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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마28:1-10, 골3:1-4) 2017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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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4-17 06:36 조회 15,065 댓글 0
 
부활 신앙(마28:1-10, 골3:1-4)            2017. 4. 16  부활주일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은 삼일 만에 예수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 내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 첫 아담으로 인하여 들어온 인간의 죄를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해결하셨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이며 예수의 부활을 믿는 부활 신앙의 신비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집 주인이 바뀌면 문패가 바뀐다. 물론 문패를 걸지 않았어도 주인이 바뀌면 그 집 주인이 바뀐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그 유명한 비유의 내용이다. 마음의 집에서 쫓겨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와 그 집 주인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 마음의 집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일곱 명의 친구 귀신을 데리고 그 집에 다시 찾아 들어 갔다. 그 사람의 마음 집은 예전보다 더 심각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예수의 비유이다. 

그렇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은 교양 있는 태도와 말씨. 화사한 화장, 품격 있어 보이는 의상, 정중한 걸음걸이. 뭐 이런 정도를 갖고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갈라디아 2장 20절의 말씀 그대로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셔서 주인으로 살아계신 것이다. 예수는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예수는 나의 마음에 주인이 되신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8장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자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
성령은 친히 주를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영이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믿는 성도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상속자의 영광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의 영광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주와 함께 받아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성도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고 말했다. 여기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란 ‘쉬네게르데테’는 부정과거수동태이다. 어렵나. 지난 날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일회적인 사건으로 살리심을 경험했다는 말씀이다. 이는 세례를 말한다. 물론 물세례에 국한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죄인 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나면 내 안에 들어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지배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게 된다. 이것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는 거듭남의 사건이며 중생의 체험이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내 의지로, 내 결정으로, 내 결심으로, 내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나를 자녀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신앙”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 부활 신앙이란 무엇인가.


위의 것을 찾는 신앙.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위에 것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하여야만 한다. 위의 것이란 무엇일까. 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스스로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서 자신에게 물어 보라. 나에게 있어서 찾고 추구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의 지혜, 권능, 거룩, 성결, 공의, 선, 진실은 무궁하시다.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선함이 풍성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며 허물과 불의와 죄를 용서해 주시느니라.”고 했다. 

느헤미야의 성벽 공사가 끝난 후에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감사와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일곱째 달 스무 나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서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고 기도하였다. 그 기도 내용 중에 보면,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9:17하)

시편 116편 5절에 보면,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라고 했다. 시편 145편 8절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라고 하였다. 

요나서에 보면 요나도 그렇게 기도하였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34:15)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111:9)
그렇다. 우리가 성도로 살면서 위의 것을 찾는 신앙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지존하시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이 없으시고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며 모든 것을 아시고 나의 생각과 느낌과 판단과 계획과 의도를 아시며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길 원하는 성도라면 마땅히 위의 것을 찾는 신앙생활을 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과 비유로 말씀해 주신 수많은 천국 비유의 말씀들을 기억한다. 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셨을까. 왜 그렇게 안타깝게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고 또 설명해 주신 것일까. 우리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육체에 갇혀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란 말이다. 

아기가 엄마 태에 잉태되면 열 달 동안 양수 안에서 탯줄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며 3kg정도의 아기로 자라난다. 때가 되면 엄마가 산고를 겪으며 이 세상에 아기를 출산한다. 엄마 태 안에, 엄마의 뱃속에 양수 속에 있던 아기로서는 이 세상이란 엄청난 세상이다. 그렇게 태어나서 엄마 젖을 먹고 자라난다. 엄마 아빠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다. 그리고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노년기를 맞고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간다. 이 같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생 과정에는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별 차이가 없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부르심을 받는 것은 인생 최대의 복 중의 복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감격의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초라한 삶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농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미국 농구 역사의 신화적인 인물인 존 우든(John Wooden, 1910-2010)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155cm의 키로 미국 농구의 역사적인 인물로 살았다. 그는 27년 동안 UCLA 농구 팀을 이끌었다. 4시즌에 88연승을 하기도 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대학농구 챔피언을 7년 연속하였다.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100년 가까이 살면서 돈의 유혹이나 스캔들에 휘말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검소했고 겸손하고 부드러운 지도자의 표상이었다. 그의 곁에 있는 선수들은 늘 존 우든 감독을 의지하였다. 존 우든은 자신에게 믿음을 심어 준 프랭크 데이비슨 목사가 그에게 선물해 준 작은 십자가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 작은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였다. 그 때마다 그는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위로부터 임하는 새 힘을 얻고는 하였다. 그는 4개월 10일을 더 살면 채울 수 있는 99년 8개월 동안 이 땅에서 위의 것을 찾으며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는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감사해라.
평판은 인간이 주는 것이다. 겸손해라.
자만은 스스로 주는 것이다. 조심해라.”

는 교훈을 남겼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신앙.
위의 것을 찾기 위해서는 땅의 것을 찾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는 법이다. 위의 것을 추구하고 찾는 생활이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생활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대로 어떻게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피부로 느끼며 오감을 통해서 경험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땅에 속한 것들인데 어떻게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매 순간마다 땅에 속한 욕망을 다스리지 않으면 결국은 땅에 속한 욕망으로 인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유혹의 수렁에 빠져 들고 말 것이다. 

최고 권력이라도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병드는지를 실감나게 경험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나. 농단이란 ‘농(壟)’자 ‘언덕’이란 뜻이다. 과거 재래시장을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며 살펴보고 잘 되는 장사의 품목을 싹쓸이해서 그 물건 값을 폭등하게 해서 높은 수익을 챙기는 것을 말한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땅에 속한 지체의 욕망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우상 숭배가 땅에 속한 것이라고 했다. 땅에 것을 죽이지 못하고 살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과거의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을 벗어 버리는 생활을 말한다. 벗어 버려야 할 것들은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의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부활 신앙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새 사람을 입는 것과 같다. 우리가 계절이 바뀌고 봄이 되니까 겨울옷을 벗고 화사한 봄옷으로 갈아입듯이 말이다. 

오늘 부활 주일에 흰 옷, 환한 옷을 입으니 서로 얼마나 환하고 밝아 보이나.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의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2-14)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성도는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프랑스의 칼레라는 이름의 시청 광장에는 “칼레의 시민”이란 로뎅의 작품이 있다. 1347년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동안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영국 군이 프랑스 북부의 항구 도시인 ‘칼레’를 침공하였다. 칼레 시민들은 1년 가까이 영국 군대 앞에 투항했지만 결국 칼레 시는 영국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 영국 왕은 그 동안 1년 가까이 저항하고 버텼던 칼레 시민의 대표를 처단하겠다고 나섰다. 대표적인 지도자 6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나머지 시민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그 때에 칼레의 시장, 상인, 법률가 등 6명의 시민 대표가 교수형을 자처하고 나섰다. 드디어 날짜가 정해졌다. 저들 6명은 광장에 마련된 교수대에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칼레 시민을 구하기 위해서 대신 죽겠다고 나섰다. 그 때 마땅히 저들 6명을 모두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러면 칼레 시민들이 다시 마음을 합하여 다시 영국에 투항하고 나설 것이니 사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라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그 당시에 영국의 왕비는 임신 중이었다. 임신 중인 몸으로 왕을 설득하였다. 저들 6명을 교수형에 처하지 말고 모두 다 살려 주자는 간청이었다. 6명의 시민 대표들은 죽기를 각오하였으나 결국은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고 모두 다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다. 칼레 시는 저들의 죽기를 각오한 용기과 희생정신을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조각가 ‘로뎅’에게 부탁하여 ‘칼레의 시민’이란 조형물을 칼레 시청 광장에 세우게 되었다. 신앙의 신비는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게 되는 것이다. 

왜 성도가 부활 신앙으로 살면서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했다. 8절에서는 “땅의 것을 벗어 버리라.”고 했다. 그 반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고 했다. 


나중 영광을 위해 사는 신앙.
부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장차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4)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때가 되면 이 세상에 재림 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늘 하신 약속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며 그를 주로 믿고 따르던 자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날이다. 장차 때가 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 온 자의 영광을 주님과 더불어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고 하셨다. 이것은 생명의 신비이며 부활의 신비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3)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나중 영광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그 생각이 다르고 삶의 출발이 다르고 삶의 과정이 다르고 삶의 나중 열매가 분명히 다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였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6-58)

나중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지금 겪는 고난이나 고통이나 역경이나 환난이나 시련이나 질병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갇히지 않는다. 옥한흠 목사의 “다시 복음으로”라는 책에 보면 성도들 중에 죽음의 순간을 평안히 맞지 못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게 맞는 이들을 보면 “저 분이 과연 평생 믿음으로 살아 온 것이 맞나.”하는 의심이 들던 때가 없지 않았다는 잘 아는 다른 목사의 목회 경험을 소개하는 내용이 나온다. 평소에 주 안에서 승리하는 영광스러운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죽음의 순간에도 평안이 임종을 맞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이미 영생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니 말이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 목사는 88살에 임종하면서 “모든 것들 중에서 최고의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라는 말씀을 끝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D. L. 무디는 임종 직전에 “땅은 물러가고 하늘은 열린다.”고 말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로 살아가자.

나중 영광의 영광스러움을 주 안에서 주와 함께 누리는 영원한 부활 승리의 인생들이 모두 다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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