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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열심(사9:1-7) 2017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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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9-04 21:18 조회 16,041 댓글 0
 
여호와의 열심(사9:1-7)                2017. 8. 27

지하철 광고 중에 “힘 내세요 라고 말하지 말고 힘이 되어 주세요.”라는 문구가 있다. 곁에 계신 분에게 그렇게 인사하자.
 
“제가 항상 곁에서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사야 8장과 9장을 연결하는 단어 중에 한글성경 번역에는 빠진 단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이다. 영어 번역에는 ‘nevertheless’라는 단어가 이사야 9장의 첫 시작을 알리는 단어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8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리며 격분하며 자기의 왕과 하나님을 저주하며 위로 하늘을  처다 보고 아래로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며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고 했다.
 
그런데 9장의 시작은“그럼에도 불구하고”전혀 다른 세상이 전개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해 주고 계시다. 요즘, 아니 지금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가 있는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을 정도로 막다른 골목에서 방황하고 배회하고 갈등하고 착잡해 하는 이가 있는가. 지금의 현실이 오래가는 정도가 아니라 평생 갈 것 같은 막막함과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갇혀 있는 이가 있는가.
이사야를 통해 진단하시는 시대 상황이 그러하였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런 고통과 흑암의 날들이 계속될 것이란 예언이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향한 위로와 소망과 격려의 말씀을 하기 시작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심(本心)이다. 지금 타락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웃인 애굽을 의지하여 아람이나 북 왕국 이스라엘이 힘을 합친 연합군의 침략 위협에서 살아남으려는 것이 남 왕국 유다의 속내였다. 그와 같은 남 왕국 유다의 왕과 방백들과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회복을 기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시며 기대하심이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이사야서에는 메시아에 대한 6가지의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7장 14절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리고 본문인 9장 6절에 5가지의 예언이 더 나와 있다.
‘정사’(政事, government)라는 말은 ‘다스림’ 즉 ‘정치, 통치’를 말한다.
‘기묘자’(奇妙者)라 ‘모사’(謀事)라는 말은 ‘놀라운 상담자’(wonderful counselor)라는 뜻이다. 이를 하나로 합하기도 하지만 따로 나누어 이해하기도 한다.
‘기묘자’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전능자를 일컫는다.
‘모사’란 인간의 지혜로 따를 수 없는 지혜와 도우심의 근본이시란 말이다.
그러므로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놀라운 상담자 (wonderful counselor)이시다. 주님은 모르는 것이 없으시고 못하는 것이 없으시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해결 받지 못할 문제란 전혀 없다. 주님은 완전한 해결자, 완전한 대답이시다. 공동번역은 “탁월한 경륜가”라고 했고, 새번역 성경은 “놀라우신 조언자”라고 번역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은  ‘전능자’
영존하시는 아버지 (Everlasting Father)는 ‘영원하신 분’
또 하나는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이시란 예언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시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와 열방 가운데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시고 상담해 주시고 도와주시며 전능하시고 영존하시는 평강의 왕이시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중심에서 어떻게 역사를 주관하시고 운행해 가시는가를 선포하는 장엄한 예언의 말씀이다. 7절 끝에 보면 그 분,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 하였다. 그 분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The Zeal of the LORD Almighty)이 모든 일을 이루시리라고 하였다.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어둠이 사라진다.
평안이 찾아오면 그 동안 겪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전쟁의 불안과 두려움도 전쟁이 멈추고 평화가 찾아오면 언제 전쟁하였는지를 잊게 된다. 물론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간의 슬픔과 아픔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했나.
 
 
영화롭게 하신다.
1절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표현은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자신의 삶이 영광스러워 지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어진 자신을 향한 영광을 부끄럽게 망치고 만다. 이는 정치 경제 국방 외교 문화 예술 문학 교육 모든 분야에 다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님 안에서 영화로워질 수 있을까.
1절에 보라. 전에는 고통 받던 자였는데 이제는 고통의 흑암이 없어지게 하신다고 했다.  옛적에는 멸시를 받던 땅인데 이제는 영화롭게, 영광스럽게 하신다고 했다. 1절에‘스블론과 납달리’란 지명이 나온다. 그 곳은 갈릴리 서편의 땅으로 이스라엘의 가장 열악한 변방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은 해변 길과 요단강 저쪽 이방인들이 살던 갈릴리 땅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은 절대로 그 땅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곳에 사는 백성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표현이 완료형이지만 아직 그렇게 된 것이 아니지 않나. 장래에 그런 날을 주시리라는 약속이다. 그런데 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이미 성취된 일로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은 말씀하신 말씀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 누구나 기분이 좋아지지 않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저하기만 하면 때가 되면 높이시고 존귀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미국 뉴욕시 북부의 뉴욕 주에 위치한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의 교훈은
 
“의무· 영광· 조국”
(Duty, Honor, Country)
 
이다. 웨스트포인트는 지명이다. 학교 이름이 아니다. 1802년에 설립되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2009년 포브스지 선정 '최고의 미국 대학교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그 해에 하버드, 프린스턴, 칼텍,  스와스모어, 윌리엄스, 예일 같은 학교를 앞질렀다. 유능한 인재들이 다니는 학교가 미육군사관학교이다. 한 학년의 생도 수가 1,100명이다. 전체 4,400명의 생도를 대표하는 여단장으로 최근에 4학년인 20살, 시몬 에스큐 흑인여학생이 뽑혔다. 뉴스는 215년 역사상 최초의 흑인여학생 여단장이 뽑혔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지도력은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남녀의 성별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미국육군사관학교 최초의 흑인 남성출신 여단장은 1980년에 배출되었다. 그는 35년이 지난 오늘 날 한미연합사령관이며 주한 미군 사령관인 빈센트 브룩스(Vincent Keith Brooks, 1958) 대장으로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미국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만일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효과적이고 압도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북한을 지도에서 없애는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어진 의무를 10년, 20년, 30년 아니 평생토록 성실하게 열심히 감당해 갈 때에 일정한 때가 되면 주어지는 것이 영광이 아닌가. 한 평생 조국을 위하여 사심을 버리고 살아간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영광스러움이다.
 
임관하기 전에 영광이 땅에 떨어지고 퇴교되는 불행의 주인공도 있다. 별 넷을 달았으나 국가적인 축하를 받으며 전역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30년 군생활의 마지막을 욕되게 옷을 벗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다운 삶, 믿음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므로 순간마다 날마다 영광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주님이 경고하여 말씀하시지 않았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여기서 말씀하는 “아버지의 뜻대로”가 무엇인가.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이 악한 세상에서 죄와 악을 분별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고 영화롭고 영광스러운 자녀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아닌가.
각 분야에 자신의 삶을 잘 지켜 살아서 영광스러워지는 이들을 보면 그 한 사람의 삶이 교훈하는 엄숙한 교훈이 있지 않나.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나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경우나 국가를 위한 어떤 크고 작은 직임을 맡아 하는 일이나 교회 안에서의 직분 감당도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유럽 동부의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 두 간호사는 인스브루크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과 1966년 한국 땅을 밟았다. 20대에 와서 43년을 섬겼다. 지난해 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식에 초청 받아 다녀갔다. 이제는 저들은 83세, 82세이다. 소록도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올해 들어 저들 두 분을 한국 정부가 나서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진하는 일을 본격화 한다고 했다. 생각해 보라. 그 두 간호사가 오늘 날 이런 순간을 위해서 일한 것인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간호사로서 부르심과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가난하고 낯 설은 나라인 조선 땅에 와서 해외 의료 선교의 현장에서 헌신한 것이다. 사랑의 마음을 갖고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충성되게 살아 온 것  뿐이다. 그런데 역사가 저들의 삶을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인정해 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교회 생활도 그러해야 하지 않나.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의 교훈은 “지인용”(智仁勇)이다. 태릉의 육사 교정에 가면 64미터 높이의 교훈탑이 있다. 안중근의 조카인 안춘생 장군이 육사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는 6.25 전쟁 기간이었다. 육사가 거제도로 피난해서 운영되던 1951-1952년도에 원래 교훈이었던 ‘충용’(忠勇)에 대통령 이승만의 재가를 받아 새롭게 정한 것이 오늘날의 교훈이 되었다.
‘지’(智)란 “긴박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확고한 가치관을 토대로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과 판단력을 발휘하는 지적역량이다.”
‘인’(仁)이란 “참된 인성과 엄격한 자기절제를 바탕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구성원과 원활하게 소통함으로써 조직의 단결력과 전투력을 고양시키는 인격적 품성이다.”
‘용’(勇)이란 “투철한 사명감과 명예심 강인한 의지와 체력을 바탕으로 생명의 위험과 불의의 유혹을 극복하고 군인다운 가치와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적, 신체적 역량이다.”
 
이런 건학 이념에서 벗어나고 탈선한 군인들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나라가 이만큼 지켜지고 세워지고 발전해 가는 것은 이런 건학이념과 교훈과 군인정신에 충실한 이들이 구석  구석에 더 많기 때문이 아닐까.
군인이든 일반인이든 자신의 삶을 잘 가꾸며 살아가면 영광스러워진다. 아니 주님께서 주목하여 눈 여겨 보시고 반드시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 그 고통을 잊게 해 주시고 그 흑암이 사라지게 해 주시고 기쁨과 보람과 만족과 영광스러움으로 보상해 주신다.
 
2절에 보면,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백성들에게 큰 빛을 보게 해 주시고 빛이 비치게 해 주신다고 했다. 복음의 눈으로 보면 죄와 악과 사망의 결박 가운데 있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참 빛과 소망이 넘치는 새로운 생을 영광스럽게 살아가도록 해 주신다는 말씀이시다.
 
2절의‘큰 빛’(a great light)은 세상의 빛이요(요 8:12) 참된 빛이며(요 1:9) 말라기 4장 2절은 ‘의로운 해’라고 했다.  그 빛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1장 9절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라고 했다.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이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마태복음에 보면 40일간 광야에서 금식을 마치신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붙잡혀 옥에 갇힌 소식을 들으셨다. 예수는 갈릴리로 가셨다. 나사렛을 떠나서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거기서 사셨다. 마태복음 4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마태는 그 당시의 예수의 활동을 기록하면서 이사야 9장 1-2절을 이루시기 위하여 거기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마태복음 4장 15-16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 첫 표적을 행하신 곳도 갈릴리였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에서 물로 극상품의 포도주를 만드셨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최초로 복음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신 곳도 갈릴리였다. 예수는 갈릴리의 곳곳에 다니시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예수는 이사야 9장의 예언을 그대로 하나하나 이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시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시작하신 교회요 예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요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교회라면 본문의 말씀처럼 주님 안에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와 세상과 열방 중에서 점점 창성하고 점점 창대하고 점점 부흥하고 점점 왕성해 질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른 아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점점 영화롭게 해 주시고 점점 영광스럽게 해 주실 줄로 믿는다.
 

즐거움을 더하게 하신다.
어른이든 어린아이든 이 세상에 즐거움을 싫어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즐겁게 살아가도록 지으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하여 범죄하고 타락하므로 그 즐거움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느 젊은 부인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남매를 데리고 지내면서 남편이 남겨 준 유산으로 작은 노래방을 차렸다. 그런데 그 노래방에 드나들던 손님 중에 한 남자가 이 부인이 홀로 사는 것을 알고 치분대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집착했다. 만나주지 않으려 하자 찾아 와서 망치로 치고 칼로 난자하였다. 하반신 마비가 왔다. 순식간에 큰 불행이 덮치고 말았다. 끝없는 병원비도 해결 할 길이 막연해졌다. 어린 남매는 마음 문을 꼭 닫아 버렸다.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다. 그렇지 않겠나.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가 당한 불행한 운명을 보면.....
 
예수께서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하여 비유로 교훈해 주신 적이 있다. 오늘 날 국가는 강도에 대하여는 관대하고 강도 만난 이웃에 대하여는 소홀한 것만 같다. 물론 정책적인 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세상에 나오면 다시 세상을 활보하고 다닌다. 그러나 불행을 당하고 피해를 입은 이들의 고난과 고통은 평생토록 쉽게 해결되질 않는다. 오늘 날 누가 강도 만난 불쌍한 자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1절을 다시 보면 ‘전에는’ 그리고 ‘후에는’ 이라는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당신은 어떤가. 전에는 고통과 어둠과 멸시와 사망의 그늘에 갇혀 있었으나 이제는 밝고 큰 빛 아래서 행복하게 살고 즐겁게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는 아닌가. 전에는 즐겁게 산 것 같은데 요즘은, 지금은 고통과 흑암과 멸시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3절에 보면 하나님은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말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미 이루신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다. 왜인가. 하나님 안에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동일한 시간이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시다. 처음과 나중이시다.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도 계셨고 세상 끝 날까지 계실 것이다.
 
3절 끝에 보면 주께서 더하게 해 주실 이와 같은 즐거움은 “주 앞에서 즐거워하게”하시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세상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94장 찬송,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의 가사처럼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라고 고백할 수 있나. 아니면 아직은 여전히 세상 낙과 세상 즐거움이 더 큰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인 평균 일 년에 소주  62병 이상, 맥주 140 병 이상을 마신다고 한다. 합하면 200병 이상이니까 술 안 마시는 이들의 수를 빼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날마다 소주, 막걸리, 맥주 속에 빠져 산다는 얘기다. 어떤가. “먹자 먹자 마시자 마시자 놀자 놀자 ”그래야만 즐겁나.
 
이사야 9장 3절은 “주 앞에서 즐거워하는 즐거움을 더 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다. 찬송가의 가사처럼“주 예수는 이 세상 부귀, 명예, 행복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분이시다.”예수 만나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라는 찬양이 절절이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고 도전이 되는 것이다.
세계적인 성악가 김영미 씨가 CBS의 <새롭게 하소서> 간증을 모은 책에서 간증하였다.

그녀는 외할아버지도 성악가셨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런 피를 이어 받았다. 어릴 때부터 성악이 뛰어났다. 고등학교만 마치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베로나 콩쿠르, 푸치니 콩쿠르에서 일등을 했다. “섬세한 테크닉과 화려한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서 유력한 1등 후보였으나 우승 자리를 뺏기고 말았다. 그때에야 이탈리아 음악계의 텃세를 절감하게 되었다. 상한 마음으로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그러나 미국은 자기를 알아주지 않았다. 오래 도록 공연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다. 두려움과 허탈감과 우울증이 엄습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서야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동안 교만했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 왔다. 하나님은 그녀를 미국 오페라 계의 ‘프리마돈나’(prima donna)로 들어 쓰시기 시작했다.  오페라 주역 남성 성악가를 ‘프리모우오모’(primo uomo)라고 하고 “프리마돈나란 오페라의 주역을 맡는 여성 성악가”를 말한다. 주의 은혜를 체험한 그녀의 나중 고백은 이렇다. “노래할 수 있는 재능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노래를 부르는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내 평생 자랑하고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사야 9장 4절에 보면, 주께서 무겁게 멘 멍에와 어깨의 채찍을 멈추게 해 주시고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면 ‘미디안의 날’과 같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미디안의 날이 무엇인가. 사사기 7장에 보면 미디안과 전쟁하기 위해 기드온이 모병하였다. 32,000명이 모였다. 하나님은 많은 군대로 싸워 이기면 너희 손이 너를 구원하였다 할까봐 많은 수를 돌려보내게 하셨다. 22,000명이 돌아가고 1만 명이 남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물가에 데리고 가서 물 퍼 마시는 모습을 보고 다시 수자를 줄이라고 하셨다. 앞을 경계하며 전쟁할 태도를 갖고 물을 마신 300명으로 전쟁하게 하셨다. 300명의 기드온 군대는 메뚜기처럼 많은 미디안의 군대와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미디안의 낙타의 공격 앞에서 싸워 이겼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신 것이다. 맞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더하게 해 주시는 즐거움은 추수하는 날의 즐거움과 같고 전쟁의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주님 앞에서 그런 즐거움을 더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창성케 되는 것도 주 안에, 더 즐겁게 되는 것도 주 안에서 누리는 상급이 아닌가.
 

한 아기를 주신다.
이사야의 꽃과 같은 말씀이 바로 이사야 9장 6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의한 메시아 예언의 절정이다. 나사렛의 마리의 태를 빌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예언하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가만히 생각해 보라. 무엇이 이에서 더 필요한가. 주님이 나에게 분명히 이런 분이시라면 여기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말이다.
우리는 어떤가. 성탄절에만 그런 기쁨을 찬양하고 끝내지는 않나.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 강림절기에 12월 한 달을 날마다 보내며 마음에 설레는 성탄절의 기쁨과 은혜와 평강 그런 기다림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의 기다림보다 백배 천배 만배 더 큰 기다림과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하지 않나.
 
주님의 다스림과 평강은 살아가면서 점점 더해가는 영원무궁한 다스림이시며 평강이시다. 주님의 다스리심은 불의한 세상에 정의와 공의의 다스리심이시다. 여호와의 열심히란 여호와의 질투하시는 사랑을 말한다. 누구를 사랑해 봤나. 질투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주님의 나를 향한 사랑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사랑은 그런 사랑이시다. 그 하나님의 질투하시기 까지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구원의 사랑은 감격스러운 사랑이다. 그 사랑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있는 힘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 사랑의 통치와 다스리심은 다윗이 왕으로 있으면서 통치하던 때의 권세와 비교할 수 없는 평화의 다스림이며 평강의 다스림이시다. 그 주님의 우리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의 열심 안에서 이와 같은 죄 사함과 영광과 즐거움과 평강을 점점 더 누리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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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각"최고관리자
그의 생각(요일3:1..최고관리자
"주님 먼저 가세요"최고관리자
"주는 피난처"최고관리자
"천 번을 불러도"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