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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다리는 오실 그이(눅7:18-22) 2017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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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2-16 22:47 조회 13,882 댓글 0
 
 우리가 기다리는 오실 그이(눅7:18-22)       2017. 2. 12



박 모세 군은 올해 26살이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4개월 때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복중에서부터 머리의 뒤 부분에 뼈가 없어 뇌가 흘러 나왔기 때문에 생존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진단을 받았다. 태어난 후에 6번의 대 수술을 받았다. 목숨은 건졌지만 후유증으로 복합 장애가 왔다. 뇌의 10%만이 오늘 날까지 살아 왔다. 5살이 되도록 말도 못했다. 한쪽 귀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5살 때부터 노래를 듣고 배워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보지 못하니까 오직 듣는 기능에 의지해서 음정과 박자와 가사를 모두 외워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박 모세군은 지적 장애, 신체장애, 시각 장애, 중복 1급 장애인이다. 그런 그가 오늘 날은 세계를 날아다니며 주신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 지난 2013년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개막식장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그 후 그는 “인간승리의 아이콘”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SBS의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해서 외우기도 힘든 긴 가사의 이태리어로 ‘프레기에라’와 영어로 ‘You raise me up.'을 불러서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다. 지난 1월 28일에는 KBS 1TV의 ‘노래가 좋아’에서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를 어머니와 함께 불러서 1승을 했고 두 번째 출연에서도 우승해서 2승을 했다. 

세상에는 고난과 불행이 많다. 박모세 군처럼 태어나면서 약하게 부족하게 태어나는 이들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살아가면서 상해를 입거나 장애를 입기도 한다. 사도를 당해서 신체의 일부를 잃기도 한다. 양쪽 눈의 시력을 잃어서 못 보게 된다든지 혹은 한 쪽 눈으로만 생활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쪽 다리 혹은 두 다리를 잃는 경우도 있다. 양 팔와 양 다리를 다 잃어버리는 중중 사고도 있다. 청력을 잃어서 못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평생을 말을 못하며 사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이들은 정도가 다를 뿐 지적 장애를 갖고 태어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정서의 장애가 있어서 정상적인 대인 관계의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의 빛을 한 번도 못 본채로 생을 마감하는 아기도 있다. 태어나긴 했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일찍이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그것이 사고이든 질병이든 말이다. 어떤 가정은 다 자란 아들딸이 어느 날 갑자기 사고나 어려운 병으로 부모 앞에서 눈을 감는 불행과 아픔도 있다. 

부부도 마찬가지이다. 언젠가는 죽음이 부부의 사이를 갈라놓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아내 혹은 남편에게 죽음이 찾아오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열심히 살지만 늘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쩔쩔매며 사는 이들도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수많은 무리들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서 물로 세례를 받았다. 심지어는 예수께서도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을 만나 그에게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세례 요한은 주로 광야에서 생활하였다. 약대 털옷을 입었고 야생 꿀인 석청으로 허기를 해결하거나 메뚜기를 잡아서 배고픔을 달랬다. 세례 요한은 자주 금식하였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천국을 알렸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서 사는 헤롯 임금의 소행을 악하다고 지적하면서 헤롯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은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미 가시는 곳마다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까지도 살리시는 예수의 소문이 그 당시에 처처에 파다하였다. 누가보음 7장의 앞부분에만 보아도 로마의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던 종이 병들어 죽게 된 것을 고쳐 주셨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례가 진행되던 상여에 손을 얹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본문의 시작은 그런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한 때에 감옥 밖에서는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에서 각종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별의 별 이야기들이 세례 요한의 귀에 까지 들려 왔다. 세례 요한은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능력이 많으신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세례 요한이 갇혀 있는 감옥의 옥문이 열려지게 하시고 세례 요한을 결박하고 있는 쇠고랑이 풀려 지게 해 주실 줄로 기대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까지도 세례를 베푼 세례 요한의 근황을 아시는지 모르는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셨다. 

감옥에 갇혀 지내는 날들이 점점 계속되고 답답하고 착잡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세례 요한이 제자 두 사람을 예수께 보내서 여쭈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이 예수께 찾아 가서 이런 질문을 여쭙던 그 당시에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는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계속하여 행하고 계셨다. 예수께 찾아오는 병자들마다 각색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 고통 가운데 지내던 이들이 평화를 되찾고 기뻐하였다. 악한 귀신에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이 떠나갔다. 앞을 보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이 눈을 떠서 세상을 밝게 보는 기적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21절의 “마침 그때에”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라.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서 답답한 시간을 보내며 두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궁금한 질문을 하던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는 이 마을 저 마을, 이 도성 저 도성, 이 회당 저 회당에 찾아다니시며 그에게 나아오는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아 새 삶을 살아가게 해 주고 계셨다. 세례 요한이 질문한 오실 그이란 누구일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오실 그이란 시편이나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말씀한 것이다. 시편 118편 26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오실 그이는 누구신가.


질병을 다스리시는 그이.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찾아 온 세례 요한의 두 제자에게 이 같이 말씀해 주셨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그러면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인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예수께서는 “못 보는 사람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못 듣던 사람이 듣는 것.”을 몇 가지의 대표적인 치유의 예로 들어 말씀해 주셨다. 미국 워싱턴 DC의 의사당 건물에는 헬렌 켈러가 펌프질하며 펌푸에서 퍼 올리어지는 물에 왼 손을 대고 있는 동상이 있다. 앤 셜리번 선생이 펌프 물을 헬렌 켈러의 손에 퍼 주면서 한 쪽 손바닥에 ‘water’이라고 알파벳 단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교육열과 그 결과 못 보고 못 듣고 말 못하는 불운을 딛고 의젓한 삶을 살아갔던 인간 승리의 화신인 헬렌 켈러의 펌푸 물을 퍼 올리는 동상은 장애를 극복하며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장애인구가 300만 명이 넘는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시각장애자는 약 3700만 명이다. 5초마다 한 명꼴로 시각장애인이 늘어나고 있다. 1분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시력을 잃고 있다. 또 시각장애자의 90%가 가난한 저개발국에 살고 있다.

자신을 보라. 나는 볼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말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면 장애를 가진 이들과 비교할 때 얼마나 큰 복과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인가. 나병은 피부 질환 중에 가장 악한 병이다. 우리 중에 피부 질환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치유의 은혜가 임하길 소망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못 보던 이들이 보게 되었다. 걷지 못하던 이들이 걷게 되었다. 말 못하거나 듣지 못하던 이들이 말하게 되었다. 나병도 고침 받고 중풍병도 고침 받고 열 두해 혈루병도 고침 받고 38년 된 병자도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 

우리는 주일마다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암이 사라지고 두통도 사라지고 피부의 질환도 고침 받고 몸의 병, 마음의 병, 생각의 병, 감정의 병 등 각종 질병으로부터 고침 받는 치유의 은혜가 강수처럼 넘쳐나게 임하기를 기도한다.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라는 찬송의 4절에 보면,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
괴로운 날이나 기쁜 때나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네”

라고 찬송하지 않나.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고 이렇게 항의 하듯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주님 그 때 나의 가족의 병을 고쳐 주지 않으셨나요. 왜 그 때에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내 아들 딸의 병을 고쳐 주지 않으셨나요.  누군 고쳐 주시고 누구는 안 고쳐 주신 건가요.”

29살 된 청년이 퇴근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달려드는 자동차에 치여서 교통사고를 당하여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갔다. 여기 저기 몹시 다쳤을 뿐만 아니라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두 눈에 붕대를 칭칭 감고 지내야 했다. 그의 병실에 정혜라는 이름을 가진 아홉 살짜리 여자 환자 아이가 들락거리며 말을 걸었다. 아저씨는 왜 두 눈에 붕대를 감고 있어. 꼭 미라 같다. “얘 저리 나가지 못해.” “왜 그래 아저씨, 너무 그러지 말아. 이 곳 병원에는 아저씨처럼 아픈 사람들 참으로 많아. 우리 엄마가 마음을 예쁘게 먹고 지내면 나쁜 병도 낫는다고 했어.” “며칠 전에 우리 병실에 마음씨 고운 언니가 하늘나라에 갔는데 하늘나라에 가서 예쁜 별이 됐대.” “너는 어디가 아픈데” “응 그건 비밀, 내 의사 선생님이 이제 한 달 만 더 있으면 병원에 안 와도 된다고 했어.” “그래 다행이구나.” “그러니까 한 달만 있으면 더 이상 나를 못 만나게 될 테니까 그렇게 한 숨만 푹푹 쉬지 말고 오늘 나랑 재밌게 놀아 줘 아저씨” 병실에 찾아 온 간호사 언니가 “정혜야 주사 맞을 시간인데” “아니 나 주사 맞기 싫다 말야” “정혜야 그러면 너 아저씨하고 결혼 못해 아저씨하고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주사 잘 맞아야지.” 정혜는 생각을 바꾸고 아저씨가 보는 앞에서 한 쪽 엉덩이를 내어 밀고 주사를 맞았다. 앞을 못 보게 된 아저씨의 손을 잡고 병원 앞 정원에 산책도 나가고는 했다. 

정혜를 만난 두 주 후에 그 청년은 퇴원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날을 집에 갇혀서 지내는 그에게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최호섭씨 축하합니다. 안구 기증자가 생겼습니다. 서둘러 입원하시고 안구 이식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질 않았다. 양쪽 눈의 안구 이식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 궁금했다. 며칠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자기가 이식 받은 두 눈은 얼마 전 병실에서 만났던 아홉 살짜리 정혜의 눈이었다. 정혜는 악성 백혈병으로 아홉 해를 이 세상에서 살고 하늘나라로 갔다. 정혜는 눈을 감기 전에 병실에서 만났던 미라처럼 두 눈을 가리고 있던 그 아저씨에게 자기의 두 눈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정혜는 엄마를 통해서 이런 편지도 써서 남겼다.

♥아저씨! 
나 정헤야.....
음 나 이제 저기 수술실에 들어간다.
옛날에 옆 침대 언니도 거기에서 하늘로 갔는데.....
정혜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저씨 내가 만일.. 
하늘로 가면 ...
나 아저씨 눈 할께 그래서 영원히 아저씨랑 같이 살께,
아저씨랑 결혼은 못하니까.....
하지만 수술실 나오면 아저씨랑 결혼할래,
아저씨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래

밝은 두 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그 청년의 두 눈에서는 주르륵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예수님은 여러 방법을 통해서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손 붙  잡아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시고 소망을 포기하지 않게 해 주시는 영원한 치유의 주님이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신 예수님.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12살 난 딸을 살려 내신 예수님. 죽은 자 나흘이 되었고 이미 장사지낸바 된 나사로를 무덤 앞에서 불러내서 살려 주신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지난 금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 묵상한 누가복음 7장의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신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나인 성의 많은 사람들이 남편 없이 홀로 살다가 아들까지 잃은 과부의 슬픈 장례식을 돕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가까이 가셔서 운구 중인 관에다 손을 대셨다. 운구하던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다. 어머니와 장례를 돕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두려워하였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말하며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 기적의 현장을 지켜보던 무리들은 서로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말하며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으로 두루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렇다. 예수는 이 땅에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기 위해서 오셨다. 사탄 마귀와 귀신을 대적하고 질병을 다스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려 주심으로 예수 자신이 생명의 근본이심을 만 천하에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시다. 예수는 어둠을 이기는 빛이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시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기독교는 무덤이 없다. 이 땅에 석가나 마호멧이나 공자 맹자의 묘는 있으나 예수의 묘는 없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묘에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하나님 곁으로 승천하셨다. 우리는 주일 마다 사도 신경을 고백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이와 같은 사도들의 신앙 고백은 사도들의 고백이며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고백 종교이다. 우리의 고백의 바탕은 역사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교회가 하나인 것을 믿는 공교회 신앙과 성도의 교제와 죄의 용서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믿음의 고백 위에 기초한다.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들의 믿음은 주님 안에서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땅에서 건강하게 장수하며 성도의 복락을 누리는 것이 귀하다. 그러나 누구나 이 땅에서의 삶이란 나그네의 삶이다. 이 세상에 아무리 장수한다고 하여도 천년을 살 수는 없다. 인생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다. 물론 요즘은 장수시대이다. 칠십도 청년 같고 팔십도 팔팔하다.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사는 것도 복이다. 모세는 120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 갈 때에 시력이 쇠하지 않았고 기력도 좋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주님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땅에 영원히 머물 인생이란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다운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175살에 죽었고 이삭은 180에 죽었고 야곱은 147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갈렙도 죽었다. 다윗은 70살에 죽었고 솔로몬은 60살에 죽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칼에 목이 잘려 죽었고 예수께서는 33살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

예수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살아난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후에 다시 죽었고 나인 성 과부의 아들도 나중에 다시 죽었다.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려 주신 나사로도 나중에 다시 죽었다. 무슨 말인가. 이 세상에 영원히 살아 갈 수 있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때가 되면 다 이 세상을 떠나가야 한다. “하나님 서둘러 데려 가지 마시고 이 땅에서의 생명을 좀 더 보존하여 주시옵소서.” 물론 이런 기도를 드릴 수는 있을 것이다. 벽을 바라보고 기도하던 히스기야 임금도 15년 생명을 연장하고 더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영생을 모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인가.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가난한 자의 복음이신 그이.
이 땅에 가난을 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첨단 과학문명 시대인 21세기에도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자녀인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가난과 굶주림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님은 예수 앞에 나오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 생명의 음료, 포도나무의 줄기, 양의 목자라고 말씀해 주시므로 그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의 공급자이심을 선포해 주셨다. 예수님은 벳세다 광야의 배고픈 무리들에게 어린 아이의 도시락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앞에 놓고 감사기도 드리신 후에 남자만도 5천명, 모두 합하면 이만여명의 무리들을 배 불리 먹게 해 주셨다. 남은 부스러기만도 12광주리에 넘쳐 났다. 주님은 자녀들이 궁핍하고 헐벗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그의 살과 피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영생의 삶도 선물해 주셨다.

지금 가난해도, 지금 핍절해도, 지금 부족해도 낙심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모든 필요의 공급자이시다. 인간에게는 생존의 욕구가 있다. 

매슬로는 인본주의 심리학을 근거로 인간행동은 각자의 필요와 욕구에 바탕을 둔 동기(motive)에 의해 유발되고, 이러한 인간의 동기에는 위계가 있어 각 욕구는 하위 단계의 욕구들이 어느 정도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지배적인 욕구로 등장하게 되며 점차 상위욕구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는,
1단계 생리적 욕구는 의식주 생활에 관한 욕구로 본능적인 욕구이다.
2단계 안전의 욕구는 신체적, 정서적으로 안전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3단계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는 단체에 소속되어 소속감을 느끼고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이다.
4단계  존경의 욕구는 타인에게 인정 받고자하는 욕구이다.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시켜 자기만족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이다. 여기에 “지적 욕구”와 “심미적 욕구”를 추가시켜 6단계와 7단계로 나아가는 인간의 학습 행동과 예술적 행위에 몰입하는 행위를 설명했다.

기독교 미술, 기독교 음악, 기독교 건축, 기독교 문학, 기독교 철학, 기독교 심리학, 기독교 교육학 등 복음은 인간의 끝없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돌아가신 강영우 박사는 장로였다. 그는 중학교 때 운동하다가 사고를 당하여 앞을 못 보게 되었다. 그러는 그는 평생을 정상인 이상의 삶을 씩씩하게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갔다.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후천성 소아마비로 못 걷게 되었다. 그런 불편한 몸으로 12년 동안 미국의 격변기에 대통령을 지냈다. 베토벤은 청각을 완전히 잃은 후에도 합창 교향곡과 같은 역사적인 작품을 남겼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7살 때 장티프스로 고열로 고생하다가 청력을 잃고 말도 제대로 못하며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625 때 피난지인 군산에서 예수 생애를 그린 한국화의 작품을 그려 냈다. 전쟁 중에 민족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탁월한 미술 세계는 얼마나 뛰어난가. 1000여 마리의 참새 떼를 그린 <군작>같은 작품 앞에 서면 그의 열정과 작품의 무게감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아 주시고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필요를 넉넉하게 채워 주시는 풍성한 공급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기다리던 “오실 그이”로 인한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나누며 증거하는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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