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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딛2:11-14) 201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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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12-05 22:10 조회 13,947 댓글 0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딛2:11-14)          2017. 12. 3
 

성탄절은 보이지 아니하시던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몸을 입고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11절과 13절의 말씀처럼 ‘나타나신’(appearing)때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말씀은 대단히 구체적인 표현이다. 이 단어 ‘에피파네이아’는 예수의 초림과 재림을 설명할 때에 주로 쓰는 단어이다.
우리가 공항 입국장에 가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약속한 시간이 되면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며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날 때 기뻐하고 반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그를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나타나셨다.
지난주일 오후 찬양제 때 청년들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나 하고 궁금했는데 얼마 후에 그림을 모아 붙이니까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나. 제 2차 대전 말기에 중국 내지의 한 시골 마을을 말을 타고 가던 사진사가 “주님의 모습을 한 번만 보여 주세요.”라고 기도라며 가다가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는 음성을 듣고 눈이 녹는 들판을 몇 장의 사진에 담아 현상했는데 이런 모습이 찍혔다고 하지 않나.
‘성육신’(成肉身)이란 용어는 기독교에서만 쓴다. 성육신(Incarnation)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말한다.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것을 말한다. 성육신이란 단어는 성경에는 없다. 관련 성경 구절을 찾자면 요한복음 1장 14절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이다. 그렇다. 성탄절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거하시다가 고난과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장사지낸바 된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사셨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예수’ 혹은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 ‘예수’란 ‘구세주’란 뜻이고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실 것을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성경학자인 플로이드 해밀턴은 <기독교신앙의 기초>라는 책에서 구약성경 안에 있는 예수님에 관한 메시아 예언 332개를 정리하였다. 또 성경학자인 페인(Payne)은 <성경예언의 백과사전>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에 대한 191개의 예언 성취를 정리하였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으로 오신다. 유다의 족속으로 오신다. 동정녀의 몸을 통하여 오신다. 이새의 가지에서 한 싹이 나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라고 부를 것이다. 그의 이름은 예수라 하고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그는 왕이며 선지자이며 제사장으로 오신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자로 오신다. 그는 성령으로 임하시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역하시고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 주시는 분으로 오신다.
 
이와 같은 내용의 주인공으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사11:2)라고 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날에 그런 약속이 분명하게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12:17-21, 막1:10-11, 눅4:15-21)
 
그보다 앞서 오는 자가 그 분의 오실 길을 예비하실 것도 예언해 주셨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 이는 세례 요한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마3:1-3)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리라는 예언도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각양의 기사와 이적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도 성취되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5-6)는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9:32-35, 막7:33-35, 요5:5-9)
 
모든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시리라는 예언도 성취되었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시78:2) 이는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4-35)
메시아로 이 땅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과 거치는 돌이시며 이방의 빛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도 예언되었고 일일이 성취되었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이 앉으실 것도 예언대로 성취되었다.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60:3),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10),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하심이로다.”(시 68:18),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1)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들은 예수께서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오셔서 죽음 당하신 후에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까지를 예언한 구약의 말씀들이다.
 
더 자세하게 묵상하기로 하면 몇 시간 동안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대조하며 다하여도 모자랄 것이다.
 
디도서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11절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했다.
13절 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신다.”고 하였다.
그러면 주를 믿는 성도들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인가.
 
 

속량(贖良)하여 구원(救援)을 주시는 은혜(恩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모든 사람’이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나.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때가 언제 있었나.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갈릴리와 그 주변 마을들과 예루살렘을 출입하실 때에도 ‘모든 사람’이 구원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면 11절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사람’이란 누구를 말씀하나. 전 인류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란 하나님의 구원 초청에 응답하고 반응하는 각 사람에게 임하는 선물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즉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 초청에는 남녀노소빈부귀천 지위고하 피부색, 인종 구분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을 구원하는 구주로 영접할 때 에라야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이와 같은 구원의 길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지도록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는 죄인된 우리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어 주심으로 그를 구주로 믿는 우리들을 속량하셨다. 14절에 속량이란 노예를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 지불하는 속전(贖錢)을 의미한다.
 
노예를 그 주인에게 일정한 값을 주고 사서 “너는 이제부터 자유자다.”하고 풀어주면 자유자가 되는 것이다. ‘보석금’(保釋金)을 내고 감옥에서 풀려나면 자유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 ‘속량’(贖良)이란 그런 정도의 자유와 비교할 수 없는 자유함을 의미한다.
 
새 한 마리를 주인이 아름다운 새 장에 가두어 두고 아무리 맛있는 모이를 주고 아무리 좋은 음악을 틀어 주고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그 새는 그런 환경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 새가 원하는 자유는 그 주인이 새 장의 문을 열고 창공으로 훨훨 날아가도록 풀어 놓아 주는 것이다.
 
디도서 바로 뒤에 이어서 나오는 서신이 ‘빌레몬서’이다. 빌레몬서는 디모데 전후서나 디도서처럼 빌레몬 개인에게 표지한 사도 바울의 편지이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만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다. 오네시모는 그 복음을 받아 들였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주인에게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쳤다. 그리고는 숨어 다니다가 다시 또 범행을 저지르고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감옥 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받아 드리고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변화된 오네시모를 칭찬하였다.

그는 갇힌 중에서 낳은 내 아들이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한 자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할 것이다.
그는 나의 심복이다.
그는 더 이상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사랑 받는 형제’이다.
그는 나의 동역자이나 너 빌레몬도 그를 동역자로 여기라.
 
오네시모가 과거에는 주인인 빌레몬과 주변 사람들에게 손해와 악한 영향을 끼친 죄인이었지만 지금은 예수 안에서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다고 천거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아는 한에는 오네시모는 속량 받고 구원 받은 자였다. 오네시모는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영접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병든 하인을 고쳐 달라고 예수께 찾아 왔던 백부장의 그런 죄 사함 받고 속량 받아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을 칭찬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예수는 그를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9-10)고 칭찬해 주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와 그 좌우편의 두 강도의 차이가 무엇인가. 좌편 강도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몰라보고 예수를 조롱하였다. 그러나 우편 강도는 주님께 구원 받는 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 그 때에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그 우편 강도를 구원의 길로 초청해 주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죄 사함 받고 구원 받는 것은 생애 최대의 축복이다. 이 세상에 공부 잘하는 사람, 명문대 나온 사람, 돈 많이 버는 사람, 권력을 얻고 누리는 사람, 성공한 사람, 출세한 사람, 외모가 뛰어난 사람, 잘 난 사람, 유능한 사람 등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많아도 죄 사함 받고 구원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 나그네 길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14절에 속량하신다는 말씀은 죄 사함 받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주를 믿는 성도들을 속량하실 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하신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해 주신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죄 사함 받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성도들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은 그런 삶의 연합을 위하여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워 주셨다.
 
교회가 일 년 동안 연합해서 행하는 다양한 선한 일들을 헤아려 보라. 개인이 혼자의 힘으로 그런 일을 몇 차례나 할 수 있으며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 받은 성도들의 연합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선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천국의 그림자와 같고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과 같은 곳이다.
 

양육(養育)하시는 은혜.
나은 정보다 기르는 정이 더 크다고 한다. 12절의 ‘양육’이란 단어인 ‘파이듀오’라는 말은 ‘훈련시키다.’는 뜻이다. 훈련은 유능한 군사를 세워간다. 훈련은 유능하고 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하게 한다.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복음을 알게 하시고 양육 받기를 원하신다.
 
에베소서 4장 13-14절의 말씀 그대로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소극적인 면에서는 죄악된 행실을 멀리하고 적극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12절을 보라.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 받는다는 것은 경건하지 않은 것을 다 버리고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을 신중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잎만 무성한 나무가 아니라 열매가 풍성한 나무로 살아가야 한단 말이다.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민수기에 보면 선지자 발람은 모압의 왕 발락을 상대하는 선지자였지만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의 기대에서 멀어져 갔다. 결국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 왕의 유혹 앞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은 천사를 동원하셔서 발람 선지자를 태운 나귀의 가는 길을 막아서게 하셨다. 나귀는 자기의 가는 길을 막고 서 있는 칼을 빼어 든 천사를 보고 놀라서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다. 발람 선지자는 영문도 모르고 나귀를 채찍으로 때렸다.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는 나귀를 포도원 사이에 있는 더 좁은 길로 몰아 세웠다. 나귀가 담에 몸을 가까이 하며 발람의 발을 그 담장에 짓눌렀다. 당황한 발람은 다시 채찍으로 나귀를 때렸다. 천사가 그 앞길을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이 막아 세우자 나귀는 발람을 잔등에 태운 채 땅에 엎드렸다. 그 때 발람 선지자는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어 발람 선지자에게 말하게 하셨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이나 때리느냐” 그러자 발람은 나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가 거역하였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곧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 때에 다시 나귀가 대답하였다. “내가 평생 당신을 거역한 적이 있느냐” 그 순간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셔서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서 있는 광경을 hq게 하셨다. 발람 선지자는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의 사악한 행동을 책망하였다. 발람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하고 말하면서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이키겠나이다.”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발람은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기회에 진정한 회개의 길을 걷지 못하였다. 물론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발람을 주장하셔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축복하게 하셨다. 그 후 쓸쓸하게 고향으로 돌아간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미디안의 다섯 왕들이 처형당할 때에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는 민수기 22장에서 시작해서 민수기 31장까지 이어지는 내용이다.
 
양육이 무엇인가. 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주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주어진 성도의 직분과 사명을 제대로 잘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양육 받은 자녀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처럼 성전의 마당만 밟을 뿐 변화와 성장과 성숙과 섬김과 헌신에 이르지 못하고 어린아이 같은 상태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걸음만 계속하는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할 때가 없지 않다.
다시 또 묵상하면 바울 사도의 에베소서 말씀처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라는 권면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할 것이다.
 
올 한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얼마나 주님 앞에 예배와 봉사와 전도와 헌신에 소극적이었는가. 올 한해도 어렵고 넉넉하지 못하다는 핑계 가운데 얼마나 주의 선한 일에 인색하고 수동적이었는가. 올 한해도 입으로는 청산유수로 말하고 기도하면서 정작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사역의 현장에서 불신앙의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았는지를 되돌아보며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새로운 결단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주어진 기회 앞에 잘 양육 받는 자로 살아가면 그 시대 신앙의 현장에서 존귀한 주인공이 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만 염려하며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셨다. 
 
에스더는 부모 잃은 고아였지만 사촌 오빠 모르드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을 받았을 때에 이방 나라에서이지만 바사 나라의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받는 왕비가 되었다. 에스더는 동족이 말살 당할 위기의 때에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하만의 궤계 앞에서 동족을 구원한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지 않나.
 
나약하고 비겁했던 베드로도 끊임없는 주님의 양육에 의해서 성령 받은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이는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제자였지만 그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양육의 기회를 거부하거 거역함으로 역사에 불행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복스러운 소망을 기다리게 하시는 은혜.
13절의 ‘복스러운 소망’이란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던 구약 시대의 성도들처럼 예수의 재림 또한 기다리는 성도의 소망을 말씀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의 끝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복스러운 소망’의 인사로 마무리된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만날 때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마라나타’하고 인사하고는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로 은혜를 입은 자는 그 소망이 달라진다. 그 소망이 복스러워진다.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에 갇혀 사는 덧없는 소망에 갇혀 살지 않는다.
 
복스러운 소망 가운데 사는 성도들은 입의 말이 달라지고 그 시간 사용과 재물 사용과 관심 분야가 달라진다. 그 취미도 달라진다. 먹고 마시고 쓰는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일들이 달라진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찬송 488장 1절)
 
이런 찬송을 아무 의미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부르지 않게 된다.
 
언젠가부터 484장 찬송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를 자주 부르고는 한다.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이나 낮이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
지혜의 주여 말씀으로서 언제나 내 안에 계십소서
주는 내 아버지 나는 아들 주 안에 내가 늘 살고지고
세상의 영광 나 안보여도 언제나 주님은 나의 기업
주님만 내 맘에 계시오니 영원한 주님 참 귀하셔라
영원한 주님 내 승리의 주 하늘의 기쁨을 주옵소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만유의 주여 소망되소서.”
 
남은 한해도 이와 같은 복스러운 소망 가운데 강림절기를 지내며 주의 성탄을 기다리는 복된 소망으로 가득하고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가다리는” 성도다운 성도로서 새해를 소망하며, 또한 영원하고 복스러운 삶을 소망하며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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