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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롬14:13-23) 201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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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10-09 22:19 조회 15,149 댓글 0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롬14:13-23)           2016. 10. 9
 
동서고금에 인간의 식생활은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인류가 불을 사용하기 이전까지는 날 음식을 주식으로 했다. 그러나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조리법이 발전하였다. 고기나 물고기를 구워 먹거나 삶아 먹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아프리카 등지의 원주민들 중에는 나무를 베어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애벌레를 먹기도 한다. 그 애벌레는 저들에게 부족한 단백질 섭취 방법의 하나이다. 문화권에 따라서 어떤 이들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동양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지만 서양을 대개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한다. 어떤 문화나 종교에서는 소고기를 금한다. 혹은 돼지고기를 금한다. 소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돼지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를 갖고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문화에서는 양고기를 주로 먹는다. 로마서 13-15장의 적지 않은 분량에서 다루는 것도 그런 문제들이다. 그 당시의 고기란 대개가 우상의 제단에 바쳐졌던 것들이었다. 그런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로 교회 안에서 의견이 나뉘었다. 그냥 고기일 뿐이라고 여기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어떻게 우상의 제단에 올려 졌던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고 판단하기도 하였다. 아예 채소만 먹고 절대로 고기는 안 먹겠다는 이들도 생겼다. 결국은 고기를 먹느냐 채소만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근심되게 하고 비난하는 일도 일어났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교회 안에서 심각한 말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파와 채소만 먹는 파가 나뉘었다. 13절에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라는 말씀은 음식을 먹고 안 먹는 문제로 서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5절에서는 식물 즉 음식물로 인하여 “형제를 근심되게 하지 말자.”고 했다. 형제 자매간에 서로를 사랑으로 대하여야지 어떤 음식을 먹느냐 혹은 먹지 않느냐의 문제로 서로를 판단하거나 근심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6절에서는 뿐만 아니라 “서로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도 권면하였다. 20절에서는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21절에서는 “형제 앞에 거리낌이 된다면 고기든 포도주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23절에서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까지 말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7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 앞에 원문인 헬라어 성경에는 ‘왜냐하면’이란 ‘가르’라는 표현이 있다. 성도들이 선한 삶을 추구하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아서는 안 된다. 16절에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통하여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이 되길 원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로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허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성도들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다. 성령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 즉 “의와 평강과 기쁨”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모습이어야 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의와 평강과 희락 즉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 간에 주어지는 의와 평강과 기쁨을 말한다. 하나님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성도들은 그 의로우심 안에서 평강을 서로 누리며 기쁨을 서로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성도라면 그래야 한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인생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씀씀이가 다르고 재물 사용, 시간 사용이 달라야 한다. 18절과 19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이러하여야 한다고 교훈하였다.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는 자.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두 가지 모습이어야 한다. 그 첫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한다. 16절과 비교하면 ‘비방’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요 동생 아벨을 죽인 그의 형 가인은 하나님이 못 마땅하게 여긴 자이다.  노아 시대의 많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못 마땅하게 여긴 삶을 살았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 노아는 그 당대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믿음의 사람이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요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였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모두 다 준행하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노아는 실로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은 자였다.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처럼 양과 염소와 소와 약대를 목축하는 이들이 그의 마을 주변에 넘쳐 났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100년 동안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았다. 75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175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까지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고자하였다. 물론 그에게도 실수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 가운데 살아갔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한 낮의 뙤약볕 아래서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뜨거운 시간에 어디론가 가고 있는 나그네 세 사람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그냥 지나쳐 보내지 아니하고 집 안으로 불러 들였다. 아브라함은 그들 가까이 다가가서 정중한 예절로 그들을 집안으로 초청해 들였다. 성경의 내용대로 보면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가며 그들을 영접하였다. 물을 좀 가져 올테니 발을 씻고 나무 아래 쉬도록 제안하였다. 아브라함은 장막 안에 있던 아내에게 어서 서둘러서 새 떡을 구우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99살 된 아브라함이 직접 송아지 떼에 다가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왔다. 그리고 종들에게 요리하도록 하였다. 89살 된 아내 사라는 직접 나서서 나그네들을 대접할 송아지 고기 요리를 시작하였다. 치즈와 우유와 방금 요리한 송아지 요리와 새로 구운 떡이 한 상 잘 차려졌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저들 세 사람은 아브라함의 친구도 아니요 무슨 사업차 만난 상대방도 아니요 가까운 친척도 아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송아지를 잡아 가며 풍성하게 대접하였다. 아마 이런 상차림은 김영란 법에 위배되는 식탁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본문인 창세기 18장을 읽기 시작해 보면 첫 구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마무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아하! 그 날, 그 곳, 아브라함의 장막 앞을 뜨거운 한 낮에 지나간 세 사람은 그냥 낯 설은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아브라함은 그날 낯 설은 나그네 세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접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 하나님이 기뻐하여 주신 열매이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뒤 늦게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에 사흘 길을 가서 그렇게 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면 아들이라고 포기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결핵이 전 유럽에 번져갔다. 19세기 말 덴마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성이 착하고 어린이를 좋아하던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우체국장이 좋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이날 홀벨(Einal Holboell)은 당시 많은 어린이들이 결핵으로 죽어 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연말이 되자 많은 크리스마스 우편물과 소포를 정리하면서 이 많은 우편물에 동전 한 닢짜리 "씰"을 붙여 보내도록 하고 그 이익금으로 어린이들의 생명을 결핵병으로부터 구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마침내 1904년 12월 10일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게 되었으며 당시 덴마크의 국왕인 "크리스챤 9세"도 적극 지원에 나서 주었다. 그의 소박한 착상은 처음부터 많은 덴마크 사람들의 참여로 씰 모금 운동이 대단한 빛을 보게 되었다. 이 같은 결핵 퇴치 운동은 전 유럽과 미국과 아시아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는 1932년 12월 일제치하의 식민지 환경이었지만 미국의 선교의사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이 처음으로 씰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893년 서양의학과 기독교를 전한 캐나다 출신의 미국 감리교 파송 부부 의사 선교사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과 로젯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56-1951)사이에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94년 8월1일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청, 일  두 나라 군대의 격전지가 되었다. 이때에 신변을 걱정하여 감리교 선교부 서울본부에서는 서울로 귀환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사 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은 부상당한 군인들을 외면할 수 없다며 평양에 머물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부상당한 군인들을 돌보았다. 결국 과로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1894년 11월 24일, 로제타와 결혼 2년 5개월 만에 34살의 젊은 나이에 순직하고 말았다. 그의 짧은 선교 기간에 시작된 학교가 오늘 날 광성고등학교이다. 그는 다음 주에 방문할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당시 로제타에게는 두 살 된 아들과 뱃속에서 7개월째 자라고 있는 어린 딸이 있었다. 남편을 잃은 후 미국에 돌아가서 둘째 딸을 낳았다. 미국을 거쳐 캐나다의 파송 교회에 방문한 그녀는 그녀 부부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던 교인들의 따뜻한 환대와 위로를 받았다. 용기를 얻어 다시 돌아 온 한국에서 선교를 계속하던 중에 어린 딸이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딸을 양화진 선교사 묘지의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드렸다. “하나님 사랑하는 어린 아들과 한국에서 평생토록 선교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길 원합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 의사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홀로 평양의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여자환자들만을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도 세웠다. 그에게서 배우고 성장한 여성이 김점동(1876=1910)이라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이다. 그녀는 나중에 남편 성을 따라서 박에스더라고 성과 이름을 바꾸었다. 정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나중에 미국 볼티모어 의대에 유학하고 1900년에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도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다. 서울에 조선여자 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 학교가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시작이다. 또한 인천에 간호대학과 인천의 감리교 기독병원도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다. 로제타 셔우드 홀 의사 선교사의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일을 이루셨다. 그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평생을 살았다. 미국은 그녀의 선교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자랑스러운 여성의 한사람이 되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양화진 땅에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다.
그 어린 아들 셔우드 홀은 커서 16살에 미국에 유학하여 의사가 되었고 의사 아내를 맞이하였다. 나중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부모의 대를 이어 평생토록 한국에서 선교하였다. 그는 1925년부터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다가 1928년 해주 결핵요양원을 설립하였다. 셔우드 홀은 1932년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였다. 1932년 이후 1940년 까지 9차례에 걸쳐 씰이 발행되지만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그는 스파이의 누명을 쓰고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강제로 캐나다로 추방되었다. 결국은 씰 발행도 중단되었다. 셔우드 홀은 1984년 91살 때에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식에 초청 받아 한국을 방문하였다. 부모의 묘와 누나의 묘를 둘러 보고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도 방문하였다. 1991년 캐나다 벤쿠버에서 98세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그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부모와 누나가 묻혀 있는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에 안장되었다. 8.15 해방 후에는 1949년 과거 해주에서 셔우드 홀을 도왔던 문창모 박사가 주축이 되어 "한국 복십자회"에서 씰을 발행하였다. 문창모 의사는 나중에 평생 원주에서 의료 선교를 한 원주제일감리교회의 장로였다. 1952년 "한국 기독 의사회"에서 씰을 발행하였으나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범국민적인 성금 운동으로 착수된 것은 1953년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면서 부터였다. 그 후 대한결핵협회는 매년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왔다. 온 국민이 이 운동에 참여함으로 점차 결핵퇴치 재원모금운동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 홀과 그의 아내와 살아남은 아들 셔우드 홀은 가족 모두 낯 설은 남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생을 살았다.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말씀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
병든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께 찾아 왔던 백부장의 믿음은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는 믿음이여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께 애원하던 가나안 여인의 믿음도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는 자의 믿음이요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믿음의 여인이었다. 하루는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다. 예수는 매우 냉정한 대답을 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수로보니게 여인 즉 가나안 여인의 대답은 예수를 감동시켰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고 말씀하신 그 시간에 그녀의 집에 있던 흉한 귀신들린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깨끗해졌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믿음의 여인이었다.
가롯 유다는 예수께 지극히 비싼 향유 옥합 즉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깨어서 예수의 발에 부어 드리고 머리카락으로 씻는 마리아의 섬김을 책망하였다. 왜 비싼 것을 허비하느냐고 시비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섬김을 칭찬하셨다. “그를 가만 두어라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12:7-8) 여기 이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께 부은 섬김은 영원히 두고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미담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지난 이천년 동안 두고두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믿음의 여인이었다.  
우리 교회도 지난 6년 반 동안 그런 미담들이 적지 않았다.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은 자의 섬김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앞으로도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안과 밖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드리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넘쳐 나기를 소망한다.
사도행전 4장의 구부로 섬 출신의 요셉이란 이름을 갖고 바나바란 별명으로 불리던 그도 초대교회 시대에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에게 칭찬받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바나바는 많은 사람들이 사울의 다메섹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만나려고 조치하지 않던 때에 적극적으로 그에게 찾아 가서 사울의 변화 받은 간증을 듣고 그를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한 주인공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루스드라 지역에도 선교하였다. 그 곳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없는 장애인이었다. 바울은 큰 소리로 그에게 외쳤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 순간에 그 사람이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 곳 주민들은 잘 생긴 바나바를 제우스신이라고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 신이라고 했다. 소문을 들은 시외의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지고 와서 대문 알에 무리와 함께 둘러서서 제사를 하려고 하였다. 그 때에 바나바와 바울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비를 주셔서 결실하게 하시며 먹을 것들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헛된 우상 숭배를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권면하면서 저들이 제사하려는 것을 못하게 하였다. 사도행전 14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알던 겸손한 믿음을 지닌 선교의 사람들이었다. 저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았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행11:24) 그 결과 바나바의 선교 현장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을 뿐만 아니라 큰 무리가 주께 더하는 부흥을 이루었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가서 만나 함께 안디옥 교회에 가서 일 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큰 무리를 가르쳤다. 그의 복음을 받아들인 안디옥에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이들을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바나바는 사도 바울조차 못마땅하게 여기던 젊은 마가를 끝까지 붙들어 주고 선교 현장에 동행시켜서 나중에 마가복음을 쓸 정도의 큰 일물로 키워낸 하나님의 사람이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던 지도자이다.(행15:36-41) 이처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는 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성도들은 서로 간에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한다. 19절의 ‘힘쓰나니’라는 ‘디오코’라는 말은 ‘힘쓰자’는 적극적인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성도는 개인과 개인 간에 자신과 가족 간에 화평의 일을 힘써야 한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아내와 남편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형제간에 자매간에 가정에서 화평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의와 평강과 희락 즉 기쁨을 실천하고 누리는 것이다. 화평의 일을 힘쓰는 것은 직장 생활과 상업과 사업의 터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동료들 간에 화평의 일을 힘써 행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관계에 화평의 일을 도모하고 힘쓸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내용을 다시 강조한 바 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으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 사도 바울은 이 말씀 앞부분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나 깨끗한 그릇이요, 귀히 쓰는 그릇이요, 거룩하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된 그릇과 같은 인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또한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하였다. 그 원래의 표현은 “집을 짓는 과정으로서의 건축”을 의미한다. 집을 짓는 일은 섬세해야 하고 매 단계를 중시해야하는 공학이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부터 모든 공정에 필수 과정이 필요하듯이 성도들은 영적인 삶의 건축자로서 지혜와 덕과 거룩함의 덕목을 잘 지켜 나가야 한다는 강조이다. 덕을 세우는 일이란 영어 표현인 ‘may edify another'라는 말은 “......교화하다, 계발하다, 덕성을 함양하다.”라는 뜻이다. 즉 신앙심과 도덕심과 덕성을 함양하고 계발하고 교화해서 서로 주변 사람의 믿음과 지혜와 지식과 성품과 소양과 기질과 정신과 덕성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즉 “영적으로 독려(spiritual strengthening)하고 격려해서 믿음이 잘 자라 나도록하는 것(building up)”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서로에게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신앙생활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였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주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벧전3:11-12)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며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여”(벧전3:8)라고도 권면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성도라면 마땅히 서로의 화평을 위하여 힘쓰고 서로의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할 것이다. 19절의 강조는 “서로...힘쓰라”는 것이다. 서로 간에 화평하게 지내고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화평한 관계를 서로 유지하고 반드시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성도의 인간관계를 유지해 나가야만 한다는 강조이다. 복된 결실의 계절에 이처럼 성숙한 성도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범사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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