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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시29:1-11) 2017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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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1-20 23:40 조회 14,462 댓글 0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시29:1-11)           2017. 1. 15


지난 해 9월 12일에 경주 지역에 강도 5. 8의 지진이 있었다. 그 후로 어제 오전 경상도 하동에서 계측된 지진까지 565번의 여진이 계속되었다. 일본이 겪는 지진이나 중국 스촨성의 지진 피해와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아직은 안전하다고 하겠지만 마음을 내려놓을 상황은 아니다. 안전한 동안에 안전하고 평안한 동안에 평안한 것뿐이다. 

지난 해 10월 경상도 울산 일대의 태풍과 많은 비와 해일의 피해는 대단하였다. 울산은 근대 산업 도시로 발전하여 120여만 명이 사는 곳이다. 우리나라 지역 도시 소비 수준이 제일 높은 도시라고 한다. 그 곳에 태풍이 강타해서 그 피해가 극심하였었다. 

2010년 태풍 콘바스로 태안반도와 안면도 일대의 아름다운 소나무인 적송들이 뿌리 채 뽑혀 나가고 꺾여 나갔다. 그 다음 해인 2011년, 우리는 서초구 우면산 산사태의 심각성을 겪어서 안다. 강한 비바람인 태풍, 허리케인, 토네이도는 큰 집채를 성냥갑처럼 부수어 버린다. 지난 해 1월 31일에는 아프리카 콩고에서 국제 축구 경기를 벌이던 중에 콩고 선수들만 같은 운동장에서 11명이 벼락에 맞아 숨졌다. 상대편 선수들은 모두 살았다. 사망 원인은 콩고 선수들의 운동화가 금속 소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번개는 비행기도 두 동강을 내기도 한다. 지난해 8월 30일에는 노르웨이에서 순록 323마리가 동시에 한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 떼죽음을 당했다. 사슴 종류인 순록의 새끼도 70마리나 동시에 죽었다. 천둥, 번개, 홍수, 해일, 쓰나미, 태풍과 같은 강한 바람 등의 자연 재해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시편 29편은 다윗에 의해 고백된 감사 예배시이다. 여호와의 크신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3절에서 9절까지에는 “여호와의 소리”라는 표현이 7번이나 반복해서 나온다. 여호와의 소리란 천둥소리를 말한다. 시인은 많은 물, 홍수, 뇌성, 번개인 화염, 광야를 진동하는 자연 재해 현상 가운데 드러나는 여호와의 위엄을 찬양하고 있다. 많은 비가 와서 주변이 물바다가 되는 것을 보았는가. 홍수의 힘을 보았는가. 거대한 나무들이 뿌리 채 뽑혀 나가고 한 아람씩 되는 굵은 은행나무와 같은 가로수가 젓가락처럼 꺾이어 나가는 것을 보았는가. 지붕이 벗겨져 나가고 간판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나뒹굴고 전봇대가 뽑혀 나가는 것을 보았는가. 

다윗은 나무 중의 나무인 백향목이 꺾여 나가고 백향목이 부수어지고 산림의 나무들이 꺾여서 송아지 뛰듯이 비바람에 뒤엉키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레바논과 시룐이란 레바논 산과 시룐 즉 헤르몬 산의 나무들이 꺾여 나가고 무참하게 나무숲이 강한 비바람에 꺾여 부서지는 장면을 보았다. 일순간에 거대한 나무숲이 들 송아지 뛰듯이 강한 비바람에 뒤엉키고 꺾이고 부서지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천둥소리가 진동하고 번개가 하늘을 가르는 가슴이 섬뜩한 장면도 보았다. 천둥과 번개와 강한 비바람 가운데 광야가 진동하는 장면도 보았다.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고 했다. 가데스 바네아는 팔레스틴의 최 남단이다. 에돔과 아모리 족속의 땅이다. 가데스에서 레바논까지란 그 당시 다윗의 눈에 보이는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과 장엄하고 광대하신 손길이 온 천지에 그 어디에나 가득한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9절에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다윗은 낙태하는 암사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장엄하신 손길 앞에 인간이 여호와의 도우심이 아니면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출산하고 생명을 양육할 수 있는 힘이 인간 스스로에게 없음을 시인하며 여호와의 섬세하신 손길을 의지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렇게 푸르고 우거지던 산들도 강한 비바람과 태풍이 휘몰아치면 과일의 껍질을 벗겨 내듯이 일순간에 삼림이 말갛게 벗겨지고 말지 않는가. 

다윗은 이 같은 자연 현상과 자연의 변화 가운데 경험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장엄하신 다스림과 통치를 인하여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다. “너희 권능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라는 말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촉구하고 있다.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라.”는 초청을 반복하며 “영광의 하나님”을 높이고 있다. 


예배를 받으시는 여호와.
다윗의 하나님의 장엄하신 위엄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광대하신 권능을 찬양하면서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역대하 20장 21절에 보면,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오늘날 성가대, 찬양대가 거룩한 옷 즉 까운을 입는 것의 전통, 기원과 같은 말씀이 거기에 나온다. 하나님은 모세 시대에 대제사장으로 구별 받아 성막을 섬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입을 구룩한 옷에 대하여 제정하셨다. 역대상 16장 29절에도 보면,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시편 96편 9절에도,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라고 하였다. 1절에 “너희 권능있는 자들아”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을 말한다. 11절에서는 두 번이나 반복하여 “자기 백성”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 땅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누구인가.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릴 백성이 누구인가.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은 그 권능이 무한하시고 그 위엄이 거룩하시며 영원무궁하신 여호와의 존재를 시인하고 높이고 경배하는 백성들을 통해서 예배를 받으시는 여호와이시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는가. 최첨단 컴퓨터 과학 시대에 비행기 앞에서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고 철도 위에 돼지 머리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나라에 통계로 무속인 수가 20만 명이 넘었다. 지난 2016년 1월 29일, 국회에서는 '국운융성기원'을 빌미로 '굿판'을 벌였다. 2010년, 한민족정신지도자연합회(한정연) 주최로 국회에서 굿판을 벌인 후 5년 만에 또 벌어진 일이었다. 유언비어이길 믿지만 “누가 언제 어디에서 굿을 했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무슨 생각이 드나. 

그런데 세상에는 미신을 믿고 우상 숭배인 샤마니즘(shamanism)에 붙잡혀 살아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면 누가 과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 수 있는가. 11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선택 받은 “자기 백성”이 아니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처럼 주일 날 교회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능력이 있고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내가 열심히 실력을 키우고 내가 사회생활이 이 분야에서 경쟁을 이기고 이런 자리를 잡아서 이렇게 힘 있게 살아가고 있는데 “여호와는 무슨 여호와, 예배는 무슨 예배” 이런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다. 

우리가 믿고 예배드리는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 여호와가 계시다. 여호와란 히브리말로 야훼(Yahweh), 예호바(Jehovah) 즉 하나님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신가.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호렙산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환상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을 체험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3:14)고 자신을 설명해 주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먼저 계시던 분이시다. 하나님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때에 수면 위에 영으로 운행하고 계셨다. 

성경의 시작이 무엇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이다. 최재천 박사는 서울 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박사를 공부하고 돌아 와서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다. 그 분야에서는 꽤 유명하고 언론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창조 신앙이 없다. 한 번의 그의 글을 보았다. 그는 철저한 진화론 신봉자였다.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은 아직 쉽게 규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의 하나의 작은 인자에서 시작해서 각종 생명체가 생겨나고 진화해 온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주장한다. 어떤가. 여러분도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가. 세상의 그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그 어떤 작은 인자에서 생겨나고 진화된 것들이라고 여겨지는가. 하늘의 각종 새들과 땅에서 뛰고 달리고 기어 다니는 모든 크고 작은 동물들과 물 속의 각종 물고기들과 작은 곤충과 벌레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 무엇인가 어느 작은 한 인자에서 긴긴 세월 동안에 진화하고 발전해 온 것이라고 여기어 지는가. 

그런 이들에서 예배가 가능할까.
누가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 수 있는가. 여기 “거룩한 옷”이란 물론 거룩한 옷을 말하기도 하지만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갖는 정결한 마음가짐과 성결한 심령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야 에베소서 5장의 말씀처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에 빠져 있고 이단의 앞잡이들에게 어리석게 사로잡힌 이들이 라면 어떻게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고 그 영광과 권능을 찬송하며 예배드릴 수 있겠는가.

여호와는 택한 백성들에게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벨은 여호와가 열납하시는 예배자로 살지 않았나. 에녹은 무드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 동안을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고 여호와와 동행하는 예배자의 삶을 살지 않았나. 노아는 방주를 짓는 동안에도 여호와와 동행하였고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후에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로 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다.  

여름에서 바닷가에 가서 수영을 즐기고 윈드 서핑을 즐기고 요트를 타고 보트를 타고 수상 제트 스키를 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봄과 가을 산과 강과 바다와 들로 나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골프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스킨 스쿠버로 바닷 속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스카이 다이빙도 신나고 좋은 오락이 될 것이다. 암벽 등반을 하고 산악자전거를 타는 일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겨울이 되면 스키를 타고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눈썰매를 타는 일도 신나고 상쾌하고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즐겨 하던 예배의 사람이었다. 시편 150편들 가운데 73편의 그 방대한 분량의 시편을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통하여 쓰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찬송하고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을 높이며 예배드리기를 즐겨 하던 예배자였다. 

다윗은 사울 왕 때에 블레셋에 빼앗겼던 여호와의 법궤를 되찾아 오면서 어린 아이처럼 기쁘고 즐겁게 춤을 추었다. 사울 임금의 딸이며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은 다윗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렇다. 아무리 부부라도 여호와의 영광을 예배하는 마음의 정도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자라나던 어린 시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다윗은 소년 때에도 달랐다. 하나님은 그런 소년 다윗, 목동 다윗, 이새의 여덟 번째로 태어난 막내 아들이었던 다윗에서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셔서 나이 어린 다윗에게 장차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될 자로 기름을 부어 구별하셨다. 다윗은 구별되게 자라났다. 다윗은 고난의 풀무를 지나야 했고 고난의 용광로를 거쳐야 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에배자의 마음이 특심하였다. 다윗은 그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울 임금의 창과 칼을 피하여 엔게디의 광야로 도망쳤다. 다윗은 광야 한 가운데서도 여호와를 예배하는 마음을 버린 적이 없었다. 다윗은 막벨라 동굴 속에 피신해 지내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 속에 가득한 여호와의 영광을 예배하는 마음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시편 8편도 다윗이 쓴 시이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고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이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 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다윗의 경배와 찬양은 이렇게 계속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다윗의 찬양은 이렇게 반복되는 가사로 끝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O LORD, our Lord, how majestic is your name in all the earth!)


성전에 계신 여호와.
다윗이 9절에서 말하는 성전은 오늘날과 같은 화려한 성전이 아니었다. 다윗이 워하고 건축하고 싶었던 성전은 아들 솔로몬의 때에 가서야 건축 될 수 있었다. 다윗이 드나들며 예배드리던 성전이란 사실은 성막이었다. 모세 시대 때에 광야에서 만들어졌던 성막이다. 40년 광야 생활 동안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하심을 따라 수도 없이 설치되고 다시 거두어서 이동하여 다시 지정된 곳에 설치하던 성막이었다. 여호수아는 그 광야의 성막을 거두어 제사장들의 어깨에 메도록 하고 수많은 레위 사람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넜다. 그리고 실로에 성막이 건축되기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긴 고난의 세월을 이기며 살아가야만 했다. 사사 시대를 거치고 사울와 왕으로 있던 때에 블레셋이 쳐들어 왔다. 성막의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기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다윗은 늘 여호와의 성막 중심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였다. 그는 고백한다.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그렇다. 다윗은 여호와의 성막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다.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경험하였다. 여호와의 성막에서 장엄한 여호와의 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다윗이 말하는 일곱 번이나 반복되는 “여호와의 소리”란 해와 달과 별들과 천지 만물 가운데 가득한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기운이요 능력이요 권세요 생명력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임금이 죽던 해에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영광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체험하였다. 스랍 즉 천사들이 여섯 날개를 가지고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하늘을 날며 창화하며 노래하며 경배하는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임재를 보았다. 성전 중심의 신앙이란 그런 것이다.

그 때에 주의 음성이 들렀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였다. 그 때에 이사야가 말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로 날아 왔다. 천사가 불이 붙는 핀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말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주께서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이사야가 대답하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여호와의 임재와 부르심을 체험한 이사야의 간증이다. 

사도 요한도 여호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체험하며 천천만만의 수많은 천사를 통한 큰 음성을 들었다.

“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사도 요한은 크고 우렁차고 장엄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음성을 또 다시 들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7:10)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계7:12)

이것이 예배다. 예배 시간에 다른 생각하면 되겠나. 예배를 대강 드리면 되겠나. 예배를 지루하게 여기면 되겠나. 다윗은 낡은 여호와의 성막에서도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 찬 영광을 보고 찬미하고 예배하고 경배하였다. 


영원한 왕이신 여호와.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29:9)고 하였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시다. 이 땅의 권세자들은 때가 되면 물러나야 한다. 이 세상 권력자들은 영원한 권력이란 없다. 영국 여왕이라도 그 권세가 영원하지는 않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땅에 영원한 왕이시다. 

시편 2편의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철장의 권세로 이 세상의 권세를 질그릇같이 깨트리시는 권세자이시다. 영원하신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 통치자들의 권세를 바라다보시며 웃으시고 그들을 비웃으시는 전능자이시다. 세상의 왕들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다.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가 낳으신 한 아들의 권세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시2:11-12)

그렇다. 그래야 한다. 맞다. 그래야 여호와께서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예배하고 그의 성전을 찾는 자기 백성들에게 힘을 주신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들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는 아버지시다. 여호와께 힘을 구하자. 여호와께서 공급해 주시는 평강을 구하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일찍이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셨다.

“여호와는 네게 복(福)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恩惠)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平康)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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