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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만군의 여호와는(사5:8-19) 2017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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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8-20 23:12 조회 13,970 댓글 0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사5:8-19)         2017. 8. 20

중앙아시아 선교사 대회를 섬기기 위해서 다녀오는 길에 주께서 동행해 주신 것을 감사드린다. 그루지아는 러시아식 발음이고 영어식 발음은 죠지아라고 발음한다. 그루지아에는 14세기 때에 몽굴 군대가 쳐들어가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목을 쳐서 살해하였다. 수도 티빌리시 시내의 중앙에 흐르는 아름다운 강 ‘메테키’강의 다리 곁에는 ‘십 만 명의 거룩한 죠지아인의 순교자의 다리(Hundred Thousand Holy Georgian Martyrs Metekhi Bridge)’라고 적혀 있었다.
 
중앙아시아는 소련에서 독립된 나라들 중에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작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의 나라를 말한다. ‘스탄’이란 ‘땅 대지’를 뜻한다. 파키스탄을 포함하면 세계에는 ‘스탄’이란 이름을 가진 일곱 나라가 있다.
그 중에 러시아 접경에 있는 카작스탄이란 나라는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12배가 넘는 광활한 땅이다. 이 번에 만난 선교사 중에는 그 카작스탄에 25년 전에 20대 젊은 시절에 선교사로 간 이도 만났다. 태권도 선교를 통해 그 동안 1만 명 이상의 훈련생들을 배출하고 지금도 400여명을 가르치며 왕성하게 선교하는 김성수 선교사 내외이다. 이미 청소년 국가 대표 선수와 금메달 수상자를 배출하고 국가적으로는 성인부에서도 올림픽 금메달 수상자가 배출되도록 훈련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한다고 한다. 주변에 25년간 한인 가정이 단 한 가정도 없는 여건에서 가족끼리 외로운 환경에 정착하여 선교에 매진한 장한 선교사 부부였다. 아들이 감리교 신학대학에 와서 신학을 공부하며 장차 부모의 대를 이어 선교사의 꿈을 키워 가노라고 했다.
어떤 가정은 젖소를 사육하여 송아지를 보급하는 축산업을 통해서, 혹은 유치원 사역을 통해서, 혹은 원주민 깊숙이 찾아 들어가는 현장 사역을 통해서, 혹은 직원이 11명씩이나 함께 일하는 대형 제과점 경영을 통해서 제빵술을 전수해 주며 선교하는 부부도 만나 보았다. 이슬람권에서 직접 선교가 어렵다 보니 간접 선교의 방법으로 선교 접근하는 분들의 생생한 현장의 사역 간증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간 세 목회자 부부는 감리교 본부의 선교국에서 이슬람연구소 소장으로 계신 목사님과 더불어 아침저녁으로 시간마다 예배드리며 긴 시간 특강 시간을 갖고 마음껏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늘 숨소리를 죽이며 조용하게 찬송하고 조용하게 기도하고 하던 답답한 환경에서 지내던 분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통성 기도하자고 기도를 시작했더니 예배 공간이 떠나가라 기도하며 끝날 줄 모르고 계속하여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크게 은혜와 도전이 되었다. 매 시간마다 사모님들이 예배 기도를 맡아 하셨는데 얼마나 기도가 감동적이고 마음을 뭉클하게 하던지 시간마다 눈물이 흐르는 감동과 감격스러운 기도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중국 동북 삼성 지역을 중심으로 단동에서 샘 병원의 간호사로 섬기시는 60대 중반의 여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종합병원 수간호사로 왕성하게 생활하던 분이었다. 선교 현장에서도 열심을 다하여 간호사 신분으로서 의료 선교의 현장에서 열정을 갖고 선교하시는 분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더 많은 분들이 참석을 원하였다지만 본인들이 직접 항공료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하다 보니 자녀들과 여러 가족이 다 같이 이동 할 수 없는 부담감 때문에 마음에는 있지만 참석하지 못한 분들의 아쉬운 소식도 접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에는 5년 전의 사고로 고생하던 남편 선교사를 하나님 앞으로 보내고 부인 홀로 다시 아제르바이잔 선교를 위해 최근에 입국한 여선교사님의 소식을 들을 때에 가슴 뭉클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여 주었던 130년 전의 모습을 생각하면 선교의 현장이란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적을지라도 때가 되면 새가 깃들만한 큰 겨자나무로 자라나게 될 것을 믿고 확신하게 된다.
 
중앙아시아의 선교 지역은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기가 어렵고 선교의 제약이 심한 환경이다. 그러나 그 접경 국가인 그루지아는 기독교 국가이다. 금번에 선교사님들이 그루지아에 모인 것은 예배가 자유로운 인접한 국가에 모여서 선교사 대회를 갖다 보니 그렇게 준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지난 화요일인 8일 새벽에 출발해서 24시간을 길과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나라 시간으로 새벽 3시 30분에 도착 예배를 드리는데 나에게 설교를 부탁하였다. 내 목회 사역 34년 중에 24시간 이상 활동하고 눕지 않고 지낸 후에 설교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띵하고 생각이 몽롱한 시간에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말씀을 전하였다.
 
매 시간마다 진지하게 예배드리고 세미나에 귀를 기울이고 찬송과 기도와 선교 보고하는 시간 시간이 얼마나 은혜가 되고 도전이 되었는지 모른다.
 
지난 금요일에는 밤을 꼬박 새워 가며 공항과 비행기에서 시간을 보내고 옆 나라인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하였다. 수도인 바쿠에서 토요일과 주일을 보내고 주일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고 또 갈아타는 긴 노정으로 다시 24시간이 걸려서야 서울에 돌아 올 수 있었다.

최근 날마다의 말씀 묵상 본문인 이사야서의 말씀 중에 5장은 ‘포도원의 노래’라고 제목을 붙이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도원 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는 포도나무로 자라나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보니 극상품은커녕 들 포도만 맺히고 말았다. 하나님은 기름진 산에 땅을 파고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다. 포도원 한 가운데 망대도 세웠다,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포도원에 좋은 포도 열매가 맺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보니 들 포도를 맺고 말았다.
 
이것은 비유이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속이 상하신 하나님은 나와 포도원 사이에 “사리를 판단하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몹시 화가 나셨다. 좋은 포도나무에서 극상품의 좋은 포도 열매를 기대하셨는데 먹을 수  없는 들 포도만 잔뜩 열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사5:5-6)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쏟아 부으셨다. 
 
이사야서의 주제를 이루는 두 단어는 이사야 5장 7절에 나온다. ‘정의’와 ‘공의’이다. (justice & righteousness)
 
이와 같은 말씀은 이미 이사야 1장 27절에서 선포하신바 있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Zion will be redeemed with justice, her penitent ones with righteousness.)
 
그러면 들 포도 열매란 비유인데 무엇을 말씀하며 누구를 말씀하는 것일까. 본문에는 세 번 ‘화 있을 진저’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도 ‘화 있을진저’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 않나. 8, 11, 18절에 세 차례 ‘화 있을진저’라고 하였다. 그 세 가지란 탐욕과 방탕과 거짓에 대한 경고이다.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표현하고 계시다. 본문에도 9절과 16절에 그런 표현이 반복되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이라고 정하고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대하길 원한다.

높임을 받으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탐욕과 방탕과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 중에서 오직 높임을 받으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여 높임을 받으실 수 있으신 것인가. 16절에 보면‘ 정의로우시므로’라고 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언제 어디서나 높임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굉장한 줄 알았는데 높은 권력의 자리나 그 많은 재물의 소유나 그 좋은 사회적인 지위에서 추락하고 초라해 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의’가 떠난 상태의 지위, 권력, 명예, 힘, 능력은 마치도 고무풍선에 바람이 빠지면 높고 높게 날아가던 고무풍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고 만다. 
15절과 16절은 그런 면에서 대구가 되는 절이다. 15절은 인간의 나약함과 헛됨을 말한다. 15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대하면 이렇다. “그래서 천한 사람도 굴욕을 당하고 귀한 사람도 비천해지며, 눈을 치켜 뜨고 한껏 거만을 부리던 자들도 기가 꺾일 것이다.”
 
그렇지 않나.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나라 안팎에 도배를 하듯 뉴스에 거론되는 내용들이 그런 것들로 가득하지 않나. 인간이 초라해 질 때 보면 정말 별것 아니다.
 
2700년 전의 인물이 이사야 선자지이다.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을 파헤치고 계신 것이다. 무엇이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나.
 
세 가지다.
첫째, 탐욕이다.
8절을 보라.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가 무엇인가. 사람이 탐심에 사로잡히면 은평 뉴타운의 15000세대의 아파트를 몽땅 다 자기 소유로 등기를 해도 탐심에 만족이 없다. 제주도를 몽땅 제 제 등기 문서로 해도 만족함이 없게 된다.
어느 신실하게 신앙생활 하는 부부가 있었다. 남편 집사가 보니까 부인 집사가 매주 로또를 사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당신 신신하게 신앙 생활하는 줄 알고 있는데 웬 로또를 매주 사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부인 집사가 대답하는 말이 당신은 성경에도 로또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로또를 사는 게 뭐가 문제냐고 맞받았다. “어디 성경에 로또가 나오냐”고 했더니 “창세기 13장 5절을 봐라.”그래서 창세기 13장 5절을 봤더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라는 말씀 중에 ‘로또’라는 표현이 있긴 있었다.
 
한 번은 무리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자기 형과 유산 분배하는 일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그리고“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어서 비유로 해 주신 말씀이 농사가 잘 되어 창고를 늘려 짓고 쌓아 두려고 한 부자 농부에 대한 비유이다. “아무리 쌓아 두고 즐기려 하여도 하나님이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부르시면 그 가진 소유가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다.  이 비유의 말씀 끝에 덧 붙여 해 주신 말씀이 이것이다.“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1)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라고 교훈해 주었다.
 
이사야서 본문에 보면 8절에 그렇게 넓은 집, 넓은 땅을 소유하여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했으면서도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이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대단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매사에 ‘내가, 내가, 내가’그리고 ‘나를, 나를, 나를’이라고 주장하며 사는 자들이 아닌가.
 
사람 ‘人’자의 모양이 그러하듯이 세상은 가족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게 마련이다. 자기 혼자서 세상을 살 수 있는 독불 장군이 거할 만한 땅이란 이 땅그 어디에도 없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고하신다. 허다한 가옥이라도 황폐할 것이다.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게 될 것이다. “넓은 땅의 포도원과 농토에 씨앗을 뿌릴 지라도 거둘 것이 형편없게 되고 말 것이다.”라고 경고하셨다. 재물은 필요한 것이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탐심과 탐욕으로 재물을 대하기 시작하면 그 인생은 반드시 타락하고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
 
 
둘째는, 방탕이다.
아침부터 일찍이 일어나서 독주를 마시고 밤이 깊도록 포도주를 마시며 취하는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술자리에서 수금, 비파, 소고, 피리를 불게하며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무관심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손을 하신 일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떠들어 댄다.  14절에 보면 “떠드는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무관심을 갖고 떠드는 무리의 가는 곳은 스올이라고 했다. 스올은 지옥인데 스올이 입을 벌리니 거기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책망하셨다.
 
12절의 말씀은 시편 92편 4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

“주께서 행하신 일”,“주의 손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
성경의 모든 내용이 모두 다 그러하지 않나. 누가 천지 만물을 지으셨나. 누가 이렇게 신묘막측한 인간을 창조하셨나. 누가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셨나. 누가 바다 물의 밀물과 썰물을 주관하시나. 누가 밤과 낮을 주관하시나. 누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주관하시나. 누가 출애굽을 가능하게 하셨나. 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나. 누가 광야의 히브리 백성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나. 곰은 평소에는 1분에 40번의 맥박이 뛴다. 그러나 겨울잠을 자는 동안에는 1분에 8번만 맥박이 뛴다. 먹지 않고 지내니 겨우 내내 배설도 하지 않고 잠만 잔다. 신기 하지 않나....그 많은 동물과 곤충과 물고기와 식물들을 누가 지으셨나.
 
누가 나사렛의 마리아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되게 하였나. 죽은 지 사흘이 지난 예수를 누가 살리셨나. 부활하신 예수를 누가 하늘로 불러 올리셨나.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 술 취하는 것보다 천배 만 배 비교 할 수 없는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8-21)
 
독주와 포도주로 사는 인생들은 장차 사로 잡히게 되고, 굶주리게 되고, 목 마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지옥인 스올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는 말씀도 해 주셨다. 세상 낙을 즐기며 술에 취하며 호화롭게 살며 떠들며 즐거워하는 자에게 임할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있다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인생들의 거만과 교만을 주께서 낮추실 것이라고 하셨다.
 
셋째는 거짓이다.
18절에 보면 거짓으로 죄악을 끄는 자들에 대하여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경고하셨다. 거짓된 지식과 언변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불법을 합법화시키려는 자들의 악을 심판하시겠다고 했다. 새번역에 보면, “거짓으로 끈을 만들어 악을 잡아당기며, 수레의 줄을 당기듯이 죄를 끌어당기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고 했다. 그렇지 않나. 역사의 동서고금에 탐욕과 방탕과 거짓을 일삼고 살았는데 자자손손 번성하는 인생과 가문을 보았나. 성경에 그런 인생이 있나. 교회 역사에 그런 주인공이 있나. 없다. 그러므로 탐심을 버리고 방탕을 벗어나고 거짓을 버리고 진실하며 공의와 정의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인생들은 하나님 안에서 존귀해지고 하나님 안에서 번성하고 하나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천지 만물 모두 주를 찬송합니다.”(8장 4절)라고 찬송하지 않나.
 
“거룩하신 하나님”찬양 가사를 보라.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 감사드리세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나의 맘과 뜻 다해 주를 사랑합니다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내가 약할 때 강함 주고
가난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신
나의 주 감사
내가 약할 때 강함 주고
가난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신
나의 주 감사 감사”
 
인간은 거룩하지 못하다. 오직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그러므로 이 땅 위에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을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거룩’이 무엇인가. 죄와 흠과 티가 없으시다는 말이다. 하나님만이 완전하시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존귀한 것이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어둠이 없는 완전한 빛이시며 큰 빛이시다. 이 땅의 태양과 달과 별들의 빛을 다 합친 것보다 만 배 억 배 더한 완전한 빛의 근원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한님 안에는 그림자도 없고 어둠이란 전혀 없으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린 양들에게 자기 초장에서 풀을 먹게 하신다. 유리하는 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을 것을 먹게 하신다. 17절의 이런 말씀을 대하다 보면 룻기의 룻이 생각나지 않나
.
하나님이 먹이시면 일순간에 배불러지게 된다.
하나님이 먹이시면 아람 군대가 떠나간 사마리아 성 밖의 나병 환자들처럼 전리품으로 배 불리고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입히시면 일순간에 창세기의 요셉처럼 왕의 옷에 버금가는 옷을 입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귀하게 높이시면 모압의 홀로 된 여인 룻이라도 베들레헴의 대 지주 보아스의 아내 되게 하시고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평화를 주시면 어제 밤 까지도 밤새도록 나를 짓누르던 고민과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과 우울과 낙담과 번민이 아침 햇살을 받는 안개처럼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이 기쁨을 주시면 방금 전까지의 슬픔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 만에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다.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신다.
19절의 표현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탐욕과 방탕과 거짓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말이다.
기껏 한다는 말이 "하나님더러 서두르시라고 하여라.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빨리 하시라고 하여라. 그래야 우리가 볼 게 아니냐. 계획을 빨리 이루시라고 하여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세우신 계획이 빨리 이루어져야 우리가 그것을 알 게 아니냐!" 하는구나.(사5:19, 새 번역)
 
2700년 전인 이사야 선지자의 때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이들은 그 하는 말이 다 거기서 거기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교회를 업신여기고 주의 종들을 업신여기고 성도들을 업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인생의 조롱으로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서서히 돌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정확하게 돌아간다.
 
물론 예수께서도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온갖 모멸과 수치와 조롱과 고통을 다 당하셨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끌고 가는 이들이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얼굴에 침도 뱉었다. 따귀도 때렸다. 주먹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갈겼다. 옷을 빨가벗겼다. 예수의 옷을 제비 뽑았다. 예수의 이마에 가시관을 씌웠다. 눈을 가렸다. 잔등을 무시무시한 채찍으로 갈겼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거의 죽은 자처럼 매 맞고 끌려 다니셨다. 예수님은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다 당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그런 인간의 조롱으로 조롱당하실 분이 아니셨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부활이 무엇인가. 부활은 사건이다. 부활은 역사.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도 있고 영화도 나오지 않았나. 예수는, 하나님은 때가 되면 자기의 계획을 완전하게 이루시는 전능자이시다.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계획을 이루실 때가 되면 순식간에 그 계획을 이루고 성취하신다. 그 하나님의 계획을 믿지 않는 이들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주를 믿는 자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조롱으로 작아지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신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대적하고 막을 수 있는 인간의 세력이란 없다. 하나님은 이 땅의 불의와 죄와 악과 거짓을 공의로 다스리시고 정의로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하나님이 공의와 정의의 근본이시기 때문이다. 공의와 정의가 빠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는 공의가 포함된다.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만 계속되면 곰팡이기가 피고 썩고 만다.  포도원의 노래는 하나님의 경고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이다. 하나님 안에서 온갖 탐심을 물리치고 방탕한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며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진실하게 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복음의 승리자들이 모두 다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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