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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의 분부(요20:19-23) 2016. 3. 27 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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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3-29 22:07 조회 16,768 댓글 0
 
부활하신 예수의 분부(요20:19-23)       2016. 3. 27 부활주일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들은 창시자의 무덤을 소중하게 여긴다. 뿐만 아니라 그 무덤에 찾아가서 경배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순례의 과정으로 여긴다. 하지만 예수는 무덤이 없다. 예수는 아리매대 사람 요셉의 묘에 장사 된지 사흘 만에 부활하였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무덤이 없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두려움 가운데 숨어 지내던 11제자들이 있던 곳에 찾아 가셨다. 저들이 있던 곳은 문이 안쪽으로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이 숨어 있는 그 곳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그렇게 두려움에 휩싸여 숨어 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반복하여 또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너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과 더불어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용서하는 사죄의 은총에 대하여 교훈 해 주셨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부활하신 예수께서 분부하신 내용들이 부활절 아침에 은혜가 되길 바란다. 


부활 신앙과 성도의 평강.
‘샬롬’(שלום), ‘에이레네’(εἰρήνη)의 평강(平康)은 하나님의 자녀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며 은총이다. “평안, 평화, 화평, 안녕, 복지, 화목”등의 뜻을 가진 이 인사는 만났을 때, 헤어질 때, 이웃을 방문할 때 등에 쓰는 인사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 후에 사용하신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인사는 그런 일상적인 차원의 인사가 아니라 오직 부활 예수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평강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이미 그런 평강을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요14:27)
실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어떤 환난과 핍박과 두려움과 곤고한 일을 만날지라도 언제나 항상 마음의 평강을 빼앗기지 않으며 순교자의 삶을 담대하게 살아갔다. 물론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의 위협이 임할 때에 얼마나 착잡하고 두렵고 떨리고 갈등이 심하고 괴롭겠는가. 그러나 지난 2000년 교회 역사에 순교자의 길을 간 신앙의 선배들은 한 결 같이 주를 배반하지 아니하고 천국 백성의 마음의 평강을 존귀하게 여기며 불의에 항거했고 악과 싸웠다. 

성도에게 임하는 평강은 그런 것이다. 부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평강의 의미와 가치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412장)라는 찬송의 가사를 보라. 그 3-4절에 보면,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큰 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와 같은 평화는 이 세상의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성도의 축복이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평강을 찾아보려고 술, 담배, 마약, 놀음을 비롯하여 육체적인 타락에 빠져 욕망을 채워 보려는 방황을 계속한다. 

호주의 닉 브이치치와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乙武洋匡)는 두 사람 모두 사지가 없이 태어났다. 그런 중증 장애 속에 살아 왔지만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닉 브이치치와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근황이 너무나 다르다.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일본의 유명 작가이며 초등학교 교사이다.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를 나왔다. 도쿄의 교육위원이기도 하다. 그는 닉 브이치치 처럼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났다. 그의 자서전 <오체불만족>은 500만권 이상 팔렸다. 그런 그에 관한 충격적인 뉴스가 최근에 전해졌다. 결혼한 그는 아내 모르게 여러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온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서 큰 실망을 주고 있다.  그는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둔 가장이다.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일본의 어린이들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고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많이 읽힌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가 성장해 오고 살아 온 이야기는 일본의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이다. 오토다케 히로타다와 닉 브이치치와의 차이가 무엇인가. 닉 브이치치도 아직 살아 있는 인물이니 인물평을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닉 브이치치 처럼 예수 안에서 살고 부활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강”을 선물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오토다케 히로타다처럼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거나 배신감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성도의 평강,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평강은 어떤 평강인가. 주와 함께 손잡고, 아니 주님의 손에 붙잡혀 이 세상을 한 걸음 씩 한 걸음씩 주님과 동행하는 자의 평강이 아닐까. 평강의 삶이란 죄와 악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을 멀리 하면서 성령 충만, 은혜 충만하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특징과 축복 중의 하나는 “마음의 평강”이다. 이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성도들이 누리는 혜택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의를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자들이다. 평강을 심어 평강의 열매를 거두며 살아가는 자들이란 말이다. 

핍박자 사울이 다메섹 체험 후에 예수의 부활 복음을 이방 땅에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나. 그러나 그는 편지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평강과 기쁨을 강조하지 않았나.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라고 해서 고난을 몰랐을까. 그라고 해서 환난과 역경을 즐겼을까. 아니다. 고난과 환난과 핍박과 시련을 소화해 나가는 신앙의 능력이 달랐을 뿐이다.

고린도 후서 11장에 보면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23-30)

그렇다. 성도가 주 안에서 누리는 평강이란 다른 것이다. 환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시련이 와도, 실패가 와도, 역경이 와도, 파도가 쳐 와도, 질병이 찾아 와도, 가난이 와도,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성도는 언제나 주 안에서 누리를 평강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도다운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여 주시는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은 두려움과 무서움 가운데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기쁨을 회복시켜 주었다. 평강과 기쁨 이것은 예수의 부활 신앙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의 특권이다. 이런 은혜를 체험하며 살았던 이방 전도자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다. 
부활 예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이 날마다 샘솟는 하루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기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20)


부활 신앙과 복음 전파의 사명.
예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나 빌립 집사나 바나바를 비롯하여 의사 누가 등등 얼마나 수많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복음 전파에 힘썼는가.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부활 신앙에 붙잡혀서 세계 열방에 복음을 전파해 왔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 상 열방을 향하여 보냄을 받는 자들이다. 성도들은 땅 끝까지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도 성령 받고 권능 받아 땅 끝까지 증인이 될 것을 분부하셨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이 그러하지 않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우리가 아는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은 영국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 아들이었다. 남의 집 옥탑 방에서 그의 7남매가 같이 컸다. 10살 때부터 낮에는 남의 집 방직 공장에 가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였다. 신학과 의학과 그리스 어를 전공하고 27살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났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토인들이 다른 마을이나 다른 종족을 습격하여 포로로 사로잡아 온 토인들을 가축처럼 부리거나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리는 것이 흔한 때였다. 이렇게 팔린 노예들은 항구로 끌려가 노예선에 실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이 되곤 하였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5개월 동안 항해 끝에 아프리카에 도착하였다. 도착한지 사년 후에 사자에게 습격을 당하여 거의 죽을 뻔하였다. 외쪽 어깨뼈가 다 으스러졌고 목숨을 겨우 건졌다. 그 이후로 그는 평생을 왼팔과 왼 손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였고 왼팔은 어깨 위로 올라가지 않는 장애를 갖고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의 두려움과 공포를  일기로 써서 남겼다. “맹수가 다른 동물을 잡아먹을 때 느낄 두려움을 다 겪었다. 사자에게 물려 찢기는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몽롱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맹수에게 찢겨 죽을 때에 다른 동물들이 느끼는 그런 감정 상태가 아닐 까 생각한다.” 그는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진 선교의 사람이요 아프리카의 이곳저곳을 6400KM 쯤 탐험하고 지도를 그린 탐험가요 지질학자요 의사였다. 
그는 당시에 다양한 아프리카 부족들을 노예로 끌어가던 구라파 여러 나라의 노예 제도를 앞장서서 반대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빅토리아 폭포도 그가 처음 발견하여 영국 여왕의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여 ‘빅토리아 폭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남 아프리카에서의 선교 여행과 연구들>이란 책은 출판되자마자 8만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그는 아프리카 선임 선교사의 딸인 메리 모펫을 아프리카에서 먼저 하나님 앞으로 보내야 하는 슬픔도 겪었다. 그는 선교 현지에서 평생 노예 제도를 반대하였으며 그가 그려 놓은 아프리카 동부, 남부, 중부의 지도들은 후배 선교사들에게 너무나도 요긴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1873년 5월 1일에 60살로 임종했다. 그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인 아프리카 신자들이 그가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숨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프리카인들은 그토록 그들을 사랑하던 데이빗 리빙스턴 선교사의 심장을 꺼내 그 곳에 묻고 시체는 미라(Mummy)로 만들어 2,400km가 넘는 해안까지 운반하였다. 영국으로 옮겨진 그의 시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장례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영국 각처에서 수많은 고관대작들과 저명인사들이 참석했다. 그의 외모는 초라하게 늙어갔으나 그는 한 시대에 크나큰 선교의 영향을 미친 영적 거인이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한 헨리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턴, 알렌..강화도 섬 마을의 고향 마을에까지 찾아 가서 복음을 전한 데이밍 선교사 이들은 모두가 다 부활 예수의 복음 전파의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선교의 사람들이었다.

오늘 날 우리가  다 사도 바울처럼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일 상의 이웃들에게 늘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 전파의 정열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예수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고 하셨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마음이 뜨거워 져서 밤낮 없이 부활예수를 전하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열심을 다하는 정열적인 전도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바울은 그를 붙잡아 로마로 호송 당하던 중에 만난 아그립바 왕에게도 “당신도 나처럼 예수 믿기를 바란다.”고 전도하지 않았나. 복음을 전파한 성도들에게는 다니엘서 12장 3절의 말씀처럼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축복”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부활 신앙과 성령의 충만.
신앙생활은 성령 충만을 받아야 본격화 된다. 그냥 무리 속에 섞여 지내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사람은 분별력이 다르고 판단이 다르고 처세가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결정이 다르고 그 가는 길이 다르다. 예수는 마리에게 잉태 도는 순간부터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출발하였다. 마리아도 예수를 잉태하는 그 순간에 먼저 성령이 임하셔서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는 성령 안에서 잉태되고 성령 안에서 살던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서 성장하였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그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임하였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나를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도 들었다. 

예수는 광야에 나가 사십일 동안 금식하실 때에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에게 이끌리어 가셨다.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사십일 동안에도 문제가 없었고 사십일이 끝난 후에도 마귀의 시험을 일일이 이기셨다. 만약 마귀가 요구한 대로 사십일을 잘 견디신 예수께서 돌로 떡이 되게 하여 잡수셨다면 그 상황이 어떠하였겠나. 물론 예수는 무슨 재료가 없이도 떡을 만들어 잡수 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가.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마귀가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대로 행하시느냐.” 의 문제가 생기지 않나. “봐라 내가 네 말처럼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 없는 줄 아느냐”하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예수께서는 사십일 동안 금식 하실 때에도 성령 충만함으로 하신 것이다. 성령 충만함과 성령의 이끌림이란 매사에, 대소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든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든지 더군다나 마귀에게 절하라든지 하는 엉터리 유혹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으셨다. 아니,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마귀에게 절하겠는가.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마4:7)는 마귀의 유혹은 마치도 에덴동산의 뱀의 유혹과 같은 것이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의 축복과 혜택을 온전히 다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 가운데 살던 인류의 조상이다. 그런 저들이 하와이든 아담이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이유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온갖 좋은 과실나무들을 심어 놓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그 말씀 말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얼마나 다양하고 맛 좋은 과일 나무들을 심어 놓으셨는가. 그 백가지 천 가지의 엄청난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한 가지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덜컹 집어 먹고 말았다. 이것이 인간이 타락하게 된 죄 성이다. 
9년 전쯤에 멕시코 유카탄 지역의 후배 선교사의 선교 현장에 방문한 적이 있다. 원주민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며 말씀도 전했다. 저녁에는 배출된 신학생들이 각처에서 목회하여 부흥시킨 교회의 성도들이 다 같이 모여서 연합으로 예배드리는 곳에 가서 또 말씀을 전했다. 그 중간에 6명이 침례를 받는 곳에 가서 침례도 행했다. 그들은 스페인 말을 쓰기 때문에 스페인 말로 외워서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000에게 침례를 주노라”하고 침례를 행한 기억이 생생하다. 여러 날을 선교사 관에서 머무는데 아침에는 밥 대신에 온갖 과일들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싱싱하고 잘 익은 망고와 파파야를 넘치도록 먹었다. 그 모든 열매들이 선교관뜰에 심어서 몇 해 동안 자라난 나무의 열매들이라고 했다. 파파야 위에 소금을 숭숭 뿌려서 먹는데 얼마나 맛이 있던지 모른다. 그 외에도 별의 별 맛이 기가 막힌 과일들이 지천이었다. 에덴동산은 그것과 비교 할 수 없던 곳이다. 그런 곳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고 범죄하고 타락하고 말았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왜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공부 잘 해라, 명문 대학 가라, 대 기업에 취직해라, 할 수 있으면 사업해서 돈 많이 벌어라” 그런 말씀은 한 마디도 하신 적이 없으시다. 예수께서는 “성령 받으라.”고 하셨다. 그렇다. 성령 받아야 한다. 복중의 생명으로부터 아기, 소년, 소녀, 청년, 어른, 노인,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교회는 성령을 받는 곳이다. 차가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 자동차의 안과 밖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또 수 백 km의 먼 길을 달려가듯이 성도는 교회생활을 통하여 계속하여 그런 은혜를 공급받아야 만 한다. 계속하여 끊임없이 성령 충만을 공급 받아야만 한다. 

공중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곁으로 같은 속도로 날아가서 다른 비행기 안에 공중 급유하는 장면을 영상이나 사진으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단히 정교한 과학과 훈련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그처럼 공중에서라도 계속하여 급유하듯이 성령을 부어 주시길 원하신다. 성령이 고갈 되지 않도록 계속하여 성령을 쏟아 부어 주시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공중에서 나에게 가까이 급유기가 다가오듯이 성령의 능력을 언제가 간절히 사모하여야만 한다. 은혜의 공급을 목 말라해야만 한다. 

그렇게 비겁하게 행동하고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맹세하며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갔던 제자가 베드로가 아닌가. 그런 그가 예수의 부활 승천 후에 기도하던 중에 성령 받았다. 담대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 성령 받으면 누구라도 이처럼 변화 될 수 있다. 새 사람 될 수 있다. 성령 받은 베드로가 3000명 앞에 복음을 전하고 저들 모두다 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2)

성령 받은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이었다. 오늘 날로 하면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이었다. 거기서 늘 만나던 구걸하는 한 사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그 날도 만났다. 베드로는 그 날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말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 때에 그 걸인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를 본 많은 사람들은 그가 걷고 뛰고 찬송하는 것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사람인 줄을 알고 심히 놀랍게 여겼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 행각 주변에 몰려드는 무리들 앞에서 설교하였다. 그 때 선포한 설교 내용 중에도 예수의 부활 증거가 분명하였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3:14-15)

베드로와 요한의 부활 복음 증거를 못 마땅하게 여기고 싫어한 이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었다. 사도행전 4장 2절에 보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고 날이 저물자 이튿날까지 가두어 두었다. 이미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졌고 예루살렘 주변에 예수를 믿는 남자들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베드로는 다음 날 요한과 함께 대 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한 자리에서 종교 재판을 받게 되었다. 거기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증언하였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그 사람, 평생 걸어 본 적이 없는 그 사람을 일어나 걷고 뛰게 한 것은 부활 예수의 회복하게 하시는 능력과 권세로 인한 것이라고 담대하게 증언하였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된 대제사장들의 문중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경고하였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몹시 궁지에 몰린 대제사장들은 또 다시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고는 풀어 놓아 주었다.

이처럼 성령 받으면 담대해 진다. 성령 충만해 지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오늘 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시급한 것은 성령을 받는 일이다. “아니 난 이미 성령 받았는데 왜 자꾸 성령 충만을 말하는가.”하고 반응하면 안 된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호흡과 도 같다. 호흡을 멈추면 죽는 것이다. 영적으로 산자의 호흡은 달라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숨을 내 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도 숨을 들이 쉬고 내 쉬신 것처럼 성도들이 호흡을 하는 것처럼 성령에 충만해져야 한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흑해 주변에서 선교하다가 그리스의 파트라이에서 X자 십자가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X자 새겨진 것도 이 때문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사도는 사도들 중 맨 처음에 순교했으며, 너무 일찍 순교하는 바람에 전승이 거의 없는 편이다. 스페인의 서북부 지방에 복음을 전하고, 팔레스티나로 돌아와 붙잡혀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남서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서 선교하였으며,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설교하던 중 분노한 군중들의 곤봉과 방망이에 맞아 순교했다고 한다. 알패오의 아들 유다는 시리아와 소아시아에서 선교하다가 창에 찔리고 참수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 등지를 선교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붙잡혀 산채로 껍질이 벗겨지고 참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바르톨로메오 순교록]에는 죽임 당한 그의 시체는 자루에 담겨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의심 많던 도마는 스리랑카 인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인도에서 순교 당하였다. ‘야웨의 선물’이란 이름의 뜻을 가진 제자 마태는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붙잡혀서 창과 칼과 도끼로 치는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빌립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박해 때 소아시아 프리지아에서 십자가형으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몬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선교하다가 페르시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십자가에 처형 되었거나 톱에 몸이 잘려 순교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가롯 유다를 대신하여 뽑혀 12제자에 보충된 맛디아도 십자가 처형 혹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순교한 사도 바울도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며 아가보라는 예언가가 사도 바울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그는 사도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손과 발을 묶으며 “이 띠의 임자가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그를 이방인에게 붙잡아 넘겨서 죽음을 당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시간에 바울은 가이사랴의 빌립 집사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빌립 집사는 네 딸이 모두 다 예언하는 처녀들이었다. 아가보의 예언을 들은 바울 주변의 선교 일행들은 울면서 모두가 바울의 가는 길을 막으려 했다. 그 때에 사도 바울은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로마 서쪽 성문 밖 5Km 지점에 바울순교기념교회가 있다. 스칼라 코엘리(Scala Coeli)는 바울이 참수 당하기 직전에 갇혀 있던 감옥이다. 그가 마차에서 내려 참수 장으로 들어간 곳과 교회 안에 들어가면 바울이 참수당할 때 그의 목을 받쳤던 돌기둥과 참수당한 바울의 목이 세 번 뛰어 ‘세 개의 샘’(트리 폰타네)이 솟았다는 자리가 보존되어 있다.

부활 신앙과 성령 충만함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방에 복음의 씨앗을 전파하게 하는 막을 수 없는 운동력이었다. 성령 충만한 부활 복음 증거의 전도자가 되자. 주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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