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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마지막 축복의 말(엡6:23-24) 2016.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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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2-15 17:22 조회 18,876 댓글 0
 
마지막 축복의 말(엡6:23-24)              2016. 2. 14
사순절 제 1주


구약의 말씀 중에 창세기에는 이삭의 축복, 야곱의 축복 등이 두드러진다.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은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까지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의 축복 기도는 서신서마다 이어진다. 세계의 교회는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의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를 공통된 축복기도로 사용한다.

지난 해 10월부터 시작해서 19번에 걸쳐서 묵상해 온 에베소서 말씀 묵상의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시작하는 인사말에서 ‘은혜와 평강’을 언급한 사도 바울은 편지를 마치면서도 ‘평강과 은혜’를 또 다시 강조하였다. ‘평안과 은혜’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중간에 ‘믿음을 겸한 사랑’을 한 가지 더 축복하였다.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과 은혜” 이것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남긴 축복의 말이다. 마지막 말이란 숙연하게 하는 것 아닌가. 마지막 말이 무엇인가. 유언이 아닌가. 평생을 무뚝뚝하게 살아 온 어느 남편이 노인 요양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유품 중에는 아내에게 미리 써 놓았던 유서가 발견 되었다. 세 단어였다. “고맙다, 애썼다, 사랑한다.” 짧은 세 마디이지만 평생을 돌아본 생각이 담긴 작별 인사가 아닌가. 

살아서 미리 쓰는 유언이란 글 모음이 있다. 거기에는 소설가이며 아동문학가인 고정욱 박사의 유언이 실려 있다. 고정욱 박사는 중중 소아마비를 앓아서 걷지 못한다. 늘 휠체어에 몸을 싣고 다닌다. 그런 그에게는 건강한 아내의 내조가 늘 그의 곁을 지킨다. 1960년생이니까 올해에 만 56살이다. 그의 유언은 “소아마비 장애인을 남편으로 맞아 준 당신과 하늘나라에서도 함께 살고 싶소.”이다. 그리고 설명을 붙였다. 장차 하늘나라에 가면 그때는 장애 없는 평범한 남편이 되어 평생토록 자신을 돌보아 준 사랑하는 아내를 힘껏 번쩍 업어 주고 싶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이다. 장편소설 「원균」,「세종로 1번지」, 동화 「아주 특별한 우리형」, 「안내견 탄실이」, 「가방 들어주는 아이」, 「헬렌 켈러」 등 그 외에도 수많은 책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소설·동화·애니메이션·만화·영화를 비롯해 여러 권은 해외 판권까지 가지고 있다. 늘 그의 마음에 가득 찬 생각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다. 소아마비에 걸려서 돌이 지났지만 전혀 일어 서지 못하고 물 자루처럼 털썩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그의 어린 모습을 보고 이웃집 할머니가 “새댁 이 아기 홀트에 갖다 맡겨요.”라고 하였단다. 그런 그를 그의 어머니는 사랑으로 키웠다. 그리고 건강한 아내도 맞았고 씩씩한 한 아들과 예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다. 아내가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할 때에 처갓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아내는 자기와의 결혼을 강행하였고 불평 한 마디 없이 오늘 날까지 살아 왔다. 그런 아내에 대하여 남편 고정욱 작가는 말한다. “이 세상에 장애 없는 평범한 남편이 되어 아내와 살 수 있는 날이 다시 주어진다면 아내를 번쩍 업어 주고 싶다. 무거운 시장바구니도 들어 주고 싶고, 아기 업은 띠를 풀어 내 어깨에 메고도 싶다, 높은 곳의 물건도 꺼내 주고 싶고, 수명이 다 된 형광등도 갈아 주는 자상한 남편이 되어 보고 싶다.”
본문에 돌아가서 보자. 평안과 사랑과 은혜!


평안(平安).
사도 바울이 말하는 평안은 어떤 평안인가.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임하는 평안을 강조하였다. 평안이면 평안이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평안이면 다 같은 평안이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임하는 평안이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말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안과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이 분명히 다르다고 선언해 주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하였다. 

어떤가. 지금 예배드리는 여러분 각자의 마음이 어떠한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런 평안이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가. 404장 찬송 “바다에 놀이 치는데”의 4절에 보면 “일평생 사는 동안에 괴로운 시련 많으나 주 예수 함께 계시니 평안해”라고 고백한다. 이런 평안을 누리며 사느냔 말이다.

408장 “나 어느 곳에 있든지”의 1절 가사는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 속이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이다.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평안이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평안이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라는 410장 찬송의 4절은 “이 평화를 얻으려고 주 앞으로 나아갈 때 주 예수님 우리에게 이 평화 주시도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그 놀라운 주의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이다. 

이게 어찌 그렇게 간단하게 찾아오는 평안이며 평화인가. 전쟁을 겪고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시력을 잃고 창자가 터져 흐르고 죽음의 위기를 겪을 때에 어찌 이런 평화를 쉽게 말할 수 있겠나. 전쟁에 나간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 왔는데 어찌 쉽게 평화와 평안을 노래 할 수 있겠나.

어떤 큰 교회 안에는 부도를 겪은 이들만 따로 모이는 속회가 있다고 한다. 어느 이가 부도가 나서 2억의 빚을 지고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런 그가 전도를 받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부도 속에 배치 받았다. 첫 속회 모임에 갔더니 어느 속도원이 자기는 74억의 부도를 겪고도 살아남아 있는데 그까짓 2억 정도 가지고 자살 운운하느냐고 꾸짖더란다. 

호주 출신의 팔 다리가 없는 '행복 전도사' 닉 부이치치(Nick Vujicic, 1982-)는 지지난 해에 <무제한 사랑>(Love Without Limits)이란 책을 내었다. 2008년에 만난 카나에 미야하라와 4년 동안 사귄 후에 결혼을 했고 2013년에는 아들 기요스 제임스도 태어났다.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는 그런 몸으로 스케이트 보드도 타고, 1분에 43개 단어씩 타이핑도 직접 하고, 드럼도 연주하고, 요트도 직접 운전하고, 스카이다이빙도 한다. 그는 매년 세계에 날아다니면서 270번 이상의 강연을 하고 400만 명 이상의 세계인을 만나며 살아간다. 

성도가 누리는 평안은 환경과 조건이 완벽하기 때문에 누리는 평안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평안이 아닌가.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성에서 전도하다가 붙잡혀서 매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다. 그 밤에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 밤 새도록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다. 그들을 결박하고 있던 차꼬도 풀렸다. 그들을 밤새도록 지키고 있던 옥졸들이 당황하였다. 간수장이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과 실라는 그 밤중에 전도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어디서 바울과 실라의 마음속에 그런 평안이 찾아 온 것일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속상할 때가 있다. 불안할 때가 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가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에 갇힌 것 같을 때가 있다. 경제적으로, 건강상의 이상으로, 혹은 가족 간의 갈등으로, 세상살이가 엉켜서 해법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날들을 겪을 때가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하고 발 버둥쳐도 헤쳐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수렁에 빠져서 연명하며 살아가는 그런 날들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자의 희망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능력이시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축복의 말을 하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임하는 평안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 시대에 애굽에서 부르짖는 히브리 백성들의 탄식 소리를 들으셨다. 

출애굽기 3잘 7-10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아버지 하나님은 그런 아버지, 그런 하나님이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21)가 아닌가. 예수는 이 땅에 죄와 죽음을 이기심으로 이룩하실 평강, 평안, 평화를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사야를 통한 예언의 말씀이 그 말씀 아닌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시다. 예수를 삶의 구주로 영접한 개인, 가정, 나라, 민족을 다스리시는 평강의 왕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믿음을 겸한 사랑.
그냥 사랑이 아니다. 경험하여  깨닫고 체험하고 확신 가운데 증거하는 바울의 증거는 이것이다. 성도의 사랑은 막연한 사랑, 세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임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요 우리의 신앙 고백에 근거한 “믿음을 겸한 사랑”이다. 성도된 우리들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닉 브이치치는 그의 책 <닉 브이치치의 플라잉>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늘 얻을 수 있습니다. 내게도 즐거운 날이 있는가 하면 슬픈 날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없이 연약해지는 순간, 그 때가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때임을 저는 압니다. 바로 그 때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할 때임을 저는 압니다. 이 땅이 중력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저는 시선을 하나님께 맞춥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날개가 솟아납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에 저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합니다.”라고 자신의 믿음 생활을 고백하였다. 그는 또 “내가 가지지 못한 것보다,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세요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는 말아요, 나는 날마다 새로운 것에 도전 합니다”, “세상엔 완벽한 나무와 꽃이 있나요? 우리는 다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라는 말도 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환경을 사랑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끝없이 겪게 되는 별의 별 일들을 사랑하되 믿음을 겸한 사랑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어떤 환경 어떤 여건 속에 살아갈지라도 주 안에서 잘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친히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If you can'?” said Jesus. "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막9:23)고 교훈해 주셨다. 

예수님의 수많은 치유의 기적 현장들은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겸한 사랑”의 열매들이었다. 예수는 각색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저들을 대하고 저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다. 믿음이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사랑이 있으면 역사가 바뀐다. 그건 자기 자신, 자기 가족, 자기 가정, 교회, 사회생활, 직장 생활, 대인 관계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교훈해 주신 산상 수훈의 교훈 주에 사랑에 대한 이런 교훈을 기억하지 않나.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주님을 믿는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진심으로 믿고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날마다의 그 삶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그 대상이 사람이든 혹은 무슨 일이든 혹은 무슨 취미이든 그 대상에 흠뻑 빠져서 진정으로 그 대상을 사랑하고 그 일을 사랑하고 그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역사는 바뀌게 되어있다. 

지금 볼 수 있는 나의 두 눈이 지금 이 순간부터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지금 들리는 내 귀에 지금 이 순간부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라,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내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장애가 찾아온다고 생각해 보라,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내 힘으로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상상해 보라. 지금 내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 할 수 있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이며 은혜인가. 그러나 그런 신체의 조건 중에서 많은 부분들을 잃고도 씩씩하세 세상을 이기며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신앙의 선배들은 수 없이 많다. 오늘 날 우리 주변에도 여러 가지 장애를 안고도 씩씩하게 세상을 이기며 불행한 기색 하나 없이 살아가는 신앙의 거장들은 얼마든지 있다.

“왜 슬퍼하느냐”라는 복음 성가를 알지 않는가.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 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 있어도 이젠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널 붙들어 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주를 믿는 믿음은 나의 환경, 나의 여건, 나의 모든 것을 절대 긍정으로 보며 살아가가 하는 무한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 생명이 살아 있고 지금 오늘 새로운 하루를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가. 살면 이 세상에 사는 것이고 믿음 안에서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천국의 삶이 이어진다가 생각해 보라. 신앙의 선배들이 불로 태워 죽이는 죽임을 당하는 화형과 굶주린 사자의 먹잇감으로 던져지는 죽음과 그 어떤 고문과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었던 믿음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든지 혹은 주님을 믿는 성도로서 주어진 사명을 다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히브리서 11장의 후반부에 보면 믿음으로 살았던 신앙의 선조들의 모습을 소개한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5-38) 복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총과 구원의 감격과 죄 사함의 은덕을 깨달은 믿음의 성도들은 그 삶이 달랐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그것이 “믿음을 겸한 사랑”이 아닌가. 그 “믿음을 겸한 사랑”의 증거는 24절 말씀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랑으로 증거 되어야만 한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섬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다. 왜일까. 그 대답은 하나뿐이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사랑에는 또 다른 대답이 없다.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왜 그토록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사랑이니까. ‘변함없는 사랑’을 영어 성경에서는 ‘an undying love.’라고 하였다. 성도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변함없는 사랑이란 ‘엔 아프다르시아’(en afdarsia)란 “불멸의, 썩지 아니하는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향한 믿음과 사랑이 제대로 자기 자신 안에 자리 잡기 전에는 우여곡절을 너무나도 많이 겪었던 장본인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날 아침까지도 이어졌다. 결국은 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쳐 버렸다. 그런 그가 나중에 성령 받고 복음의 위대한 전도자가 되고 십자가에 거꾸러 달려 죽기까지 순교자의 길을 가는  초대 교회의 빼어 놓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었다. 그의 편지인 베드로 전서 제 1장의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은 얼마나 힘차고 우렁찬 부활의 메시지를 담고 있나 모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1:3-5) 베드로의 이런 편지 내용을 대하다 보면 과연 그에게 그렇게 나약하게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도망 다니고 숨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을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을 겸한 성도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음도 이기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은 영원히 식지 않는다. 주를 믿는 성도들을 구원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끝이 없다. 

어제 일간 신문에는 “세계 제 2차 대전 때 헤어진 연인 70년 만에 다시 만나”라는 기사 제목과 함께 자세한 기사와 사진이 실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터에서 사랑에 빠졌다 헤어진 연인이 70년 만에 다시 만났다. 10일(현지 시각)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군 공수부대원 노우드 토머스(93)는 1944년 런던 템스 강에서 영국 출신 조이스 모리스(여·88)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투입된 토머스는 종전 직후 급하게 복귀 명령을 받아 모리스에게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미혼이었던 토머스는 모리스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 집을 가정으로 만들어 줘”(make my house a home)라고 청혼했다. 그러나 저들은 다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결국, 둘은 서로 다른 짝을 찾아 각자의 가정을 꾸렸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모리스는 남편과 함께 호주에서 살다가 지난해에 헤어졌다. 토머스는 10여 년 전 미국에서 부인과 사별했다. 1년 전에 혼자가 된 모리스 할머니는 문득 70년 전에 헤어진 연인이었던 토머스를 떠올렸다. 모리스는 지난해 아들에게 인터넷으로 사람을 찾을 수 있는지 물었고, 아들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미국에 토머스가 88세 생일에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해 지역 언론에 보도한 사실을 찾아냈다. 호주의 모리스 할머니의 아들은 인터넷을 통해 미국의 토머스의 아들과 연락하는데 성공했고, 70년 전 연인은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 화상 채팅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연이 전해지자 온라인에서는 이 두 노인을 서로 만나게 해주자는 크라우드 펀딩 캠페인이 진행됐다. 삽시간에 토머스를 호주로 보내줄 만큼의 여행 경비가 모금되었다. 뉴질랜드 항공은 토머스와 아들 스티브, 간병인에게 일등석 항공권을 무상 지원했다. 호주로 날아간 토머스는 70년 만에 모리스를 만나 서로 포옹하며 미리 마련된 호텔에서 2주 동안 함께 지내며 꿈과 같은 시간을 지냈다는 기사였다. 

우리는 이런 정도의 사랑 이야기만 들어도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이천 년 전에 골고다 언덕 위에서 흘리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를 향한 사랑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이며 ‘변함이 없는 사랑’을 요구하는 사랑이다. 나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 사랑은 우리 각 사람의 삶을 온전히 그 분께 쏟아 붓게 하는 사랑이며 영원히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어느 신학교 교수가 쓴 칼럼 집의 제목처럼 “사랑의 중독”인 것이다. 예수의 사랑에 중독되고 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오직 예수, 오직 말씀, 오직 복음,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가득차고 넘쳐흐르게 마련이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라는 복음 성가를 알지 않나.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은혜(恩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 중의 또 하나가 은혜이다. 신앙생활은 은혜 생활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동서양의 선교 현장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살았던 신앙 선조들의 이야기로 넘쳐 난다. 

이 세상의 성도들은 은혜 받을 만한 곳을 찾아다닌다. 교회를 옮겨 다니기도 한다. 은혜 될 만한 목회자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은혜 될 만한 기도원을 찾아 가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은혜를 받고 나면 신앙생활이 달라진다. 말씀의 은혜를 받고 나면 사람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복음이 깨달아지고, 구원이 깨달아지고, 죄 사함이 깨달아지고, 진정한 회개의 체험과 함께 예수 만나는 체험,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을 경험하고 나면 신앙생활은 그 때부터 달라지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도 그만 믿지 않아도 그만 그런 어정쩡한 상태란 없다. 우리 각 사람이 다 마찬가지다.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삶은 분명히 바뀌게 되어 있다.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도 주일 날 일하러 다닌다.” 그럴 수 없다. “은혜를 체험하고 났는데도 세상 낙이 즐겁고 기쁘고 매력이 있다.” 그럴 수는 없다. 사람이 충격만 크게 받아도 삶이 바뀌는 법이다.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중인 도널드 트럼프는 45억 달러의 재산가이다. 우리 돈으로 5조 4000억의 거부이다. 그가 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의 거친 입담이 계속하여 뉴스거리다. 올해 69살인 그는 술이나 담배나 마약을 일체 한 적도 없고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사랑하던 그의 형 프레드 주니어 트럼프가 43살에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술에 중독되는 불행이 얼마나 큰지를 집안에서 가까이 보았던 그는 절대 술과 담배와 마약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정도의 충격으로도 그런 결정을 지켜 가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을 체험하고 나면 은혜 생활이 달라지게 되어 있다. 신앙생활을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누구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예수 체험하고 나면 은혜 생활은 달라진다. 예수 체험하고 나면 예배, 찬송, 기도, 헌신, 봉사, 전도, 선교를 포함한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지고 변화될 수밖에 없다. 복음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LA의 어느 큰 한인 교회 목사가 몽골 선교 길에 나섰다. 낮에는 선교 현장에 뛰어 다니고 밤마다 몽골인들을 초청하여 선교 부흥회를 열었다. 현지인의 통역 설교였다. 그는 설교 중에 “우리가 말을 물가로 이끌고 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물을 마시던지 혹은 마시지 아니 하든지의 결정은 말 스스로 하는 것이다. 오늘 밤 여러분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께서 공급해 주시는 영원한 생수를 마시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강단 앞으로 나오시기 바란다.”고 초청하였다. 원하는 이들은 먼저 손을 들라고 하였다. 그런데 850명의 예배 참석자들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다 손을 든 것이다. 다시 묻고 또 다시 물었다. 저들은 늘 생활 가운데서 말을 목축하고, 양을 목축하던 이들이라서 그 예화가 주는 의미를 생활 속에 너무나도 생생하게 실감하는 목축문화 가운데 살던 이들이지 않나. 그날 밤 그 부흥회 장에 참석했던 850여명의 몽골 주민들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다 강단 앞으로 몰려 나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회개의 체험을 가졌다고 한다. 

그렇다.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은혜가 있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우리들이라면 그 분의 은혜가 이른 비와 같이 늦은 비와 같이 임해야 한다. 헐몬 산의 이슬과 같이 날마다 새벽마다 내 삶에 풍성하게 임해야 한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시133:3)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 각 사람의 날마다의 삶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홍콩의 '팝의 여왕'으로 불리는 ‘비비안 쵸우 웨이만’(Vivian Chow Wai-Man)이 지난 해 성탄 전날인 12월 24일 처음으로 교회 찬양예배에 참석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켰는지에 담고 있는 자신의 신곡을 불렀다. 그녀는 “2010년 침례를 받았는데,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처럼 옛 나는 죽었다. 그리고 물 위로 나오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세례를 받은 후에 나는 거듭해서 시험을 당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기회들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께 더 순종적이 되었다. 나는 성령의 축복 안에서 성장해갔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따라 살게 되었다. 이제 나는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 있고, 다가오는 도전들에 직면해도 만족하며, 빛과 사랑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주시고, 당신을 구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한다."고 간증하였다.

예수 만나면 누구라도 달라진다. 예수 만나면 누구라도 은혜 안에 거하게 된다. 
예수 만나면 예수 만난 은혜 생활을 증거하고 간증하고 전파하게 되어 있다. 

소설 ‘벤허’(Ben Her)의 작가인 미국의 루이스 월레스(Lewis Wallace, 1827–1905)는 젊었을 적에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일평생 감리교인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성경 얘기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벤허’를 쓰기 전에도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까지 가는 얘기를 소설로 쓰기도 했다. 자서전 ‘나는 어떻게 벤허를 썼는가’와 1899년에 발표한 ‘첫 성탄’ (The First Christmas) 서문에서 그는 ‘벤허’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당시 세계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들”(religious and political conditions of the world at the time of the coming)을 그렸다고 썼다. 그는 글을 쓰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a conviction amounting to absolute belief in God and the divinity of Christ)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월레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이를 통해서 ‘벤허’같은 역사적이고 위대한 문학 작품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이 영화화됨으로 얼마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시작된 사순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 가운데 나 자신이 포함되길 기도하며 주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고 증거 하는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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