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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욜2:23-32) 201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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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10-28 12:41 조회 16,220 댓글 0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욜2:23-32)       2016. 10. 23


차를 타고 이동 중에 클래식 FM 음악 방송을 들었다. 사회자가 누군가의 글을 인용해서 소개하고 있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멍들지 않고 가을단풍처럼 서로에게 아름답게 물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렇다. 맞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맺는다. 그런 서로의 관계가 상처나 갈등으로 인하여 가슴에 멍만 들지 말고 서로에게 좋은 추억으로 점점 단풍들듯 아름답게 물들어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말의 ‘좋다’는 말은 한자의 ‘조화’(調和)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좋다’의 반대말은 ‘나쁘다’인데 ‘나쁘다’는 말은 ‘나뿐이다’ 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나 혼자 독불장군처럼 살아가면 내 삶은 점점 나빠지고 만다. 사람은 서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 보여서 그를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비뼈를 하나 취하여 만들어 그의 곁에 돕는 짝으로 세워 주신 배필이 하와이다. 그 내용이 있는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 거기서 말씀하는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아담 혼자서는 ‘조화’가 되지 않는 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요엘서를 쓴 선지자 요엘은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다. 요엘(Joel) 선지자의 이름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 이름이 1장 1절에 나온다. ‘브두엘’(Pethuel)이다. 그 뜻은 “여호와의 신실하심”이다. 그러면 이 가정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뜻하는 대로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가정이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런 가정의 아들 중에서 요엘을 부르셔서 그 시대의 선지자로 쓰셨다. 

남 왕국의 제 8대 임금이었던 요아스(BC835-896)왕 당시에 유다에는 전대미문의 엄청난 메뚜기 재앙이 일어났다. 마치도 펄벅의 작품 <대지>에 소개된 중국 땅의 메뚜기 재앙처럼 말이다. 2014년 8월 26일에 전남 해남에 수십억만 마리의 메뚜기 떼가 출현했다. 길이 4cm의 메뚜기 떼였다. 순식간에 주변의 농작물이 쑥대밭이 되었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그 메뚜기 재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장차 임할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 요엘서의 서두에 나온다. 메뚜기 재앙은 밀밭과 포도원과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초토화 시켰다. 석류나무, 대추나무, 사과나무를 비롯하여 열매 맺는 모든 나무들이 다 시들었다. 그 당시의 실상을 요엘서 1장 12절 끝에 보면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 1장 11절에 보면,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아 곡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시대가 얼마나 황폐하여 졌는지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욜1:5)라고 했다. 여호와의 전에 드릴 소제와 전제인 곡물과 포도주를 구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밭이 황무해지고 토지는 마르고 곡식을 떨어지고 새 포도주는 말라 버리고 기름도 다 하였다. 이와 같은 참담한 시대에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게 하신 말씀이 바로 ‘요엘서’이다. 요엘서를 처음부터 읽어 보면 메뚜기 재앙의 원인이 그냥 살다 보면 경험하는 천연재해가 아니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따르고 경청하여 순종하는 민족으로 돌이키라는 경고의 말씀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엘을 통한 예언의 말씀을 시작하시자마자 선포하신다.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욜1:2)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신다. 요엘 시대에 있었던 메뚜기 재앙의 내용을 자자손손 후대에 자세하게 설명하여 알게 해 주라고 하셨다. 왜 일까. 교훈을 삼고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후손이 되라는 말씀이시다. 

요즘 새벽마다 대하는 호세아서의 말씀처럼 이나 요엘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민족으로 살아가라는 경고이며 초청이며 회개의 촉구이시다. 메뚜기 재앙보다 천배 만배 더 무섭고 더 두려운 심판이 임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경고의 말씀이시다. 

요엘서 2장 12-13절 전반부를 보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돌아오라는 간절한 초청이시다.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씀이시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을 따라서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일 예배에 가 보면 그 때 시골 교회 담임 목사님이 525장 “돌아 와 돌아 와”라는 찬송을 자주 부른 기억이 난다. 

“돌아 와 돌아 와 맘이 곤한 이야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 어서 와 돌아오라.”

그렇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 것이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듯이 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회개하는 믿음이다. 금식하고 울고 애통하며 옷을 찢듯이 마음을 찢으며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받아 주신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의 입을 빌려서 말씀하신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욜2:13후-15)

이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뜻을 돌이켜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여호와께서 재앙을 거두시고 대신 복을 내려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고 했다. 제사장, 장로, 어린 아이, 젖먹이, 신방의 신랑과 신부 모두 다 불러내어 나팔을 불고 거룩한 금식을 선포하며 성회로 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울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여호와의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욜2:17)

그렇게 회개하고 금식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히 여겨 주심을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이란 사람의 편에서 볼 때에 놀라운 일이지 하나님의 편에서는 일상이요 상식이요 정상이요 보편적인 것이다. 본문 26절에 보면,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살아가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 가운데 언제 어디서라도 놀라운 일을 행하시며 찬송을 받으시는 여호와이시다. 무엇이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이며 무엇이 큰일이란 말씀인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의 엄마 아빠 곁에 있는 어린 자녀들은 언제나 기쁘고 언제나 즐겁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어떤 형편, 어떤 환경, 어떤 신체조건, 어떤 경우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대하심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어떻게 항상 기쁘고 어떻게 항상 즐거울 수 있다는 말인가.”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기쁠 일이 있어야 기쁘고 즐거울 일이 있어야 즐거운 것이 정상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제라고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기쁨이 사라지고 즐거움이 떠나는 환경이나 사건을 겪을 때가 없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 된 인생들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생활을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탄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병들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주저앉기를 꽤한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우리”라는 치유상담연구원을 운영하는 이미란 원장은 전쟁 난민을 돕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직후 갑자기 쓰러진 후 전신에 마비가 왔다. “길랑-바레(Guillain-Barre) 증후군”이라는 병이었는데 체중이 34kg까지 줄었다. 이 병은 신경계에 이상이 생기는 근력저하증이다. 급성 사망률 80%의 무서운 병이다. 회생한다고 해도 평생토록 근무력증 상태로 살아야 한다. 미라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손과 발은 물론 뇌를 제외한 모든 신경이 마비되었다. 자기 손으로 물 한 모금 마실 수도 없고 혀가 굳어져서 말을 해도 발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누워서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산송장 같이 되었다. 

모태신앙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몸에 치유가 일어나는 소망을 갖고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절망 상태였지만 믿음과 확신을 갖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스스로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자신의 장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림 그리면서 기도하였다. 손과 발과 팔 다리와 입술과 입 안의 혀와 모든 마비된 몸의 기능이 정상으로 회복되어 웃고 힘차게 걷고 뛰고 기뻐하면서 활기차게 사회 생활하는 꿈을 꾸며 기도하였다. 그렇게 기도하며 완전한 회복을 꿈꾸며 지내기를 2년 만에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게 되었다. 잃어 버렸던 기쁨과 즐거움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이미란 원장은 FPT(Fantasy Programming Therapy)라는 심리치료 요법(일명 동화치료)을 창안해 동화를 상상치료에 사용하고 있다. FPT는 환상 또는 상상이란 인간의 정신활동을 이용해 정신적 육체적 질환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이다. 

앞으로 5주가 지나고 11월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면 강림절이 시작된다. 대강절이라고도 한다. 강림절 4주간이 지나면 성탄절이다. 그 강림절 때에 주로 부르는 찬송 이 강림절 찬송이다. 이 찬송을 다른 절기 때에 부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우리 찬송가에 강림절 찬송가가 몇 장 되지 않는다. 그 중에 104장 찬송은 우리에게 익숙한 강림절 찬송이다. 그 가사는 12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 오 임마누엘 아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은 기쁨의 회복을 꿈꾸고 소망하는 신앙이다. 우리는 성탄절 새벽에 모여서 이렇게 찬송한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 하여라.”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의 탄생을 기다리는 모든 만민들에게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감사요 축복이요 감격이요 응답이다. “구세주 탄생 했으니 다 찬양하여라, 온 세상 죄를 사하려 주 예수 오셨네, 은혜와 진리 되신 주 다 주관하여라.”라고 찬양을 계속한다. 

우리는 강림절에만 이런 기쁨을 기다려서는 안 될 것이다. 
성탄절 새벽에만 이런 기쁜 찬송을 부르고 끝내서도 안 될 것이다. 

본문을 다시 보자.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그들의 땅을 고쳐 주시리라고 하셨다. 그들의 땅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응답은 땅에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어 흡족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불안을 막아 주시겠다고 하셨다. 들짐승들이라도 두려움이 없게 하시리라고 하셨다. “들의 풀이 싹을 내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라고 하셨다. 

본문 23절에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권력자의 비호를 받는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경제적인 부강이나 번영이 귀하지만 그것만으로 기뻐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인기, 지위, 젊음, 외모, 권력, 힘, 명예, 부와 재물 이런 모든 것들은 아침 안개처럼 때가 되면 사라지고 만다. 이 세상에 영원한 권력이란 없다. 영원한 인기도 없다.

2008년에 인기 정상을 달리던 39살의 인기 연예인(최진실)이 목숨을 끊었다. 유명한 야구선수였던 그녀의 전 남편도, 친정 남동생도 줄줄이 세상을 등지고 불행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기란 그런 것이다. 허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야 한다. 하나님께로 진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를 만나야 한다. 교회만 다니지 말고 날마다 매 순간마다 예수를 전인격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을 세상적인 것에서만 찾으면 안 된다. “예수 나의 기쁨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이런 찬송을 입에 달고 살아가야 한다. “예수 나의 사랑, 예수 나의 승리, 예수 나의 전부, 예수 나의 신랑, 예수 나의 생명” 이런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은 완전한 회복의 기쁨이다. 과거에 메뚜기, 느치, 황충,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회복시켜 복되게 해 주시고 기쁘고 즐겁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기쁨과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른 비를 적당하게 내려 주셔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골고루 내려 주셔야 한다. 그래야 땅도 즐거워하고 인생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믿는 자의 여호와이신 하나님.
27절에 보면, 라고 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것이라.” 그렇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따르고 섬겨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와 우주 만물 가운데 여호와이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히 그를 믿고 섬기는 개인과 가정과 백성의 하나님이시다. 요엘의 이름 뜻처럼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 요엘의 아버지 브두엘의 이름 뜻처럼 “여호와의 신실하심”앞에서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매 순간 신실하게 응답하며 살아 갈 줄 알아야 한다. 아버지의 아들이 집 떠나 타국에 가서 주색잡기 즐기며 허랑 방탕하게 살 때에도 고국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아들이 맞다. 그러나 그런 삶의 모습은 아버지가 기대하시는 아들의 모습이 아니다. 주색잡기 즐기는 허랑방탕한 삶이 영원할 줄 아나. 그렇지 않다. 후회할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나님은 노아 때도 계셨고 아브라함 때도 계셨고 모세 때도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말씀을 따르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나님이셨다. 바로 왕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의 하나님이셨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하나님이며 갈렙이 믿고 섬기며 따르던 갈렙의 하나님이셨다.  

다윗의 때에 다윗처럼 양을 치며 물매를 던지던 이스라엘 소년이 한 두 명이었겠나.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언제나 분명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예수 곁에 등장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라. 병든 부하 고쳐 달라고 간청하던 백부장의 믿음은 주님을 믿는 분명한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는 믿는 자의 구주이시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예수의 뒤에서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던 12해 혈루병 여인의 믿음은 주님을 믿는 분명한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살자. 믿음만이 이긴다. 믿음만이 대답이다. 다음 주일은 마틴 루터 종교 개혁 499주년 기념 주일이다. “오직 믿음”(Sola fide) 이런 믿음이 종교 개혁의 불씨가 되었고 최후의 승리를 얻는 원동력이 되었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 오셨을 때에 산 아래에 있던 9명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 앞에서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를 만난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께 말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이 말씀을 들은 아버지가 대답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그 때에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그 아들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고 깨끗해졌다.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심히 경련을 일으켰다. 죽은 것처럼 보였다. 예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 아들이 건강해 져서 일어났다. 

믿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는 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
요엘서는 구약의 성령행전이다. 요엘서의 본문처럼 명쾌하게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 곳이 구약 어디에도 없다. 요엘서 2장 28절부터 소개된 성령에 대한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 받은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인용된 유명한 말씀이다. 

전쟁도 막아 주시고, 풍년도 보장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 우상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이 되기를 기대하셨다. 그리고 곧 이어 약속하신 말씀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 ‘내 영’은 ‘루아흐’이다. 하나님의 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불어 넣어 주신 생기가 그것이다. 생기를 불어 넣었을 때에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만민에게’라는 것은 천한만민이다. 인종, 혈색, 문화, 언어 등의 구별이 없다. 누구나 다 포함한다. 차별이 없다. ‘부어 주리니’라는 말씀은 ‘솨파크’인데 ‘폭포수처럼 많은 량의 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보이는 인공 폭포 정도가 아니라 브라질의 이과수 폭포 같은 폭포를 말씀한다. 이과수 폭포는 폭포수의 길이가 4.5km다. 평균 폭포수의 높이가 70m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의 나이아가라도 대단하지만 이과수폭포와 비교가 되질 않는다. 나이아가라는 가장 긴 곳이 900m이다. 물줄기의 높이도 가장 높은 곳이 51m이다. 이과수폭포가 세계 최대 최고이다. 
구약시대로 하면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에게 임할 여호와의 영이 어떻게 자녀,어른, 젊은이, 남자, 여자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임한단 말씀인가. 누구나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보는 날이 오리라고 하셨다. 남녀를 불문하고 여호와의 영을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그런 성령 강림의 현장을 보아서 안다. 그렇다. 본문의 약속은 천하 만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And afterward, I will pour out my Spirit on all people. Your sons and daughters will prophesy, your old men will dream dreams,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Even on my servants, both men and women, I will pour out my Spirit in those days.)

성령 받고 신앙 생활하여야 한다. 그래야 신앙생활에 활력이 생긴다. 피와 불과 연기의 이적이란 출애굽 시대와 광야 시대 때에 하나님이 보여 주셨던 기적들이 아닌가. 바로 왕의 강퍅함 앞에서 하나님은 나일 강이 핏빛으로 변하게 하셨다. 애굽에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도 하셨다. 출애굽이 19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불 가운데서 강림하셨다.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진동하였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란 세상 심판의 날을 말씀한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날이란 종말의 실제적인 사건이다.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다시 구원을 말씀하신다. 왜일까. 세상의 심판의 날은 구원 받을 자의 구원의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하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는 상징적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남은 자의 은혜를 입을 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고 최후 승리를 입고 영생할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구원의 받는 자가 바로 나 자신이 되기를 소망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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