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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말하노니(고후13:11-13) 2017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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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6-15 09:34 조회 14,517 댓글 0
 
 마지막으로 말하노니(고후13:11-13)            2017. 6. 11
      

중국 신장위 위그루 지역의 우루무치(Wulumuchi,烏魯木齊)를 중심으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 내외분과 현지인들을 만나고 커피 바리스타 교육으로 섬기고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을 갖고 돌아 왔다. 중국 북서쪽 맨 끝에 위치한 이 자치구에는 13개의 다른 민족 집단이 살고 있으며, 그중 위구르족과 한족이 가장 많다. 우리나라 남한 면적보다 16배나 큰 땅이다. 주요작물은 겨울 밀·옥수수·벼·수수·기장 등이며, 주요과일 생산지이다. 가축으로는 양과 말이 중요하다. 광물자원으로는 납·아연·구리·몰리브덴·텅스텐이 매장되어 있다. 가는 하루, 오는 하루 빼면 만 3일을 머무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매우 유익하고 서로에게 치유와 도전과 크게 은혜가 되는 기회였다. 다녀 온 후에 이번 사역을 주관한 이기현선교사를 통해서 전해 받은 그 곳 선교사님들의 감사의 글을 전해 드린다. 

"먼 곳까지 오셔서 저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아주 질 좋은 여름옷을 주셔서 행복했습니다. 저희들이 옷을 고르면서 서로서로 힐링이 되었습니다. 갖다 주신 떡도 너무나 맛있습니다. 가르쳐주신 커피 핸드드립으로 가정과 선교 현장에서 잘 활용하겠습니다. 유익한 말씀으로 섬겨주신 지성래 사장님과 손님 분들 편안한 귀국길 되셔요. 사랑합니다."

"귀함 손님 오셔서 섬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들 받은 사랑을 선교현장으로
흘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계속하라’는 지성래 사장님 말씀에 다시 한 번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요즈음 상황이 어려워서 여러 가지 핑계가 많았는데 주신 사랑 계속해서 잘 감당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한길을 계속하면 역사가 일어난다. 전심전력해서 한길로 가라.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말씀에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할 순간이 다가 온다면 무슨 말을 마지막 말로 하겠는가. 어느 날 마지막 순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죽음의 순간을 맞게 된다면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세상에는 사고와 사건과 재난과 질병 등으로 인하여 자신이 기대한 삶을 다 채우지 못하고 눈을 감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요즘 유언 미리 쓰기 운동을 하는 단체나 교회들도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1703-1799)는 “최고의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라는 유언을  남겼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눈을 감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은 30대 이전에 청력을 잃기 시작했다. 나중에 49살 때부터는 전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늘 노트를 갖고 다녔고 남이 그에게 하려는 말을 노트에 쓰게 하고 난 후에 자신이 하려는 대답을 말하고는 하였다. 그는 늘 긴 시간 홀로 묵상하며 공원을 산책하였다. 그 때 그 때마다의 악상을 노트에 적어 놓고는 하였는데 그 중의 많은 분량의 작곡 노트들이 오늘 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는 57살에 결핵과 간경변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천국에서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라는 말을 마지막 말로 남겼다.  

헬라 시대의 대 정복자 알렉산더(BC 356-323) 대왕은 33살에 열병으로 열흘 동안 앓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죽기 전에 그 동안 쉼이 없이 달려 온 정복전쟁의 부질없음을 뒤늦게 후회하며 “죽어서 내가 차지하게 될 땅은 고작  한 평 뿐인 것을..  나는 이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적과 싸우며 수만리를 달려왔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죽어 갔다.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18살의 나이로 서대문 감옥의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은 내 조국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72년을 살다 간 노나라의 공자(BC, 551-479)는 “지는 꽃잎처럼 나는 그렇게 가는구나.”라는 말을 마지막 말로 남겼다. 

석가모니의 석가는 북인도의 ‘사카이 족’을 뜻하고 모니는 ‘성자’란 의미의 ‘무니’(Mu ni)를 음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란 ‘사카이 족의 성자’란 뜻이다. 붓다라고 하는데 ‘붓다’란 ‘깨달은 자’란 뜻이다. 붓다에서 중국의 음으로 ‘불타’로 불렸고 줄여서 ‘불’(佛)이라 했다. 그가 태어난 때를 주전 7세기 혹은 6세기라고 말할 뿐 정확하게 입증할 자료가 없다. 불교의 석가모니 싯다는 80년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임종 전에 “이제 나는 늙어서 노후하고 긴 세월을 보냈고 노쇠하여 내 나이가 여든이 되었다....피곤하구나, 누워야겠다. 그만 하여라 슬퍼하지 말라. 탄식하지 말라.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고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마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말을 하며 눈을 감았다. 

화가 이중섭과 쌍벽을 이루었던  서양화가 박수근(1914-1965)은 ‘빨래터’, ‘우물가’ 등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강경화로 고생하며 지내던 51살 때의 어느 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숨을 거두며 “천국이 먼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고 말했다. 
모세는 120살 때 죽음 전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 그와 동족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그에게 유언하였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31:7-8)

여호수아는 110살에 임종을 준비하면서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다윗은 나이 70에 죽음의 날이 임박하자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였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2-3)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끝으로 숨지셨다. 그리고 죽임 당하신 지 사흘 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부활과 영생의 길로 초청해 주셨다. 

하루를 더 살든 혹은 100년을 꽉 채우며 살든 누구에게나 이 땅의 나그네 인생길을 마감할 순간이 찾아 올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두 편의 편지를 쓰면서 더 이상 저들을 만나볼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다시 또 편지를 써서 전할 기회도 없을 것이라 여기며 고린도 후서를 이렇게 마쳤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십시오. 
위로를 받으십시오. 
마음을 같이하십시오. 
평안하십시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마지막 말 중의 맨 끝 부분인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예배 시간의 마지막 기도인 축도(祝禱)의 내용이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자.


성도인 형제자매의 문안.
우리가 아는 대로 고린도 전서와 후서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갈등과 분열과 경쟁과 다툼과 분쟁과 시기와 대립이 심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과 책망과 훈계의 편지를 쓴 사도 바울은 마지막 부분인 본문에 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는 표현과 더불어 여러 가지 주제의 내용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라
서로 위로를 받으라
마음을 같이 하라
평안하라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한다.
(Finally, brothers, good-by. Aim for perfection, listen to my appeal, be of one mind, live in peace. And the God of love and peace will be with you. Greet one another with a holy kiss. All the saints send their greetings.)
고 했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란 어떤 곳이어야 하나. 성도란 누구인가. 성도의 한 사람인 나는 가정과 세상과 교회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나. 바울은 성도됨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다.

기뻐하라.
이는 그 당시 헬라어로 말하는 ‘기뻐하라’는 말은 만날 때와 헤어질 때 하는 인사다. 단지 우리는 사도 바울이 기뻐하라는 이 말을 그냥 단순히 인사말 정도로 했는지 아니면 문자적으로 ‘기뻐하라’는 말을 편지의 끝에 남겼는지 알 길이 없다. 물론 영어 성경에도 ‘기뻐하라’를 기뻐하라고 번역하지 않고 ‘good-by’라고 했다. 서양 사람들이 인사하는 ‘good bye’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는 뜻의 ‘May God be with you.’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여러 편의 편지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자주 강조한 바 있다. 갈라디아 5장 22절에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가 ‘희락’ 즉 ‘기쁨’인 것을 강조하였다. 

어떤가. 요즘 삶이 기쁜가. 그렇지 못한가. 왜 그렇지 못한가. 어찌하여 기쁘게 살아가지 못하는가. 이번 선교 일정 중에 매일 묵상 집 소책자인 ‘다락방’의 매일 분량을 묵상하였다. 지난 목요일(2017. 6. 8) 묵상 내용의 제목은 ‘하나님은 선하시다.’(God is good)이다. 글을 쓴 이는 여러 해 전부터 류머티스 관절염 진단을 받고 고생하며 살고 있다. 여러 해 동안 몸과 마음이 고통에 시달렸다. 초기에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광대뼈와 턱뼈까지 쑤셔 왔다. 그러나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전에 우울증으로 고생하기도 하였다. 젊은 날 약혼자의 죽음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는 중에서도 그는 순간마다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아 왔다. 특별히 시편 136편 1절 말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씀이 그에게 크게 위로가 되었다. 그는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격려를 깨닫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늘 고통이 그를 힘겹게 하였지만 그가 깨닫는 하나님의 돌보심은 그가 고통을 견뎌 낼 수 있는 힘과 기쁨을 주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그런 어려운 고통 중에서도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가 그런 고통 가운데 지내는 것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하나님의 따뜻한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늘 돌보아 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하고는 했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일자리를 잃을 때에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결혼 생활에 실패하였을 때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죽어 갈 때에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쇠약하게 하는 고통을 겪을 때조차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늘 선하십니다. 우리에게 유별나고 늘 새로운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언제나 선하십니다.”

어떤가. 우리가 기쁜 환경과 즐거운 여건과 좋은 조건에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기쁨이다. 기뻐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있으니 즐거워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주 안에서 질병과 고통과 고난과 시련과 역경과 억압과 답답함과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과 환난이 파도쳐 오듯 밀려오는 상황 가운데서도 서로에게 주님의 마음을 담아 문안하며 ‘good by'라고 인사하고 축복하는 것이 기뻐하라 하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며 마지막 인사의 말이 아니겠는가. 

온전하게 되라.
사도 바울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갈등과 대립이 극심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일치와 통일과 화목과 화합을 이루는 신앙생활을 강조하기 위해서 쓴 표현이다. ‘카타르티조’라는 이 말은 ‘수선하다, 선도하다. 준비하다’라는 뜻이다. 의복을 수선하고 기계를 완전하게 재정비해서 수선하고 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 

이번에도 우루무치에 가고 오는 길에 북경에서 갈아타고 가고 또 갈아타고 왔다. 300명이 타는 중국 남방항공기편을 이용하였다. 비행기가 안전하게 비행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비행 전에 완벽한 점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번에도 보안 안전 검사도 얼마나 철저히 하나 모른다. 신을 벗게 하고 발바닥까지 검색기로 검색하였다.  온 몸을 구석구석 쓰다듬어 더듬듯이 자세히 조사하였다. 왜 그렇게 하나. 서로의 안전과 온전함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이 표현 ‘온전하게 되라’는 말씀은 결코 가벼운 문안이 아니다. 성도의 삶이란 고통과 영광을 더불어 다 같이 함께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지체로서 온전하게 되어 가는 상태를 말씀한다.(고전12:26)

서로 위로를 받으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를 통해서 설립된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애착이 남달랐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고린도 전서와 후서의 편지에 구구절절이 간절한 그의 심정을 담아서 전한 것이다. 왜 서로 위로를 받으라고 말하나. 우리는 누구나 다 위로가 필요한 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라는 복음성가 중에 보면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렇다. 찬양 가사에서 말하는 ‘그들’ 가운데 우리 모두도 포함된다. 그들 모두 즉 우리 모두는 각 사람 모두 주가 필요한 하나님의 아들딸들이다. 어른 젊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우리는 누구나 다 주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서로에게서 위로 받기를 원한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라는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을 우리가 안다. 그러나 우리는 위로하기도 하고 위로 받기도 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성도는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구제하고 필요를 돕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문안하며 서로가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서로를 돌보아 주며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위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어 표현에 보면 사도 바울의 말 뿐만 아니라 서로의 호소와 요구를 들어 주라고 했다.(listen to my appeal)

평안함으로 마음을 같이 하며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권면하는 것일까. 당시 고린도 교회에 그런 권면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을 같이 할 때에 서로에게 평안함이 있지 않나. 부부라도 부모 자녀 간이라도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며 어찌 서로 간에 평안이 있겠는가. 성도들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거룩한 입맞춤을 하는 경건함과 진지함을 가지고 마음 문을 열고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서로 양보하며 평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한 마음으로 대하라고 강조한다. 동성 간에 서로 입 맞추는 전통은 13세기 말까지 계속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동성 간에도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것에도 부작용과 폐단과  부담이 커서 13세기 말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 됨이다. ‘마음을 같이 하며’라는 강조는 성도됨의 바탕이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같이 하나 될 때에 성도다운 성도, 교회다운 교회로 사랑이 넘치고 서로에게 위안과 격려와 힘과 배려와 따뜻한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성도된 우리에게 서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서로 간에 평안한 마음으로 상대방과 마음을 같이하며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왜 사도 바울이 마지막 인사에서 ‘사랑’과 ‘평강’을 이렇게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일까. 생각하여 보라. 개인이든, 가족들 간이든, 직장과 사업의 현장과 사회의 그 어디에서든, 교회 안에서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사랑과 평강이 아닌가. 1970년대부터 복음성가가 우리나라에 소개되던 초창기에 가장 많이 불리던 찬양이 이것이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바다 같은 사랑, 내게 샘솟는 믿음 넘치네... 할렐루야.”

그렇지 않나. 우리에게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는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와 그를 향한 우리의 신앙 고백인 믿음의 응답으로 가능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강조하여 이 교훈을 쓰며 편지를 마무리 하고 있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후13:11)
예수께서도 이처럼 교훈하시지 않았나.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은혜와 사랑과 사귐.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우리가 아는 대로 축복하는 기도 즉 ‘축도’라고 한다. 바울은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과 사귐에 대하여 차례대로 축도하였다. 혹자는 왜 하나님의 사랑이 앞에 나오지 않았나를 질문한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마음에 가득 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며 주님의 구원하시는 그 은혜로 인하여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 되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었으며 성도들은 늘 성령의 임재와 교통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의 사귐을 은총으로 누리는 자들이기에 이처럼 순서를 정하여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 같이 두 손을 들어 서로에게 하나님의 강복(降福)을 축복(祝福)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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