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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성령 강림과 교회(행2:43-47) 201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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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6-04 22:05 조회 13,721 댓글 0
 
성령 강림과 교회(행2:43-47)               2017. 6. 4 성령강림주일


교회는 성령 강림에 의해서 탄생되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그 ‘약속’이란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이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땅 끝 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은 증거는 두 가지다.
첫째는 성령 받고 나면 능력이 임한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에 힘쓰는 것은 임한 능력을 지속해 나가는 삶의 모습을 의미한다. 아무리 잘 하는 피아노 연주나 바이올린 연주라도 날마다 연속적으로 계속하지 않으면 그 실력, 그 능력이 퇴화되고 만다. 계속 할 때에 그 능력이 점점 증진되는 것처럼 말이다. 

둘째는 성령 받고 나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하게 증거하고 전파하게 된다.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고 하는 것도 그렇다. 소유, 물질, 재물을 교회 앞에 드리는 것은 그 행위가 목적이 아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천하에 만방에 증거 하기 위해서 그런 헌신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예수의 승천을 지켜 본 11사도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였다. 가롯 유다를 제외한 예수의 제자들과 많은 여성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 등 120여 명이 모여서 기도하기에 힘썼다. 그 열흘 후인 오순절 날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는데 성령이 임하였다.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나오는 장면이다. 그들이 앉아 있던 집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집 안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다. 그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였다. 바람처럼 불의 혀 처럼이란 것은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임했다는 사실이다. 기도하던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다른 언어로 말하게 하셨다. 그 때에 여러 나라에서 예루살렘을 방문 중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현장을 목격하였다. 예수의 제자들과 기도하던 무리들이 다른 나라의 말로 각각 말하는 것을 듣고 다 놀라 당황해하며 신기하게 여겼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하며 조롱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 사도가 11사도와 함께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지금이 아침 아홉 시인데 아침부터 술에 취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구약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2;17-21)

그리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고 증거하였다. 
그렇다. 성령 받은 사람은 이처럼 다르다. 성령 받은 사람은 말이 다르고 삶이 다르다. 아니,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 받기 전과 성령 받은 후가 분명히 달라진다. 그 하는 말이 달라지고 그 삶이 구체적으로 달라진다.   

에베소서 2장에서 말씀하는 사도 바울의 증언대로이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때에는, 전에는 그리고 이제는”이라고 시제를 달리하며 증언하는 말씀 말이다. 

사람이 성령 받기 전에는 누구나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르며 살아간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나면 사람이 달라진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요 율법학자였지만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 받기 전에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다. 그러나 다메섹의 부르심 후에 사람이 바뀌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위협과 살기기 등등하던 자가 사울이었다. 그런 그가 강한 빛을 받고 땅에 엎드러졌다. 그 순간에 하늘에서 사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그 순간 이후 사울은 삼일 동안 눈이 가리어져서 앞을 못보게 되었다.  다메섹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들어갔다. 사흘 동안 앞을 못 보게 된 상태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냈다. 그 때에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아나니아에게 다메섹의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무는 사울에게로 찾아 가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안수하라고 하셨다. 사울을 만난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면서 말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9:17) 사울은 안수 받자 눈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다시 보게 되었다.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다시 강건해졌다. 그 즉시 사울은 각 회당에 다니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날을 머물면서 사울이 복음을 전파하자 유대인들이 공모해서 사울을 죽이려고 하였다. 유대인들은 밤낮 없이 성문을 지키면서 사울을 죽이려고 계교를 꾸미고 있었다. 결국 사울을 보호하는 사울의 제자들이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성벽에서 달아 내려서 피시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부르심과 체험 이후로 사울은 평생토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초대교회의 위대한 이방 전도자의 생을 살았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쓰게 하신 13편의 편지는 신약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스러운 사도의 삶을 살게 되었다. 

본문에 돌아 와 보면 사도 바울이 초대 교회의 기둥처럼 여기던 사도 베드로를 통한 교회의 탄생과 부흥의 현장에 대한 말씀을 대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 “야고보과 게바 즉 베드로와 요한을 기둥같이 여기는 사도들이라고 말했다. 

왜 베드로가 기둥 같은 사도인가. 주님께서는 비겁자요 배반자요 도망자였던 베드로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초대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게 하셨다. 

성령 받은 베드로의 복음 전파 설교를 듣던 무리들에게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전하는 베드로의 말씀 증거 앞에 무리들은 마음에 찔림을 갖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반응하였다. 그 때 베드로는,

회개하라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이 성령의 약속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주신 약속이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이처럼 여러 말로 확증하고 권하는데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수가 삼천 명이 나 되었다. 그 무리들이 모두 다 세례를 받았다. 그 후로 그 무리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서로 기도하기에 힘썼다. 이것이 성령 강림으로 인한 초대 교회 탄생의 모습이다. 성령 강림으로 인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탄생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미함.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이나 방문한 이들이나 성령 강림에 의한 초대 교회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였다. 성령 받은 사도들과 120여 성도들을 무시하고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조롱하는 말을 하던 무리들이 이제는 더 이상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는 마치도 광야 생활 40년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쳐들어갔을 때의 장면을 방물케 한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실패했던 아이 성 전투에서 다시 전열을 재정비한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하였다. 그 후로 연전연승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실감나게 체험하였다. 

성령 강림의 현상과 증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성령 받은 성도들을 주목하여 보던 무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47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성령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로 인하여 그 현장을 지켜보던 무리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점점 커 가게 되었던 것처럼 그런 역사가 전개 되리라고 믿는다. 이 곳 폭포동에서 부터 시작하여 이처럼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마음을 모아 경외하는 이들의 수가 점점 허다하게 더해가는 거룩한 성령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찬양이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날의 베들레헴의 현장이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2장 13절 이하에 보면,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목자가 서로 말했다.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그리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았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을 만나 이 사실을 알렸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며 생각하였다.” 목자들은 이 모든 일어난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 현장을 목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면서 돌아갔다. 

성령 받은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배하며 찬미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령 받은 성도의 사명이다. 


사도들로 인한 기사와 표적.
‘사도’(使徒)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이다. 베드로나 안드레나 야고보나 요한과 같은 제자들은 갈릴리 어부 출신 사도들이다. 저들은 많이 배운 것도 없고 신분도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저들을 한 사람씩 일일이 제자로 사도로 불러서 초대 교회의 중심인물로 사용하셨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many wonders and miraculous signs)이 많이 나타났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가시는 곳 마다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하신 일들이다. 그런 기사와 표적들이 제자들인 사도들을 통하여  많이 나타났다.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자. 성령의 역사는 성령 받은 이들을 통하여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는 증거로 드러난다.  지난 7년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과 성령으로 인한 표적이 아니었다면 오늘 날 이처럼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예배하는 공동체로 자리매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광야 40년, 고난의 길을 걷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시시 때때로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아말렉과의 전쟁을 이길 수 있었겠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왔겠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표적이 아니라면 어떻게 날마다 만나로 배불릴 수 있었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기사와 표적이 아니라면 어떻게 메추라기 떼를 바람으로 몰아다가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 불리 먹을 수 있게 하셨겠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 아니라면 어떻게 마라의 쓴 물이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변할 수 있었겠나.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예수님의 때에 각색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벳세다 광야의 그 많은 무리가 배 부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으며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었겠나.

기사와 표적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는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성령 받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생활 중에 보여 지는 기사와 표적을 부인해서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가 기사와 표적의 역사이며 하나님은 그 때 그 때마다 각양의 기사와 표적을 큰 권능으로 보여 주시는 전능자이시니 말이다.

올 한 해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안에서 각양 기사와 표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도들의 삶을 이어가는 주인공들이 되자. 

오늘 날 우리가 사도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나 요한을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우리 각 사람에게도 ‘사도성(使徒性)이 계승되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가롯 유다의 빈자리에 맛디아 라는 제자가 제비 뽑혀 충원되었다. 저들 12사도들은 장수한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인 순교자의 길을 가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복음의 가치는 위대한 것이다. 성령 받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교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은 누가 최고위 직의 통치자가 되거나 누가 그 통치자의 곁에서 절대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그 권력을 공유하는 그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영원한 것이다.

세상 권력이란 것은 유한한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 맞다. 뭘 자랑할 것이 있나. 5월의 그 화려하고 그 많던 꽃들이 다 어디로 갔나. 역사 속의 영웅호걸(英雄豪傑) 절세가인(絶世佳人)들이 지금 다 어디로 갔나. 다 지나가는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법이다. 자랑하면 안 된다. 교만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하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성도답게 살아가야 한다. 

성령 받고 나니까 베드로가 달라졌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복음서에서 만나던 그런 모습이 더 이상 아니다. 베드로가 이제는 더 이상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 다니던 비겁자가 아니다. 성령 받고 나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다. 사도들로 인한 기사와 표적이 무엇인가. 44절부터 46절의 내용을 보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   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하였다.

성령 받고 나면 믿는 사람 즉 성도들이 더불어 다 함께 같이 있기를 즐겨하게 된다. 성령 받고 나면 물건, 재산, 소유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성령 받은 사람의 헌신 생활과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의 헌신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다. 성령 받지 못한 사람 100명이 성령 받은 성도 한 사람의 헌신을 못 따라 간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 “나는 물건, 재산, 소유, 재물, 돈, 금은보석 등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하여 집착하고 있나” 아니면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하여 내 소유를 드리고 또 드리며 내 몸이라도 온전히 다 바쳐 드려 충성하고 싶을 정도로 헌신적인가.” “아니면 아직도 재물 앞에 벌벌 떨며 꽁꽁 움켜쥐고 인색한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 쓰는가
성도들의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생활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즐겁고 기쁜가.

아니면 그래도 여전히 노래방이 좋고, 호프집이 좋고, 룸 싸롱이 좋고. 호스트바가 좋고 나이트클럽이 좋고 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춤추고 한 잔 하는 것이 더 좋은가.

성령 받은 사람은 돈 쓰는 것 보면 알 수 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즐겨 가는 곳, 즐겨 하는 일이 무엇인지 관찰해 보면 안다.
스스로가 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 밖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성령 받은 사람은 다르다.
주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다르다.
주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다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성령 충만을 받고 살아가는 사도성이 있는 성도라면 그 삶이 구체적으로 달라야 한다. 재물을 쓰는 명세서가 달라져야 한다. 소득을 사용하는 우선순위가 달라져야 한다. 가는 곳, 걷는 길, 앉는 자리가 달라져야 한다. 

이화대학, 연세 대학, 숭실 대학, 경신, 대광, 배재, 오산 고등학교 같은 학교가 어떻게 세워졌나. 연세 세브란스병원 같은 세계적인 수준의 병원이 어떻게 씨앗이 뿌려지고 뿌리내리고 싹이 터서 오늘 날과 같은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게 되었는가. 우리는 알지 않는가. 자기 하나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 보려는 인생관을 가진 이들이었다면 그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목숨을 버리기 까지 선교 할 수 있었겠나. 자기 배만 위하고 자기 등만 따뜻하게 하며 살아가려는 이들끼리 모였다면 오늘 날의 정동 제일 교회, 상동교회, 종교 교회, 영락교회, 새문안교회와 같은 교회들이 탄생할 수 있었겠나. 

사도들로 인한 기사와 표적이 무엇인가. 물론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 앞에 40여살 된 걷지 못하던 거지를 베드로가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믿음의 말을 선포하였을 때에 일어나고 걷고 뛰게 고쳐 낸 기적의 장면이 나온다. 맞다. 그것이 기적이고 표적이다. 오늘 날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질병이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되고 막힌 담이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모든 기사와 표적의 중심은 사도들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보내 주신 성령의 역사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오직 주님만이 받으셔야 한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성도들의 연합이 되기를 염원한다. 사람들끼리 왁자지껄하게 모였다 흩어지는 그런 모임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현존하시는 그런 기사와 표적의 공동체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리할 때에 재물 사용이 다르고 헌신이 다르고 모이는 자세가 다르고 서로를 대하는 눈빛이 다르고 성도들 간에 떼는 떡과 마시는 음료의 가치와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심.
성령 강림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부흥이다. 교회의 부흥이란 단순히 규모가 커지고 수가 많아지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이 주님의 모습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집 안에 있는 큰 아들에게처럼 똑 같은 비중으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서 먼 나라로 가 버린 둘째 아들에게 마음이 늘 같이 함께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 아버지의 심정,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갈 때에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 앞에 대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려는 것이다. 교회에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해 가는 것이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요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므로 기도해야하고 그러므로 주님의 도우심을 겸허하게 간절히 구해야 한다. 물론 방법, 전략, 노력 다 필요하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주께서 그렇게 되게 해 주셔야 한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the Lord added to their number daily those who were being saved. 

주님이 능동이시고 우리는 피동이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다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러 좋은 땅이 떨어지는 복음의 씨앗이 100배로 열매 맺는 순간이 분명히 찾아오게 마련이다. 올해도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며 개인, 가정, 사회, 직장, 학교 등 어디에서나 성령의 사람다운 생각과 말과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주께서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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