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여호와의 말씀(왕상17:1-16) 2016. 2. 21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21 20:34 조회 19,026 댓글 0
 
 여호와의 말씀(왕상17:1-16)   2016. 2. 21 사순절 제 2주


일반 백성이 왕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2,900년 전인 고대 국가 당시의 왕의 권력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절대 권력이 아니었겠는가. 그런 권력자 앞에 좋은 내용을 전하고, 왕이 기분 좋아할 일을 전하는 것이면 몰라도 왕이 기분 나빠할 내용을 전하는 일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겠는가.

어느 날 하나님은 길르앗에서 살아가던 디셉 사람 엘리야를 아합 왕에게 보내셨다. 
‘길르앗’(Gilead)이란 지명은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이 있다. 하나님은 그곳, 길르앗 사람인 선지자 엘리야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증거가 되게 하셨다. ‘엘리아’(Elijah)의 이름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이다. 바알 숭배가 온 나라에 독버섯처럼 번져 가던 당시에 엘리야는 그의 이름처럼 오직 여호와만이 믿고 따르고 섬기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이심을 평생 선포한 하나님의 선지지였다. 바알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방 신앙은 주전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 숭배 신앙이었다. 바알(Baal)이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며 ‘소유주, 주인, 남편’의 뜻을 가진 일반명사인데 이런 단어가 신의 이름에 붙여져서 바알을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주신’(主神)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긴 기간 동안 치명적인 악 영향을 미친 우상 숭배가 바알 숭배 신앙이었다. 오늘 날로 하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황금만능주의’로 ‘돈’이 최고이고 ‘돈’을 신처럼 여기는 그런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아합 왕에게 보내셔서 장차 이스라엘 나라에 비도 내리지 않고 이슬도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몇 년간 계속될 것이라고 전하게 하셨다. 요즘 지구촌이 고민하고 있는 기상 이변, 온난화, 일산화탄소의 과다 배출, 엘니뇨현상 등의 환경 공해 등등이 원인이 된 기상이변에 대하여 설명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 임금과 백성들이 행해 온 죄와 악(惡)에 대한 심판으로 하늘의 문을 닫으셔서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하시겠다는 내용을 전하라고 하셨다. 

18장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3년 세월이 지나도록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합 왕과 이세벨은 회개하기는커녕 그들이 바알을 숭배하는 악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뿐만 아니라 아합 왕과 이세벨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만나는 대로 죽였다. 

그런 당시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셔서 하나님 대신에 바알을 우상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신접한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그런 악한 아합 왕과 백성들의 영적 타락을 문제 삼으신 것이다. 

아합 왕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7대 왕이었다. 분열 왕국 시대의 북 왕국 이스라엘 19명의 모든 왕이 다 악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는 평가를 받은 왕이 단 한명도 없었다. 아합 왕은 주전 874년에 왕위에 오른 후에 22년 동안이나 왕이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여로보암’이다. 여로보암은 솔로몬 왕의 휘하에 있던 능력 많은 부하였다. 솔로몬 왕이 밀로 성을 건축하고 아버지 다윗 성을 보수 공사하던 때에 여로보암은 큰 용사요 부지런한 감독관이었다. 그는 에브라임 족속의 느밧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났다. 그는 솔로몬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성곽 공사 중에 요셉 족속의 건축 분량을 총괄하는 감독관이었다. 그는 어느 날 들에서 새 옷을 차려 입은 선지자 ‘아히야’를 만났다. ‘아히야’ 선지자는 여로보암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새 옷을 벗어서 12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 10조각을 여로보암에게 가지라고 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서 10지파를 네게 주시겠다고 하신다.”고 전하였다. 단지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시고 예루살렘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한 지파만을 남겨서 솔로몬에게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선지자 아히야는 시대적으로 그런 불행한 날이 오게 된 이유를 여로보암에게 전하였다.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경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왕상11:33) 솔로몬 왕 시대 말기의 죄악 상을 지적한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말씀해 주셨다.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왕상11:38)

이러한 소문을 들은 솔로몬 왕은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였다. 결국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도움을 입으며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망명하여 지냈다. 세월이 흘러갔고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남북으로 나누이고 말았다. 남 왕국 유다에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왕이 되었다. 솔로몬이 죽은 소식을 들은 여로보암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에 도착하여 세력을 규합하고 사마리아 성을 중심으로 10지파가 연합한 북 왕국 이스라엘 나라를 새롭게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 북 왕국 이스라엘의 7대 왕이 아합이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4대 임금 엘라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시므리에게 살해당하여 죽고 말았다. 시므리는 엘라 왕의 신하로 병거 절반을 맡아 통솔하던 지휘관이었다. 그 시므리가 반역을 일으켰다. 시므리는 왕권을 장악하자마자 엘라 왕과 그의 선친 아사 왕의 왕족과 친인척의 남자들을 모조리 다 죽여 버렸다. 성경은 그 까닭은 바알 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이 노하시게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열왕기 상 16장 13절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시므리가 엘라 왕을 죽이고 왕이 된지 7일 만에 오므리에게 패하여 죽고 말았다. 오므리는 시므리처럼 엘라 왕 휘하에 있던 군대 지휘관이었다. 그에게는 따르는 무리가 많았고 무리들은 오므리를 왕 삼기 원했다. 오므리의 군대가 왕궁을 포위하자 왕궁이 함락된 줄로 여긴 시므리는 왕이 된 지 일주일 만에 왕궁의 요새로 피신하여 스스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불 길 가운데 죽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인 비운의 사건을 성경은 “이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이니라.”(왕상16:19)고 설명해 놓았다. 이는 당시에 왕이든 군대 지휘관이든 너나 할 것 없이 바알을 숭배하는데 몰두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그 후 오므리는 왕이 되어 12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성경은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16:25-26)고 하였다. 그 악했던 군대 지휘관 출신 오므리 왕이 죽고 아들 아합이 대를 이었다. 엘리야는 아합 임금 때에 활동하던 선지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통하여 하시려는 말씀을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란 제목으로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하도록 하자.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 여러 해 동안 비와 이슬을 내리지 않게 하시는 자연의 대 재앙을 경고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야의 심경이 매우 단호하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말했다. 그것도 여호와를 무시하고 여호와 앞에서 보란 듯이 악을 행하는 아합 임금 앞에서 그런 엄청난 경고의 말씀을 전달한 것이다. 열왕기상 16장 30절에 보면,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라고 지적하였다. 무슨 말씀인가 아합 왕은 그 이전의 그 어떤 왕보다도 악했다. 아합 왕의 악행은 역사에 비교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악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여로보암이 행하던 모든 악보다 더욱 악하게 행동하였다. 심지어 그는 아예 바알 숭배의 본거지인 시돈 사람의 왕 엣 바알의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하였다. 그 이름이 이세벨이다. 아합은 아예 시돈에까지 건너가서 바알을 숭배하고 바알 신상 앞에 예배하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 안에 바알을 숭배하는 바알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 바알 신전 안에서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다. 그 바알, 혹은 아세라 혹은 아스다롯이라는 것들은 풍요를 상징하는 조잡하고 해괴한 형상을 가진 우상들이다. 열왕기상16장 33절에 보면,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고 하였다. 역대 이스라엘 왕들 중에 하나님을 가장 몹시 화나게 하고 분노하시게 한 왕이 바로 아합이었다. 그런데도 나라는 발전하는 것 같았고 벧엘 사람 히엘을 앞장 세워서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등 나라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게 번영해 가고 있었다. 

여리고 성은 여호수아가 앞장섰던 가나안 점령 전의 첫 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순종하게 하여 무너트리신 여리고 성을 다시 쌓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여호수아 6장 26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여리고 성을 다시 쌓는 자에게는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가 죽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아들을 잃으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신 바 있다. 500년 세월이 흐른 후에 여호수아 시대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심판의 장면을 본문에서 목격하게 된다. 

히엘이 총감독으로 앞장서서 여리고 성의 터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인 아비람이 죽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여리고 성의 성문을 세울 때 즈음에 막내아들인 스굽도 세상을 떠났다. 그런 시대 상황을 성경은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16:34)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영원불변하시는 말씀이시다. 여리고(Jericho)는 본래 베냐민 지파에 배당되었던 땅이다(수 18:21). 그런데 10지파의 반란(12:16-20)으로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그 이후 여리고 성 지역은 북 왕국의 국경 성읍이 되었다. 아마도 아합(Ahab) 왕은 이 여리고 성읍을 재건함으로써 요단강을 가로지르는 남 왕국 유대와의 길목을 장악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자, 그러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란 어떤 말씀들일까. 여호수아 11장 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모세가 그러하였듯이 여호수아가 어떤 인물이었나를 한 마디로 전하는 성경의 내용이 아닌가. 그런 여호수아도 나이 많아 늙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날아 가까워 오고 있었다. 여호수아는 110살에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여호수아 23장 2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 나라의 장로, 수령, 재판장, 관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마디가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분부와 가르침 중에 강조한 말씀은,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수23:6-7)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수23:11)는 교훈의 말씀도 전하였다. 이런 경고의 말씀도 남겼다.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수23:16)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의 단에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칠 것이고 이미 주신 아름다운 땅이지만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고 경고하셨다. 

본문에 돌아 와서 열왕기 상 16장 33절에 보면,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이스라엘 나라에 장차 여러 해 동안 비도 내리지 않고 이슬도 그치는 자연 재해가 임할 것인데 그 이유는 아합 왕과 백성들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몹시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란 설명이 아닌가. 

자연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통로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기록된 성경의 말씀은 “특수 계시”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만 일상적인 자연의 현상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자연 계시”로도 말씀하신다.  

자연이 무엇인가. 우주와 이 땅의 삼라만상이 자연이 아닌가. 해와 달과 별들의 우주 공간에 지구가 있다. 이 지구 안에 70억이 넘는 인류가 살아간다. 오대양 육대주의 광활한 바다와 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엄청난 축복의 여건이다. 우리는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반도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 그것도 한반도의 절반은 휴전선 너머의 북한 정권이 지배하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남북 아메리카, 유럽 등의 큰 대륙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연의 혜택과 축복과 엄청난 지하자원이 쏟아져 나온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당하게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런데 내리던 비가 내리지 않고 비와 이슬이 마르는 것은 재앙이 아닌가. 물론 일 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땅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축복 받은 땅들도 많다. 가령 프랑스(France)는 한국 땅의 3배에 가까운 면적이다. 그런 넓은 땅에 사는 인구는 7,000만 명이 넘지 않는다. 그 넓은 땅의 80%가 비옥한 들판이다. 산의 면적은 전체의 20%에 불과하다. 그러하다 보니 농사도 잘되고, 과일 농사, 꽃의 재배 등 풍요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세계에서 6번째 가는 경제 대국이다.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영국 다음 가는 강대국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 앞에 진실하게 반응하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많은 나라가 되어야 복된 것이다. 

네덜란드는 어떤가. 정식 명칭은 네덜란드 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이다. 일명 Holland·화란(和蘭)이라고도 한다. 서쪽과 북쪽이 북해와 접하며, 해안선은 약 451㎞에 달한다. 속령으로 카리브해에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의 다섯 개의 섬과 아루마 섬이 네덜란드 땅이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면보다 낮다. 그러하다 보니 전통적으로 간척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이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국토의 70%가 농목지로서 낙농업과 원예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네덜란드의 땅 면적은 우리나라의 1/5정도인데 1,700만 명이 살아간다. 그런 네덜란드의 GDP는 5만 불에 이른다. 이처럼 부요하냐 못하냐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느냐 못 섬기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도 하나님이 축복하신 아름다운 나라 중의 한 곳이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얼마나 아름답나. 가는 곳곳마다 얼마나 지역을 자랑하는 풍성한 먹을거리들이 넘쳐 나나.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제대로 잘 돌아 보면서 더불어 살아간다면 우리나라처럼 안전하고 복된 나라가 어디에 있나. 미국, 미국 하지만 미국은 앞으로도 총으로 많은 착한 이웃 사람을 쏴 죽이는 그런 총기 난사 사고를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고 말았다. 대통령이 나서도 쉽사리 해결 될 수 없는 복잡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총기 생산 업자들로부터 그 악의 고리를 끊는 일이 쉽지를 않다. 

사철 여름인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펑펑 내리는 눈을 본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사면이 육지로만 되어 있는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동해의 아름다운 바다와 남해의 그림 같은 바다와 섬들을 보라 본다면 어떨까.

어제 연신내역에 전도하기 위해 나가는데 정월 보름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파는 재래시장 곁을 지나갔다. 커다란 좌판에 멍게와 굴을 어머 어마 하게 쌓아 놓고 파는 진풍경도 보았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산과 들과 바다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크다. 그 모든 것들을 풍요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이슬의 힘이 아닌가. 24시간 산업 시설이 잘 돌아가고 무역이 빈번하고 달러가 쌓여가는 것이 다 좋고 필요하지만 땅이 복을 받아야 한다. 산과 밭과 논과 바다가 복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비와 이슬을 골고루 내려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이 지도자들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민족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앞장 세우셔서 아합 왕의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삼년 반 동안이나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하셨다. 야고보도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나.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5:17-18)

하늘이 비를 내려야 한다. 하늘이 이슬을 내려야 한다. 계절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비와 이슬을 적당하게 내려 주셔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평안하고 나라가 평안하고 지도자들이 복을 누리게 되지 않겠나. 너무 비가 많이 와도 문제이고 너무 비가 적게 와도 문제가 아닌가. 시절을 따라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시고 새벽 마다 산과 들에 이슬이 풍성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과 가정과 개인의 삶에 비처럼 이슬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한다. 노아의 홍수가 무엇인가. 엘리야 때의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던 가뭄의 재앙이 무엇을 말씀하나. 범사에 적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한다. 그래야 복된 것이다. 추수 때에 알곡을 거두게 하시고 쭉정이를 불에 태우게 하시는 구별된 추수의 복이 어디에서 임하나. 누구에게서 오나.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을 누가 먹여 키우시나. 들에 핀 백합화를 누가 곱게 입혀 주시나. 

우리가 부르는 감사절 찬송 중에 592장,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라는 찬송이 있다. 그 2절에 “씨 뿌린 논밭마다 기름고이고 심겨진 과원마다 열매 맺으리 비바람 고운 햇빛 주님 선물로 가꿔온 손길마다 복이 넘친다.” 그렇지 않나. 인간의 수고와 열심만 가지고 논과 밭에 기름이 고이게 할 수 있나. 인간이 밤을 새워가면서 농사한다고 과원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나. 물론 요즘은 수경 재배를 비롯하여 별의 별 과학적인 농산물 재배법이 발전하고 있다지만 그것은 인간이 과학적인 노력에 의한 새로운 시도일 뿐 그 넓은 논과 밭과 산자락에 풍성한 곡식과 맛있는 과일들이 탐스럽게 열매 맺게 하는 힘이 어디서 오나.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비와 이슬을 적당하게 골고루 내려 주셔야 한다. 이는 가족들의 범사, 자녀들의 매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가족들에게,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비와 이슬을 내려 주시듯이 은혜를 부어 주셔야 한다. 그래야 복되게 되는 것이다.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하면 안 된다. 교만한 자가 번성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면서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번영하는 인생이나 가문이나 나라를 부러워하면 안 된다. 시편 1편의 교훈이 무엇인가. 악인들의 결국은 바람에 날아가는 겨처럼 되고 만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날에 그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죄인들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복이 있는 사람은 다르다. 그 생각이 다르고, 그 가는 길이 다르고, 그 앉는 자리가 다르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복이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복이 있는 사람은 오만하고 교만하고 거만한 자의 자리에 끼어 앉지 않는다. “복이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다.”, 복이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인생이다. 철을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않는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된다. 형통하다는 말은 영어 NIV 성경에 보면 “Whatever he does prospers.”라고 하였다. 그가 하는 일들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번영하고 번성하고 번창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왜 아합 왕 때에 하늘이 문을 닫았나. 왜 하나님께서 삼년 반 동안이나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 재앙을 주셨나. 여호와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회복과 용서와 형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삶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여호와.
나라가 복되고 가정이 복되고 개인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말씀 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지금 잘 산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 번영한다고 번영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 바벨론, 앗수르, 메대,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문명이 왜 역사 속에 사라졌는가. 그 당시의 화려했던 문명의 흔적이 오늘 날은 박물관 안에만 남아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 패망의 원인이 무엇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문명이 되어야만 한다. 온 이스라엘 나라에 비와 이슬이 그치고 자연 재해가 임하는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말씀으로 임하셨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재해가 시작되는 그 곳을 떠나라고 하셨다. 아합 왕이 거하는 사마리아 성의 왕궁으로부터 벗어나서 동쪽으로 가라고 하셨다. 장차 이스라엘 나라에 임할 재앙과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엘리야를 아합이 곱게 살려 둘 리가 없다. 하나님은 미리 그런 아합 왕의 악행을 아시고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어 지내게 하셨다. 도피성을 예비하시듯이 온 나라에 재난이 임하는 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하실 일을 남겨 놓으시고 그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게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위기와 고난의 때에 숨겨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평화라는 주제의 그림 대회가 열렸다.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기의 모습, 꽃이 만발한 산 정상의 호수에 물이 가득하고 그 물 위에 원앙새가 떠다니는 그림 등등 많은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1등에 당선된 작품이 있었다. 먹구름이 덮치고 파도가 거세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 해변의 까마득한 낭떠러지 암벽에 어미 갈매기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새끼 갈매기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1등작으로 뽑혔다. 우리 인생이 그러하지 않나. 하나님은 한 개인이 겪는 고난과 질병과 역경 가운데 찾아 오셔서 어미 닭이 새끼 병아리를 날개 깃 아래 품어 주듯이 안아 주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으로 살면서 이런 저런 어려움과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에 “왜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침묵하시고 나의 이 어려움을 돌아보아 주시지 않으시나” 하고 착잡해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신데, 나를 사랑하는 주님이신데 침묵하실 리가 있나. 침묵의 시간도 일종의 말씀하시는 시간이시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피할 방향과 피하야 갈 목적지와 피하여 가서 머물 장소까지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동쪽으로 가라, 요단 앞까지 가라. 그릿 시냇가에 숨어라. 그리고 엘리야의 필요를 공급해 주셨다. 그 맑은 그릿 시냇물을 마시게 하셨다.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셔서 거기서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게 공급해 주셨다. 하나님은 까마귀들을 동원하셔서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먹게 해  주셨다. 한 마리의 까마귀가 아니었다. 4절과 6절에 보라.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셨고 까마귀들이 동원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 시대적인 선지자 엘리야를 위하여 공중 나는 새들 중에 까마귀들을 동원하셨다.

세계 곳곳마다 까마귀들이 동원되어 필요를 채우고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인간의 기본권이 해결되기를 열망하는 가난한 이웃, 불쌍한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에만 노숙자가 있고 달동네의 가난한 이웃, 쪽방 촌에 살면서 대를 이어 흙 수저의 탄식을 말하는 이웃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같은 세계 최강의 부유한 나라에도 국가적으로 의료 보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병원을 찾지 못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들의 수가 적지 않다. 인종 차별의 문제의 벽은 여전히 높다. 17-21살의 흑인 고등학교 졸업생 들 중에서 취업을 원하지만 취업하지 못하는 이들이 50%를 넘는다. 미국이란 나라는 0.1%의 부유층이 가진 부의 규모가 미국인 전체 90%의 국민이 소유한 부보다 더 많다. 미국인들 중에서 58%의 임금을 상위 1%의 사람들이 가져간다. 그렇게 잘 사는 나라 미국이지만 20%의 어린이들이 빈곤층에 속한다. 40%의 흑인과 유색인종 어린이들이 빈곤하게 산다. 미국인들 중에서 수백만 명이 넉넉한 저녁을 먹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어간다. 지난 2년 동안 미국인 중에서 15명이 벌어들인 1,700억 달러의 돈은 1억 3,000만 명이 2년 동안 벌어야 하는 돈보다 더 많은 액수이다. 집을 마련하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아예 길거리에서 자고 지붕이 없는 공간에서 지내는 이들의 숫자도 엄청나다. 이런 현상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바알을 숭배하고 아세라를 숭배하며 도시 안에 바알의 제단을 쌓고 하늘을 치솟는 빌딩 앞에 힘있어 보이는 뿔을 치켜 든 황소의 상을 세워 놓은 나라, 그런 도시의 참상이다. 바알의 신전에서 바알 앞에 절하던 아합 왕의 때와 다르지 않다. 심지어는 주일이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마치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를 풍요의 신 바알에게 절하고 풍요의 우상 앗세리 신상 앞에 제단을 쌓듯이 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올 한해를 살아가면서,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자연을 다스리시고, 새라도 동원하시며 까마귀들이라도 필요하시면 동원하시는 오묘하신 섭리와 손길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범사가 되기를 소망하자. 그러나 막연하게 바알에게 빌고, 앗세라 신상 앞에 절하듯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의지하며 성실하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누군가가 나를 위한 까마귀가 되게 하시기도 하고 또 때때로 내가 누군가에게 떡과 고기를 공급하는 까마귀 역할을 하게끔 하시기도 하실 것이다. 왜일까. 하나님은 그런 서로의 모습을 통하여 그 시대마다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이시니까. 

하나님은 오늘 날 아름다운 새 성전 시대를 맞이한 우리들을 향해서 이 곳 하나님의 집, 이 곳 예배당의 필요를 해결해 가는 하나님이 동원하시는 까마귀의 역할을 하는 나 자신과 나의 가정이 되기를 원하시는지도 모른다. 비와 이슬을 내리지 않으시는 날들이 계속되었고 엘리야가 도망하여 숨어 지내던 요단 앞 그릿 시냇물도 말라 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기적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시대적인 선지자로 오래도록 쓰임 받아야 할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물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곳으로 그의 가는 길을 인도하셨다. 이미 그릿 시냇물이 마른 후였다. 땅은 비가 내리지 않은지 오래 되었고 가는 곳 마다 시내가 메마르고 바닥이 들어난 상태였다. 그럴 즈음에 하나님은 다시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9절에,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고 하셨다. 시돈이 어디인가.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 이방 나라 시돈 여성이다. 시돈은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본 고장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임금 아합이 앞장서서 바알을 숭배하던 때에 이방 나라인 시돈 땅 사르밧에 사는 과부를 통해서 하나님 체험을 갖도록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그 때 그때마다 엘리야의 갈 길을 인도해 가고 계셨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 하나님의 자녀인 믿음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그 삶의 방향과 목적지가 분명한 나날을 살아가야만 한다. 아니 그 살아갈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 한다. “어떻게 살다 보면 잘 되겠지 좋은 일이 있겠지” 그런 막연하고 미신(迷信)적인 생각으로 살면 안 된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가는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노아의 시대에는 노아에게 그렇게 하셨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말씀으로 인도하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이는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기드온과 드보라와 사무엘과 다윗의 때에도 마찬가지이셨다.

최근에 새벽 묵상으로 대한 예수께서 변화 산에 오르셨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하시고 변형 되셨던 신비의 체험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이시며 엘리야의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기뻐하시는 자였다. 하나님은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명령하셨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시다. 연극에 제 1막이 끝나면 제 2막이 시작되고 제 2막이 끝나면 제 3막이 시작되듯이 하나님은 새 날을 예비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9절에 보라.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시나.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상하지 않나. 아니 이왕이면 이 극심한 가뭄의 때에 엘리야를 어느 부자 집에 보내 실 것이지 하필이면 그렇게 가난하고 남편도 없고 아들하고 단 둘이서 마지막 떡을 구워 먹고 죽으려고 하는 시돈 땅의 이방 여인을 방문하게 하셨을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은 그 남편 없이 아들과 함께 단 둘이 살아가는 이 여인에게 미리 말씀해 놓으셨다. “이제 얼마 있으면 너희 집에 내가 보내는 선지자 엘리야가 찾아 갈 것이니 그를 선대하여라.” 하고 말이다. 사르밧에 도착하여 성문에 이르러 보니 어느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엘리야는 그에게 마실 물을 구하였다. 물을 가지러 가는 그 여인에게 엘리야는 이왕이면 먹을 떡도 한 조각 달라고 청하였다. 그 때에 그 여인의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떡은커녕 내게 남아 있는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가지고 마지막 떡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이제는 굶어 죽으려는 참이라고 체념을 늘어놓았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이 불쌍한 과부와 그의 아들을 위하여 엘리야를 그 가정에 보내신 것이다. 엘리야는 그 남은 가루로 자신을 위한 작은 떡을 먼저 만들어 오라고 부탁하였다. 산해진미가 철철 넘쳐 나는 그런 식탁이 아니다. ‘작은 떡 한 덩이’를 요구하게 하셨다. 13절에 보라.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다 나로 하여금 먼저 먹게 하고 그리고 나서 당신과 당신의 아들의 몫의 떡을 만들어 먹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위하여 그 극심한 가뭄의 때에 하시려는 날마다의 기적을 예언하게 하셨다. 14절에 보라.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나라에 다시 비를 내리시는 그 날까지 그 집의 가루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런 기적이 그 집에 날마다 일어났다. 그 과부는 엘리야의 요구대로 엘리야에게 먼저 먹을 작은 떡을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아들의 몫의 떡을 나중에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 날마다 기적이 계속되었다. 날마다 가루 통에는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기름병에는 날마다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그 기적의 비밀 열쇠가 어디에 있나. 15절에 보면,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라는 그 말씀이 기적의 비밀이다.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란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라는 말씀이 아닌가. 

다음 주에 자세히 보겠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던 사르밧의 이방 여인을 통하여 신앙고백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 과부의 죽은 아들을 엘리야를 통하여 살려 내셨다. 그 때에 그 여인은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전실한 줄 아노라”(왕상17:24)하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와 같은 기적의 신앙 고백이 우리 주변 가족과 친척과 주변 사람들을 통하여 계속하여 번져 나가는 그런 일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열왕기 상 17장의 본문에 보면 구구 절절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표현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왕상 17:2, 5, 8, 14,  16)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등장이시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고 우상인 바알와 앗세라를 섬기는데 앞장섰던 악한 왕 아합과 이세벨의 시대에 하나님은 여호와의 말씀에 붙잡힌 여호와의 말씀의 선지자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가는 곳 마다 기사와 표적과 증거를 새롭게 하셨다. 엘리사가 그렇게 갑절의 영감을 이어 받기를 소원하던 엘리야! 그 엘리야 시대의 하나님 말씀 묵상을 통하여 새로운 말씀의 은혜를 경험해 가는 나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다윗의 신앙(시22:..최고관리자
"주님 밖에 없습니다..최고관리자
"나를 통하여"최고관리자
"다윗의 신앙"최고관리자
"내 주 하나님 넓고..최고관리자
"그의 생각"최고관리자
그의 생각(요일3:1..최고관리자
"주님 먼저 가세요"최고관리자
"주는 피난처"최고관리자
"천 번을 불러도"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