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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행하라(빌4:8-9) 20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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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11-24 10:38 조회 14,326 댓글 0
 
생각하고 행하라(빌4:8-9)              2017. 11. 19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이것은 프랑스의 수학자요 근대철학의 창시자로 구분되던 데카르트(René Descartes , 1596-1650)가 그의 책, <방법서설>에서 남긴 표현이다. 꽤나 알려진 표현이지만 데카르트의 이런 사상은 반그리스도적인 생각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 은총으로 구원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고 그에 따르는 행동으로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덕이 쌓여져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철저히 비 성경적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하기야 동물이라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먹고 마시고 눕고 잠을 자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서 생각이 끌려가고 있다면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생각이란 곧 그 사람 자체이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느냐가 그 사람의 사람됨을 좌우하는 것이다. 잠언에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고 교훈했다. 그렇지 않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그 사람됨이 아닌가. 사람이 얼굴 생김새로 그 사람을 알 수는 없다. 그의 외모로 그 사람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사람이 차려 입은 옷으로도 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 사람의 생각, 사람의 마음은 부부라도, 부모자녀라도, 가족이라도, 친구라도 쉽게 알 수가 없다.
 
바울의 13편의 편지들을 성경에서 대하다 보면 바울의 사상, 바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서신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편지들이기도 하지만 그 편지들마다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위대한 사도인 바울의 생각이 배어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에베소 교회, 고린도 교회, 로마 교회, 골로새 교회 등 모든 교회의 성도들을 일일이 사랑하였다. 그러나 빌립보서를 대하다 보면 바울이 얼마나 끔찍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고 아끼고 사랑하고 사모하고 존귀하게 여겼는지를 구구 절절이 알 수 있다. 이미 대한 빌립보서 4장 1절에 다시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한다. 사모한다. 나의 기쁨이다. 나의 면류관이다.”라고 반복해서 그들을 향한 바울의 생각, 바울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나.
바울은 빌립보서의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그가 전달하고 싶었던 생각들을 본문에서 짧게 묶어 전하고 있다. “끝으로 형제들아.”라는 표현이 옥중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숙연한 마음을 느끼게 하지 않나.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라.
너희는 내게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권면하고 있다.
 

이것들을 생각하라.
바울이 강조하는 ‘무엇에든지’라는 말씀은 주를 믿는 성도라면 어떤 처지와 어떤 형편 가운데서라도 이 덕목들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자그마치 여덟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Finally, broth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think about such things.)
 
‘무엇에든지 참되며’(whatever is true)라는 말씀인 ‘알레데스’라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며 참된 성도의 증거를 드러내야만 한다.
 
‘참되다’는 덕목은 초등학교의 교훈이나 급훈으로 끝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권력을 잡고 갑질하며 살려면 그렇게 순진하게 ‘참되게’ 살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풍조가 지배하는 세상이 우리 눈에 비치는 세상의 전부라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냥 세상적인 기준으로 경쟁 사회이니 남들보다 더 앞서야 하고, 더 가져야 하고, 더 높아져야 하고, 더 힘이 있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는 소망이 없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참되며’라는 교훈은 세상적인 기준의 그런 가치관 정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4절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말씀하였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언급하였다. 바울이 언급한 ‘참되며’라는 강조는 예수께 예배하는 자들이 신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요한복음 4장 24절의 ‘진리’의 차원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그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무엇에든지 경건(敬虔)하며’(whatever is noble)라는 ‘셈노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신앙의 또 하나의 덕목이다. 이는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디모데 전서 3장의 감독이나 집사의 자격 중에 언급된 ‘정중하고 정숙한’ 성도의 모습을 말한다. 이는 결코 외면적인 것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체하는 면을 말씀하는 것 아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간 이들에게서 경험되는 그 무엇이 있다. 가령 베드로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해변에서 불을 지피고 떡과 생선을 구워 먹게 하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까지만 해도 경건하지 못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 승천 이후에 성령을 받고 사람이 달라졌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를 대해 보면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다. 그 후로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도 담대했고 위협과 협박을 받아도 담대하였다. 베드로의 두 편지인 베드로 전서와 베드로 후서를 대해 보면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그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서 얼마나 경건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였나를 엿보기에 충분하다.
 
예수님도 예언해 주셨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이게 무슨 말씀인가. 베드로의 젊은날과 베드로의 노년기는 확실히 달랐다. 베드로의 나중 모습 속에는 경건이 있었다. 사람이 평생토록 신앙으로 살아가다 보면 추하게 늙지 말고  경건한 모습이 드러나고 증거되는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노 사도 바울과 노 사도 요한과 노 사도 베드로처럼 말이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에서 이런 교훈도 남겼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딛2:1-2) 사람이 예수 안에서 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디도서에서 언급하는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되는 신앙의 진보를 드러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에든지 옳으며’(whatever is right)라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세상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하신가”가 기준이어야 한다.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기도가 그것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예수는 자신이 원하는 바와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 차이인지를 분별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는 기도를 끝으로 운명의 새벽을 맞았다. 우리들의 사회생활, 가정생활, 교회 생활, 신앙생활의 기준도 이러해야 한다. “무엇에든지 옳으며”라는 질문 앞에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믿음의 사람다운 대답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
 
‘무엇에든지 정결(淨潔)하며’(whatever is pure)라는 말씀은 복음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상태’를 말씀한다.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 하며’(whatever is lovely)라는 말씀은 사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모든 언행을 말씀한다. 사람이 사랑 받을 만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어디 가서나 누구에게나 사랑 받지 않겠는가.
 
‘무엇에든지 칭찬(稱讚) 받을 만하며’(whatever is admirable) 그렇지 않나.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칭찬’을 목말라 한다. 가족에게 칭찬받고 남편에게 칭찬 받고 아내에게 칭찬 받고 엄마 아빠에게 칭찬 받고 자녀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기를 원한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장의 상관과 동료와 아랫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칭찬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누구나 있다. 성경을 보라. 모세나 다윗은 하나님께 칭찬 받은 인물들이다. 하나님은 다윗에 대하여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행13:22)고 극찬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내 뜻을 이루리라”고 말씀하셨고 다윗의 생애를 그렇게 주장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혈통을 통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만약에 무슨 덕이 있든지’(if anything is excellent) 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 두고두고 그 믿음이 존귀하고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상태를 말한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이 그런 인물이 아닌가. 다메섹 체험 이전의 사울과 부르심 이후의 사도 바울은 확연히 다른 생을 살았다. 바울의 생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뛰어난 생을 살았던 신앙의 표상이었다. “무슨 덕이 있든지”라는 말씀은 그런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같은 역사적인 기독교 명저를 남긴 중세의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1379-1471)는 그 당시에 로마의 교황청에서 교황으로 군림하며 화려한 옷을 입고 로마 교황청의 권세와 권위를 누리던 그 어떤 인물들보다 덕이 있었고 뛰어난 인물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인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Imitatio Christi)는 지난 500년 동안 성경 다음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는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무슨 기림이 있든지’(anything is praiseworthy)라는 말씀은 앞서 강조한 ‘칭찬 받을 만하며’라는 말씀의 반복적인 강조와 같다. 칭송 받는 것을 말한다.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사도행전 2장 47절에 보면, 성령 받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
 
주를 믿는 성도된 우리들은 이처럼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야 만 한다. 그것이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주님의 기대이시다.
 

배울 자에게서 배우라.
기술은 장인에게서 배워야 한다.
소리를 배울 때는 그 시대 최고의 명창에게서 배워야 권위가 있다.
악기도, 노래도 누구에게서 배우냐가 중요하다.
미술 공부도 마찬가지다.
운동도 코치가 중요하고 감독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축구계가 다시 히딩크를 거론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나중 편지인 디모데 후서 3장 14-15절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아버지 같은 분이며 스승이셨다. 바울 자신이 디모데를 참 아들로 여겼다. 그런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게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배운 신앙뿐만 아니라 메게도냐로부터 고린도에 도착했던 디모데는 그 곳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다. 그 때의 그 만남이 평생을 이어갔다.
 
바울도 위대하지만 디모데도 훌륭한 초대 교회의 지도자이다. 디모데는 나중에 존경 받는 에베소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디모데의 생각과 마음과 뜻과 의지와 판단과 범사에는 그를 아들처럼 여기고 가르치기 원했던 사도 바울의 가르침으로 꽉 차 있었다. 물론 디모데 자신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믿음을 갖고 살기도 했지만 디모데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산으로 하면 큰 산과 같은 존재요 나무로 하면 큰 나무 즉 거목(巨木)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지 않나. 세상살이도 어떤 분야에 거목과 같은 인물들이 있지 않나. 디모데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그처럼 무궁무진하게 배울 만한 큰 어른이요 지극힌 존경할 만한 신앙의 사표였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감히 사도 바울은 이렇게 편지한 것이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4:9)
 
매주 칼럼을 쓰는 이유가 있다. 몇 해 전에 전남 광주시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전화를 했다. 그 곳에서 호남 지역 교도소 선교를 하는데 어느 재소자가 나의 책을 읽은 후에 다른 책이 있으면 더 받아 보기를 원하는 뜻을 전해왔다고 하면서 책 100권을 요청한 적이 있다. 택배로 책 100권을 보내 드렸다. 이곳저곳의 교도소 재소자들 손에 들려 나의 책이 읽혀지고 있다고 여기면 보람이 아닐 수 없다.
 
1993년에 임권택 감독에 의해서 제작된 영화가 <서편제>이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를 영화화 한 것이다. 서편제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소리꾼 남매의 가슴 아픈 한과 소리의 예술을 그린 작품이다. 일정한 직업 없이 소리꾼으로 벌어먹고 사는 가난한 아버지와 그의 딸의 이야기에서 소리에만 미쳐 살아가는 소리꾼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버지는 그 딸 또한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딸이 잠자는 사이에 두 눈에 청강수를 부어 두 눈을 멀게 한다. 그렇게 하면 눈으로 뻗칠 사람의 기(氣)가 귀와 목청으로 옮겨가 소리가 비상해 진다고 믿고 있었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을 골고루 다 접할 수는 없지만 소리 즉 창 한 가지에 몰입하고 매진하는 소리꾼의 모습에서 진정한 ‘꾼’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분으로부터 한 소리만 듣고 다듬어진 한 목소리로만 노래하길 원하는 그런 마음, 그런 태도가 주를 믿는 성도의 태도여야 하지 않나.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바울은 예수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그의 화려했던 과거를 배설물처럼 여겼다.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부활 신앙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일을 푯대로 정하고 앞만 보고 달려갔다. 그런 바울이 감히 자신 있게 권면한 것이다. 내게 배운 대로 행하며 살아가라는 강조이다.
 
사도행전 13장에는 바보 섬의 마술사 ‘바 예수’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로 선교지를 향해 출발했다. 실루기아로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 섬으로 갔다. 살라미를 거쳐서 ‘바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바보’는 ‘대문’이란 뜻이다. 구브로 섬의 수도이다. 아름답고 큰 항구도시다. 바울은 거기서 ‘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났다. ‘바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의 아들’이란 뜻이다. 마술사 엘루마라고 했는데 ‘엘루마’라 불린 것은 ‘마술사’란 뜻이다. ‘예수의 아들’이란 뜻의 ‘바 예수’이니 그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런데 그 ‘바 예수’가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였다. 그 곳의 총독이 바울과 바나바의 소문을 듣고 저들을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다. 그 총독의 이름은 ‘서기오 바울’이었다. 그 때 유대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 ‘바 예수’는 총독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려고 힘써서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고 방해하였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 바 예수’를 꾸짖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행13:10-11) 그 때에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총독 서기오 바울은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 예수가 그렇게 된 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고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다.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느냐 누구에게서 배우느냐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복음 안에서 배우고 듣고 본 바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바울은 반복해서 네 가지로 구분하여 강조하였다. “배운 것, 받은 것, 들은 것, 본 것” 이 모든 것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사도 바울은 실로 개인적으로나 설교나 강론이나 그 어떤 가르침이나 삶에 있어서 모본이 되는 위대한 사도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도 말하지 않았나.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누구를 본 받으려 하느냐 무엇을 본 받으려 하느냐는 참으로 소중한 인생의 과제이다. 단편 소설인 <큰 바위 얼굴>은 1850년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작품이다. <주홍글씨>도 나다니엘 호돈의 작품이지 않나.
 
주인공인 어니스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동경하였다. 작가인 나다니엘 호돈은 소설 속에서 막대한 재력가나 군대의 장군이나 유명한 정치가나 시인을 등장시킨다. 청교도 신앙에 철저했던 작가는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인 시인의 입을 빌려서 주인공인 어니스트가 평생토록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살아가던 중에 어린 시절과 청년기와 장년기와 노년기를 살면서 그 자신의 얼굴 표정과 삶에서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인물이 바로 그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노년기의 어니스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로 등장한다. 작가인 나다니엘 호돈은 사회적 지위보다 청교도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인간의 위대한 가치를 드높인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과연 누가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인가.
 
2차 대전 때 독일군 감옥으로 사용하던 비밀 지하 동굴에 유대인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채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극한 상황에서 버티며 살아갔다. 그 동굴이 나중에 발굴되었을 때 동굴 벽에는 많은 낙서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그 낙서 중에는 이런 글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아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사랑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
 
그렇지 않나. 생각이 곧 그 사람의 믿음이고 믿음이 곧 그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주님께 배우고 본받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주변의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본받게 하기를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주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무엇을 말씀하셨고 어떤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가셨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로 살아가라고 하셨다. 그래야만 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천국이 저희 것이고, 위로를 받을 것이고,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야 배부르고, 그래야 긍휼히 여김을 받고, 그래야 하나님을 보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그래야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의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살인은커녕 노하지 말아라.
간음은커녕 음욕을 품지 말아라.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라.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누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나가 너에게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해 주어라.
누가 네게 구하면 주고 누가 네게 꾸고자 하면 거절하지 말아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하는 길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남을 구제하려거든 은밀하게 하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기도 하라.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아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 누군가가 너희에게 잘못하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금식하며 기도하려거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단정하게 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픔 기색을 하고 흉한 얼굴로 하지 말고 단정하고 밝은 태도로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라.
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법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먹고 마시고 입는 것 염려 하지 말고 살아라.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염려 하지 말아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남을 비판하지 말아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좋은 나무가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
반석 위에 집을 세우라.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라.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유월절 만찬 음식을 잡수시다 말고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사도 바울이 언제나 항상 주님에게서 배우고 행하며 누군가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싶었던 말씀이 이런 말씀들이 아니었겠나.
주님의 말씀 안에서 그런 생각을 갖고 그런 믿음을 행하며 살아가노라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이것이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끝말이었다. 바울은 말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이것들을 생각하고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와 같은 믿음 생활을 통하여 모두가 주님께 칭찬 받는 주인공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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