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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구원의 소리(시118:15-24)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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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3-13 00:32 조회 18,977 댓글 0
 
우리는 며칠 전 이웃 나라 일본에서 일어난 천연재해의 참담한 소식으로 인하여 충격과 아픔 속에 주일을 맞고 있다. 지난 20세기 이후 세계 역사상 다섯 번째 규모라고 한다.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본 동북부 해안 150여 킬로미터를 할퀴고 지나갔다. 2011년 3월 11일(금) 오후에 발생한 대 재앙의 소식이다.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 상황을 가름 할 수 없는 참담한 주말을 맞았고 오늘 우리는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도 여진의 두려움 가운데 공포와 불안 속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폐허 속에 망연자실하고 있다. 어찌하여 인간이 이런 고난을 겪으며 이 땅에 살아가야 하는지 해석하기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것이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세계 열방의 도움 가운데 어서 속히 재기하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이 손바닥과 손잔등의 차이와 같다. 사도 바울은 생명과 죽음 사이에 끼어서 살아간다고 했다. 일본의 재난 현장을 보면 산자와 죽은 자가 한 현장에 뒤 엉켜 있다. 죽은 자의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바닷물에 휩쓸려 나간 이들의 죽음은 아마도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자연 재해 앞에서 인간의 무기력함과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 보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복음 성가의 가사처럼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이렇게 고백하며 찬송할 것이 아니라 다음 순간을 나는 모른다고, 매 순간 순간을 살아가노라고 고백해야 옳을 것이다.

지난 주일에 묵상한 시편 118편의 14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구원이 되셨도다.”고 고백했다. 나의 구원이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요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이렇게 찬송하지 않는가. 그렇다. 우리 각 사람의 구원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나의 구원은 철저히 그분에게서 선물과 은총으로 임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이 시작되는 15절에도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The voice of rejoicing and salvation is in the tabernacles of the righteous/ KJV)라고 했다. 인간이 언제 기뻐하고 언제 구원 받은 것으로 인하여 함성을 지르게 되는가. NIV 성경에 보면 “의로운 자의 장막에서 기쁨과 승리의 함성을 지른다.”고 하였다.(Shouts of joy and victory resound in the tents of the righteous.)
그렇다. 일본의 그런 참담한 재난의 현자에서도 이제 계속 구조 작업과 복구 작업이 진행되다가 보면 아직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 참담한 죽음의 현장에 생존한 이들을 한 명씩 한 명씩 구조해 내는 생존자를 향한 기쁨의 함성이 세계의 뉴스를 타고 울려 펴질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한 영혼의 가치를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이번 이 엄청난 재앙으로 인하여 일본 열도에 하나님을 잘 믿게 되는 기독교의 영적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도하자.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 가는 경제 대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경제적인 힘을 가지고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속수무책이다. 그것이 자연의 위력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았다고 하나 산 것이 아니다. 인간의 그 무엇도 자랑 할 것이 없다.

15절의 ‘의인들의 장막’이란 KJV 영어 성경으로 보면 ‘tabernacles’ 즉 하나님의 집들을 말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집 즉 성막(聖幕)이다. 그곳에서 기쁜 소리와 구원의 소리를 낸다고 하였다.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그런 본질적인 기쁨과 구원의 함성을 발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자, 그러면 오늘의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안에서 그 무엇으로 인하여 자신의 장막 안에서 기쁨과 구원의 소리를 낸다고 하였는가.

여호와의 오른 손의 권능(權能)으로 인하여 기쁜 구원의 소리를 발하게 하신다.
15절과 16절에 하나님을 의인화 한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성경은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표현할 때에 꼭 왼손으로 표현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표현한다. 왼손잡이들은 섭섭할 수도 있겠으나 성경은 그렇다. 유대인들은 손을 사용할 때에도 선하고 깨끗한 용도로는 오른 손을 사용한다. 덜 깨끗하거나 부정한 것을 부득불 만지거나 집어야 할 때에는 왼손을 사용한다.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자면 오른 쪽은 -바른쪽, 좋은 쪽, 의로운 쪽, 선한 쪽, 힘이 센 쪽, 능력이 있는 쪽 -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성경이 오른 손이란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상징할 때이다. 오늘 본문 15절과 16절에서만도 ‘여호와의 오른 손’이란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창세기 48장 14절에 보면 야곱이 늙어서 하나님 앞으로 가기 전에 열두 아들들과 손자들인 요셉의 두 아들들에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데 야곱의 두 손이 오른 손은 요셉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어 졌고 왼손은 장남은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졌다. 당황한 것은 요셉이었다. 그것도 야곱이 양 손을 엇바꾸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 때에 아들 요셉이 당황하고 놀란 표정으로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 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창48:18)하고 다시 요청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다시 안수하려 하지 않고는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하면서 의도적인 축복의 방법이었음을 설명해 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 보면 아들 요셉도 오른 손이 왼 손보다는 더욱 축복의 손이라는 기대와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 29장에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제사장의 거룩한 직임을 구별하여 위임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는 그 숫양을 잡고 그것의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고.”(출29:20)라고 했다. 숫양을 잡아서 그 피를 오른 쪽 귀와 오른 손 엄지와 오른 발 엄지에 바르고 그 나머지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라고 했다. 오른 쪽에다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이처럼 오른 쪽이란 특별히 축복과 권능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오른 손이란 힘과 권세를 상징하기도 한다.

시편 45편 4절에 보면 고라 자손의 시에서 “왕의 오른 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로다.”라고 했다. 출애굽기 15장 6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의 가사에서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Your right hand, O LORD, was majestic in power. Your right hand, O LORD, shattered the enemy./NIV)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이든, 나라이든, 민족이든 지금 있는 형편에서 시작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축복과 권능을 사모하고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신명기 1장 11절에 보면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千)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福) 주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다. 

사도행전 7장 56절에 보면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의 폭도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게 된 스데반 집사가 죽음 직전에 성령에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는 장면이 나온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천국에 계신 곳도 하나님의 왼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편, 하나님의 오른 편이라고 했다. 이 같은 복된 승리의 함성과 기쁜 구원의 함성이 넘쳐나는 예배와 기도의 삶이 계속되기를 사모하자.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함으로 기쁜 구원의 소리를 발하게 하신다.
17절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은 위험과 질병과 사고와 위기를 경험하며 살아가는가. 그러한 모든 상황과 모든 형편과 모든 변화 속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생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나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면서 살아가는 적극적인 전도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어제 주일 예배처에 다녀 가다가 운전 중에 극동방송을 들었다. 김장환 목사님이 사회를 보며 진행하는 좌담 프로그램이었다. 과거에 해군 참모총장을 지낸 김홍렬 장군이 초대 손님이었다. 1939년에 충남 서천의 100여 가구 되는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평범한 농촌 마을에서 아홉 남매 중에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마을에 사는 어느 권사님이 자기의 그 많은 형제들 중에서 자기만 교회에 데리고 다녔다. 부모도 믿지 전인데 부모의 반대가 없었다고 한다. 자기가 어려서 먼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되어서 오늘 날에는 아홉 남매가 모두 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 시작은 동네 아주머니 중에 예수를 믿는 권사님 한 분이 어린 아이 홍렬이를 교회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것으로 부터이다. 그는 시골 마을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가난한 환경에서 대학 갈 길 중에 학비 문제가 해결 되는 방법으로 해군 사관학교 제 16기로 입학하게 되었다. 별 네 개를 다는 사성장군으로 해군 참모총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분당갈보리 교회에 출석하는 장로이다. 시골 마을의 어린이 하나를 교회로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전도의 시작이 그의 아홉 형제자매 모두를 구원하게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그의 어머니는 권사님을 예수님을 잘 믿다가 하늘나라에 가셨다고한다.

나에게 생명이 있는 동안에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가장 영광스럽고 복되고 자랑스럽고 자손 대대로 복된 일은 나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만방에 선포하는 일이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 살아가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못 마땅하게 범죄하며 살아갈 때에 그 자리에서 징벌하여 거두지 아니하시며 길이길이 참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경책하여 회개하게 하고 깨달음을 갖고 주님의 하시는 일을 선포하며 살아가도록 다듬어 가시는 자상하신 주님이시다.

17절과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란 말씀이 나온다. 이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고 했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가만히 관찰해 보면 모든 것이 신비요 기이함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22절에 그 유명한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마치도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분으로 이 땅 위에 오셔서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오늘 날 우리들의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이웃의 지방과 교회와 연회까지도 우리를 버리려 하지만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면 된다. 하나님은 건축자의 버린 돌을 주우셔서 역사의 정점에 서는 골고다의 십자가의 아들로 우뚝 세우셨다. 그분은 창과 대못에 양손과 양 발과 옆구리를 찌려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다시 사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좌편 강도에 의하여 처절하게 조롱을 당하셨지만 고개를 떨어뜨리고 죽으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매 주일 마다 맞이하는 주의 날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야 하는 날이다.

24절이 그렇게 선포하지 않았는가.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This is the day the LORD has made; let us rejoice and be glad in it.) 이 날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슬픈 일을 당하였어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고통스럽고 답답하고 우울한 일들을 겪었어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야 하는 날이다. 우리를 죄와 악에서 건지고 구원하신 은혜를 생각하면 그 어떤 것도 즐거워하고 기뻐하지 못할 것이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방주 안에서 참고 기다리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그런 날이 왔다. 이십 오년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이 태어남으로 그런 즐겁고 기쁜 날이 왔다. 호렙 산에서 양 떼를 몰며 늙어가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불이 붙는 떨기나무의 환상 가운데 찾아가서 만나 주셨을 때에 그런 즐겁고 기쁜 날이 왔다. 광야와 동굴 속에 숨고 피하던 다윗에게 그런 영광스럽고 즐겁고 기쁜 날이 왔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치던 앞 못 보던 시각 장애인 바디메오에게 주님을 통하여 광명한 세상을 보게 되는 그런  즐겁고 기쁜 날이 왔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런 즐겁고 기쁜 날이 왔다. 수가 성 우물가에 한 낮에 물 길러 나왔던 여섯째 남자와 살아가던 숙명적인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그런 즐겁고 기쁜 날이 왔다. 비겁하게 피하고 숨고 도망 다니던 베드로가 승천하시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중에 그런 영광스러운 성령 충만의 날이 왔다. 우리 모두에게도 각 사람에게 그런 기쁘고 즐거운 감격의 날이 반드시 찾아 올 줄로 믿는다.
 
한 나절을 살고, 하루를 살고, 한 주간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이 땅의 처처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사고와 사건의 소식을 듣지 않는가. 전쟁과 난리와 테러와 지진과 쓰나미와 각종 교통사고와 살인과 방화와 음모와 궤계로 인한 불안하고 참담한 소식들을 얼마나 많이 들으면서 하루하루를 사는가 말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도저히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진과 쓰나미의 그 엄청난 재난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허탈한 한계를 보라. 오늘 본문을 24절까지 보았으나 25절을 보라. 시편 기자의 간절한 기도가 이어진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이 얼마나 진솔하고 간절한 기도요 간구인가. 구원과 형통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누구 앞에 구할 것인가. 세상의 방백과 왕들인가. 시편 2편 12절에 보면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라고 했다. 천하 만민 중에 믿음으로 주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모퉁이 돌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께 입 맞추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인생들을 다 영원히 복되게 하실 것이다. 인생의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들마다 반드시 즐겁고 기쁜 그런 날을 선물로 허락해 주실 줄로 믿는다.

여호와의 의로운 문으로 들어가 감사하려는 자에게 기쁜 구원의 소리를 발하게 하신다.
19절과 20절에 보면. ‘의(義)의 문’ 혹은 ‘여호와의 문’이란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말씀하는 문은 성막과 성전에 예배하기 위하여 들어오는 자들이 통과하는 문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들을 향하여 활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문이요 의의 문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7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양과 같은 어리석은 인생의 구원의 문이시다. 요한복음 10장 9절에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문으로 삼고 그 분 안으로 들어가 살고 그 분 안에서 구원을 받고 그 분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은 인생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마다 잘못된 경우란 없다. 예수님을 문 삼고 그 분 안으로 들어 갈 때에 인생의 영원한 축복이 보장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늘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인생의 문 삼고 의의 문으로 들어가고, 여호와의 문으로 들어 갈 때에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의로운 자의 생을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응답이고 이것이 구원이니 참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의의 문이며 여호와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양인 인생의 문이실 뿐만 아니라 선한 목자가 되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영원한 문으로 모시고 그 분 안으로 들어갈 때에 들어가며 나오며 풍성한 꼴을 먹게 되는 것이다.
가끔 언급하는 필립 켈러(Phllip Keller)의 책, <양과 목자>에 보면 그런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사의 아들로 자라나서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토양학을 공부하고 8년 동안이나 양을 치는 목장 주인이었다. 그는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의 성경을 몸소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 책을 썼다. 그래서 그의 책은 통찰력이 넘치고 힘이 있고 감동적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문으로 삼고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인생으로 살아야 복된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를 인생의 목자로 삼아야만 복된 것이다. 거기에 인생의 영원한 구원의 해답이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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