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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지 아니하는 감사기도(엡1:15-23) 2015.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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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8-03 04:13 조회 16,327 댓글 0
 
그치지 아니하는 감사기도(엡1:15-23)         2015. 8. 2



<힐링 코드>(Healing Code)라는 책의 저자는 미국의 알렉산더 로이드 박사와 벤 죤슨 박사이다. 알렉산더 로이드는 목사이며 자연의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의사이다. 심리상담소도 운영했었고 지금은 자연치유를 위하여 힐링코드 사를 설립하고 미국 50개주와 세계 90개 나라를 드나들면서 자연치유 사역을 전문하는 의사이다. 벤 죤슨은 대체 의학을 연구하고 암의 원인을 연구하고 암 환자를 치유하는 치료법 개발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하는 의사이다. 

알렉산더 로이드 박사는 결혼 6개월 만에 아내가 우울증에 걸렸다. 그 후로 12년 동안 부부간에 서로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큰 고통을 이겨 내며 살아가야 했다. 심리상담, 비타민 요법, 무기질 요법, 허브요법, 보완대체정서이완요법 등 해 볼 만한 치료법은 다 동원해 보았다. 돈도 엄청나게 들었다. 그러나 그의 각종 처방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아무 효험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항상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렸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와 양자물리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어느 날 밤에는 아내가 잠을 자다가 말고 비명을 질렀다. 놀라서 불을 켜 보니 아내 트레이시가 온몸과 잠옷과 침대에 피 투성이를 한 채 울고 앉아 있었다. 아내가 잠결에 손톱으로 자기의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다리를 긁어 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항우울제 치료를 받고 있던 당시의 사건이었다. 911 긴급요청 전화를 치켜드는 순간에 남편의 마음에 만감이 교차하고 만약에 아내가 잘못되면 여섯 살 짜리 아들은 혼자서 어떻게 키우나 하는 불안이 엄습해 왔다. 아내는 여러 차례 자살 시도도 했다. 결혼 삼 년 만에 파경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남편 알렉산더 로이드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더 좋은 무엇이 분명히 있을꺼야”하는 믿음으로 아내를 돌보며 살아갔다. 어느 날 알렉산더 로이드 박사가 로스앤젤레스로 출장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비행장으로 가는 중에 다급한 목소리의 아내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죽을 것만 같으니 도와달라는 전화 요청이었다. 

로이드 박사는 비행기에 앉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저들 내외로써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간구한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영감을 심어 주셨다. 그는 책에서 “하나님은 나의 머리와 가슴에 우리가 현재 힐링코드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을 알려 주셨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는 영적인 문제로 인하여 초래된 잘못된 믿음을 치유하는 몸 안의 물리적인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아내에게 어떤 방법으로 도움을 주면 되겠다는 마음의 생각과 감동들을 2시간이 넘도록 부지런히 노트에 메모하였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감동이었다. 집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기도하던 중에 받은 영감을 따라 40분간 아내에게 따라 하도록 하였더니 급속한 치료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아내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12년 만에 우울증의 고통 속에서 벗어난 부부는 자신들이 깨우친 방법대로 치유세미나를 열었다.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겪던 수 천 명의 환자들에게서 치유의 결과가 간증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환자 중에 벤 죤슨이란 외과 의사가 있었다. 그는 루게릭병에 걸려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벤 존슨은 자신의 의학 상식으로 루게릭병이 치유불능의 병인 줄로 여겨서 치유를 포기하고 그냥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로이드 박사 부부의 힐링코드 세미나의 좋은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는 힐링 코드 치유세미나에 참가하였다. 그 세미나에서 그는 완치 되었다. 그 후로 벤 존슨은 알렉산더 로이드의 치유 사역에 합류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로이드 박사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바탕을 둔 심리학 지식과 벤 죤슨 박사의 외과 의사로서의 지식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바탕을 둔 영적인 치유와 결합되어 그의 힐링 사역은 점점 왕성해져 가고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콧등, 후골, 턱, 양편 관자놀이 부위에 양손의 다섯 손가락을 모아서 5-6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머물게 하고 1-2분간씩 집중하는 방법인데 그 효험이 크다는 연구 발표이다. 알렉산더 로이드 박사는 

“이와 같은 간단한 동작의 반복으로 20분 만에 질병과 증상의 800%이상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스트레스가 사라지게 된다.”

고 임상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캘리포니아 하트모스 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트레스가 해결되면 유전자도 치유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그들의 연구에 의하면 “몸 안에 있는 강력한 치유 자원이 손상된 DNA까지도 치유된다”고 한다. 세포 생물학자인 스탠포드 대학교의 부르스 립튼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적어도 질병에 관련된 증상의 95%는 스트레스에 기인한다”고 한다. 하버드 의대에서는 “질병은 단지 스트레스가 표현된 것이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미 연방정부 질병관리센터에서는 “모든 질병과 증상의 90% 이상은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다.”고 발표할 정도이다. 사람들은 “맵고 짠 음식을 피해야 한다.”, “날마다 일정하게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은 인정하면서 “스트레스를 줄이며 살아야 한다.” 혹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등의 말은 별로 중요하게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미 3,000년 전에 솔로몬은 성경에서 교훈해 주었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고 하였다.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
이와 같은 성경의 교훈들이 얼마나 우리의 심신의 건강에 유익하고 신앙생활에 소중한 교훈인가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까지도 비중 있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뒤에 이어지는 교훈의 말씀에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강조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3서 2)라고 편지하였다. 제가 첫 삼일 새벽, 성도들의 이마에 기름을 바르고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할 때에 소리 내서 기도하지는 않지만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사랑하는 이의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하고 기도한다. 

에베소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주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기억하며 감사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에 대하여 소문으로 듣고 그와 같은 믿음과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는 저들로 인하여 그치지 아니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고 하였다. 

‘믿음과 사랑과 감사’는 사도 바울의 기도 가운데 배어 있는 세 기둥과 같다. 에베소서는 언제 대하여도 새롭고, 언제 대하여도 은혜롭고, 언제 대하여도 신선하다. 길지 않는 편지이지만 에베소서를 읽다가 보면 사도 바울을 만나는 것과 같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뵙는 것과 같은 영적 충만함을 체험하게 된다. 바울은 고난을 많이 겪은 사도였다. 그러나 반면에 그에게는 곳곳마다 마음에 가득한 감사의 기도를 드릴만한 믿음직스러운 성도들이 있었다.


주 예수 안에서의 믿음으로 인한 감사기도.
성도란 에베소서 1장 13절의 말씀처럼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印)치심을 받은 무리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들은 모이면 찬송하고, 모이면 기도하고, 모이면 예배드리고, 모이면 전도하고, 모이면 섬기고, 모이면 돌보고, 모이면 간증하고, 모이면 나누고, 모이면 베풀고, 모이면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찬송하리로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 6, 12, 14)고 하였다. 사도 바울 자신이 감사가 충만하여 주께 찬송 드리고 있음을 증거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을 예정하여 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이과 같은 말씀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 15절과 16절을 읽어보자.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5절의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라고 말씀하는 주 예수 안에서의 성도의 믿음이 무엇인가. 성도란 에베소서 1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그와 같은 성도들의 믿음을 인하여 감사기도를 드린다는 것이다. 

믿음은 개인적이다. 부부라도 개인적이고 부모 자녀라도 개인적이다. 최근까지 새벽마다 묵상했고, 개인적으로 일정한 분량씩 묵상해 온 열왕기 상하서의 교훈이 그러하지 않나. 

열왕기 하 22장 이하에는 요시야(BC 632-609, 재위 640-609) 임금에 대한 기사가 길게 나온다. 요시아는 20명의 남 유다의 왕들 가운데 16번째 왕이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였던 히스기야 왕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시야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은 자그마치 55년 동안 왕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 아버지 왕의 신앙을 잇지를 못하고 우상 숭배만 일삼았다. 증조부 히스기야 때에 없애 버렸던 산당들을 다 다시 세웠다. 우상인 바알의 단,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해와 달과 별들을 섬겼다.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일월성신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다. 왕자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다. 점을 쳤다. 신접한 자와 박수의 말을 굳게 믿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로를 일으켰다.”(왕하21:6) 그런 악을 55년 왕으로 있는 동안에 계속하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길이길이 참으셨다. 안타까운 것은 므낫세의 아들이며 요시야의 아버지 왕인 아몬 왕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했다. 그런 아몬 왕은 왕이 된지 2년 만에 신복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런 격동기에 8살에 왕위에 오른 왕이 요시야이다. 그런 어린 나이에 뭘 알았겠나. 그러나 요시야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왕으로 성장해서 31년 동안 자신의 판단 능력과 국가 경영능력을 가지고 나라 살림을 잘 하고 하나님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놀랍다. 성경을 자세히 관찰하고 묵상해 보면 그 교훈이 도전이 된다.  열왕기하 22장 2절에 보면 요시야 왕을 극찬하는 말씀이 나온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남 유다의 20명의 왕들 중에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라는 칭찬을 받은 왕은 8명뿐이다.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야 왕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칭찬이 더욱 존귀한 칭찬이다.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는 칭찬 말이다. 8명의 칭찬 받은 왕들 중에서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라는 최고의 칭찬을 더 받은 왕들은 세 명뿐이다.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왕이 그 주인공들이다. 저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는 칭찬을 받은 주인공들이다. 

믿음은 이처럼 지극히 개인적이다. 부부라도 그렇고 형제자매라도 그렇다. 부모 자녀라도 그렇다. 기독교 교육이 중요하지만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은혜를 체험하고 복음에 붙들리고 신앙으로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자기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응답하고 믿음을 지켜 나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오늘, 지금, 이 시간 나의 믿음을 점검하고 이 믿음이 굳건한 믿음으로 이어지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게 이만한 믿음 있음을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요시야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았다.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나 아버지 아몬 왕때에 엉망을 만들어 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였다. 발견한 율법책의 내용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율법 신앙을 회복하고 자신이 철저히 회개하며 살았다. 서기관 사반이 읽어 내려가는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왕 요시야는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다.(왕하22:11) 왕의 옷이 무엇인가. 왕의 그 값지고 화려하고 아름답고 존귀하고 왕의 자존심과 같은 멋있는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다. 오늘 날 우리는 무엇을 찢으며 회개하여야 할까. 

하나님은 당시의 여 선지자 훌다를 통해서 만족함을 요시야 왕에게 전하게 하셨다. “네가 율법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 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고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왕하22:19)

지금 나 자신이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믿음을  주님 앞에서 제대로 된 믿음으로 불 붙여 나가자. 그리고 그 믿음을 가족과 주변에 번져 가게 하자. 그리고 그 믿음을 인하여 사도 바울처럼 감사하며 감사 기도를 드리며 살자.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저들의 믿음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은 당시에 에베소교회에 믿음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내용이다. 우리 가정,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 시대에 믿음의 부흥기를 맞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그 믿음 없음을 안타깝게 요시야 임금이 옷을 찢으며 회개하듯 회개하고 믿음을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소망하자.

19절에 보면,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실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지 않았나. 그 “믿는 우리”라는 표현이 얼마나 굉장한 표현이고 은혜로운 표현인가.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인한 감사기도.
주 예수 안에서의 믿음이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를 잇는 수직적인 관계라면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은 서로 간에, 이웃 간에 수평적으로 나누는 사랑을 말씀한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가. 믿음이 있노라하면서 가난한 이웃, 병든 이웃, 옥에 갇힌 이웃, 소외된 이웃, 배고파하고 목 말라하는 이웃의 요구를 외면하며 살아간다면 그 믿음을 거짓된 믿음이며 위선적인 믿음이 아니겠는가.

저희 교회가 역사가 짧고 교회 내부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선교하고 구제하고 나라 안과 밖에 누군가는 돌보고 섬기는 일에 사역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 아닌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속회를 중심으로 서로 주변에 누군가 기도와 사랑이 필요하고 구체적인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그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외면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그런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청년 실업이 심하고 어느 세대이든 경제 활동을 해서 일정한 소득을 확보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은 무한 경쟁 사회 속에 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고 자신을 돌아보면 감사한 생각이 들지 않나.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라고 편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심으로 기도해 보면 누구나가 감사한 생각과 감사한 기억과 감사한 내용들이 떠오르게 되어 있다. 

미국의 그 유명한 전도자요 설교자였던 무디가 어느 탄광촌에서 설교하는데 한 광부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이 거져 주시는 은혜라는데 믿어지질 않는다”고 반문해 왔다. 그 때에 무디가 묻기를 “갱도에 일하러 내려 갈 때에 얼마나 깊이 내려 가는가”하고 묻자 “한 500미터 쯤 땅 속으로 내려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 깊은 곳을 어떻게 내려가고 어떻게 올라오느냐”고 묻자 “그거야 회사에서 설치한 승강기를 타고 금방 내려가고 금방 올라온다.”고 대답하였다. 그 때에 무디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사랑과 구원에 대한 원리이다.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승강기를 통해서 그 깊은 땅 속에 쉽게 내려가고 쉽게 올라 올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믿고 그 구원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 진리가 바로 그런 원리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주변을 돌아보라. 가만히 생각해 보라, 자세히 기억하며 기도해 보라, 모든 것이 주변 사람들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부모님의 사랑이요 성도의 사랑이요 가족의 사랑이요 민족적인 사랑이요 선조들의 피 흘리고 땀 흘리고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대가요 국가적인 혜택과 사랑이 아닌 것이 단 한 가지라도 있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런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사랑하며 살자, 사랑 받을 만하게 살자, 사랑을 베풀며 사랑으로 돌보며 사랑으로 섬기며 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안에서 믿음의 사람 답게 살자. 에베소서 1장 6절의 교훈이 깨달아지지 않나.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마음의 눈이 밝혀지기를 구하는 감사기도.
사람이 신체적인 장애 중에 볼 수 없는 시각 장애가 얼마나 심각한가. 어제도 연신내 역 지하도에서 전도하는데 앞을 못 보는 건장한 남편의 팔짱을 끼고 아내가 함께 걸어가는데 그 아내가 전도지를 받아 들었다. 단 하루라도 볼 수 있다는 이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이며 축복인가. 그처럼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도하고 있다. 18절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렇다. 마음의 눈이 밝혀져야 한다. 마음의 눈이 밝혀지면 가족이 새롭게 보이고 가정이 새롭게 보이고 자기 자신이 새롭게 보이고 교회나 나라나 세상이 일일이 다 새롭게 보이게 되어 있다. 육신의 눈이 어두우면 육체의 삶이 답답해 지듯이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혀 져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17절의 영광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여야 한다.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혀지면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일일이 그런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해서 마음의 눈이 환하게 밝혀지기를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세계를 깨달아 알고 나면 20절과 21절에서 말씀하신 역사적인 기록들이 생생한 현실이 된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이시고 장사지낸바 되셨으나 죽임을 당하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힌바 되셨다. 스스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이 아니다. 20절 끝에 보라.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신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눈이 밝혀 으로 깨달아 지고 믿어지는 것이 은혜요 축복이 아닌가.

이런 편지를 쓰던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 마지막 부분에서 교회에 대하여 언급한다. 22절과 23절에서 ‘교회’를 말씀한다.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신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교회인 성도 안에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 영원히 충만한 상태가 교회이다. 이 시대 교회의 영광을 보는 마음의 눈이 활짝 밝혀지는 은혜 충만하고 말씀 충만하고 성령 충만한 성도다운 성도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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