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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의 뜻(엡1:1-2) 2015.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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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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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10-15 15:12 조회 17,894 댓글 0
 
하나님의 뜻(엡1:1-2)               2015. 10. 11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복음을 전파한 내용은 사도행전 19장에서 다루고 있다. 이 때가 주후 50년경이니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지 20여년이 지난 후이다. 에베소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그 곳에서도 예수 믿는 이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들을 만난 사도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저들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 때 저들은 “요한의 세례니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에 사도 바울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와 세례 요한이 소개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한 그 분이 “곧 예수라”고 소개하고 설명하여 주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 내용에 귀를 기울인 저들 몇몇 에베소에 살던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때에 바울이 저들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안수하였는데 성령이 그 즉시 저들에게 임하여 저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 사도행전 19장 6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들 성령 세례 받은 제자들의 수는 12명 쯤 되었다. 성경은 정확하게 12명이라고 하지 않았다.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고 하였다.

복음을 전할 장소를 찾던 중에 마침 회당이 있어서 사도 바울은 그 곳의 회당에서 삼 개월 동안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고 권면하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를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은 무리들을 선동하면서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를 반대하고 비방하였다. 그 때 사도 바울은 두란노 서원으로 장소를 옮겨서 2년 간 동안 더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후에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 사람들이 다 같이 주의 말씀을 듣는 말씀 부흥이 일어났다. 에베소 지역에 교회의 부흥을 일으키시려고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도 행하게 해 주셨다. 심지어는 사도 바울에게서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하여도 병이 떠나가고 악귀가 떠나가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기서 ‘앞치마’란 사도 바울이 틈틈이 장막을 고치고는 할 때에 앞에 두르던 작업용 앞치마를 말하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세월이 지나갔고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사도 바울은 크게 세 차례 감옥에 갇히는 때가 있었다. 에베소서는 로마의 감옥에 두 번 갇혔던 때 중의 첫 번째 감금 되어 있던 때에 쓴 편지이다. 그 당시 바울은 비록 갇히기는 하였으나 그를 찾아 오는 사람들을 비교적으로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권한이 제한적으로 주어져 있었다. 그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도 바울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도 이 때 감옥에서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그 때 오네시모가 형기를 마치고 주인에게 돌아 갈 때에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빌레몬서’이다. 그리고 빌레몬이 몸담고 있으면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섬기던 교회가 ‘골로새 교회’인데 그 곳에 보낸 편지가 ‘골로새서’이다. 이 때에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고 설립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써서 보낸 편지가 바로 ‘에베소서’인 것이다. 그 때가 AD 61-62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빌립보서를 포함해서 에베소서와 빌레몬서, 골로새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분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에는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성도들을 교회의 유기적인 공동체로 부르셔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로 삼으신 것을 강조하였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 받고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스러운 삶을 성령의 인치심 가운데서 누리며 그 은혜를 찬송하고 그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다.
에베소서는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던 인생들 중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가 되고 성도가 된 점을 분명히 한다. 그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믿음의 사람들로 연합하여 교회의 지체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어떤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교훈한 탁월한 말씀이 바로 에베소서이다.

오늘부터 주일마다 에베소서의 말씀을 묵상 할 것이다. 매 주일마다 연속적으로 잘 듣고 깨닫고 믿어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멸하려 하였고 살기등등했던 핍박자 사울이 사도행전 9장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부르심 앞에 눈이 가리고 삼일 동안 앞을 못 보는 체험 후에 다시 눈을 떠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라는 다메섹의 선지자를 통하여 그를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파하는 ‘이방을 위한 그릇’으로 택하셨다. 그 택하심을 따라 이방을 넘나들며 복음을 전파하였던 사도 된 바울이 에베소에도 교회를 세우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나중에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 복음 전파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총 정리하여 증거 한 편지가 바로 에베소서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핍박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선택도 물론 아니다. 이는 일방적으로 그를 초대 교회의 복음이 이방에 전해지도록 그를 불러 사용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다. 우린 대개 예수의 12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울이 바울로 부르심을 받고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점을 편지마다에서 강조한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다. 에베소서의 시작이 그러하지 않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란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하였다. 고린도 전서 1장 1절에도 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라고 소개하였다. 고린도 후서 1장 1절에서도 마찬가지다. “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하였다. 갈라디아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에서도 이런 표현을 분명히 하였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딤후1:1)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유대 율법주의자 사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열렬한 이방 전도자 사도 바울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하다.
‘사도’(使徒)란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보냄을 받은 자’란 뜻이다. 고대에는 왕이 사신을 이웃 나라에 보낼 때에 왕의 친서를 들려 보냈다. 그런 특별한 임무를 맡은 자가 ‘사도’인 것이다. 성경적으로는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임 받은 자들을 사도라고 하였다. 사도의 조건은,

첫째, 예수께서 친히 임명하신 자들이다. 
마가복음 3장 1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이 나온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4-15)

둘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예수의 곁에서 항상 있었으며 예수의 승천까지를 지켜 본 자들이다. 이는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도를 보충할 때의 장면이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1:21-22)
이리하여 적임자들 중에서 맛디아를 12 사도의 수에 보충하였다. 

셋째, 예수의 부활을 증언할 자들이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1:22)고 하였다. 이는 복음 전파의 핵심 내용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이어야 함을 강조한 본문이다.
사울을 다메섹에서 부르신 주께서는 다메섹의 선지자 아나니아에게 직가라는 거리의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서 만나라고 명령하였다. 그 명령의 내용은 주께서 사울을 사도로 부르셔서 사도 바울 되게 하시는 부르심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 담겨 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실로 사도 바울을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후에 이와 같은 부르심의 내용처럼 이방인과 임금을 포함한 권세자들과 동족들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서의 생을 살아갔다. 그는 고난을 받고 또 받던 이방 전도자로 살다가 순교자가 되었다.

바울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충분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셨다. 이는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어찌하다가 예수 믿고, 어찌하다가 세례도 받았고, 어찌하다가 집사요 권사요 장로요 전도사요 목사로 부르심도 받았고 어찌하다가 예수사랑교회의 교인이 되었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 각 사람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으시다.”고 믿어야 한다.

기독교인에게는 우연이란 없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믿는 것이지 우연이란 없다. 우리가 남자로 태어나거나 여자로 태어난 것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으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면에서 보면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담겨 있다. 물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거나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제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이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에서 스스로 도망가거나 숨 듯한 이의 모습이 면면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치도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그를 향한 택하심과 부르심의 사명을 거역하고 당시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도 도망하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서 죽을 것만 같은 고생을 한 장면처럼 말이다.

사도 바울이 사도된 것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그런 내용이 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고전9:1)는 항변에 담긴 사도 바울의 격양된 표현에 보면 바울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을 하는 이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탄생한 것은 사도 바울을 통한 인치심과 같은 열매이기에 결코 고린도 교회의 성도라면 바울의 사도됨을 무어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말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9:1)

오늘 날 성도들인 우리들도 각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다. 우리가 학교, 직장, 일터, 가정에서 살아가며  공부하고, 경제 활동하고, 살림살이를 하는 그것이 내 사명의 끝이 아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더욱 더 숭고하다. 복음 안에서 자신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복음 전파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고, 사업도 하고, 장사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아 양육하고 친구도 사귀어야 한다. 목적이 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 그 끝이 허망해 지고 마는 것이다.

노아 시대의 번영과 영화가 홍수 심판의 물속에 가라앉았다. 홍수 심판 때에 구원 받은 이들은 노아와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며느리를 포함한 여덟 식구뿐이었다. 누가 질문하였다. “베드로는 한 번 설교로 3000명을 회개 시키고 세례 받게 하였는데 노아는 고작 100년 동안 방주 지으며 하나님의 말씀 전하고도 자기 가족 밖에는 구원 시키지 못하였느냐”고 말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스스로에게 질문하여야 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
성도로 부름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성도로 부르시고 신실한 자로 부르신 뜻이 분명히 있으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성도’란 ‘신성한 자, 봉헌 된 자,  하나님께 바쳐진 자,  구별된 자’란 뜻이다.  이는 모세의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아 성막을 섬기는 구별된 자로 살아가게 하신 것과 같고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거룩히 구별된 성민의 삶을 살기를 기대하신 것과 같은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신33:3)고 하였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 앞으로 가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한 말 중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이 성도이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의 은총을 덧입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 하나님 안에 하나가 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신실하여야 한다. 신실하다는 말은 “신뢰하다, 의지하다”는 뜻으로 ‘믿을 만한 자, 신임 받는 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이어야 한다. 신실한 자이며 성도인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물 세례와 불 세례와 성령 세례를 통해서 신비하게 하나로 연합한 상태를 말한다. 이는 심오한 교훈과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결혼식 때에 양가의 어머니들이 두 개의 양초에 불을 밝힌다. 어떤 결혼식에는 가운데 또 하나의 새로운 초를 준비하였다가 양가의 어머니들이 밝혀 놓은 촛불을 신랑과 신부가 결혼 서약을 한 후에 서로 붙여다가 한 개의 새로운 양초에 불을 밝히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그 의식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 이전 까지는 따로 따로 타들어 가던 각 자의 불빛이 하나로 합쳐진 불빛이 되어 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 나가는 하나의 불빛과 같은 인생으로 결합하여 살아가자는 고백이며 서약이며 선언이 아닌가.

신앙생활도 그런 것이다. 성도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신비한 영적 결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이 표현은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한 표현으로 무려 164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특별히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에서 자주 사용하였다. 에베소서에서만도 35번이나 사용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표현 속에는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반복적인 강조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첫째는, 사죄(赦罪)의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법적 연합이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신비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던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의 접붙임을 통한 구원의 원리와도 같은 것이다. 죄 투성이 상태의 인간이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으므로 죄 없는 하나님의 자녀의 은총을 선물로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처럼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영적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아가는 성도가 누리는 신분의 변화이며 영적 은총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 안에서 성도의 영적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신비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성화(聖化)의 근거로서의 그리스도와 성도의 영적 연합이다.
인간은 오직 성령의 힘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성도의 영적 연합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아가던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주 예수와 하나가 되고 성령님과 하나가 되는 이 영적 연합은 법적인 연합뿐만 아니라 실존적인 연합이며 신비한 연합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연합한 자는 그 연합한 자의 온갖 귀한 것과 좋은 것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남의 집에 가면 방문한 남의 집의 냉장고 문을 함부로 열수 있나. 그러나 내 집이라면 하루에 열 번이든 백번이든 냉장고와 냉동실의 음식들을 내 마음대로 꺼내서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다. 온갖 신선한 야채와 생선과 반찬과 과일과 아이스크림과 초코렛을 비롯한 모든 것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성도,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의 모습이란 이러하여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적으로 온갖 하나님의 좋은 것들을 공급 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특권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를 명확하게 잘 설명한 사도 바울의 다른 편지가 로마서 8장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8:9-10) 이처럼 사도 바울은 반복하여 ‘그리스 예수 안에’라는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지 않나.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들어와 계신다면 나의 영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자인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가 그러하지 않나.
하나님은 농부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 줄기이시고 성도는 포도나무 가지이다. 포도나무 줄기에 꼭 붙어 있으면 나라는 포도나무 가지에 포도송이가 풍성하게 맺게끔 되어 있다. 그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그렇다. 신앙생활, 성도의 삶, 신실한 자로서의 성도의 삶이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생활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고 하셨다.썩은 가지, 잘려 나간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원 줄기이신 예수께 붙어 있어야 한다. 그 안에 거해야 한다. 그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 그래야 언제나 풍성한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기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찬송 370장 1절)

그러나 사탄 마귀는 자꾸만 성도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한다. 이것이 사탄의 궤계이며 마귀의 간교함이다.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기 전에 무슨 걱정 근심이 있었나. 그러나 아버지의 유산 받아 가지고 남의 나라에 가서 떵떵 거리고 허랑방탕하고 주색잡기를 즐기며 폼 잡고 살았지만 빈 털털이가 되고 나니 누가 그를 알아주나. 불쌍하고 초라해진 둘째 아들이 제 나라로 와서 제 아버지가 계신 마을 입구에 나타났을 때에 그에게 달려가서 그을 반긴 것은 그의 아버지가 아닌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니 무슨 일이 일어났나.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 주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인다. 어제 밤 까지도 누워 잘 자리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이 남의 나라의 돼지우리에 누워 지내던 거지같던 둘째 아들이 갑자기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 안에서 온간 사랑의 공급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니까 그런 환대를 받았다. 그런 은혜가 임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씀은 그런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의 신실한 삶을 제대로만 살아 보라.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지고 누리는 영적 축복이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은총이며 축복이 아닌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1서2:15-17)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평강.
성도로 부르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로 부르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은혜와 평강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인사법은 헬라 사람들의 인사법이다. 그리고 평강을 비는 것은 유대인의 인사법이다. 당시 에베소 교회 안에는 헬라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뒤 섞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저들에게 인사하는 사도 바울의 인사법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과 의미는 얼마나 심오한가. 물론 여기서 바울 사도가 사용한 ‘은혜’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값없이 거저 주시는 십자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절절히 넘쳐흐르도록 깨달아 알고 누리며 선포하며 살았던 은혜의 사도이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자기 같은 자를 누가 택정하시고 부르셔서 사도 삼으셨겠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은혜’란 ‘카리스’는 ‘호의, 감사, 기쁨, 은총, 총애’ 그런 뜻이다. 그리고 ‘평강’이란 ‘에이레네’는 ‘ 합하다, 연결하다, 평화하다, 일치하다, 화목하다, 화평하다’는 뜻이다. 히브리 말의 ‘샬롬’이다. 이는 전쟁과 반대되는 정도의 평강이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영적 평화를 말한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평화와 화목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엡4:3) 그런 영적 만족과 충만의 상태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요즘도 여전히 마약 사건이 계속하여 언론에 공개되지 않나. 그런데 그 마약이란 것이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하지만 일단 경험하고 나면 계속하여 다시 경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잡아끄는 힘이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그 어느 누구든지 그런 환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독 상태에서 헤매고 마는 것이다.

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평강”을 사모하고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지 대답이 나오지 않는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평강을 의지하다가 잘못된 이들이 있는가. 설령 그렇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났고 하나님의 평강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공급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은혜와 평강은 온전하고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살아가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면 잘 못될 인생이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많으면 좋겠나. 권력인가, 재물인가, 돈인가, 명예인가, 다이아몬드와 진주와 금과 은을 비롯한 각종 보석인가, 인기인가, 젊음인가, 아들딸인가, 남편인가, 아내인가, 부모인가,  좋은 집인가, 좋은 자동차인가... 그것들 중에서 영원한 것이 있는가. 완전한 만족과 은혜와 평강을 주는 것들이 있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돈으로 좋은 집을 살 수 있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생활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침대를 살 수 있다. 그러나 평안한 잠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값비싼 시계를 살 수 있다. 하지만 시간과 세월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돈으로 책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지위를 살 수 있다. 하지만 존경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약을 살 수 있다. 하지만 건강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돈으로 피를 살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헤매다가 정작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수 없는 훨씬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며 살고 있지는 아니한가.

<돈 주고 살 수 없는 7가지 선물>을 쓴 히라노히데노리는 그의 책에서 그 첫 내용으로 '따뜻하고 소중한 마음'을 주제로 다룬다. 그렇다. 따뜻한 마음 하나면 족하다. 이는 천 냥 만 냥으로 대신 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 

요즘처럼 별의별 끔찍한 사고와 사건과 희한한 질병과 각종 재난이 끊임이 없는 세상에서 하루하루 주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과 분부하신 사명을 따라서 이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과 그 은혜, 그리고 평강의 복음을 누리고 증거하고 전파하는데 매진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은혜와 평강의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고 또 갇히고, 풀려났으나 다시 갇히고 또 갇히는 크게 세 차례의 옥중 경험을 하면서도 늘 그의 마음속에는 ‘은혜와 평강’을 빼앗기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다운 담대함과 평정심이 있었다. 특히 평강이란 하나님과 나, 혹은 나와 주변의 성도들 간에 ‘연합하고 일치하여 서로가 기도 가운데 연결된 평화로운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스스로 질문해 보라. 나 혼자 평강하다고 평강한 것이 결코 아니다. ‘에이레네’, ‘샬롬’이란 이 문안은 성도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은혜와 평강의 관계를 형성하고 이루며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구원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과 화평하고 화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한 삶을 살게 된 성도라면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평강의 상태를 균형 있고 질서 있게 서로 나누며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와 평강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성숙시켜 나가는 성도들의 신실한 연합, 거룩한 교회의 구성원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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