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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서 나신 왕(마2:1-12) 201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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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12-26 05:41 조회 15,664 댓글 0
 
베들레헴에서 나신 왕(마2:1-12)         2016. 12. 25 성탄주일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한 말씀은 미가서 5장 2절이다. 당시에는 그 곳을 ‘베들레헴 에브라다’라고 불렀다. 베들레헴은 유다 족속들이 사는 땅 중에 보잘 것 없이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는 미가 선지자를 통한 예언의 말씀이 있었다. 오늘 날의 베들레헴은 3만 여명의 인구가 사는 도시이다. 그러나 이천 년 전의 베들레헴은 500여명 미만의 주민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정도의 거리이다. 

베들레헴이란 지명이 성경에 처음 언급된 것은 창세기 35장이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베들레헴 길가에서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은 후에 죽어 그 곳의 길가에 장례 되었다. 베들레헴은 룻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베들레헴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고향 마을이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손을 잡고 베들레헴에 들어가 살면서 그 마을의 대 지주였던 노총각 보아스의 아내가 된다. 보아스는 룻을 통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여덟 아들들을 낳았다. 그 여덟 번째 아들인 이새의 막내아들이 다윗이다. 이처럼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 마을이기도 하다. 다윗은 자기 마을에 찾아 온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자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사무엘상 16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끝으로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었다. 솔로몬의 아들이며 다윗의 손자인 르호보암 왕은 베들레헴을 요새화하며 남 유다의 중심지로 삼았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당시에는 로마군의 그 지역 근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 날 베들레헴에는 “목자들의 들판 교회”와 “예수탄생기념교회”가 있다. '마을에서 가까운 동굴'의 관리자였던 2세기의 그리스도교 교부였던 성 유스티누스(St. Justin Martyr)가 예수의 탄생지를 확인하였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베들레헴 중심부에 '예수 탄생 기념 교회' 아래에 있는 동굴은 지금까지 성지 순례객들이 즐겨 방문하는 곳이 되어왔다. 동굴 위의 교회는 최초의 그리스도교도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성 헬레나(AD248-328)가 짓게 했다. 그러나 그 후 파괴된 것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AD527-565 재위)가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예수의 탄생은 별의 이동을 따라 예루살렘에 도착한 동방 박사들에 의해서 분명해졌다. 당시 그 지역을 관할하던 왕은 헤롯이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는 동방 박사들의 말을 전해들은 헤롯왕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소동하기 시작하였다. 헤롯왕은 모든 대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다. 그 때에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이 아는 성경의 지식을 동원해서 미가서에 소개된 메시아 예언을 언급하였다. 마태복음 2장 6절의 말씀은 미가서 5장 2절에 예언된 메시아 예언의 인용 구절이다. 베들레헴은 유다의 작은 마을이지만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라고 하였다. 베들레헴에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스리다”는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  보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집안, 나라 따위를)보살펴 이끌거나 관리하다, (사람이 혼란스러운 일을)수습하여 평정하다.”는 뜻이다. 물론 그 외에도 “다스리다”라는 뜻의 용도는 다양하다. 물을 다스려 자연이 인간의 삶에 유익을 주도록 하는 것을 치수(治水)라고 하지 않나. 산에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나도록 가꾸고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치산(治山)이라고 하지 않나. 범죄율이 낮아지도록 시민생활에 안정을 지켜 가는 것을 치안(治安)이라고 한다.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위생적인 보건 생활을 하도록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질병을 예방해 가는 것은 병을 고치는 치병(治病)의 일환이 될 수 있다. 정치적으로도 “다스리다”는 뜻이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다스리다.”라는 뜻은 주변을 보살펴서 안정되고 질서 있고 복되게 하고 서로 다른 주장을 통일시켜서 선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며 어떤 일과 사건과 사태를 평정시켜 나가는 통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신 왕으로서 “다스리는 자”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의와 정의로 불의를 다스리고, 참과 진리로 거짓을 다스리며, 선으로 악을 다스리는 왕이시다. 예수는 빛으로 어둠을 다스리는 왕이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죽음을 다스리는 생명의 구주이신 왕이시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올 것이다.”라는 예언대로 오신 예수는 어떤 왕이신가.


목자이신 왕.
양이나 염소나 약대나 소를 치는 목축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목자의 역할이 실감나게 전달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처럼 이 땅에서 반만년 동안  논과 밭에 농사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던 농경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목자의 역할이 생활 속에서 경험해서 마음에 와 닿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양들은 목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절대로 목자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들로부터 생명을 보존하고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는 자신을 목자로 소개하였다. 선한 목자는 문으로 들어간다. 담을 넘거나 울타리를 넘지 않는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양을 돌보지 않고 도망가는 것은 선한 목자가 아니라 삯꾼이라고 하였다. 예수를 왕으로 삼은 백성은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듯이 나를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알아듣게 된다. 뿐만 아니라 목자이신 나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이름을 각각 일일이 불러가며 인도해 주신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는 자신이 곧 양의 문이라고 하셨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왕 삼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 분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또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 된다. 양을 도둑질하는 도둑과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다르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시며 믿는 자를 다스리시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양과 같은 인생을 그 삶이 주 안에서 점점 풍성해 진다. 은혜가 풍성해 지고 감사가 풍성해지고 사랑이 풍성해지고 소망이 풍성해진다. 기쁨이 풍성해지고 자비가 풍성해진다. 

선한 목자이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양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버리셨다. 그리함으로 그를 믿는 성도들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셨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다. 양도 제 양이 아니다. 그러므로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다. 삯꾼은 이리가 양을 물어가도 몰라라 한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며 그를 믿고 따르는 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최선을 다하여 양의 목숨을 보호한다. 선한 목자의 다스림을 받는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도 일일이 양을 안다. 

베들레헴의 이새는 아들이 여덟 명이었다. 그 중에 막내아들이 다윗이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들판에서 양을 쳤다. 블레셋이 쳐들어 온 전쟁이 났다. 형들 셋이 사울 임금 때에 전쟁에 불려 나갔다. 아버지는 다윗에서 면회를 가게 하였다. 다윗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종들에게 양을 잘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 전쟁의 일선에 나가 있는 형들을 만나 보려고 면회하기 위해 출발하였다.(삼상17:20) 전쟁은 40일이 지나도록 소강상태였다.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저쪽과 이쪽에서 군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다윗이 나가 싸우겠다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이 소문이 임금 사울에게까지 들렸다. 임금 앞에 불려 간 다윗은 자기가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자 생활을 이야기하였다. 사자와 곰이 양을 잡아 가려고 달려들면 그 사자나 곰 입과 수염을 잡고 쳐서 양과 양의 새끼를 보호한 경험을 이야기 하였다. 다윗은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구해 주시고 건져 주신 것처럼 블레셋과 싸우러 나가도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임금 사울이 내어주는 왕의 군인의 옷과 놋 투구와 갑옷을 입어보고 칼을 차 보았으나 어색하고 잘 맞지 않았다. 다윗은 임금이 내어준 군복과 투구와 갑옷을 벗어 버리고 손에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서 제구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향하여 나아갔다. 다윗은 평소에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의 마음을 갖고 전쟁터에 나선 것이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너는 나를 개로 여기느냐 왜 손에 막대기를 들고 나아오느냐”고 조롱하였다. 그리고 다윗을 죽여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잇감으로 내어 주겠다고 큰 소리쳤다. 그러나 다윗의 대답은 남달랐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그리고 물매에 돌을 감아 던졌다. 그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하였고 골리앗은 그 자리에 땅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양을 치던 목자 다윗이 양을 보호하는 목자의 심정을 갖고 전쟁에 나가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속에 있는 목자의 심정을 사용하셨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소년 다윗, 목자 다윗의 믿음을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고 따르는 양과 같은 믿음의 인생들에게 선한 목자이신 왕이시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목자이신 왕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다스림을 받을 때에 기쁨과 만족과 평화와 풍성한 꼴을 먹고 시원한 물을 마시며 주를 따르는 자의 만족을 누리게 해 주신다. 


기쁨을 주시는 왕.
동방에서 예루살렘을 찾아간 박사들은 별의 이동을 따라서 거기까지 갔다. 동방 박사들은 자기들의 앞서서 인도하던 별이 아기 예수께서 탄생한 곳 위에 머물러 선 것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여기 “큰 기쁨”이란 “충만하고 넘치는 기쁨”의 상태를 말한다. 이런 기쁨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현장에서 예수를 만난 여인들의 기쁨과 같은 것이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베들레헴 언덕에서 밤에 집에도 가지 못하고 들판과 산언덕에서 양떼와 함께 밤을 지내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났다. 주의 천사가 목자들의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은 크게 무서워하였다. 그 때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하였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들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탄생 소식을 듣는 백성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오셨다. 

이런 기쁨이란 미로에 갇혀 있던 이들이 출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이다. 갱도에 갇혔던 이들이 구출 받을 때의 기쁨도 그러할 것이다. 2010년에 칠레의 광부 33명이 지하 700미터 갱도에 갇혔다. 그런 그들이 69일 만에 구출되었다. 매몰된 상황에서 구조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역으로 갱도를 뚫고 사고 17일 만에 내려 보낸 케이블에 쪽지가 적혀서 지상으로 올라 왔다. “33명 피신처에 살아 있음”이란 쪽지를 발견하고 구출 작전을 벌였다. 희망과 용기와 절망과 회의를 오가는 착잡한 순간순간이 흘러 69일 만에 기적이 일어났다. 33명의 목숨을 모두 다 건져 낼 수 있었다. 그런 때의 기쁨을 상상해 보라. 본인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녀들과 부모들과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그 큰 기쁨과 감격의 순간 말이다.  

그러나 숙제는 그렇게 큰 기쁨의 순간을 체험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나중 삶이다. 2011년 사고 일주년이 된 때에 언론은 33명 생존자들의 생활을 추적하였다. 광부 33명 중 15명은 무직상태였다. 7명은 동기부여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3명은 과일노점상을 하며 지냈고 2명은 보석상점 운영하고 있었다. 4명은 다시 광부로 일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정신적 고통이 극심해 일과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기쁨이란 어느 순간에 잠깐 크게 기뻐하고 다시 우울하게 지내는 그런 기쁨의 상태가 아니다. 세상을 기쁘게 살아가는 힘을 공급 받아야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위로와 모든 기쁨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감사”가 골고루 어우러진 상태를 언급하였다. 그렇지 않나. 위로와 기쁨과 감사가 함께 어우러져서 우리의 믿음 생활에 활력을 얻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사야서 66장 10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오늘 날 우리의 기쁨이 그러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주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교회와 함께 기뻐하고 성도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그런 즐거움 말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공급하시는 왕으로 주님이 우리 곁에 늘 함께 계시기를 소망하자.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오 이 기쁨 주신 것 
오 이 기쁨 주신 것 
주께 영광 할렐루야 주 만 찬양해.”

이런 찬양이 늘 입에서 떠나지 않는 그런 기쁨의 삶을 나를 다스리시는 왕이신 주님 안에서 누리며 살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대강절을 지내면서 이렇게 찬송하였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 오 임마누엘”
성탄절 날 아침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이렇게 찬송하고 다시 365날 우울하게 지내면 되겠나.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기쁨의 원인, 기쁨의 이유, 기쁨의 근원, 기쁨의 대답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 기쁜 소식으로 들리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헤롯 왕이 그랬다. 헤롯은 자기가 베들레헴 주변을 다스리는 왕인데 어느 누가 내 대신 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당황하였다. 그래서는 베들레헴 주변에게 태어난 두 살 미만의 남자 아이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다 죽여 버렸다. 헤롯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태어났다는 소식은 그를 화나게 했고 이성을 잃도록 만들었다. 

예수가 장성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또한 예수에 대하여 기뻐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저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모든 유대 종교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어야 했고 대제사장들 중심이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든지 혹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힐난하셨다. 

어쩌면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기쁨의 근원을 권력이나 재물이나 세상적인 지위나 명예나 인기를 누리는 가운데 찾으면 그것은 마약을 찾는 자처럼 되고 말 것이다. 물론 필요하다. 좋다. 그러나 그것들만이 대답일 수는 없다. 이 세상에 진정한 기쁨은 어디서 오나. 참 기쁨의 근원이 누구이신가. 남들을 배꼽잡고 웃게 만드는 코미디언도 자신의 삶의 기쁨을 그 무대 위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아무리 남들로 하여금 배꼽을 잡고 웃게 하고 재밌게 만드는 희극 배우라도 결코 자신의 삶이 저절로 그처럼 기뻐질 수는 없는 법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항상 기뻐하라.”는 권면은 무엇인가. 그는 기뻐할 환경이 아닌데도 기뻐하며 살았다. 매를 많이 맞고 실라와 함께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그 밤에도 그는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그랬더니 지진이 일어나고 옥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쇠고랑이 풀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기쁨을 공급해 주시는 왕이시다. 예수의 슬픈 모습의 그림도 많지만 기뻐하시는 장면의 모습도 있지 않나. 


경배 받으실 왕.
베들레헴 말구유에 뉘이신 아기 예수를 찾아 간 동방 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경배하였다. 11절에 보면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낳은 마리아에게 경배하였거나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보호한 요셉에게 경배한 것이 아니다.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였다. “경배”는 왕을 대하는 예법이다. 그렇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성도들로부터 경배 받으실 평강의 왕이시다. “황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권을, 유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신성과 거룩함을, 몰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맞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예물을 예수께 드렸다는 점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경배를 받으실 주님이시다. 예배란 무엇인가. 언제나 하나님께 경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을 즐겁게 하고 사람에게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예배가 아니다. 예배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임재를 높이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이심을 선포하였다. 그의 어깨에 있는 정사와 평강은 더함이 무궁한 것이다. 그는 기묘자요 모사이시다. 예수는 놀라운 상담자요 우리 모두의 필요를 채우시고 해결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예수는 평강의 왕이시다. 평강을 공급하시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신 예수께 실망하는 인생이란 없다. 세상의 통치자와 권력자와 권세자들은 그를 지지하거나 추종하던 백성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거나 고통을 주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고 완전한 평강을 공급하시는 왕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평강을 주시는 왕이신 예수께 경배하고 그의 아버지이시며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다. 

8절에 헤롯은 동방 박사들에게 부탁하였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라”,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헤롯 왕은 전혀 아기 예수께 경배할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헤롯은 평강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는 베들레헴 주변에서 태어난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찾아 내 죽인 것이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예수께 경배하려 하지 않는다. 40일 금식하신 예수께 마귀가 나타나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 주며 유혹하였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

세상은 사탄 숭배, 물질 숭배, 번영 숭배, 권력 숭배, 재물 숭배, 미모와 체력과 육체를 숭배하는 카니발리즘의 지배를 받는다. 성탄절에 우리의 경배 받으실 평강의 왕 예수께 경배 드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 드리는 신앙의 회복이 있기를 기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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