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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쇠도끼(왕하6:1-7) 201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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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16-08-30 20:35 조회 18,755 댓글 0
 
 다시 찾은 쇠도끼(왕하6:1-7)             2016. 8. 28



사람은 살아가다 보면 얻는 것도 많지만 잃어버리는 것도 적지 않다. 잘 지키는 것 같던 건강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말기도 한다. 안 쓰고 아껴서 모아 왔던 재물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평생 갈 것 같던 권력이 일순간에 땅에 떨어지고 말 때도 있다.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던 명예가 무참하게 짓밟힐 때도 있다. 오래도록 좋던 인간관계가 꼬이고 꼬이는 경우도 있다. 

선지자 학교 기숙사를 신축해 보겠다고 의욕을 보이며 나섰던 선지자의 제자들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남의 쇠도끼를 빌려가지고 벌목 현장에 나섰다. 그런데 그만 그 도끼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난감해 하던 현장에 함께 있던 엘리사 선지자는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졌다. 그런데 물에 빠진 도끼가 물 위로 떠올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는 엄청난 기적도 행하시지만 이처럼 작고 섬세한 기적까지고 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이 같은 기적은 과학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나뭇가지는 식물이고 쇠도끼는 철물인데 어떻게 나뭇가지 던져 넣은 것으로 물속에 빠진 무거운 도끼가 떠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기적이 아닌가. 강력한 자석을 물속에 낚시처럼 내려 넣고 도끼가 빠진 곳을 휘저어서 물속의 도끼가 자석에 붙어 올라온다면 모를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은 그런 것이다. 예수님 때의 기적들도 다 그러하다.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나는가. 어떻게 죽은 지 나흘이 지난 장례가 끝난 나사로를 무덤 앞에서 불러내고 살려 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맹인이 눈을 뜰 수 있었다. 어떻게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되었다. 어떻게 열 두해 혈루병 여인이 깨끗이 고침을 받았나. 어떻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이만여 명을 먹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 하실 수 있었나. 하나님이 하시면 못 하실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자이시니까 말이다. 

본문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기적의 내용 중의 또 하나이다. 선지자의 제자들이란 오늘날로 하면 신학교의 신학생 같은 이들이다. 어느 날 선지자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말했다. 선지자의 제자들이 다니는 선지자 학교의 시설이 너무 협소하니 기숙사를 새롭게 신축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갖고 말을 꺼냈다.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씩을 가져다가 자신들이 거주할 처소를 지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요단이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라서 버드나무, 포플라나무, 석류나무 등 건축에 쓸 만한 좋은 나무들이 자라나던 곳이다. 2절의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하는 표현은 선지자의 제자들이 다 같이 협동하여 자기들의 살아갈 처소를 직접 건축하려고 한 마음 한 뜻을 갖고 나서는 아름다운 화합의 장면을 보여 준다. 선지자 학교의 교장인 엘리사는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런데 선지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엘리사에게 제안하였다. “당신도 종들과 함께 가소서.” 엘리사는 “내가 가리라”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함께 나섰다. 당시에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 선지자를 향하여 자신들을 ‘종’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엘리사의 영적 권위가 얼마나 대단하였나를 짐작하게 해 준다. 

드디어 요단에 도착한 선지자의 제자들이 나무를 베기 시작하였다. 이 역사적인 건축 준비와 자재 확보와 건축 현장에 선지자 학교의 교장격인 엘리사 선지자의 동행을 요청한 일과 엘리사 선지자가 현장에 나선 일은 완벽한 화합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어야 할 시간에 있어야 할 장소에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반대를 생각해 보라. 있어야 할 시간에 있어야 할 역사적인 현장에 없으므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나. 

지난 8월 12일에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에는 이틀 만에 609mm의 물폭탄이 쏟아졌다. 집 4만 채가 파손되었다. 3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되었다. 그 기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계획한 가족 휴가를 모두 다 보내고 난 후에 수해 현장에 나타나는 바람에 주민들로부터 비난을 사고 말았다는 국제 뉴스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산불이 났다. 순식간에 70㎢의 면적이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주민 8만 명이 집을 떠나 대피하였다. 그 지역의 고속도로와 일부 도로는 통행이 금지되고 폐쇄되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 생활, 묵상 생활, 명상 생활 하던 선지자 학교의 제자들이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해 보겠다고 도끼를 들고 요단 강가를 찾아 나섰다. 거기서 나무를 베어 좁고 모자라는 신학교의 숙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건축의지를 보었다. 하라, 가라고 말했지만 그 현장에 선지자 학교의 교장인 엘리사가 없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나. 관리 감독과 모든 사안의 총책임은 늘 엘리사에게 있었다. 이것은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삶의 부담이다. 

최근에도 우리나라에 미국과의 관계에 중요한 일이 발표되고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긴장감을 표명하던 날 해당 부처의 장관 중의 한 사람은 백화점에 바지를 수선하러 갔었다고 해서 언론의 지탄을 받고 국민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한것처럼 말이다. 

요단 지역에서 벌목작업을 하던 중에 사건이 생겼다. 선지자의 제자 한 사람이 물가에 있는 나무를 베다가 그만 도끼를 물에 빠트리고 말았다. 그는 “아아, 내 주여 이 도끼는 빌려 온 것인데 물에 빠트리고 말았습니다.”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였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어디 빠졌느냐”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가리키는 곳에 엘리사는 나뭇가지를 베어 물 위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쇠도끼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 때에 엘리사는 “너는 그것을 집으라.”고 말하였다. 그 사람은 손을 내밀어 물 위에 떠 오른 쇠도끼를 집어 올렸다. 그렇다. 마침 그 현장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음으로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기적을 보여 주셨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별의 별 기적들을 대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못 하실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전능자이시니 말이다. 본문이 주는 교훈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하도록 하자.


마음을 모아 새 일을 행하던 제자들.
엘리사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는 선지자 학교의 시설이 좁고 다 같이 생활하기에 열악한 것을 해결하기 다 같이 직접 발 벗고 나섰다. 그냥 불만을 표현하고 만 것이 아니라 각자가 뜻을 모아 환경을 더 낫게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대안을 찾아 나섰다.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사 선지자의 동의를 받아 낸 후에 다 같이 나서서 요단으로 가서 각각 나무를 베어다가 기숙사를 건축하려 하였다. 

1절에 보면 엘리사의 제자들이 선지자에게 먼저 제안하였다.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좁고 답답한 신학교의 환경에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선지자의 제자들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였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명령 두 가지가 담겨 있다. 그 하나는 문화 명령 또 다른 하나는 선교 명령이다. 문화 명령이란 창세기 1장 28절이다. 선교 명령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이다.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의 명령이 문화 명령이다. “땅 끝까지 가서 제자 삼고 성령으로 세례 주고 주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 선교명령이다. 

엘리사 선지자 때의 선지자의 제자들은 이 두 가지 명령에 모두 다 충실하고자 했던 제자들이었다. 선지자의 제자로서의 일상뿐만 아니라 늘어난 선지자 제자의 수를 수용하기에 턱 없이 비좁고 부족한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서 직접 건축에 나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 삼라만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름의 더위가 한 풀 꺾이면서 어제 오후의 하늘은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구름과 맑은 하늘이 눈길을 끌었다. 해와 달과 별들과 하늘과 바다와 산과 들과 나무와 숲과 새와 들짐승과 물고기들과 풀 벌래 소리 하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벌써 단풍이 든 나무들도 눈에 들어온다. 계절을 따라 주시는 오곡백과의 풍성함은 어떠한가. 

어제 신문에는 아침과 낮과 저녁에 이르기까지 시간대로 피는 꽃의 종류가 다양한데 그 다양한 꽃을 분류해서 시간대로 정돈한 꽃을 배경으로 한 18세기의 꽃시계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아침에 꽃이 피는 나팔꽃이 있고 오후에 꽃이 피는 분꽃이 있다. 해바라기 꽃은 우리가 아는 대로 종일토록 해를 바라보며 고개를 돌려 가며 하루를 지낸다. 그렇지 않나. 얼마나 꽃이 다양한가.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눈을 비집고 피어나는 꽃, 이른 봄에 피는 꽃, 늦은 봄에 피는 꽃, 여름 내내 피는 꽃, 가을에 피는 꽃, 늦가을에도 피어 서리가 내리도록지지 않고 계속 피는 꽃등 얼마나 다양한가. 

그러나 인간이 발전시켜온 문명의 발전도 그에 못지않다. 2800년 전의 내용이 요즘 대하고 있는 엘리사 시대의 역사이다. 그 당시에 주거 환경, 가옥 구조가 어떠하였겠나 상상해 보라.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이미 3500년 전 혹은 4000년 전의 중국 황하 문명, 에집트의 나일강 문명,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유역의 중동 문명의 발전은 역사에 전해져 오는 그 당시의 유물들과 흔적들을 통해서 익히 잘 아는 바가 아닌가.

다윗과 솔로몬이 3000년 전의 인물인데 다윗이 살던 다윗 성, 솔로몬의 때에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은 얼마나 창대한 건축의 백미였나. 신명기 19장 5절에 보면 출애굽한 모세 시대의 광야 백성들은 이미 쇠도끼를 주조하고 사용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철을 녹여 생활 도구를 만드는 기술을 애굽에서 전수 받은 이들이 광야 생활을 시작한 히브리인들이었다. 그런 저들이 여호수아 시대, 사사 시대,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의 왕정시대를 거쳐 분열 왕국 시대를 살아가던 이 당시에 이미 나름대로 맘에 드는 건물을 건축하여 살아가는 건축술이 나름대로 발전해 있었다. 예수님도 목수의 아들로서 나사렛에서 세상 아버지 요셉이 일찍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 요셉의 가업을 이어서 목수 일을 하고 석공 일을 하던 청년기를 보내지 않으셨나. 

이처럼 선지자의 제자들의 나서서 자신들이 거할 거처를 건축하겠다는 단합된 모습은 얼마나 많은 교훈을 주나.

우리 교회도 지금의 건축에 만족해하지 말고 남아 있는 교회적인 숙제들을 해결해 가고 주차장의 문제도 넉넉하게 해결해 나가는 엘리사 선지자의 제자들과 같은 적극적인 신앙의 주역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고통’이란 뜻의 아픈 사연을 담고 있는 이름을 가진 야베스가 늘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역대상 4장 10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그런데 때가 되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다. 

그렇지 않나. 지금 50평 혹은 60평 혹은 그 이상의 넓은 공간에서 살아가시는 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집에서, 그런 아파트 공간에서 사신 것이 아니지 않나. 누구라도 단칸방이나 월세 방에 사는 이들은 좀 더 나은 주거 환경을 마련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나. 화장실이 한 개라서 아침 출근길에 화장실 사용 전쟁을 벌이는 집들은 화장실이 두 개 이상 있는 주거 환경을 원하지 않나. 

토기 문명, 석기 문명을 거쳐서 철기 문명과 오늘 날과 같은 나노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 문명의 발전사와 변천사는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나라도 100년 전, 50년 전과 비교하면 의식주와 생활환경과 문화적이 발전이 얼마나 급속하고 창대해 왔나. 

강과 바다 위에 다리는 건설하는 일, 산맥을 뚫어 터널을 건설하는 일, 바다 속에 길을 내서 바닷물 속에서 기차가 달리고, 차들이 섬과 대륙을 연결한 해저 통로로 질주하게 하는 일, 달나라뿐만 아니라 우주 공간의 항성을 탐험하고 우주선을 쏘아 올려 최첨단 문명을 발전 시켜 그 혜택을 누리는 일, 총알처럼 빠른 기차, 바다 속의 잠수함, 500명이 넘는 승객을 실고 20시간씩 쉬지 않고 대륙을 이동해서 지구 저편의 공항까지 안전하게 실어 나르는 일, 운동장 몇 배만한 항공모함, 항공모함 위에서 전투기가 뜨고 내리는 일, 전자제어시스템에 의한 최첨단 무기의 개발, 인체의 창조 신비를 연구하여 최첨단 의술을 발전 시켜 온 일, 최첨단 의료 장비와 수술 장비를 개발하여 질병을 토치하고 과거에는 상상도 못하던 섬세한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 내는 일, 좁은 땅에 하늘로 치솟는 50층 혹은 100층의 고층 빌딩을 건축하여 쾌적하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살기도 하며 사무실 공간을 꾸며 업무를 처리하는 일등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문명을 발전시켜 온 인류의 공헌이 아닐 수 없다. 

인류의 과거 역사로 하면 불을 활용해서 날고기 대신에 고기를 구워 먹거나 익혀서 먹는 식생활의 변화, 벌거벗고 살지 않고 각종 다양한 의복을 개발해서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고 사는 의상 문화의 발전, 그냥 단순히 한 끼의 식량을 겨우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양 다양한 음식을 연구하고 개발해서 맛있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요리해서 먹는 식생활의 변천사, 얼기설기 지은 나무 집에 살거나, 흙집에 살거나, 동굴 속에 살거나, 얼음집에 사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고 끊임없이 가옥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오늘 날과 같은 최첨단 환경에서 각종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의식주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다양한 문화적인 발전을 이룩해 왔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부여 받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의 산물이 아닌가. 

불순종하고 범죄하고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나 살아가게 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그냥 단순하게 땀 흘리는 수고에 멈추거나 아기를 낳는 해산의 고통에 멈추지 않고 다양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요즘 점점 발전하는 핸드폰의 다양한 기능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요즘 관심을 끌고 있는 3D 프린터가 실용화 되면 자동차와 같은 기계류도 생산할 수 있고 재료만 골고루 넣어 놓으면 음식도 만들어 낸다고 하지 않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3D 프린터가 찍어 내는 세상이 다가 오고 있다지 않나. 또 요즘은 자동차가 알아서 운전해서 손님을 목적지까지 모셔다 주는 무인 운전 시대가 전개 되고 있다지 않는가. 

오늘 날 악기, 노래, 뮤지컬, 오페라, 연극, 영화 그것도 3D 세계의 발전으로 까지 계속하여 변천해 오고 발전해 가고 있지 않나. 미술은 어떤가. 체육은 어떤가. 선수들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 1초에 5000장 이상을 찍어 식별하는 최첨단 카메라를 사용한다지 않나. 

다시 1절을 보라.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이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었다. 이제 곧 시작될 가을의 문턱에서 그 동안 기도해 오던 좁고 답답하게 여기던 기도 제목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 가는 능력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성경의 기적의 책이다. 하나님이 쓰신 성경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이 좁고 답답할 지라도 좁게 여기는 것으로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도전하고 개척해 나가는 능력의 사람들이 모두 다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했던 엘리사.
혼자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여럿이 힘을 합치면 훨씬 더 많은 일을 능률적으로 해 낼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이 함께 만나서 바로 앞에 나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론과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의 시대를 진행하셨다. 모세 곁에는 그림자처럼 그를 시종 드는 여호수아가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 시대의 법궤를 한 사람의 힘으로 옮기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여러 명의 제사장들이 정성을 다하여 어깨에 메어 옮기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 시대에 그의 곁에 유능하고 충성된 장군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방백들을 겹겹이 세워 주셨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혼자 힘으로 하지 않으셨다. 제자로 부르신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삼년 밤과 낮을 함께 사역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고 늘 함께 지내시며 마지막 밤, 마지막 새벽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길 원하셨다. 

부활 후에도 계속하여 11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 받을 선교의 사람인 사도의 사명을 반복해 강조해 주시다가 승천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자신도 스스로 혼자 일하시지 않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하는 것보다 다 같이 연합해서 할 때에 더 큰 기적과 역사가 일어나는 법이다. 전도서 기자는 연합의 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교훈해 주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4:9) 둘이 있다가 한 사람이 넘어지면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이 붙잡아 일으켜 세워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있다가 넘어지면 누가 일으켜 주겠는가.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1-12)

선지자의 제자들은 제각기 자기주장만 하고 나 몰라라 한 것이 아니었다. 저들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늘 기도만 하고 있지도 않았다. 저들은 한 결 같이 마음을 모아서 다 같이 요단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각각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나무를 베어 본 분들은 알겠지만 그것이 톱으로 베든, 도끼로 찍든 보통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해 본 분들은 알지만 장작 하나 패는 일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남이 하는 일은 다 쉬어 보이지만 숙련된 기술도 필요하고 수고와 땀과 인내가 없이는 나무 한 그루 베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벌목공들의 벌목은 항상 위험이 따르는 극한 작업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모두 다 같이 나섰다. 저들은 기술의 정도, 경험의 정도, 힘의 정도, 역량의 정도가 다 다르겠지만 일단 다 같이 참여 하였다. 2절의 “우리가...우리가”하는 반복된 표현은 그 당시 엘리사 선지자 시대의 제자들이 얼마나 서로 마음과 뜻이 잘 맞았나를 말해 준다.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속회, 기관, 교사들 간에, 성가대원들 간에, 주방을 섬기며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이들 간에, 전도의 현장에서, 주차 봉사, 운전 봉사의 현장에서 서로 서로 마음이 잘 맞고 화합하는 그런 교회, 그런 성도들의 겸손한 연합을 이루기를 소망한다.

저들 선지자의 제자들은 자기들끼리만 나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숙원 사업을 교장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고하였고 그 모든 요청을 좋게 받아들인 선지자 엘리사는 제자들끼리만 다녀오도록 하지 않고 함께 벌목 현장에 동행하였다. 그 당시에 선지자 학교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요단 쪽에서 벌목하고 그 곳에 거주할 거처를 마련하려 한 것을 보면 선지자 학교의 이전 작업을 시도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일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나서고 제자들이 총 동원되어 다 같이 스스로 나무를 베고 교실을 짓고 기숙사를 짓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 교회가 이곳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한지 꼭 삼년이 되었다. 돌아보면 초 창기 첫해, 둘째 해, 셋째 해를 지나는 동안에 이런 성전 터를 마련하고 이만한 건축을 이룰 만한 단합된 힘이 우리에겐 턱 없이 부족하였다. 그런데 이런 기적을 이루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고 아무리 돌아보고 아무리 추억해 보아도 이것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다 보니 지금 와서 돌아 보건대 그 당시 적지 않은 성도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만 컸다. 적지 않은 성도들이 서로 그렇게 말하며 지내 왔으니까 말이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우리 들 가운데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은 내가 나서서 나무를 베고 내가 나서서 거처를 지어야겠다고 의지를 다짐하던 선지자의 제자들과 같은 참여도가 너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우리가 다시 나서서 나무를 베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나서서 우리의 교회를 세워 나갈 때가 되었다. ‘건축-건축’하고 기도 하던 중에 이런 아름다운 교회 생활 시대가 열린 것처럼 이제는 ‘부흥-부흥’을 노래하고 기도하고 부르짖고 땀 흘려 전도하고 강권하여 데려다가 주의 전을 채워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봄부터 엘리야의 하나님, 엘리사의 하나님의 시대를 묵상해 오고 있다. 그렇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회오리바람 가운데 하나님의 불러올리심을 체험한 엘리야의 곁에서 그 현장을 목격하던 엘리사의 요구는 한가지였다. 

“당신의 성령의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열왕기하 2장 9절에서 이미 묵상한 말씀의 내용이다. 그렇다. 우리는 늘 그렇게 기도하면서 봄과 여름을 지내 왔다. 갑절의 성령, 갑절의 은혜, 갑절의 부흥을 이룰 때가 되었다. 왜! 엘리야의 하나님은 엘리사의 하나님이시며 엘리사의 하나님은 오늘 날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절의 “우리가...우리가...”하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6년 전에 함께 했던 이들이나 5년 전, 4년 전, 3년 전, 2년 전, 1년 전, 아니 올해 몇 달 전부터 우리 새로운 꿈의 공동체에 하나가 된 어느 누구이든지 ‘우리는’, ‘각각’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 어느 나라의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은 “우리는 사랑의 띠로”라는 찬양을 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하나 되고 사랑의 띠로 묶였네
모두 다 함께 찬양해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
 그 영문 가사는 이렇다. 

We are one in the Bond of Love
We are one in the Bond of Love
We have joined our Spirit with the Spirit of God
We are one in the Bond of Love

이런 찬양, 이런 기도, 이런 결단, 이런 고백, 이런 의지, 이런 섬김, 이런 헌신의 힘으로 하나 된 힘차고 거룩한 공동체를 건설해 나가자. 성령께서 왕성한 부흥을 계속하여 이루어 나가도록 축복해 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기적. 
물에 빠진 쇠도끼를 건저 올린 엘리사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행하신 또 하나의 기적 사건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기적을 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기적이 무엇인가. 인간의 지혜나 분별력이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다. 

성경은 기적의 책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기적의 사람들이다. 100세된 아브라함이 스스로 아들 이삭을 낳았나. 90세 된 사라가 자기 소원으로 아들을 낳았나. 아니지 않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하신 기적이 아들 이삭의 탄생이 아닌가. 모세가 홍해를 건넜나.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내었나. 모세가 아침마다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배불리 먹게 해 주었나. 모세가 메추라기를 불러 모았나. 모세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만들어 세웠나. 모세의 힘으로 성막을 건축하였나. 이 모든 것은 모세 시대에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가. 

요즘 새벽에 마무리 해 가는 여호수아 시대의 기적도 마찬가지 아닌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넜나.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했나. 갈렙에 헤브론을 점령했나.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멸절시켰나. 물론 전쟁해야 했고 물론 애쓰고 수고하고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명령의 순종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내고 보니 그 모든 일들은 여호수아 시대에 여호수아와 그의 따르는 백성들을 통하여 이룩하신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었나. 

늘 묵상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나.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윗의 믿음을 귀하에 여기신 하나님께서 다윗이 던진 물매 돌 한 개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때려눕히신 것이 아닌가. 

삼천 개의 잠언을 솔로몬 스스로의 지혜로 지었나. 천 다섯 편의 노래를 솔로몬 스스로 지었나. 솔로몬은 식물학, 동물학, 조류학의 대가였다. 그 모든 지혜를 누가 주었는가. 열방의 왕들과 천하의 왕들이 보낸 자들이 솔로몬의 그 놀라운 지혜를 들으러 왔다.(왕상4:32-34)

그 어떤 지혜이든, 그 어떤 재주이든, 그 어떤 기량이든, 그 어떤 업적이든, 그 어떤 공적이든 자기 스스로 했다고 말하면 교만한 것이다. 그 지혜는 누가 주었으며 그 인내심, 그 정열, 그 열심, 그 노력, 그 투지, 그 창의력, 그 지도력은 누가 주었는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한다.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매 순간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후우’ 하고 불어 버리시면 나라라도 민족이라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선지자의 제자들이 다 같이 나서는 것 좋았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각각 한 사람씩 제 몫을 제대로 잘 감당해야 한다. 도끼를 물에 빠트리고 나면 무엇으로 나무를 찍어 쓰러트리고 나무를 다듬어 기둥 삼고, 석가래 삼고, 대들보 삼을 수 있나. 선지자의 가난한 제자는 나무를 베기 위해서 도끼도 제 것이 아닌 남에게 빌려 온 것이었다. 빌려 온 도끼를 물에 빠트렸으니 가난한 신학생이 무슨 돈으로 남의 도끼를 새로 마련 해다가 갚는다는 말인가.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는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넣고 쇠도끼가 물 위에 떠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건져 올린 도끼를 갖고 계속해서 나무를 베는 일을 감당하게 하였다. 

6절에 보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 어느 시대 그 어느 삶의 현장에나 하나님의 사람이 소중한 것이다.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각기 다 학력이 다르고 전공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것 같지만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 모두는 각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다. 일에 대한 의욕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안에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 분이 주인이 되셔야 한다. 주님이 내 안에 주인이 되셔서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고 주님이 나를 다스리시고 주님의 나를 통해 주의 영광을 드려내셔야 한다. 내 건강이 내 건강이 아니다. 내 재물이 내 재물이 아니다. 내 돈이 내 돈이 아니다. 내 시간이 내 시간이 아니다. 내 실력, 내 능력, 내 경험들이 내 것이 아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내 건강, 내 능력, 내 실력, 내 경험, 내 재물, 내 돈, 내 모든 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나의 전부가 되셔야 한다. 그래야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개인, 가정, 가족,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사모하자.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적의 현장에 쓰임 받도록 기도하자. 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고 작은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사모하자. 

신앙생활이란 새로운 기적의 연속을 경험하는 생활이어야만 한다. 

잃는 것은 아쉬움이지만 다시 찾는 것은 기쁨이며 감격이며 축복이 아닌가.
예수님의 누가복음 15장에 소개된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나중에 기쁨이 된다는 내용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다시 찾았다. 목자는 다시 찾은 어린 양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즐거워했다. 이 비유 후에 예수께서 하신 교훈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그런 기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내용이다. 

집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부지런히 집안을 뒤지고 청소해서 잃어 버렸던 드라크마 하나를 다시 찾았다. 그 여인은 벗과 이웃을 불러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이 유산을 다 탕진하고 빈 털털이가 되고 거지로 돌아 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반기고 얼싸 안고 입을 맞추고 목욕 시키고 새 옷 입히고 새 신 신기고 가락지까지 준비해서 끼워 주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하며 기뻐하였다. 아버지는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말했다. 이 세 비유의 공통점이 있다. 죄인 하나가 회개 하고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다.  

다시 찾은 쇠도끼로 인하여 기뻐하는 선지자의 제자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기쁨. 그런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하는 날마다의 기적의 삶이되기를 사모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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