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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일어나 먹으라(왕상19:1-8) 201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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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16-04-28 22:18 조회 17,294 댓글 0
 
일어나 먹으라(왕상19:1-8)             2016. 4. 24
 

엘리야의 본문을 대하다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을 대하게 된다. 엘리야가 누구인가. 당대에 시대를 대표하던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가. 얼마 전에 갈멜 산 정상의 기도 대결 때에 바알 선지자 450명이 지켜보고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불이 내려서 제물인 송아지와 나무와 돌과 흙을 다 불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아 버렸다. 하나님의 강력한 불의 응답을 체험한 엘리야였다. 그 일 후에 엘리야의 명령을 들은 백성들은 바알 숭배자 450명을 모조리 다 그릿 시냇가로 끌어다가 처단하였다. 엘리야가 갈멜 산꼭대기에서 무릎을 꿇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기도할 때에 삼년 육 개월 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장대비 같은 비가 내려 북 왕국 이스라엘의 극심한 가뭄이 해결 되었다. 

엘리야는 그 당시에 시대적인 중심인물이었다. 여호와 신앙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선지자였다. 임금 아합 조차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왕이라도 함부로 엘리야를 없애 버릴 수 없는 버거운 존재였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용하고 계심이 온 백성들 앞에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엘리야 선지자를 아합 왕의 부인인 이세벨이 24시간 안에 죽이겠다고 나섰다. 이세벨의 사신을 통하여 엘리야를 이세벨이 죽여 없애겠다는 전갈을 받은 엘리야는 두려운 마음에 휩싸여서 브엘세바로 도망쳤다. 브엘 세바는 이스라엘의 최 남단에 있는 사해 바다 보다 더 남쪽의 끝이 없는 황량한 광야인 사막 지대이다. 함께 피신한 사환을 브엘세바의 광야에 남겨 두고 자신은 광야의 더 깊숙하고 은밀한 곳으로 하룻길쯤을 더 숨어들어 갔다. 그리고 그 곳의 로뎀 나무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 달라고 탄식하였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도 낫지 못하나이다.”(왕상19:4)고 간청하였다.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엘리야는 지금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탈진된 상태로 아무 의욕도 없이 허탈한 심정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있다. 시대적인 영적 거장이었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얼마를 하나님 앞에서 차라리 자기의 목숨을 거두어 가 달라고 졸라대던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고단하게 잠이 들어 버렸다. 그 때에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엘리야를 어루만지면서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했다. 엘리야가 잠에서 깨어 나 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이 있었다. 엘리야는 잠결에 허둥지둥 그 떡을 다 먹고 물 한 병을 다 마시고는 다시 누워서 잠이 들어 버렸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일어나 먹으라.”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한 마디 말을 더 덧붙여 말했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이는 마치도 부활 하신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의 새벽에 그 곳에 가셔서 밤새 고기잡이 하였지만 빈 그물로 새벽을 맞은 베드로와 어부 출신 제자들을 만나 주시는 장면과도 같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잡혔다. 예수신줄 알고 베드로가 물 위로 뛰어 들었다. 예수는 이미 숯불을 피우고 떡을 굽고 생선을 굽고 계셨다. 잡은 새 물고기도 가져 오라 하여 숯불에 구우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배불리 먹게 하시면서 베드로의 사랑을 고백 받으셨다. 세 번이나 반복하여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리고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세 번 반복하여 분부하셨다. 

천사의 방문과 어루만지며 떡과 물을 먹고 마시게 하며 말한 말을 들은 엘리야는 배 불리 먹고 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천사는 얼마 후에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다시 깨웠다. “일어나 먹으라” 엘리야는 다시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또 다시 떡을 더 먹고 물을 더 마셨다. 먹고 또 먹고, 먹고 또 먹고 엘리야는 새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는 사명의 말씀을 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엘리야는 새 힘을 얻고 사십일 밤낮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였다. 브엘세바에서 호렙 산까지의 거리는 400km정도이다. 정상인의 걸음으로 하면 보름 정도면 걸을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밤낮을 걸어서 40일만에 도착하였다. 이 말은 당시에 엘리야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지쳐 있었나를 입증하는 내용이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아합 임금의 마차보다 앞서서 달리던 엘리야의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 장면의 엘리야는 너무나 지쳐 있고 약해져 있다.


시대적인 잔혹상.
아합 임금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못된 왕이었다. 하나님께서도 아합의 악을 여러 차례 지적하신 적이 있다. 실로 아합은 악한 왕이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오아상16:30)라는 말씀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이세벨은 임금 아합 그 이상이었다. 아합 왕은 갈멜 산의 여호와의 불의 응답과 백성들이 앞장서서 바알 숭배자 450명을 그릿 시냇가에서 처단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백성들의 마음이 바알에게서 여호와께로 돌아서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엘리야의 기도로 삼년 육 개월 간의 가뭄이 그치고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는 하나님의 응답도 지켜보았다. 그 동안의 일련의 모든 사건과 기적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런 그가 왕비 이세벨에게 돌아가서 그 동안 되어진 모든 일들을 일일이 말하였다. 당시 이세벨은 섭정 왕후였다. 마치도 고종 곁의 왕비였던 민비가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구한말의 조선을 주물럭주물럭 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시대 정황을 전해들은 이세벨은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래서는 24시간 내로 엘리야를 붙잡아서 공개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바알 숭배 신앙에 똘똘 뭉쳐 있던 이세벨로서는 바알 선지자 450명이 백성들의 손길에 의해서 그릿 시냇가에서 처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치를 떨었을 것이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 감히 내가 누군데 내 앞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건드린단 말인가. 전국에서 모여든 바알 선지자 450명을 한 순간에 모두 다 죽여 버렸다니 이런 일이 어찌 있단 말이냐 하며 이세벨은 자기 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서 “내일 이맘때 즈음에 네 목숨도 450명의 죽음의 한 장면처럼 될 것이라”고 공갈하고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왜 그 날 그 시간에 당장 임금 곁의 특수 부대원들을 동원해서라도 그 밤이 가기 전에 엘리야를 잡아 처단하지 않았을까. 그것 또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일 이 맘 때에 ”라는 전갈은 엘리야로 하여금 도망할 기회를 열어 주었고 도피할 시간을 벌게 해 준 것이다. 이세벨은 자신의 손으로 엘리야를 붙잡아 죽이지 아니하면 신들이 자신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열왕기 상 19장 2절의 “신들이”라는 그 표현이 이세벨의 신앙 상태였다. 이세벨은 신들을 섬기는 다신 신앙, 잡신 신앙에 사로잡힌 바알 숭배자였다.

권력자가 악에 사로잡히면 그 피해를 입는 백성들의 비극은 상상 이상으로 크게 된다. 며칠 전에 4.19 기념일이 지났다. 4. 19가 무엇인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우리나라 헌법 전문의 첫 문장은 엄청나게 길다. 그 헌법 전문에 거론되는 3. 1 운동과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4. 19이다.

4·19혁명 혹은 4. 19의거라고 부르는 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자유당 정권의 불법·부정 선거였다. 근본적인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독재와 탄압이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를 이승만 정권 비호세력인 반공청년단이 습격하였다. 다음 날인 4월 19일에 3만 여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서울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아댔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하였다. 4월 19일 하루 만에 서울에서만 약 130여 명이 죽었고 1,000여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시위가 점점 거세지자  일주일 만인 4월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현대 역사의 권력자들에 의한 악행의 한 예일 뿐이다. 

성경의 역사와 동서고금에 알려진 권력자들의 난맥상과 권력의 횡포를 예로 찾아  보는 일에는 시간이 부족할 정도이다. 이세벨은 무모하고 맹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절대 권력자의 곁에서 왕비의 신분으로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증오심이 불붙듯이 강렬했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거대한 지지를 받기 시작한 여호와의 사람 엘리야를 쉽게 없애 버리는 일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아미도 이세벨은 엘리야를 붙잡으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450명 바알 숭배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공개 처형하여 자신과 아합 왕의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하고자 하는 악한 의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악한 사건들이 의외로 많다. 
445년 전인, 1572년 8월 24일 밤, 프랑스 파리에서는 성 바돌로매 축일을 맞아 온 도시 안에 성당마다의 종소리가 울려 펴지고 있었다. 가톨릭교도들은 이미 준비한 칼과 흉기를 들고 개신교도들의 집에 쳐 들어 갔다. 닥치는 대로 참살극을 벌였다. 이 같은 학살극은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파리의 온 시내는 광란의 도시로 변해 버렸다. 학살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모든 개신교인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학살당하였다. 당시의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는 개신교 신자인 나바르의 앙리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개신교인들 약 1만 명이 모였다. 그들 거의 모두 다 결혼식 축하객으로 참석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센 강은 핏빛으로 변하였다. 파리의 길거리마다 나뒹구는 개신교인들의 시체로 가득하였다. 파리에서 시작된 대 학살은 프랑스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두 달 동안 살인극이 끝나지 않았다. 이 학살극으로 7만여명의 개신교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샤를 9세의 어머니인 가톨릭 맹신자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사주하여 일어나게 된 참담한 사건의 전모가 모두 밝혀졌다. 이 소식이 로마의 교황청에 알려졌다. 로마의 교회들은 일제히 승리의 종을 울렸다. 로마 교황청의 성직자들은 축포를 쏘며 축하 행진을 하였다. 바티칸은 이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 메달을 만들었다. 성당의 벽에는 기념벽화를 그려 넣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프랑스 왕에서 훈장까지 보냈다. 세월이 흐른 후에 영국의 저명한 가톨릭의 신학자인 죤 뉴먼(John Newman, 1801-1890)은 프랑스 가톨릭 신도들의 그와 같은 악행과 당시 교황청의 악한 처세에 대하여 그 죄악상과 오류를 강력하게 따져 묻고 비난하였다.(<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pp. 418-419)


도망하는 엘리야와 천사의 방문.
왕비 이세벨의 사신으로부터 24시간 내에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전갈을 받은 엘리야는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최남단인 브엘세바의 광야로 도망하였다. 성경은 그 도망간 날들이 며칠이나 걸렸다고 밝히지 않는다. 요즘처럼 빠른 교통수단이 없던 때에 더군다나 중요한 길목을 차단당할 죽음의 위협을 느낀 엘리야는 험한 산길과 광야 길로 구비 구비 돌고 돌아서 브엘세바에 이르렀을 것이다.  갈멜 산에서 브엘세바까지는 200km정도 이스라엘의 남쪽 끝이다. 왜 동행하던 사환을 그 곳 브엘 세바 광야에 따로 머물게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정황을 생각할 수 있다. 엘리야 자신이 하나님 앞에 홀로 남기를 원했던지 아니면 사환이 더 이상 엘리야와 함께 피신할 만한 체력이 안 되었던지 사환 자신이 다 이상 삭막하고 황량한 브엘세바 광야 깊숙이 함께 피신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지 등의 여러 경우들 말이다. 이 현장에서의 작별 이후로 이 사환은 더 이상 엘리야의 생애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후로는 엘리야의 곁을 따르기를 원하는 새로운 인물 엘리사가 등장하였다. 그렇게 추정하면 그 사환을 브엘세바의 광야 길에서 엘리야와 운명을 더 이상 같이 하려 하지 않고 제 길로 가 버린 것만 같다. 혼자 광야 길을 가게 된 엘리야는 하룻길 정도를 브엘세바 광야의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리고 한 곳에 도착하여 로뎀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았다. 그리고 죽기를 소망하였다. 아마도 엘리야는 갑자기 도망치느라 별 비상식량도 준비하지 못한 채 피하고 피하여 이 먼 길을 오도록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최악의 상태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로뎀 나무 아래 주저앉은 엘리야는 죽기를 청하였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왕상 19:4) 이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이렇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이게 무슨 탄식이란 말이다. 아합 시대 이스라엘 최고의 영적 거장이었던 선지자 엘리야가 아무 사람도 없는 이스라엘 남방 사막 한 가운데, 브엘세바 광야 깊은 곳의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대단한 하나님의 임재 사건을 체험하였고 그 기적의 현장의 주인공으로 쓰임 받던 예언의 사람 엘리야가 무너져 가고 있다. 엘리야는 허탈감과 좌절과 절망감에 깊이 빠져서 금방 죽어 버릴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가 하는 말이 그렇지 않나. 죽여 달라고, 차라리 죽고 싶다고, 자신은 그 어떤 선조들보다 못난 놈이라고 스스로를 비하하며 자조하며 우울과 낙담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 가고 있지 않나.

그럴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 날마다 예배드리고,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찬송하고, 날마다 말씀 묵상하고 날마다 Q. T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들에게도 그런 영적 우울과 낙담의 순간이 엄습할 수 있다. 

언제 정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그런 지진이 일어날지, 언제 내 영혼과 내 심령에 쓰나미가 덮칠지, 언제 내 영혼의 땅이 갈라질지, 언제 내 영혼의 집이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릴지 아무도 모른다. 설마 나는 그렇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병들이 있지 않나. 내가 우울의 깊은 늪에 빠져 있지 않나. 내가 냉소적이고 대인 기피증과 무기력에 빠져서 멍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

엘리야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엘리야가 누군가. 그 당대에 자타가 공인하듯이 엘리야만한 믿음의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엘리야가 이세벨이 죽인다고 하면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순교를 각오한 것이 아니라 수 백 킬로미터를 수십 일간 도망쳐서 브엘세바 광야 깊은 곳에 가서 숨어 지내고 있다. 그리고 당장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쉽게 그 장면이, 엘리야의 그 상황이 이해가 되나.

여러분! 혹이 여러분이 교회 안과 밖에서 대하는 그 누군가 중에 나보다는 훨씬 신앙이 좋아 보이고 나보다는 훨씬 하나님과 가까운 것 같고, 나보다는 훨씬 신앙의 뿌리고 깊고 분명한 체험도 많은 것 같은 누군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그를 바라보겠는가. “하나님 나를 차라리 여기서 죽여주세요, 나의 목숨을 여기서 거두어 가 주세요.”하고 울부짖고 씨름하며 하나님께 탄식하고 하소연하던 엘리야가 마치도 울며 투정하던 아기가 지쳐서 잠이 들어 버리듯이 깊이 잠이 들고 말았다. 그 동안 온 국가적인 바알 숭배자들과의 영적 씨름과 영적 전쟁을 치르느라 얼마나 긴장하고 얼마나 지쳤던 엘리야인가. 

“지금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절규와 탄식은 바알 숭배자 450명을 처단했고 3년 6개월 만에 그릿 시내가 범람할 정도의 큰 비가 내려서 온 땅에 물이 벙벙하고 해갈의 기쁨을 얻게 된 이스라엘 땅을 바라다보면서 이쯤에서 사명을 멈추고 아버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솔직한 엘리야의 절규일 수도 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분부하신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명 자들이 죽기를 각오하는 일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때로 도망하고 피신하는 것도 필요하다. 예수께서도 아직 죽음의 때가 아니 신 것을 알고 그를 대적하는 자들의 흉계를 피하여 피신하신 적이 있으셨다. 모처럼 방문했던 고향 마을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에도 회당의 사람들이 예수를 나사렛의 산꼭대기 낭떠러지에 끌어다가 밀쳐서 죽이려고 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현장을 피하여 새로운 길을 떠나가셨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옥에 갇혀 죽을 뻔한 베드로를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밤 새워 기도하였다.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미 헤롯 왕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다음 차례는 베드로라고 정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헤롯은 무교절 기간에 베드로를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유월절이 끝나면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어 야고보의 목을 칼로 치듯이 죽일 계획이었다. 군인 네 명이 네 패로 조를 짜서 베드로를 지켰다. 사도행전 12장 5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했다. 헤롯은 하루만 지나면 다음 날 베드로를 처형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현장에 개입하셨다. 베드로의 곁에는 두 군인이 두 쇠사슬을 자신들의 팔에 함께 묶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강한 광채가 감옥 안에 비치었다.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났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다. 그리고 “급히 일어나라”하고 말할 때에 베드로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 베드로의 손에서 벗겨졌다. 천사가 베드로에게 말했다.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베드로가 천사가 시키는대로 하자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고 베드로를 옥에서 불러 내었다. 베드로는 천사를 따라 나서기는 하였으나 마치도 환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첫째, 둘째 파수를 쉽게 통과 하였다. 마지막 시내로 통하는 쇠문도 도착하자마자 저절로 열렸다. 감옥을 나서서 큰 길로 걷기 시작하는데 천사가 그의 곁에서 떠나갔다. 베드로는 그 때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 그 날 밤에 일어난 사건을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찾아 갔다. 많은 성도들이 그 곳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렸다.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집 안에서 문가로 다가 갔다. 문 밖에서 베드로 사도의 음성이 들리자 놀랜 로데는 문을 열어 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돌아가서 “문 밖에 베드로 사도가 와서 있다.”고 말하였다. 기도하던 성도들은 “네게 미쳤구나”하고 로데를 책망하였다. 그러나 로데는 “아닙니다. 참말입니다.”고 대답하자 기도하던 성도들은 “그러면 문 밖에 천사가 와서 있나 보다.”하고 반응하고 말았다. 그 때 문 밖에서 베드로 사도가 계속하여 문을 두드렸다. 그들이 일제히 달려 가서 문을 열자 베드로 사도가 문 밖에 서 있었다. 베드로 사도는 문 밖에 서서 손 짓 하면서 조용히 하게하고 그 밤에 주께서 천사를 동원하셔서 감옥에서 자신에게 보여 주신 기적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거기 사도행전 12장 17절의 “다른 곳으로 가니라”가 무슨 말인가.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도망한 것이다. 도피한 것이다. 주님은 그 이후에 베드로를 통하여 얼마나 크고 많은 초대 교회의 사역들을 이루어 가셨는가. 

베드로는 잘못하면 다시 붙잡혀서 헤롯의 칼에 목 베임을 당하여 죽고 말았을 것이다. 베드로가 도망간 그 다음 날 헤롯이 크게 화나 났다. 예루살렘 안에 적지 않게 소동이 일어났다. 결국은 베드로를 옥에서 놓친 파수꾼들이 심문을 당하고 헤롯은 베드로를 놓친 군인들을 사형시켰다. 그 날 이후로 헤롯을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예루살렘을 떠나서 제법 멀리에 위치해 있는 가이사랴에 가서 머물러 지냈다.  
지금 지쳐 있는가. 이즈음에서 생을 마치고 싶은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중에도 겉으로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웃고 밝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실은 그 마음 깊은 곳에 우울의 강이 흐르고 있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답답한 심정의 감옥에 갇혀서 지내는 이들이 없지 않다. 아니 적지 않다. 아니 많다. 아니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로뎀 나무 아래 누워서 잠이 들어 버린 것처럼 영적으로 자포자기한 채로 될 대로 되라고 여기며 영의 깊은 잠을 청하고 있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요나서의 요나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엘리야가 선지자였듯이 요나도 선지자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고 있었다.  도망 가려는 그의 도망길이 의외로 순탄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기에 그 배를 타고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배 안에서도 맨 아래 칸에 내려가서 쿨쿨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깨웠고 바다에 던졌고 큰 물고기의 뱃 속에서 회개 시켜서 니느웨 성민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갖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죽기를 청하며 로뎀 나무 밑에 누워 잠들어 있는 엘리야에게 찾아 온 천사의 모습을 보자. 


사명자의 달려 갈 길. 
광야의 뙤약볕 아래 로뎀 나무 밑에서 잠이 들어 버린 엘리야를 흔들어 깨운 것은 천사였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깊은 잠이 들어 있는 엘리야를 깨우셨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땅 끝에 가도 거기에도 계시고 바다 속에 가도 거기에도 계시다. 하나님은 우주 삼라만상 모든 공간 구석구석에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시며 이 세상 모든 인생들 각 사람의 마음속에도 언제라도 찾아 들어오신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브엘세바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서 잠든 엘리야를 어루만지면서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먹으라.”

천사의 이 음성은 곧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렇다. 사랑의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은 나를 먹이시는 아버지이시다.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깨우셔서 숯불에 구운 떡을 먹게 하시고 마련한 병의 물을 마시게 하시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시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아닙니다. 나는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하나님은 지쳐 쓰러져 고단하게 기진맥진 잠이 들어 있는 나나 나의 가정을 돌보시거나 깨워 매만져 먹을 것, 마실 것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 우리 각 가정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흔들어 깨우시며 어루만지시고 먹을 떡과 마실 물을 공급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일어나서 먹으라”고 두 번이나 다시 엘리야를 깨우며 천사는 계속하여 숯불에 구운 떡과 마련한 물을 마시게 하였다. 그 동안 엘리야가 얼마나 지치고 지쳤으면 천사가 마련해 준 떡을 계속하여 먹고 또 먹었다. 물도 마시고 또 마셨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왕상19:7)

그렇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엘리야는 그냥 그렇게 브엘세바 광야에서 죽어 없어질 존재가 아니었다. 아직 엘리야를 통하여 이루실 사명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은 나중에 그를 죽음을 보지 않는 선지자로 하나님 곁에 불러 올리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각 인생의 탄생과 그 삶의 여정과 그 마지막 까지도 계획하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예정이요, 하나님의 경륜이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요, 하나님의 개입이시다. 그러므로 지금 힘들다고, 지금 지쳤다고, 지금 답답하다고, 지금 가는 길이 막혀 있다고, 지금 병들었다고, 지금 일이 엉켜 있다고 자포자기하면 안 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전능자이시다. 광야에도 길이 있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면 광야에도 강물이 흐르게 하신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숨어 지내던 엔 게디에 가 보았다. 엔 게데는 브엘세바를 향하는 이스라엘 맨 남쪽의 그 황량한 광야, 삭막한 바위산이다 그 바위산 꼭대기에 100m 높이도 더 되는 폭포가 흐른다. 기적이요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사울은 그 엔 게디에 3000명의 무장 군인들을 풀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 뒤가 급해진 왕 사울이 동굴에 피하여 용변을 보는 왕의 옷자락을 피신 다니던 다윗이 베어 냈다. 그래도 사울 왕은 다윗을 못 죽였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해할 자가 없는 법이다.  

하나님은 지금 엘리야를 통하여 하실 앞으로 남아 있는 사명을 위하여 엘리야의 깊은 잠을 깨우셨다.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이시고 물을 마시게 하셨다. 먹고 마신 엘리야가 금방 또 잠이 들었다. 천사는 다시 엘리야를 또 깨워서 먹고 마시게 하였다. 그리고 사명을 말씀하셨다. 먹고 마시고 호렙 산에 까지 40주야를 걸어가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새롭게 다시 한 것이 엘리야이다.

하나님은 지쳐 주저앉아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영과 육의 양식을 먹고 마시게 하셔서 새 힘을 주시고 새 은혜를 주셔서 새 사명의 길을 가게 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아브라함이 큰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피신하려 하였다. 거기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큰 창피를 당했다. 그만 아내를 빼앗길 뻔하였다. 남편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말씀과 믿음과 언약의 조상으로서 이 얼마나 초라하고 나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인가.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다. 그 극심한 가뭄의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와 그의 종들과 짐승들을 먹여 살리셨다. 

이삭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랄 왕 아비멜렉으로 인하여 이삭의 하루하루는 긴장되었고 지쳐 있었다. 이삭의 종들이 어렵게 우물을 파면 얼마 후면 그랄 왕의 목자들이 와서 빼앗아 버렸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초지를 찾아 나서야 하고 사람과 짐승 떼의 마실 물을 해결해야 하던 이삭과 그의 종들은 지쳐 있었다. 그런 이삭과 그의 종들에게 그 때 그 때마다 먹을 것을 주시고 마실 물을 마련하게 해 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대적하여 저들의 땅에서 몰아내고 쫓아 낸 후에도 하나님은 이삭을 잘 되게 해 주셨다. 나중에는 낯 설을 땅에서 우물을 팠고 이전에 만나 본 적이 없는 큰 우물 샘을 마련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삭은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해서 그 곳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정하였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창26:24)고 하나님의 은혜를 송축하였다. 이삭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여호와의 아름을 불렀다.  그 곳에 장막을 치고 지내는 중에 이삭의 종들은 또 우물을 팠다. 나중에는 그랄 왕 아비멜렉이 찾아 와서 이삭과 계약을 맺자고 했다. 이삭과 그의 종들이 여호와께 복을 받고 늘 여호와가 함께 계신 것을 보고 블레셋의 이방 왕, 그랄의 아비멜렉 왕 조차도 감탄하게 된 것이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 기도를 받긴 했으니 형 에서가 죽인다고 달려들자 루스 광야로 도망쳐야 했다. 축복 기도 받으면 형통할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집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런 루스 광야에서 돌을 베개 삼고 잠을 청했던 야곱이 들판에서, 광야에서 꿈을 꾸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사닥다리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분명한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명한 축복의 말씀도 들었다. 잠이 깬 야곱은 베개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하나님께 서원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 이전에 하나님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야곱의 앞날을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지금 힘들고 지쳐 쓰러 질 것만 같은가. 아니 쓰러져 잠들어 있는가. 금방 숨이 넘어 갈 것 같고 죽을 것만 같고 차라리 죽기를 청하고 있는가. 아직 포기하면 않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어루만져 주시고 먹을 떡을 주시고 마실 물을 주셔서 새 힘 얻게 하시고 새 사명자의 길을 가게 하시는 인생의 회복자요 각 영혼의 공급자이시다. 주 안에서 날마다 새 날을 사모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자. 주심이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하시고 힘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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