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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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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성전의 기둥(계3:12) 2017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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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2-19 23:42 조회 16,638 댓글 0
 
하나님 성전의 기둥(계3:12)             2017. 2. 19


“형제 사랑”이란 좋은 이름 뜻을 가진 빌라델비아교회는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 중에서 칭찬만 받은 교회이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켰다.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
고 칭찬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속히 올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라.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는 분부의 말씀을 하셨다. 

이어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 본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와 명령을 잘 준행하며 살아가면 장차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세상 건물의 기둥이 아니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약속인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에서도 나라 안과 밖에서 각 분야마다 기둥 같은 존재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는 일은 얼마나 감격스럽고 존귀한 일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인생으로 살아가면 “내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 

사람이 스스로 기둥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의 믿음의 응답을 통해서 그렇게 되게 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시대마다 필요한 곳에 기둥과 같은 삶을 살아가도록 해 주셨다.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하여 그런 부르심을 통한 사명자들을 구별하여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 그 마음이 인자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주님의 마음을 갖고 세상을 대하며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 시대의 기둥과 같은 인물들이 되게 하신다. 

예수님 당시로 하면 세례 요한이 비단 옷을 입고 지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중심인물이 되고 헤롯왕조차 두려워하는 인물이 된 것이 아니지 않나. 세례 요한이 오래도록 장수하였기 때문에 인물이 된 것이 아니지 않나. 불의한 헤롯의 칼에 목이 잘려 죽은 세례 요한,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 헤롯의 칼에 죽은 사도 야고보, 요한과 함께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 로마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던 사도 바울이 왜 그 시대의 기둥과 같은 인물들인가. 바나바가 왜 초대 교회 시대에 기둥과 같은 인물인가. 저들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주님의 뜻에 응답하고 반응하며 살았던 이들이 아닌가.

왜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이 위대한가.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라는 믿음을 갖고 사자 굴에 던져져도 당황하지 않고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 불 가운데 던져 넣어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삶이 가증이 되게 해 주신 것이 아닌가. 저들은 한 결 같이 그 난세에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과 같은 생을 살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역사에 성전이 최초로 세워진 것은 솔로몬 임금의 때이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기도와 소원을 이루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완성하였다. 열왕기 상 7장에 보면 솔로몬 임금의 때에 여호와의 성전을 마무리 하는 공사 내용이 나온다. 그 중에 놋으로 두 기둥을 세웠다. 야긴과 보아스라는 이름의 기둥을 세웠다. “야긴”은 “그가 세우신다.”,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기둥의 높이가 18규빗이었다. 1 규빗이 45cm정도이다. 그러므로 8미터가 훨씬 넘는 높이이다. 기둥의 꼭대기에는 기둥머리를 만들었다. 놋을 녹여서 부어 만들었다. 기둥머리의 높이가 다섯 규빗이었다. 기둥의 꼭대기에 놋으로 부어 만든 기둥머리만도 2미터가 넘었다. 기둥머리에는 바둑판 모양으로 그물 장식을 하였다. 그리고 사슬 모양으로 땋은 일곱 개의 장식을 넣었다. 기둥의 맨 꼭대기에는 석류 모양 두 줄을 그물 위에 둘렀다. 기둥 꼭대기의 머리 부분은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다. 기둥머리를 돌아가며 석류 모양 200개를 줄 이어 장식하였다. 이 두 기둥을 멀리서 보면 백합화 모양이었다. 설명으로 다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고 웅장하였다. 

그런 솔로몬 성전의 놋 기둥이 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군대에 의해 넘겨지고 끌려가게 되었나. 남 왕국 유다의 말년의 왕과 제사장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점점 악을 행했다. 역대하 36장 16절에 보면,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신들을 비웃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욕했다.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의 온 백성에게 미쳤고 회복 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떠나면 개인이든 민족이든 불행해지고 마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되고 말았다. 
오늘 날은 솔로몬의 성전, 스룹 바벨 성전, 헤롯의 성전은 다 무너지고 역사 속에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이슬람의 황금 돔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계시록 일곱 교회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터키에도 건물이 무너진 잔해들과 건물의 일부 벽면과 기둥 몇 개와 그 기둥들을 받치고 있던 기단만이 황량하게 남아 있는 정도이다.  세상의 건물들은 그런 것이다. 긴긴 세월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이 땅 위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대리석 기둥이라도, 놋 기둥이라도 영원하지 못하다. 기둥이 세워지고 쓰러지는 흥망성쇠의 배후에는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이 반드시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 또한 상징적이며 교훈적인 내용으로 받아 드려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누구를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일까.


이기는 자.
“이기는 자는”이라고 하였다. 이기는 자가 무엇인가. 이 세상은 철저히 약육강식의 사회다. 힘이 없는 자는 힘이 있는 자에게 지고 만다. 지배당하고 만다. 빼앗기고 만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모든 삶의 원리는 철저히 이기려 하는 것이다. 한 민족, 한 나라도 마찬가지고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웃나라와의 관계에서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 힘을 잃은 나라는 힘 있는 나라의 지배를 받고 만다. 침략 당하고 만다. 지난 오천 년 한 반도의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중국의 긴긴 역사도 그러하지 않나. 이는 구라파나 동남아를 비롯해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녀들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하고 강조하는 이유도 그러하지 않나.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말지 않는가.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 걸려 있는 문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한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루게 된다.”
(If you sleep now you will be dreaming, 
If you study now you will be achieving your dream.)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말씀에 불순종하면 자신도 불행해지고 가족도 불행해지고 나라도 불행해지고 만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사울 왕이 아말렉을 공격한 전쟁 기록이 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전쟁 명령을 내리셨다. 선지자 사무엘은 임금 사울에게 방문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아말렉을 공격하되 모조리 다 죽이라고 하셨다. 왕과 백성, 남녀 노유, 젖먹이,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등 사람과 짐승 할 것 없이 모조리 다 죽이라고 하셨다. 사울이 전쟁에 나갈 자를 소집해 보니 보병만도 20만 명이었다. 사울의 군대는 전쟁에 이겼다.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사로잡아 왔다. 양과 소들 중에서 기름지고 가장 좋은 것들을 모두 다 살려 끌고 돌아 왔다. 전쟁은 완전한 승리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전쟁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실망하셨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대신 말씀하셨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15:11) 이 말씀을 들은 사무엘은 그 날 밤에 밤새도록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사울 왕을 만나려고 나섰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사울 왕은 갈멜에다가 기념비를 세운 후였다. 그리고 길갈로 떠난 후였다. 길갈에 있는 사울 왕을 찾아 갔다. 사울 왕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에 대한 깨달음도 없었고 아무 개념이 없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임금 사울을 책망하였다. 그때서야 사울 왕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 말조차 진실한 고백이 아니었다. 이미 사무엘 선지자의 입장은 단호하였다. 사무엘은 임금 사울에게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왕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삼상15:26)고 선언하였다. 사무엘은 사울 왕이 살려 끌고 온 아말렉의 아각 왕을 길갈에서 칼로 쳐서 처단하였다. 그리고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 왕은 기브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 그 후로 선지자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 왕을 다시 보지 않았다. 늘 슬픈 마음으로 지내던 사무엘 선지자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서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인 어린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고 장차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날을 예비하셨다. 

사울은 왕이었으나 하나님 앞과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서 무너져 가는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난세에 베들레헴 시골 들판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어린 소년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평생을 하나님 안에서 이기는 자의 삶을 살아갔다. 사무엘하 3장 1절에 보면,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사울은 왕이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점점 약하여져 가고 청년 다윗은 점점 강하여져 갔다. 

이기는 자란 어떤 자인가. 
이기는 자의 믿음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자를 이기는 자로 여기시나.

모세를 보라. 모세가 자기 의지, 자기 혈기, 자기 젊음, 자기 판단으로 행동할 때에는 왕궁 밖에 나갔다가 자기의 동족과 싸우는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땅 속에 묻어 버리는 살인자가 되고 말았다. 그 다음 날 다시 왕궁 밖에 나섰다가 자신의 어제 저지른 살인 범죄의 사실이 이미 세상에 소문 난 것을 알고는 미디안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40년 세월이 흘러갔다. 모세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보려 하다가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었다. 그런 그가 미디안으로 피ㅎ신하여 지내며 거기서 장가들고 미디안에서 40년을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생활을 하면서 나이 팔십이 되었다. 나이 팔십이 된 모세를 호렙 산 떨기나무의 불이 붙는 것 같은 환상 앞에서 부르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 후에 모세는 애굽에서 고난당하며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동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게 하는데 앞장서도록 쓰임 받았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나이 팔십 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그의 나중 사십년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승승장구 이기고 이기는 삶을 살았다. 모세가 유능해서인가. 모세가 경험이 많아서있다. 모세가 지혜로워서인가. 모세가 탁월해서인가. 모세 스스로에게 강퍅한 바로 임금을 설득할 외교 능력이 있었는가. 모세가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였나. 모세가 뱀을 다시 지팡이가 되게 하였나. 모세가 바로 임금 앞에서 스스로 열 가지 재앙을 묘기로 보였는가. 모세가 자신의 무슨 숨은 능력을 발휘해서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였는가. 누가 모세 때에 이백여 만 명의 히브리 노예백성들을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아가게 하였는가.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어떤 자인가. 이기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혀 쓰임 받아야 하지 않나.

누가 광야 생활 중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였나.
누가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였나.
누가 모세에게 두 돌 판에 계명의 말씀을 새겨 주셨는가.
누가 구름 기둥으로 낮의 해를 가리어 주셨는가.
누가 불기둥으로 밤의 어둠을 밝히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아가는 길을 인도하셨는가.

누가 요단강을 건너게 하였는가.
누가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였는가.

모세의 힘인가. 여호수아의 지혜인가.  갈렙의 전략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간 자가 아닌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누가 이겼는가. 사울 왕인가. 이스라엘의 그 어떤 장수인가. 다윗의 세 형들인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 중에 누구인가. 사울임금이 칼과 창과 활과 튼튼한 투구와 갑옷이 있었건만 왜 골리앗을 이기지 못하였나. 누가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나. 소년 다윗은 물매 돌 한 개로 전쟁을 끝냈고 골리앗의 목숨을 빼앗았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나.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나. 엘라 골짜기에 돌멩이 다섯 개를 주워 들고 물매를 손에 잡고 골리앗을 향하여 나갈 때에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무어라고 말하였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 왔느냐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그 때 다윗이 무어라고 대답하였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그렇다. 하나님은 소년 다윗의 이 믿음을 사용하신 것이다. 믿음이 이긴다. 믿음의 사람만이 최후 승리를 얻게 마련이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Faith is the victory! Faith is the victory!
Oh, glorious victory that overcomes the world.

라는 찬송이 있지 않나. 

주님의 제자 베드로가 자기 생각, 자기 견해, 자기주장을 펼칠 때에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나. 아니지 않나. “사탄이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책망을 받지 않았나. 베드로가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혀 예수님을 따를 때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되었나. 예수께서 붙잡히시던 날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반하고 도망가 버리지 않았나. 그런 베드로가 어떻게 초대 교 회의 위대한 사도가 되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는 순교를 피하지 않는 순교자가 될 수 있었나. 베드로 스스로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과 비겁한 모습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었나. 아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니 달라지기 시작했다. 성령 받고 나니 담대해졌다. 베드로는 성령 받은 후에도 시간시간 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지 않았나. 그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이 삼천 명을 하루에 회개하게 하는 말씀의 사도가 되지 않았나. 베드로 자신의 언변과 자신의 지식으로 삼천 명을 회개 시킬 수 있었겠나. 베드로 자신의 힘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 앞에서 구걸하며 지내던 걷지 못하던 자를 걷고 뛰게 할 수 있었겠나. 그는 사십년 동안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불쌍한 거지요 중증 장애인이었다. 

누가 벳세다 광야의 배고픈 무리들이 배 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게 하였나. 그 들 판에서 빌립의 믿음과 안드레의 믿음의 차이가 무엇이었나. 예수께서 빌립을 시험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그때 빌립이 대답하기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백 데나리온이란 오늘 날로 하면 이천만원 정도이다. 이천 만원어치 빵을 사다가 나누어 준다고 해도 부족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 때에 안드레가 예수님께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여기 한 어린 아이에게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들판에 있던 배고파하는 무리들을 둘러앉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골고루 나누어 먹게 하셨다. 그런데 기적이 계속된 것이다. 그날 그 들판에서 빌립의 반응과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의 믿음은 달랐다.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이기는 자란 어떤 자여야 하나. 

사울이 편협된 유대주의자의 자기 신앙과 자기주장에 사로 잡혀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예수 믿는 이들을 사로 잡아다가 죽이려는 목적이었다. 그런 살기 등등하던 사울을 예수께서 부르셨다. 강한 빛으로 비추셔서 그의 눈이 보이지 않게 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고 사울을 부르셨다. 사울은 삼일동안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된 복음 전파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삼일 후에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고 다시 보게 되었다. 그 즉시로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다. 그가 복음 전하는 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워했다. 사울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힘을 더 얻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였다.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은 사울의 변화를 믿으려 하지 못했고 모두 다 당혹스러워했다. 그런 사도 바울의 나중을 주님은 평생토록 존귀한 이방 사도로 사용하셨다. 다메섹을 향하던 순간으로 비교하면 사울 자신에게 그런 변화의 능력이 있었겠나. 신약 성경 중에 사도 바울의 편지 13편이 포함되어 있다. 놀랍지 않나.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믿음의 사람들을 세워 나갔다. 가는 곳마다 교회가 탄생하였다. 사도행전 9장 이후에 소개되는 사도 바울의 1, 2, 3차 선교 여정을 보라.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르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 곳에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울도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그 사람에게는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 바울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네 발로 바로 일어나라.” 그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었다. 그 현장을 지켜 본 많은 무리들이 놀라워하면서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렀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바울보다 인물이 좋았던 바나바를 보고 제우스신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을 헤르메스 신이라고 불렀다. 루스드라 시외에 있었던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갖고 와서 대문 앞에서 무리와 함께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다. 그 때에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면서  소리 질렀다. “여러분 이러지 마세요. 우리도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세요. 제발 이런 헛된 일을 버리세요. 천지와 바다와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고 말씀을 전하였다.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몰려 와서 무리들을 충동하였다. 수많은 무리가 바울에게 달려들어서 돌로 쳤다. 죽은 줄로 알고 바울을 시 밖으로 끌어다가 내쳐 버렸다. 바울을 따르는 제자들이 안타깝게 여기고 둘러 서 있는데 바울이 살아 일어났다. 그리고 루스드라 성에 다시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향하여 갔다. 이런 일들이 바울 자신의 능력인가. 바울 자신에게 이런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신 것이다. 주님이 루스드라의 평생 걸어 본 적이 없는 불쌍한 한 사람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걷게 해 주신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고 겸손하게 쓰임 받으며 평생토록 이기는 자의 삶을 사모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자.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할 자.
기둥은 움직이면 안 된다. 기둥은 들락날락하면 안 된다. 기둥이 움직이면 집이 무너지고 만다.  일단 기둥이 되고 나면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 기둥은 들어가도 안 되고 나가도 안 된다. 기둥은 천년이 가도 다시 또 천년이 가도 그냥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기둥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빌리델비아 지역에는 큰 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서 새로 계획하여 잘 세운 새 도시가 필라델피아다. 필라델피아는 1932년까지도 기독교 도시로 거의 이천 년을 이어 온 유서 깊은 도시이다. AD 100-160년대에는 ‘암미아’(Ammia)라는 여선지자 뛰어난 사역을 감당해서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번성한 적이 있었다. 주님이 그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셨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칭찬하셨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분”이 칭찬하셨다. 

이기는 자의 믿음으로 살아가면 “결코 다시 나아가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왜 나가게 되는가. 지진이 나면 불안해서 집안에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게 되어 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다시는 그런 큰 재앙과 심판이 없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는 성도가 믿음으로 누리게 될 영원한 상급과 온전한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다. 1000년 전인 969년에 백두산 정상에 화산이 폭발하였다. 그 때 생긴 분화구가 천지다. 그 직경이 5km이고 둘레가 14. 4km다. 물의 평균 깊이가 200여 미터다. 가장 깊은 곳은 384미터나 된다. 그 때 화산재가 일본 열도에 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누가 지진과 화산 폭발을 원하겠는가. 그런데 주님은 빌라델비아교회에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우리 각 사람이 교회 안에서 그런 기둥처럼 든든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 나가는 은혜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새 이름들이 기록될 자.
주님은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될 자들에게 새 이름을 기록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세 가지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인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그 기둥 위에 기록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 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소유를 삼아 주신다는 말씀이다. 민수기 6장 27절에 보면, “그들은 이 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선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축복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신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축복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인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생각해 보라. 이 세상에 있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긴장되고 언제 전쟁이 다시 일어날지 모르고 언제 테러가 일어나고 언제 어디서 누가 적의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른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도시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완전한 평화, 영원한 평화가 보장된 곳이다. 요한 계시록 21장의 말씀처럼 새 예루살렘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언제나 항상 곁에 함께 계신 곳이다. 요한 계시록 21장 7절에 “이기는 자는 새 예루살렘을 상속으로 받으리라.”고 하셨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우리 모두 아들딸의 권세를 누리며 사는 곳이다. 그 곳 새 예루살렘은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귀한 보석으로 설명해도 다 설명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곳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곧 성전으로 계신 곳이다.(계21:22) 

그리고 또 하나 기록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단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 될 자들에게 주시는 이기는 자의 믿음의 상급 중의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다. 이는 성도들에게 장차 누리게 해 주시는 온전하고 완전한 영광을 상징하는 말씀이 아닌가. 요한 계시록 2장 17절의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 가운데도 보면,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고 하셨다. 요한 계시록 19장 12절에도 보면,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은 장차 주께서 이 땅에 재림 하실 때에 그를 믿고 구원 받을 성도들에게 밝혀 주실 이름인 것이다.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과 같은 자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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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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