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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롬1:16-17)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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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10-29 23:14 조회 13,601 댓글 0
 
개혁신앙(롬1:16-17)               2017. 10. 29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이것은 종교 개혁 이후 개혁 신앙을 지켜 가기를 원하는 이들에게서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온 내용이다. 고인 물은 썩고 만다. 2000년 동안의 교회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500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하나님은 당시 34살의 가톨릭 수사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통해 기독교의 개혁에 불을 붙이셨다. 물론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나라마다 이미 종교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종교개혁 하면 루터나 칼빈이나 쯔빙글리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 이전에 먼저 개혁을 주도한 선각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력에 눌리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단으로 몰리거나 순교 당하였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1260-1327), 하인리히 수소 (Heinrich Seuse, 1295-1366), 요한 타울러 (Johannes Tauler,1300-1361) 등은 하나님과 일치를 도모하는 신비적 신앙으로 교회갱신 운동을 전개하였다.
•발도(Petrus Waldus, ?-1218)와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1452-1498)는 도덕과 윤리적 실행의 혁신을 시도하였다.
•존 위클리프 (John Wyclif,1329-1348)와 존 후쓰 (John Huss,1370?-1415) 등으로 교리와 신학면에서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불복하였다.
 
가령 사보나롤라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복음적인 설교가였다. 그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잘못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었다. 그는 시민광장에서 엄청난 무리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로마 교황청의 강압에 의해서 신과 옷이 벗겨지고 양손은 묶여졌다. 1498년, 그의 나이 46살 때의 일이다. 그는 “예수님, 예수님”하며 교수형을 받았다. 그는 수많은 무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리고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태우고 남은 재는 아르논 (Arnon) 강에 뿌려졌다. 사보나롤라는 교황 알렉산더 6세의 명령에 의해 다음과 같이 공포되었다. " 그는 우리가 그를 사람이나 수도사로 부를 수 없을 만큼 사악한 수도사, 가장 지독하고 사악한 자이다". 세월이 지난 후 역사는 사보나롤라의 죽음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1882년 플로렌스 시는 시 창설 500주년 기념으로 사보나롤라의 동상을 그의 고향인 피렌체에 세웠다. 그의 동상은 그가 처형된 곳으로부터 몇 야드 떨어진 곳에서 그는 도미니크 수도사 제복에 두건을 쓴 모습으로 그의 왼손은 사자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십자가를 들고 맑은 그의 시선은  높은 하늘을 향한 채 서 있다.
 
위클리프, 얀 후스 모두 다 그런 길을 걸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하나님은 마틴 루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이루셨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의 시작에 불을 붙인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독일의 금은세공업자였던 구텐베르크는 1450년에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하는 기술을 발명하였다. 마틴 루터는 “인쇄술은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최대의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의 반박문은 채 한 달 도 되지 않아서 유럽 각지로 번져 나갔다. 인쇄술의 덕분이었다. 종교 개혁이 시작된 후 7년이 지난 1524년까지 루터의 소책자는 약 100만부 이상이 유럽 전역에 배포되었다.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도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철필로 묵지를 대고 프린트를 준비해서 가리방이라고 부르던 등사기로 주보를 만들었다. 손과 옷과 주변에 먹물 투성이가 되고는 했다. 지금의 인쇄 수준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요즘 웬만한 것들은 교회 안에서 컴퓨터 작업으로 하고, 교회 안에 마련된 프린터로 적지 않은 량의 인쇄물을 프린트해 낸다. 하나님은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전에 인쇄술이 발명되도록 하셨고 종교 개혁의 의지는 독일의 국경을 넘어 각처로 불길처럼 번져가게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인물을 준비해서 쓰신다. 그것이 부르심이며 사명이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에 7남매 중 장남으로 독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게 자라났다.  18살에 유명론 철학(Occamism, via Moderna)으로 잘 알려진 명문대학인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하여 2년 만에 대학 공부를 마쳤다. 23살 때에 들판에서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한 후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입단했다. 다음해에 수도의 맹세를 하고 25살 때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수도원에서 교리사, 교회사, 조직신학 등의 신학 수업을 비롯하여 비엘을 통해 옥캄의 유명론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의 구원을 위한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인간은 날마다의 거룩한 생활을 통한 성화와 선한 행위 즉 온전한 공로에 의해서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마틴 루터는 수도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고해성사를 드려도 언제나 마음에 평화가 없었고 번민에 가득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즈음에 스타우피츠 교수(J. Staupitz)는 루터의 뛰어난 지력과 종교적 열심을 갖춘 유능한 역량을 인정하고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로 추천하였다. 마틴 루터는 25살 때에 대학 교수되 되었다. 29살 때에 자기가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정식으로 교수가 되었다. 그 즈음부터 마틴 루터는 성경 연구를 통해서 복음적 진리를 깨달았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탑 속의 경험(Turmerlebnis)’을 하게 된 것이다.
 
마틴 루터에게 복음의 눈을 뜨게 해 준 성경 말씀이 본문인 로마서 1장 17절이다. ‘하나님의 의’란 인간의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수동적인 의라는 점을 깨달았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주시는 ‘덧입는 의’(imputed grace)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깨달음을 얻게 된 마틴 루터는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은 감격을 체험하였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의 깨달음은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은 감격스러운 경험을 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생각해 보라. ‘덧입는 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던 둘째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 왔다. 그런 아들은 아버지는 얼싸안고 목을 끌어안고 환영하였다.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기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하였다. 아버지 집을 향해 돌아 올 때는 거지와 같은 남루한 옷을 입고 있던 둘째 아들인데 아버지가 좋은 새 옷을 입혀 주신 것이다. 그리고 큰 아들에게 말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2)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이다. 16절을 먼저 보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현대인의 번역으로 읽으면 이렇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유대인에게만 해당되었으나 이제는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나.

첫째,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둘째,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셋째, 구원은 복음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행위나 공로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넷째,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열려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이 기쁜 소식에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 쓰인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무엇인가. ‘의(義)’라는 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힘인데 인간 스스로에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의’가 있는가. 인간에게는 의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아들을 낳을 수 있었나.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긴지 오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믿음의 아들 이삭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25년을 기다리게 하신 후에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에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다. 의심하는 것은 인간인 아브라함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 앞에 믿음이 생겼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이끌고 나가셔서 뭇 별을 바라보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의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에게 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상태를 의로 여겨 주신 것이다.
 
어떻게 십자가에 죽은 한 인간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나. 그러나 그는 좌우편에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와 똑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을 구원한 것이다. 이 십자가의 복음이 깨달아지고, 믿어 질 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로마서 1장 17절을 보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렇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 무엇인가. 요즘 수시철이다. 누구는 원하는 대학에 붙고 누구는 못 붙는데 어떻게 누구에게나 좋은 소식이며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을 수 있나. 16절의 말씀처럼 “유대인에게나 그리고 헬라인에게나” 다 같이 골고루 기쁘고 좋은 소식이란 이 세상에 단 한가지 밖에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는 복음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은 무엇일까.
앞의 믿음과 뒤의 믿음이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이다. 앞의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초보적인 믿음이다. 나중의 ‘믿음’이란 신앙  생활의 방향과 푯대가 정해지고 그 목표를 향하여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기독도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중에 성화(聖化,sanctification)되어 가는 믿음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 첫 믿음이 믿음의 완성이 아니지 않나. 마치도 어린 아기가 태어난 상태와 같다. 그러나 양육을 통해서 자라나고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이 믿음의 성장, 믿음의 진보,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져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축원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씀은 구약 하박국 2장 4절의 인용이다. 여기서 ‘살리라’라는 ‘제세타이’라는 말은 ‘영생’을 뜻한다. 그렇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하는 것이다.
 
대전 목원대학교의 전신은 대전감리교신학대학교이다. 그곳 신학대학의 교수였던 이호운 목사가 1967년에 쓴 찬송시에 박태준 선생이 곡을 붙인 찬송가가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이란 436장 찬송이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이 찬송시는 마치도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집대성한 찬송시라고 할 것이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문 안에서 크게 문제 삼은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원하는 규모의 베드로 대 성당을 지을 정도의 부와 재물을 갖고 있는 당시의 로마 바티칸이며 교황인데 왜 독일과 같이 먼 나라에 사는 백성들에게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 지을 비용을 요구하는가. 성전이란 마음의 전, 그리고 내가 속한 곳의 성전 중심이어야 한다.
둘째, 천국과 지옥은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에게 사죄권이 있다거나 교황이 죽은 자를 연옥으로 보낼 수 있다는 등의 주장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셋째, 면죄부의 판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함으로 죄 사함 받는다.”는 가르침에 위배되는 내용이다. 교황도 죄 아래 있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황이 면죄부 판매를 통하여 죄 사함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종교 개혁문을 내건  다음 해 1월 도미니칸 수도회 총회는 106개조에 달하는 항목으로 루터를 정죄하였다. 마틴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 교황에게 파문을 요청키로 결의하였다. 그 같은 해 8월 7일, 로마교황청은 마틴 루터를 로마 교황청의 법정에 출두시켜 화형에 처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의 압력을 견디고 살아남아 종교 개혁자의 길을 걸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요 그를 보호하시는 은혜였다.
 
1521년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은 루터는 그가 깨닫고 믿는 성경의 복음을 불경건한 자들의 조소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4월 17일 제국회의에 출석하였다. 마틴 루터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갖고 확신에 찬 고백과 대답을 이어 나갔다.  1521년 5월 26일 ‘보름스 칙령’에 의해 마틴 루터는 정죄되었다. 그러나 구라파 전역에서는 마틴 루터를 향한 지원과 후원이 계속되었다. 지식인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지속적인 지지를 얻었다. 루터는 그를 지지했던 선제후 프레데리히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성으로 도피하였다. 그 곳에서 라틴어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내는 대사업을 이룩하였다.
마틴 루터와 그를 잇는 종교 개혁가들의 강조점은 다섯 가지이다.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       /Sola Christus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a Deo Gloria
 
이 다섯 가지 신앙 정신이 마틴 루터로 하여금 그 당시 거대하고 막강하던 종교조직이었던 로마 가톨릭을 향하여 항거하게 한 힘이었다. 마틴 루터는 성경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보니 그 동안 교황청에서 강조해 온 것들과 교황의 칙령들에 얼마나 오류와 부정이 많았는지를 절절히 체감하게 되었다. 차례대로 조금 더 묵상하자.
 
 
오직 성경.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바탕은 성경 말씀이다. 성경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은 위험하다. 반면에 성경 말씀은 가까이 대하는 것 같은데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는 것도 건강한 신앙생활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였다. 복음을 전파하였다는 말이 무엇인가. 성경 말씀을 전한 것이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베드로의 설교, 스데반의 설교, 사도 바울의 설교 등이 입증하는 바이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에 베뢰아에 사는 사람들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지역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훨씬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받고자 하였다.
성경을 많이 읽는 다독도 중요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바로 묵상하고 실천해 가는 신앙생활이 중요하다. 이단과 사이비의 횡포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정통교회의 성도들이 성경 말씀에 기초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 보니까 저들 이단이나 사이비 신앙에 빠진 이들에게 끌려가고 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성경 말씀에 근거한 신앙생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4-17)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성읍에 거주하기 시작한지  일곱째 달에 예루살렘 성 수문 앞 광장에 모든 백성들이 모였다. 학사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져 오도록 청하였다. 남자 여자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들이 새벽부터 정오까지 모여서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나무로 만든 높은 강단에 학사 에스라가 서서 여호와의 율법 책을 펼칠 때에 모든 백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였다. 그 때 온 백성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 사이로 다니면서 여호와의 율법의 말씀을 해석해 주었다. 낭독하는 여호와의 율법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백성들이 다 울기 시작하였다. 수문 앞 광장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총독 느헤미야와 학사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은 울고 있는 백성들에게 “오늘은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하거나 울지 말라.”고 말했다. 느헤미야의 명령을 들은 백성들은 제 각기 모여서 살진 것과 단 것을 먹고 마시고 서로 나누어 주고 서로 크게 즐거워하며 들은 여호와의 율법의 말씀을 인하여 서로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 다음 날도 모이고 또 다음 날도 모였다. 일주일을 날마다 모였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대로 산에 가서 들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 나무, 종려나무,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지붕과 뜰과 성전 뜰과 수문 앞과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지었다. 여호수아 때 이후로 이 날까지 이어 오지 못하던 초막절기를 지키게 된 것이다. 학사 에스라는 날마다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하였다. 백성들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서 성회를 열었다.
신앙생활은 이처럼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고 회복하는 생활이다.
 
 
오직 그리스도.
신구약 모든 말씀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짐승을 잡고 피를 흘리게 한 후에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흐리심과 대속의 은혜를 상징하는 예표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하고는 한다. 맞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에덴에서 불순종하여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로부터 첫째 아담의 피를 받고 태어나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둘째 아담이다. 하나님은 첫째 아담의 범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므로 개혁 신앙의 바탕은 성경이며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이단과 사이비 교조들에게 빠져서 맹종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당시에 로마 교황청이 그러하였다. 마틴 루터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 45세때 말라리아에 걸려 선종)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증축을 위해 전임(前任)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1503-1513)때 공포된 면죄부(免罪符) 판매령을 이어 받았다. 1515년부터 면죄부 판매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로마 교황청의 이단적이고 비성경적인 강압 앞에 주변의 나라마다 많은 사람들은 침묵하며 끌려가듯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문제점과 부당함과 그 심각성 등에 대하여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교황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황과 그 주변의 성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가로채려 하였다. ‘면죄부’가 무엇인가. 설명이 필요 없다. 어떻게 그런 엉터리 주장으로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려고 하였단 말인가. “헌금함에 동전이 딸랑 하고 떨어지는 순간에 지옥에 간 부모의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식의 거짓된 주장으로 백성들을 어리석고 맹목적이고 변질된 신앙의 구렁텅이로 끌어 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예수와 이십오리를 동행하면서도 그가 부활하신 예수인 것을 몰라보았다. 그런데 엠마오의 한 집에 들어가신 예수께서 음식 잡수시기 전에 기도하시는데 저들의 눈이 열렸다.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 때에야 부활 예수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그 저녁으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향하여 갔다. 그리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전하였다.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대제사장 문중과 산헤드린의 재판장 에서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고 하셨다. 예수님 안에만 구원이 있다. 예수만이 길과 진리와 영생이시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다.”(골 3:11).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 이 신앙에서 벗어나면 그 누구라도 이단이고 사이비이고 가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영원한 능력이시다.

 
오직 은혜.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바울 대성당을 화려하게 건축하고 베드로 대성당을 웅장하게 건축해도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오늘날도 가톨릭은 여전히 성인을 따로 구분하여 세우지 않나. 하나님 앞에서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나. 하나님 앞에서 누구는 성인이고 누구는 죄인인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구원 받은 죄인과 구원 받은 못한 죄인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누가 구원 받은 죄인인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들이 구원 받은 죄인이다. 인간의 그 어떤 쌓은 선이나 공로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충성이나 봉사나 헌신은 구원 받ㄷ은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그 감사를 날마다의 생활 중에 표현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순례일 뿐이다
.
구원 받은 성도의 은혜를 아는 이들은 예배가 다르고 기도가 다르고 찬송이 다르고 헌신이 다르고 섬김이 다르고 충성도가 다르다. 은혜를 알고 나면 은혜를 받고 나면 다를 수밖에 없다. “은혜로다”라는 찬양을 보라.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주가 계신 지성소에서 주를 찬송함이 내 영혼에 부어주신 주의 큰 은혜로다.”
 
주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나 베다니의 마리아를 보라. 순전한 나드 향유 옥합이 문제인가.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려서라도 주의 은혜에 보답하고저 하는 감격이 있지 않나. 마리아의 섬김과 화내던 가롯 유다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은혜를 모르면 가롯 유다처럼 행동하고 마는 것이다. 오직 은혜! 그 길만이 살길이며 주 안에서 누리는 영생의 시작이다. 
 
   
오직 믿음.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무릎의 흰 뼈가 드러나도록 고행하여도 구원은 없다. 40일 금식을 40번을 하여도 구원은 그렇게 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 의한 선물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분노한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교황청에서 발행하는 면죄부에 의해서 죄 사함을 받는단 말인가.
 
당시 마인츠 대주교가 테첼을 베드로 대성당 건축기금 모금을 위해 과거와 미래의 죄를 씻겨주는 면죄부를 판매하라고 독일로 파송하였다. 로마의 사절단 중 한 명인 존 테첼이 교회가 인증하는 죄 용서를 위한 면죄부를 판매하자 마틴 루터는 격분했다. 마틴 루터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구원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기만 속이고 수도원의 유익을 위해 파렴치하게 착취하는 것에 분노하였다. 그래서는 결국 그는 95개 조항의 자세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의 교회의 정문에 부착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토론하자고 제안하면서 종교 개혁의 불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주를 믿는 성도라면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 갈 줄 알아야 한다.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을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교황이나 추기경이나 총회장이나 감독이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할 수는 없다.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이다. 주를 믿는 성도라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바울의 권면처럼 살아가야만 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롬11:36). 이 말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고 무엇이 더 필요한가. 다시 로마서 1장 17절을 보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처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승리와 구원의 삶을 사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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