새롭게 체험하는 절기여야 한다. 왜 동방의 박사들이 그 멀고 낯선 길을 별빛의 이동을 따라서 베들레헴에 까지 찾아 갔나. 헤롯을 만나러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그들의 먼 여정의 목적이었나. 아니다. 예수 만나야 기뻐지고 예수 만나야 좋아지고 예수 만나야 인생이 변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장 10절에 보면 베들레헴에 도착한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기뻐하고 아기 예수를 만나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며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저들은 아기 예수 만났기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역사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에 기뻤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성탄절이라도 내가 슬프면 슬픈 것이다. 내가 아프면 아픈 것이다. 내가 괴로우면 괴로운 것이다. 내가 쓸쓸하고 내가 고독하면 외로운 것이다. 제천 화재 현장에서 죽음을 맞은 이들의 유족들의 이번 성탄이 기쁘겠나. 인간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은 일순간에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구주 예수의 나신 소식이 왜, 무엇 때문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건가. 예수 아니면 해결 할 수 없는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시간과 세월로 해결 할 수 없는 것이 죄와 죽음의 문제이다.
8,760이란 숫자가 내게 어떤 의미의 숫자로 다가 오나.
24시간 곱하기 365일이 8,760시간이다.
하루하루 24시간을 쓰며 살았는데 올 2017년도 이렇게 다 지나가고 이제 올 해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전자렌지 안에 음식을 데우기 위해서 1-2분을 세팅해 놓으면 1분도 짧지 않고 2분이란 시간은  더 길게 느껴진다. 한 시간이 60분이고 24시간인 하루가 1,440분이다. 촌음을 아껴 쓰라고 말한다. 시간을 분과 초로 나누어 경험해 보면 시간이란 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어릴 때나 젊을 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계절의 변화와 한해가 가고 또 한해가 오는 시간과 세월의 흐름을 절감하게 된다.
 
장수 시대가 되었지만 오늘 날은 속도와의 전쟁 시대이다. 빌 게이츠는 <생각의 속도>라는 책을 썼다. 그는 책에서 속도와 생각에 대하여 설명한다.
 
사람의 평균 속도는 1초에 1미터이다.
소리는 1초에 340미터를 간다.
빛은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간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1초에 447미터이다.
지구의 공전 속도는 29.77킬로미터이다.
그렇게 빠르게 자전하고 공전하는 지구에서 사람이 공중으로 튕겨 나가지 않고 붙어서 살 수 있는 것은 만유인력의 원리 때문이다.

빛보다 더 빠른 속도는 없다.
 
그러나 그는 지금 우리 시대가 경험하는 IT 분야의 개척자가 되었다. 1955년생인 그는 13살 때인 1968년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원리를 독학으로 스스로 터득하였다. 그가 “모든 책상 위에 컴퓨터를, 모든 가정에 컴퓨터를”이라는 구호를 말할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오늘 날 어떻게 되었는가. 오늘 날은 22조를 자선 사업에 기여하는 자선 사업가가 되었다.
 
이처럼 과학이 발전하고 인터넷으로 인한 통신 혁명 시대에 살면서 각종 최신 문명의 혜택을 엄청나게 누리며 살아도 인간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것이 죄와 죽음의 문제이다.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인간을 죽음을 넘어서서 영생하는 존재로 이끄시는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비롯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생명이란 ‘영생’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는 유일하신 길이요, 유일하신 진리요, 유일하신 영생의 근본이시다. 이것을 깨닫고 믿고 영접하는 것이 복음이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이다.
 
 
‘좋은 소식’이란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천사’란 뜻이다. 복음(福音)을 영어로는 ‘good news’ 혹은 ‘gospel’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그런 좋은 소식이 있나. 이번 제천의 큰 화재 사건을 보라. 누구는 화재 현장에서 아슬아슬하게 대피하여 살아나고 누구는 목숨을 잃었다. 죽어 간이들과 그의 유족들의 슬픔을 상상해 보라. 어찌 산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의 기쁨을 말할 수 있겠는가. 대학병원 신생아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죽어간 4명의 신생아를 잃은 엄마 아빠와 가족들에게 이번 성탄절이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이 세상은 가난한 자와 부자, 건강한 자와 병약한 자,  힘 있고 권력 있는 자와 늘 지배만 받고 살아가는 계층이 뒤 섞여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이들이 있고 힘  쓰고 애 쓰고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잘 안 되는 이들은 여전히 안 된다. 어떻게 해석하며 살아가야 하나.
 
바사 즉 페르시아의 침공 앞에 무참히 무너지고 점령당하고 말 것 같은 그리스가 버티고 이겼다. 부전 490년 이 전쟁의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4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달려온 ‘필립피데스’라는 이름의 그리스 병사가 있었다. 그 병사는 치열한 격전지였던 마라톤 벌판에서 아테네까지 40여킬로미터를 힘을 다해 달려 갔다. 지치고 지쳐 쓰러지면서 ‘우리가 이겼다 아테네 시민이여 기뻐하라.’하고 외마디 소리를 외쳤다.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숨지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  승리의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유 앙겔리온 유 앙겔리온’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스 말로 ‘유 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란 ‘기쁨의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이른 뜻이다. 역사에서는 그 당시의 전쟁을 ‘필로폰네서스 전쟁’이라고 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생각하여 보라. 이 세상의 기쁨이 얼마나 가나. 좋은 집 산 기쁨이 며칠이나 가나. 좋은 차 ,비싼 차 산 기쁨이 얼마나 가나. 좋은 다이아몬드 반지 선물 받은 기쁨이 몇년씩 가나. 결혼 한 기쁨, 시집 장가간 기쁨이 결혼식장에서 느끼던 기쁨처럼 전혀 그 감동이 식지 않고 평생을 계속되는 사람이 있나.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1등한 기쁨, 취직한 기쁨, 승진한 기쁨, 아들 딸 낳은 기쁨, 손자손녀 태어난 기쁨. 물론 좋고, 물론 기쁘고, 물론 행복하고 물론 즐거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의 소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소식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그를 생명의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과 영생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 안에서 영원한 영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이런 찬송의 가사 전달이 달라진다. 436장 찬송,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이란 찬송 말이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감리교 목사요 신학교 교수였던 이호운(李浩雲, 1911-1969) 목사에 의해서 고백된 가사에 박태준(朴泰俊, 1900-1986) 선생이 곡을 붙인 우리나라 찬송가이다.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질병과 사고와 사건과 어려움과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앞에 생의 방향을 정하고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감사하고 주 안에서 주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표적으로 오신 아기 예수.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 이 땅에 최소한 왕궁에서 태어나야 하지 않았겠나. 화려한 왕궁에서 왕자로 태어나 고관대작의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 왕족으로 태어나야 하지 않았겠나.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소와 양과 염소가 소리 내고 짐승들의 배설물 냄새가 코를 진동하는 헛간과 같은 허름한 공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셨다. 이것이 표적이다.
 
그렇게 낮고 비천한 환경 가운데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구주이신 것이 표적이다. 나 같은 시골 섬 소년이 예수 만나 예수 영접하고 예수 믿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 안에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표적이다. 그렇지 않나. 여러분 각자가 그렇지 않나. 오늘 예배 드리고 내일 성탄절 예배에 또 교회에 찾아 와서 함께 예배드릴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내가 예수 믿고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 드리고 찬송 드리고 기도드리고 예배드리며 살아가는 이 모습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표적이 보이지 않나.
 
표적이신 예수 없이 살아가는 북한과 평양의 지배 계층을 보라. 오만 불손한 이웃 나라 들의 지도자들을 보라. 중국이나 일본이나 우리 나라에도 하나님 없이 살고, 예수와 상관 없이 권력을 누리고 권세를 자랑하고 세상적인 힘을 과시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보라. 예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 속에 마구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그림자라도 보이는가.
 
강보에 싸여 마구간의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표적을 보이셨다. 각색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귀신이 떠나가고 새 사람이 되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배 고픈 무리들이 배 불리 먹고 오히려 부스러기만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 예수는 필요하시면 물 위라도 걸으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면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졌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표적이 계속되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넘쳐 났다. 예수를 만나니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고 막달라 마리아는 평생토록 예수님을 섬기는 훌륭한 복음의 여인이 되었다.
 
예수 만나니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에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다.
남아 있는 올 한해, 그리고 새롭게 맞이할 다가오는 새해에 날마다 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표적이 넘쳐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길 축원한다. 
 

평화의 왕 예수.
천사가 말하고 있던 그 때에 수 많은 천군 천사가 함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영광이 무슨 영광인가. 이 평화가 누구에게서 비롯되는 평화인가.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전능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평화를 누릴 자들은 누구인가. 천사들의 합창 가사가 뭔가. 이 땅의 모든 백성이 절대 아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분명히 구분된 평화를 선포하였다.
 
동방 박사들에게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전해 들은 헤롯에게 이런 평화가 있는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목소리를 높이던 대 제사장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아나스와 그 현장에 모여 들었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런 평화가 있는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사형 언도를 내린 본디오 빌라도에게 이런 평화가 있는가 말이다.

예수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대하면서도 결국은 예수를 조롱만 하던 예수의 좌편 십자가에 달려 있던 그 강도에게 이런 평화가 있는가.
 
그러므로 성탄절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를 누리고 나누는 절기이다.
 
천사들의 합창 가사를 분석해 보라.

지극히 높은 하늘과 지극히 낮은 땅
하나님과 사람
영광과 평화

이 대비 속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들어 있다. 구원은 이렇게 임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이란 택함을 받은 자이며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사명을 깨달은 자들이다.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렸지만 신랑과 함께 잔치 자리에 들어간 신부는 지혜롭고 슬기롭게 등의 불과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신랑을 맞이한 다섯 처녀들뿐이었다.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큰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큰 기쁨과 구원의 감격과 택함 받은 자의 영광스러운 삶과 평화를 얻지 못한 채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다. 왜 그랬나. 그가 십계명을 어긴 것이 있나. 그에게 젊음이 없었나. 돈이 없었나. 재물이 없었나. 그런데 그는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근심이 점점 더해갔다. 젊고 재산도 많고 철저한 율법 생활을 하며 계명도 철저히 지키던 그인데 왜 근심하며 예수 곁을 떠나가고 말았나.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18:22)
 
이 말씀을 들은 그 부자 관리는 심히 근심하며 예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자들이 예수께 질문하였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해 주셨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18:27)
 
성탄절은 예수를 진심으로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기회이다. 내 마음의 품 안에 예수가 탄생하시고 예수가 각색 표적을 행하시고 예수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평화”를 선물해 주시는 체험을 다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냥 들 뜬 마음과 어수선한 마음으로 보내는 성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선물해 주시길 원하신 평화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영원한 평화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기회가 되길 축원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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