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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계명을 지키면(요15:9-16) 2017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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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9-17 23:07 조회 14,805 댓글 0
 
내 계명을 지키면(요15:9-16)               2017. 9. 10
 
포도나무 비유의 중요한 강조는 ‘내 안에 거하라’는 초청이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7절의 말씀대로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관계를 말한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렇지 않나.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영접된 주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성령의 역사가 아닌가 말이다. 예수 안에 거하는 생활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에녹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65살에 아들 무드셀라를 낳은 후부터 그렇게 하였다. 아들 무드셀라를 낳던 해에 무슨 특별한 은혜 체험이 있었던 것 같다. 그 후로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방주를 건설한 노아도 그렇지 않나.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겠나. 그러나 노아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하며 살았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한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한 의인이요 은혜를 입은 자였다.
 
아브람도 그렇다. 아브람이 75살 때에 하나님이 그를 말씀으로 불러 내셨다.
“아브람아!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아브람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러므로 ‘내 안에 거하라.’는 예수의 초청은 농부이신 하나님의 말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본문인 10절과 12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내 계명을 지키면”, “내 계명은”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곧 예수 안에 거하는 생활인 것을 강조해서 설명해 주고 계시다. 자,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미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새 계명’ 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셨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면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다. 그렇다. 계명을 지키며 살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라야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리에 불과하다. 벳세다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펼쳐진 어마 어마한 축복의 식탁에 둘려 앉아 광야의 배부른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무리다. 남자만도 5,000명이 넘었다는 그들은 무리였다. 2만여 명의 무리였다. 무리는 제자가 아니다. 떡 주면 떡 받아먹고, 생선 주면 생선 받아먹고 배부르고 나니 “예수를 임금삼자”고 달려드는 무리는 어디까지나 무리일 뿐이지 제자는 아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가만히 그들을 피하여 홀로 기도하러 가셨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수의 가신 길을 묵묵히 따르는 자가 제자이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이 말씀을 무리들에게 하셨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렇다.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무리들 중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이렇게 차례대로 따르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12제자를 삼으시고, 70인의 제자의 길을 말씀해 주신 말씀이 포도나무 비유이다.
 
요한복음 15장 8절, 열매를 많이 맺어야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계명을 지키는 믿음에 대하여 강조해 주셨다. 자, 그러면 ‘예수의 계명’을 지키는 그 증거가 무엇인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예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온 증거이다. 그러면 예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의 반복적인 강조가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계속하연 반복적으로 사랑의 함수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9절을 보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랑, 예수님과 세상 성도들과의 사랑,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사랑이 어떤 차원의 사랑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시다.

예수님은 효자셨다. 하늘 아버지께도 효자요 나사렛의 아버지와 어머니께도 효자셨다. 예수님은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잘 지키시는 효자셨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이 땅에서 그를 통해서 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바탕은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계명을 제대로 잘 지키며 사는 길이다.
 
예수의 계명을 잘 지키며 살고 서로 사랑하며 살면 어떤 증거가 주어지나.

기쁨의 충만.
예수 안에 거하는 증거는 기쁨이어야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말씀하신 “나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 다른 기쁨, 다른 즐거움, 다른 만족, 다른 행복, 다른 소망, 다른 평화를 말씀하신 것이다. ‘샬롬’이란 히브리인들의 인사에 포함된 그런 다양한 의미의 평화와 기쁨 말이다. 예수께서는 부활 하신 후에도 이와 같은 인사로 인사하셨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모여 숨어 있는 곳에 찾아 가셨다. 제자들은 두려움 가운데 모여 숨어 있었다. 그곳을 찾아 가신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인사하셨다. 이 인사는 다른 말로 하면 “너희에게 기쁨이 있을지어다.”라는 인사이다. 예수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그 때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이신 것을 알고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
 
요한복음 15장 11절 말씀을 보라. 예수께서는 “내 기쁨” , “너희 기쁨”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 그러면 세상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과 초조와 우울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들이 기쁨이 충만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왜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구원의 길이며 기쁨이 충만하게 살아가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항상 기쁘고, 항상 즐겁지는 않다. 속이 상한 일이 생기면 속이 상하고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기분이 나빠지고, 우울한 사건이 생기면 우울해 지고, 답답한 일이 생기면 답답해지는 것은 누구나의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믿음을 살고,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사는 증거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힘이다.
 
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에 찾아 가신 예수님은 두 번 반복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말씀을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못 자국 난 손과 창 자국 난 옆구리를 본 제자들은 주님이신 것을 알아보고 기뻐하였다.
기쁜 일이 있어서 기쁘고 예수께서 부활하셨으니 기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기뻐할 이유가 있어야 기쁜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주의 제자 된 우리의 기쁨의 근원은 무엇인가. 부활 신앙이다.
 
성도는 서로 사랑하며 기쁘게 살아가야 한다. 예수의 제자라면 서로 사랑하며 기쁨이 충만하게 살아가야 한다. 가족들 간에 서로 사랑하고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 편을 가르면 안 된다. 끼리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 배운 자와 덜 배운 자, 능력 있는 자와 부족한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힘 있는 자와 연약한 자, 잘 나가는 자와 주저앉아 있는 자 간에 서로 돌아보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이며 제자의 모습이 아닌가. 나를 사랑하는 이만 사랑하고 나를 좋아 하는 이만 좋아하고 나를 가깝게 대하는 이만 가깝게 대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며 지속적인 사랑이며 영원한 사랑이고 완전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라는 찬양을 간혹 부르고는 한다.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삶을 다해”
 
이와 같은 찬송을 날마다의 고백이요 매 순간의 고백으로 삼고 살아 갈 수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공급해 주시기를 원하는 그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은혜로 그런 기쁨으로 그런 감사로 그런 구원의 감격으로 부르는 찬양이 <사랑송>이 아닌가.
 
“주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축복으로 당신을 축복합니다
형제의 삶속에 주 영광 나타날 때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리
자매의 삶속에 주사랑 나타날 때에 주님의 구원 임하리”

라는 찬양 말이다. 기쁨의 노래, 기쁨의 찬양은 성탄절 새벽이나 부활절 새벽에만 몇 차례 부르고 그칠 찬양이 아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찬양과 멧시지는 365일 날마다 울려 펴져야 할 구원의 찬송이며 기쁨의 찬송인 것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하여라.”
 
기쁨의 충만은 기도 생활의 강조와 감사 생활의 강조보다 더 앞에 강조한 말씀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의 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와 같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생활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비난과 배척과 조롱과 멸시와 능욕과 희롱과 고난과 핍박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셨지만 그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와 어둠과 사망을 이기신 영원한 평강과 기쁨의 근원이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서로 사랑하며 주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증거 중의 첫째는 기쁨이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운전 중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날 그냥 내버려 둬” 라는 송골매의 노래를 처음 들어 봤다.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송골매는 배철수 씨를 포함한 6인조 그룹 가수들의 이름이다. 찾아보니 이런 가사다. 사랑도 미움도 지나가고 사라져 가는 것이니 고독도 슬픔도 이기고 내 식대로 살아가도록 ‘나를 그냥 내버려 둬’ 그런 가사다.
 
“창밖엔 빗방울 떨어지고 내 가슴엔 고독이 밀려오고
그 누가 내 이름을 불러도 나를 그냥 내버려둬
창밖엔 흰 눈이 쏟아지고 내 마음엔 슬픔이 다가 오네
그 누가 내 이름을 불러도 나를 그냥 내버려둬
사랑은 흰 눈 속으로 미움도 빗물 속으로
모두 그렇게 모두 그렇게
사라져 가고 사라져 가고 사라져 가고 사라져 가네
 
성도는, 예수의 제자는 자기 혼자 고독과 슬픔, 사랑과 미움을 삭이며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자가 결코 아니다.
성도라면, 예수의 제자라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안다면 기쁘게 살아야 한다. 기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 예수의 제자라면 말이다.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더불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며 서로 용납하며 서로 너그럽게 대하며 서로 덮어주며 서로 가리어 주며 서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기쁨이 있고 충만한 기쁨이 계속하여 생겨나고 공급되는 것이다.
 
<날 좀 그냥 내버려 둬>라는 동화책도 있다. 동화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교훈이 담겨 있다. 올 2017년에 그림책의 노벨상이라는 ‘칼데콧 아너 상’을 받은 책이다. 베라 브로스골은 1984년생이니까 이제 33살이다.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에 이민 가서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 산다. 책도 많이 쓰고 상도 많이 탔다.
 
엄청나게 많은 어린애들을 데리고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할머니는 손자 손녀들을 위해서 뜨개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많은 애들이 소란을 피우니 도저히 뜨개질을 할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난 할머니는 산 속 깊이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많은 곰들이 곁에 나타나서 뜨개질을 방해하였다. 나중에는 동굴 속으로 피해 들어갔다. 그런데 그 동굴 속에는 산양 떼가 겨울을 나면서 할머니를 귀찮게 했다. 산꼭대기로 올라간 할머니는 달나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외계인들이 나타나서 뜨개질을 방해하였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게 된 할머니는 깜깜한 ‘웜홀’을 찾아 들어갔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깜깜한 그 곳에서 할머니는 혼자 외롭게 지내면서 30벌의 스웨터를 떴다. 그런데 어린 손자손녀들의 너무나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30벌의 스웨터를 들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할머니를 반기는 손자손녀들에게 스웨터를  나눠 주며 기뻐하는 애들을 보며 덩달아 할머니에게도 기쁨이 넘쳐 나게 되었다.
기쁨의 충만! 당신은 어디서 기쁨을 찾고 있는가.

예수님의 친구.
“사람이 친구를 위하
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
 
제자는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아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정말 마음이 통하는 친구는 10년 후에 만나도 친구고, 20년 후에 만나도 친구다. 어렸을 적 친구, 죽마고우 말이다. 자라나면서 맘이 통하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 금방 새로 사귀어서 좀 서먹한 친구 말고 10, 20, 30, 40년 아니 평생 같이 미운 정 고운 정을 함께 나눠 온  그런 사이 말이다.
 
교회 생활,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렇지 않나. 아무리 부모자녀 형제자매의 의리가 좋기로 서니 매주 만나고 날마다 만나고 매시간 만나고 다시 또 만나는 가족이 있나. 물론 한 교회에서 그렇게 부모형제자녀들이 다 같이 모일 수 있으면 좋지. 그러나 교회 생활을 통해 만난 남녀노유 성도의 교제와 사귐이란 나이와 신분과 배경과 지역과 여건을 초월한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 가지 않나.
 
교회 생활이란 친구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나이도 뛰어 넘고 남녀의 성(性)도 뛰어 넘는 것이다. 세상은 다르다. 동창끼리 모이고 동문끼리 모이고 동향끼리 모인다. 취미 따라 모인다. 그래서 세상에는 동우회가 많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나온 대학이 아니면 사위나 며느리도 맞지 않는다. 세상은 철저하게 차별화 되어 있다. 가진 자끼리, 배운 자끼리, 출세한 자끼리, 힘 있는 자끼리 모인다. 잘 난 자들끼리 모인다.
 
그러나 교회는 다르다. 예수님은 그 어느 누구라도 친구 삼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친구 삼을 수 있겠나. 진정한 친구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버리는 관계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계명대로 행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예수님의 친구답다는 말씀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친구처럼 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언약과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430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셨다.
 
다윗은 하나님이 마음에 꼭 들어 하셨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고 하셨다. 하나님은 마음에 드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영광스러운 가문이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와 같은 자들이었다. 나중에 아쉽게도 가롯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가서 예수를 팔아 버렸다. 그 전까지는 예수님의 12제자는 예수님의 분신이요 예수님의 친구요 예수님의 전부였다.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을 받고 나니 예수님의 11명의 제자들이 맛디아를 채워서 12명이 구라파와 서유럽과 인도와 스리랑카 지역까지 넘나들며 복음을 전했다. 순교하기 까지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살았다. 순교의 순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 그런가. 예수의 제자들은 친구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가르쳐 주시고 알려 주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제대로 몰라서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 다니고 숨고 했는데 성령 받고 깨닫고 보니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 제자 됨이란 말이다.
 
15절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진심으로 친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참다운 친구사이라면 비밀이 없어야 한다. 친구인줄 알았는데 등 쳐먹고 사기치고 도망가 버리는 것은 친구가 아니다. 한번 친구는 평생 친구, 영원한 친구여야 한다.
 
함석헌의 시 중에 <그대 이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다.
대학로 돌비에도 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친구처럼 행동한 여인이다. 그녀는 가롯 유다와는 차원이 달랐다. 예수께 향유 옥합을 깨어 부어 드린 두 여인들은 예수의 생애에 두고 두고 기억되는 친구와 같은 여인들이었다.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는 예수님의 친구였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 가서 머무는 것을 기뻐하셨다. 나사로의 여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도 예수님께 친구처럼 의리 있게 행동하고 한 결 같이 섬기던 자매들이다. 베드로의 장모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늘 친구처럼 대한 여인이다.
 
아리마대 사람요셉, 침향 백 근을 들고 나와서 예수님의 장례를 도왔던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친구와 같은 신앙생활을 한 주인공들이다. 입으로만 떠들고 큰소리치며 장담하다가 부인하고 도망가 버린 베드로와는 달랐다.
 
사도 바울의 곁에도 친구와 같은 이들이 많았다. 바나바, 디모데, 디도, 누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뵈뵈,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의 아내,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 오네시보로, 에라스도, 두기고, 아리스다고, 유스도, 에바브라, 눔바와 같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곁에 친구처럼 붙여 주신 신앙의 친밀한 동역자들이었다.
 
로마서 16장 3-4절에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칭찬하는 바울의 편지를 대하게 된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동역자들이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라도 내어 놓았다.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우리교회에도 예수의 친구요 나의 사역의 친구와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박상규의 “친구야 친구”라는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이거다.
“아하 자네와 난 친구야 친구”
 
예수님의 친구, 주의 거룩한 사역의 현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 해 나가는 복음 동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를 쏟아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해 주신 예수의 영원한 친구로 살아가자. 진정한 친구란 친구를 위하여 의리(義理)를 지키고 자기 자신보다 친구를 더 생각하고 친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어 줄 수 있어야 참 친구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의 참 친구요 영원한 친구였다. 그런 사이, 그런 인간관계, 그런 세상살이, 그런 교회로 세워 나가자.
 

택하여 세우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 진리와 복음을 깨달아 알고 믿게 된 것도 나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이 곳에서 더불어 주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도 나의 선택이 아니다. 내가 나의 남 녀 된 성을 선택하거나 내가 이런 키, 이런 몸, 이런 모습, 이런 나의 신체조건, 이런 나의 그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하여 취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지 않나. 나를 나 되게 하신 것은 전적은 그 분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다. 그 분의 부르심이요 그 분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맞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의 예수님 말씀 그대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선택하여 이 땅에 보내 주신 삶이라면 숭고하지 않나. 거룩하지 않나. 그 선택, 그 부르심 그 사명, 그 분부하심, 그 기대하심 앞에 마음 깃이 여며지지 않나. 뭔가 지금보다는 좀 더 다르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왜 그런가.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그 무엇에 대하여 말씀하시니 또 다시 무언가를 구하려고 하지 않나. 우리가 구할 것은 더 이상 떡과 밥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그의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해야만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이다. 주님이 찾으시는 많은 열매란 돈 많이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높아지고 군림하고 좋은 집, 넓은 아파트, 좋은 차, 값비싼 보석, 이 세상 열락을 즐기며 사는 그런 도취 생활이 결코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제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장차 당하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반대할 때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고 책망하며 해 주신 말씀이시다. 계명을 지키는 길은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길이다. 주님의 택하심에 합당한 제자의 길을 걸어가며 예수께서 친구라고 인정하실 만한 믿음을 지켜 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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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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