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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도하라(눅18:1-8) 201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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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3-19 21:59 조회 15,282 댓글 0
 
항상 기도하라(눅18:1-8)               2017. 3. 19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하여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신 “불의한 재판관과 원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과부의 비유”가 본문의 큰 내용이다. 본문은 누가복음 17장의 후반부에 소개된 내용에 연 이어서 묵상해야만 한다. 

세상의 끝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교훈을 들은 제자들이 당황스러워 하였다. 예수님은 노아의 때의 홍수 심판이나 롯의 때에 일어났던 소돔과 고모라 유황 불 심판 사건에 대하여 예를 드셨다. 그러자 “주여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씀입니까”하고 질문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고 “주검이 있는 곳에는 주검을 즐겨 찾는 독수리가 모여드느니라.”고 교훈해 주셨다. 주검이란 죽은 시체를 말하지 않나. 시체가 있는 곳에 죽은 고기를 즐겨 먹는 독수리가 모이게 되어 있다고 경고하셨다. 

그 당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결코 안일한 문제가 아니었다. 핍박이 극심해지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 장차 붙잡혀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곁에 계실 때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도 말씀하셨지만 장차 임할 재림에 대하여도 교훈하셨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라는 말씀은 구원 받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불행해진 롯의 아내와 같은 어리석은 믿음으로 살아가지 말라는 교훈이시다. 그리고 이어서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목숨을 얼마나 사랑하나. 그런데 그 목숨이란 것이 보전한다고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반대로 “자기 목숨을 잃는 자가 살리라.”고 하셨다. 그렇다. 동생 아벨은 형 가인에게 들판에서 쳐 죽임을 당했다. 아벨이나 가인이나 다 역사 속에 죽었다. 그 죽음의 형태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성경은 저들의 죽음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하나. 히브리서 11장 4절 끝에 보면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라.”고 교훈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라.”,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빌립 도마 마태 등 순교한 예수의 제자들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라.”,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라.”, “얀 후스는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라.”, “주기철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라.”는 설명이 맞다.

그러나 그 당시 제자들을 바라다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으셨다. 그래서 하신 말씀 중의 하나가 본문 8절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은 세상 끝 날에 환란과 핍박과 고난이 극심해 지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변절하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시다. 

그런 도전을 주시려고 기도에 대하여 “항상 기도하라”,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강조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연 이어서 기도의 필요성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다. 


계속하여 드리는 기도.
“항상 기도하고”라는 말씀은 지속적인 기도, 계속하여 끊임이 없이 드리는 기도를 말씀한다. 우리말에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이 있지 않나. “일곱 번 넘어지더라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는 속담 말이다. 잠언 24장 16절에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는 말씀이 있다. 의인(義人)이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넘어졌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서 새 길을 가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항상 기도하고” 라는 말씀은 계속하여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여쭙고 찾아 가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가르치심이 아니겠는가. 

“구하라 얻을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또 다른 교훈은 어른이나 어린 아이나 누구나 다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는 기도에 대한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가 힘이 든다고 숨 쉬기를 멈출 수 있나.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항상 기도하고”라는 가르침은 기도에 대한 완전한 교훈이시다. “Always pray"이다. ‘always'가 무엇인가. “어떤 상황, 어떤 형편, 어떤 경우, 어떤 입장, 어떤 문제, 어떤 장애, 어떤 장벽, 어떤 난관, 어떤 위기, 어떤 여건, 어떤 건강, 어떤 처지”를 만날지라도 계속하여 기도하라는 분부이시다. 예수께서는 붙잡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기 전날 밤에도 밤새도록 이마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지 않았나. 예수님 자신의 생각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기도하지 않으셨나. 

자기(自己)(EGO)가 강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까.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대로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절대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나 스스로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어느 순간에나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간다면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겠나. 

더군다나 억울한 일이 생기고 아무리 밤잠을 설쳐 가며 이리 생각하고 저리 궁리하고 고민해도 해법이 없는 답답한 상황이라면 기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신 기도의 교훈이 본문의 내용이다. 

어떤 도시에 악한 재판장이 있었다. 이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무시하는 소문나고 악명 높은 재판장이었다. 그런데 한 과부가 자주 그 재판장을 찾아 갔다. 만나줄 체도 하지 않는 그 재판장을 계속하여 자주 찾아 갔다. 주차장에서도 따라 붙고 재판소의 현관에서도 따라 붙었다. 재판관이 건물 밖에 나서기만 하면 졸졸졸졸 따라 붙으며 자기의 원수로 인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하소연하고 애원하였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이 한마디의 애원이 담고 있는 천 가지 만 가지 사연이 가슴에 먹먹하게 느껴지지 않나.

<재심>이라는 영화와 관련된 실제 인물인 박준영(1974-) 변호사가 세간에 화재가 되고 있다. 그는 다른 변호사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재심”을 주로 다루는 변호사 일을 해 왔다. 올해 44살인 그는 자신의 삶이 기구하다. 전남 완도의 작은 섬 노화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를 구타했다. 가족들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준영이 중학교 2학년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는 섬 마을 시골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아이였다. 그는 시골 종합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을 떠났다. 이미 고등학교도 100여일 씩 무단결석하였다. 인천, 서울로 오가며 막노동, 정비공장, 프레스 공장을 전전긍긍했다. 그 자신도 일찍부터 술과 담배 속에 절어 살았다.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적도 있다. 나쁜 친구들과 쏘다니며 그냥 그렇게 지냈다. 그러나 방황의 현장에서 언제나 그를 붙잡은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겨 놓으신 유서의 내용이었다. 

“너희 셋이 지금처럼 공부하고 말 잘 들으면 엄마가 없어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단다. 엄마가 없다고 술 먹고 방탕한 생활하면 그것같이 불쌍하고 불행한 것 없다. 그 점을 언제나 머리 숙여 염두에 두어라. 어린 너희들을 두고 가는 내 마음을 헤아려 다오. 기가 막혀서 통곡을 한다.”

그는 군대에서 법대를 다니다가 온 선임을 만났고 사법 시험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제대 후에 그 선배를 따라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고등학교 검정고시 졸업 자격으로 사법 시험에 합격하였다. 2002년도의 일이다. 그렇게 가족들 마음을 아프게 하던 아버지마저도 그가 사법 시험에 합격하기 1년 전에 돌아 가셨다. 

범죄사건 앞에 경찰, 형사, 사법부의 복잡한 그물망과 같은 조직의 힘에 의해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실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히는 이들이 있다. 긴긴 세월 자기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무죄를 입증 받지 못하고 지내는 이들이 현실적으로는 적지 않다고 한다. 박준영 변호사는 승산 확률이 거의 없이 역사에 묻혀서 잊혀져가는 원통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이 당하고 있는 사건들을 추적해서 재심을 청구하는데 시간을 써온 변호사이다. 재심을 청구해서 이길 확률이 적어도 끝까지 가는 것이 그의 재심 철학이다. 그는 2015년 “변호사 공익 대상”이라는 명예로운 상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항상 계속하여 기도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도하면 지혜가 생기고 기도하면 돕는 이가 나타나고 기도하면 자신도 알지 못하던 새 힘이 생기고 기도하면 마른 땅에 샘이 터지고 기도하면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기도 한다. 주님은 남의 안타까운 문제를 갖고도 기도할 것이지만 내 안에 있는 내 원수 대한 원한을 풀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7절에 보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물론 기도한다고 형에게 맞아 죽은 동생 아벨에 부모인 아담과 하와 앞에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기도한다고 억울하게 원주민의 추장에게 겁간당한 야곱의 딸 디나가 예전과 똑 같아지지는 않는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이 기도했다고 해서 하룻밤 잠자고 나니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가나안의 아버지 야곱 곁으로 꿈처럼 옮겨 간 것은 아니었다. 기도한다고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금방 예루살렘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도한다고 무너진 성전, 무너진 예루살렘 성곽이 며칠 만에 복원 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도한다고 지뢰에 잘려 나간 두 다리다 다시 자라나지는  않는다. 기도한다고 안 보이던 두 눈이 금방 환히 보이고 기도 한다고 안 들리던 귀가 금방 들리기 시작하고 기도한다고 누구나 다 중풍병이 꿈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도한다고 모든 병이 일순간에 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계속하여 밤낮 기도하다 보면 억울함과 원통함과 비통함과 답답함과 고통을 싸매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손길이 간섭하기 시작하신다. 기도하며 이기며 견디며 버티며 살아가다 보면 마음의 불안을 평안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답답함을 시원함으로, 괴로움을 안식으로, 탄식을 감사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손길을 체험하게 된다. 

사래는 여 주인이고 하갈은 사래의 몸종이었다. 사래는 어느 날 남편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아들 주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니 몸 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으라고 제안하였다. 창세기 16장 3절에 보면 사래가 자기 몸종 하갈을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을 떠난 지 십년이 되던 해였다. 거기 “첩”이라는 성경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리하면 안 된다고 하나님의 언약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해야 할 아브람이 아내 사래의 말을 받아들이고 사라의 몸 종 하갈을 침소에 들여서 임신 하였다. 그 동안은 고분고분하던 여종 하갈인데 주인의 아기를 임신한 후부터는 여 주인을 멸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나. 여종에게 멸시 받게 된 여 주인 사래가 남편 아브람에게 항의했다.  “내가 받는 모욕을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아브람도 단단히 화가 났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거칠게 말을 받았다. 참을 수 없게 된 여주인 사래가 몸 종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갈은 사래의 손을 피하여 도망하였다. 

왜 아브라함과 사라라고 하지 않고 아브람과 사래라고 하나면 이 때는 아직 하나님께서 저들 부부의 이름을 개명해 주시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저들 부부의 이름을 개명하는 내용은 창세기 17장 5절과 15절에 가야 나온다. 

하갈의 입장에서는 여주인의 말에 순종하여 주인의 침소에 끌려 들어갔고 주인의 아이를 임신한 잘 못 밖에는 없다. 물론 임신 한 후에 얌전히 있지 않고 여 주인을 멸시하였으니 화를 자초한 것이 아닌가. 결국 광야로 피하여 도망쳐 가던 하갈은 지친 몸으로 광야에서 샘물을 만났다. 술 길 샘 곁에 있을 때에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가 물었다.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갈이 대답하였다. “나는 내 여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다시 말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그리고 천사는 장차 태어날 아기는 아들이라고 알려 주면서 ‘이스마엘’이란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이스마엘’이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답답하고 앞길이 막막하고 살길이 묘연하던 하갈이 자기에게 찾아 온 천사를 통해서 새 힘을 얻었다. 그래서는 그 곳 이름을 “브엘라헤로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나를 보살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우물”이란 뜻이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원한이 쌓일 때 왜 기도하여야 하나. 기도하면 하나님의 그 억울한 원한을 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선지 10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15년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아들 이삭을 낳게 해 주셨다. 사라는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6)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그 기쁨이 오래 가질 못했다. 이삭이 커 가며 젖을 떼는 기념으로 큰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16살 쯤 된 이스마엘이  이제 갓 젖을 뗀 아들 이삭을 놀려 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당장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요청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마음에 근심이 생겼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아내 사라의 성화를 이겨 내지 못하며 근심하고 있던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21:12-13)

아브라함은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준비하고 하갈의 어깨에 메어 주며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로 내어 보냈다. 그 아침에 사라는 밖에 내어다 보지도 않았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하루아침에 광야에 버리진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는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담아 준 가죽부대의 물은 이미 다 떨어졌다. 하갈은 아들을 광야의 가시나무 같은 앙상한 관목나무 아래 있게 하였다. 그리고는 아들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말하며 저 만치 떨어져 앉아서 크게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아들 이스마엘과 서로 저 만치서  바라다보며 같이 울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울고 있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스마엘의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고 천사는 하갈에게 말을 걸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그만 울고 일어나서 네 아들을 일으키고 네 손으로 네 아들을 붙들어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다. 하갈이 밝아진 눈으로 보니 거기 샘물이 보였다. 달려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다가 지쳐 있는 아들에게 마시도록 해 주었다. 성경은 그 날 이후 하갈과 이스마엘이 어떤 고생을 하며 어떻게 연명하며 살았는지를 장황하게 기록해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다”

억울하고 답답한 환경에서 아들을 낳은 후에 본 부인에게 밀려 쫓겨난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지만 하나님이 그 아이와도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와 같은 자의 기도를 들으실까. 하나님이 내 사정을 돌아보아 주시기나 할까. 하나님이 나와 같은 자의 형편에 관심이나 있으실까. 예수님의 비유를 다시 보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악한 재판장이라도 원수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하소연하는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었다. 하도 자주 나타나서 번거롭게 하고 괴롭게 하니 귀찮아서라도 해결해 주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하물며’(눅18:7) 하나님이 그 밤낮 부르짖는 원한을 들어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한나의 답답하고 억울한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남편과 두 아들 잃은 상처와 슬픔과 탄식 가운데서 기도하던 나오미의 기도를 들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나오미에게 홀로 된 며느리 룻으로 하여금 시댁 마을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대 지주 보아스의 아내가 되게 해 주셨다. 불쌍한 며느리 룻으로 하여금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해 주셨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며느리 룻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신 것이다. 

계속하여 기도하고 밤낮 기도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해 주시는 줄 믿는다. 물론 언제든지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단3:18) 혹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마26:39)라는 기도를 함께 드려야 할 것이다. 



낙심하지 않는 기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란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말씀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기도가 낙심하지 않는 기도가 아닌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던 사도 바울과 실라의 기도가 낙심하지 않는 기도가 아닌가. 매 맞고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았다. 포기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저들을 여전히 풀어내시고 여전히 복음 전파를 위하여 존귀하게 쓰시고 또 쓰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낙심하지 않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게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낙심하지 않고 포기 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크고 비밀한 일을 기도하는 인생들에게 간증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고라 자손의 시편인 시편 42편 5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낙심은 기도의 방해 요인이다. 낙심하면 기도하지 못하게 된다. 낙심하면 낙심의 수렁에 점점 빠져 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낙심과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와 포기할 것 같은 약해지는 마음을 떨치고 응답의 확신과 소망을 갖고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도우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고통이란 이름을 갖고 살았던 야베스의 기도를 우리는 잘 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환난 중에도, 근심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포기 하지 않고, 기도하며 열심히 꿈을 가꾸며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난다. 반드시 하나님의 그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신다.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고 이겨 나가다 보면 억울한 일이 풀려지고 원한이 해결되고 고통이 사라지고 답답한 일이 시원하게 해결된다. 


택함 받은 자들의 기도.
7절의 “택하신 자들”이란 8절의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을 말씀한다. 에녹은 택함 받은 자이다. 노아도 택함 받은 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택함 받은 언약의 조상들이다. 요셉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갈렙도 택함 받은 자들이다. 기드온도, 사무엘도, 다윗도 택함 받은 자이다. 이사야, 예레미야, 엘리야, 엘리사, 에스겔 모두 다 택함 받은 종들이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모두 택함 받은 자들이다.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불행한 가롯 유다는 빼고 말이다. 바나바도, 바울도, 초대 교회 일곱 집사들도 일일이 다 택함 받은 자들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택함 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를 보기를 원하신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이 보실 때에 나는 택함 받은 자 다울까. 주님이 보실 때 내 믿음은 택함을 받은 믿음다울까. 

물론 택함 받았던 아브라함도 실수도 있었고 우여 곡절이 많았다. 이는 모세도 마찬가지이고 다윗도 마찬가지이다. 베드로도 그랬고 야고보와 요한도 그랬다. 다 부족했으나 택함 받은 자들로서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선지자요 사도요 참 제자의 길로 다듬어져 갔다. 

예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제자들을 향하여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 하셨겠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저들에게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더욱 더 당혹스러워 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는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말하면 마치도 이단처럼 취급하고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 17장과 본문을 연 이어서 관찰해 보면 예수께서는 장차 주님의 재림의 때에 닥칠 환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7장 22절의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라는 인자의 날이란 예수께서 장차 재림하실 날을 말씀하신 것이다. 17장 26절과 30절에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강조하신다. 

이 말씀을 하실 그 당시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에 여전히 살아 계신데 무슨 고난, 십자가 죽음, 사흘 후의 부활도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예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이 들려질 리가 없다. 믿어질 리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노아의  때나 롯의 때에 일어났던 일들이 “인자의 때”에도 그렇게 일어날 것이라고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농사를 시작하는 봄이 왔지만 가을에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보면 삭막하다. 알곡과 쭉정이가 같이 들판에 가득하게 자라던 날에는 어느 것이 알곡인지 어느 것이 쭉정이인지 잘 구분이 안 된다. 그러나 알곡과 쭉정이에 골고루 낫이 닿고 타작마당을 거치고 키질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알곡은 창고에 들어가고 쭉정이는 아궁이 속으로, 불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쭉정이는 연기 속에 일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꽃이 피는 봄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계절이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추수의 계절은 심판의 시간이다. 올해도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기 믿음을 든든하게 지켜 나가는 승리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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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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