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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 안에 거하라(요1서 2:18-29) 2015.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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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4-19 21:33 조회 18,971 댓글 0
 
주 안에 거하라(요1서 2:18-29)              2015. 4. 19

 
27절의 ‘주 안에 거하라’,  28절의 ‘그의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요한 1서의 핵심 구절이다. ‘신앙 생활한다.’는 말은 요한 복음 15장의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관계처럼 결국 하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고 성령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의 연속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란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예수님과 사귐이 있고 성령님과 지속적으로 깊이 있게 사귐을 가지며 서로 형제 자매간에도 성도다운 사귐을 계속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과 사귐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는 자연스럽게 죄를 멀리하게 되고, 주님을 닮아 살게 되는 것이다. 요한 1서 2장 8절에 보면,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권면하였다. 그렇다. 예수 안에 살고, 예수 안에 거하는 성도라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하는 기준과 판단 가운데서 매사를 행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이면 하나님, 세상이면 세상이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두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난 하나님도 좋고 세상도 좋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직 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나.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니 혹 이를 미원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3)고 말씀하셨다. 이를 누가복음 16장 13절에서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요한 1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성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며, 어떻게 세상을 대하며 살아가야 할까를 자세하게 교훈한 편지의 말씀이다. 본문 27절에, ‘주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어둠에 거하지 말고 빛 가운데 거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주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거짓 가운데 거하지 않고 진리 안에 거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주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미움 가운데 머물지 않고 사랑 안에 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 거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죄를 자백하고, 죄를 용서 받은 자들이다. 주 안에 거하는 성도들은 예수님이 우리들의 ‘화목제물’(요1서 2:2)이심을 알고 믿고 따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이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을 인격적인 관계의 주님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그 분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우리가 눈으로 그 분을 직접 보았고 자세히 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을 만졌다.”고 설명한다. 요한 사도가 쓴 복음서인 요한복음 13장 23절에 보면,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고 하였다.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누울 정도로 주님과 친구처럼 친밀한 관계였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는 제자인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귐과 교제의 삶을 살아 왔었고 지금도 여전히 주님 안에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1서 1장 3, 6, 7절에 보면 ‘사귐’이 있다고 하였다. 이 ‘사귐’이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1서 1:3)고 하였다. ‘사귐’이란 표현의 의미를 알지 않나. 우리는 누가 누구와 사귄다고 말할 때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잘 알지 않나. 가령 청춘 남녀가 서로 사이에 이 사람을 사귀면서 동시에 저 사람을 사귄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서로를 사귀는 것이 아니다. 사귀는 것이 못된다. 사귄다는 것은 서로 간에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개인적이고 특별한 관계의 시작이며 관계의 지속이며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주 안에서 살아가고, 주 안에 거한다는 의미는 예수님과의 사귐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이다. 이는 사도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나 오늘 날 우리들과 예수님의 관계나 다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그런 인격적인 사귐의 관계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본문 말씀은 주 안에 거하는 성도인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
 

마지막 때를 분별하는 자의 지혜.
세상 사람들의 한결 같은 특징은 이 세상을 마지막 때라고 여기지 않는 다는 점이다. 마치도 이 세상에서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살아간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은 대개 이 세상이 영원한 자기들의 살 곳인 양 여기며 살아간다. 사도 요한이 여기서 말씀하는 ‘지금은 마지막 때라’는 의미는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초림의 때부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의 시간 즉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는 믿음과 기대를 갖고 살았다. 요한 사도가 쓴 계시록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인가. 요한 계시록 22장 20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셨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고 인사하는 것으로 요한 계시록의 말씀이 끝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마라나타!’ 즉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 인사를 드리며 주님을 기다리는 나날을 살았다. 그러면 2천 년 전에도 그런 인사를 나누었고 2천년이 지난 오늘 날도 그런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주님을 기다라는 인간들에게 어떤 현상이 생길까. “곧 오신다던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아니하시니 ‘오시긴 뭘 오신다는 말인가.’ 하고 세상 낙을 즐기며 사는 데로 빠져 들지 않겠나.” 그렇다. 이미 당시에 그런 현상이 심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지 주의자’들의 횡포를 비롯하여 ‘내가 재림 예수다’ 하고 등장하는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여기저기서 심각하였다. 그러한 때에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 곁에서 늘 말씀을 듣고 대하며 지냈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 더 이상 가만히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쓰게 된 편지가 바로 요한의 서신서 이며 그 중의 가장 먼저 쓴 서신이 요한 1서인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소개된 예수님의 3편의 천국 비유 중에 신랑을 기다리는 10명의 신부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차이는 이것이었다. 미련한 처녀는 등을 가졌지만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만약의 경우 신랑이 혹시라도 늦게 도착할 경우를 대비하여 충분한 기름을 예비한 것이다. 신랑이 더디 오자 다 같이 졸며 잤다. 그러던 중에 한 밤 중에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하고 큰 소리가 났다. 그 때에 열명의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등불이 꺼져 가고 있었다.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기름을 나눠 쓸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었다. 만약에 서로 나눠 쓰는 날에는 서로 모자랄 판이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들이 제안하였다.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의 쓸 것을 사라.” 그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신랑은 기름과 등불과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던 다섯 처녀들과 함께 혼인 잔치 자리에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 거기 마태복음 25장 10절에 “문은 닫힌지라”는 말씀이 매우 중요한 비유의 말씀이다. 그 후에야 기름을 사 가지고 뒤 늦게 도착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하고 닫힌 문을 두드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문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나왔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교훈으로 한 말씀을 더 해 주셨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이 날과 때를 분별하며 살아가는 생활이다. 아름다운 계절 4월도 벌써 하순에 접어들고 있다. 날과 때는 이렇게 휙휙 지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경험하는 대로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 아닌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나중에 국회의원도 지낸 가수 최희준 씨는 <하숙생>이란 노래에서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 하였지 않나. 맞다. 인생이 나그네 길이다.
김지평 작사에 이진관이 곡을 붙이고 노래 부른 유행가 중에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도 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 걸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친구야 친구야 우린 모두 나그넨 걸 그리운 가슴끼리 모닥불을 지피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 해⌟
 
슈베르트의 교향곡 중에 <미완성 교향곡>이 있다. 그는 1악장과 2악장만 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 곡은 참으로 선율이 아름답고 그 어떤 교향곡 이상으로 완성곡 같은 감동을 준다. 브라암스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평하기를 “양식은 미완성이지만 내용은 결코 미완성이 아니다. 일찍이 이렇게 온화하고 사랑스럽고 매력이 가는 교향곡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사람이 아무리 이 세상을 성실하게 살고, 열심히 살고, 부지런히 눈 코 뜰 새 없이 살아도 역시 인생은 미완성을 끝나게 되고 만다. 그러나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았던 인생들 가운데 그 주어진 생의 목적과 사명을 온전히 다 완성하고 그 생을 마친 주인공이 있으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다. 요한복음 17장 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기도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은 주어진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대업을 온전히 다 이루고 죽으셨다고 삼일 만에 그를 뉘었던 무덤에서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이시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의 인생이든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던 진시황(秦始皇, BC 259-210)도 49살에 죽었다. 6,300킬로미터의 성곽인 만리장성을 쌓아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땅 끝까지 점령해 가려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323)도 33살에 죽었다. 에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BC 69-30)도 39살 밖에는 더 살지 못했다.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도 36살에 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이 세상의 그 모든 인생들에게 마지막 때가 반드시 다가온다. 아무리 젊었어도,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워도 마지막 때가 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권력이 뛰어나고,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해도 다 마지막이 있다.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간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와 개인의 마지막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본문 18절에 ‘마지막 때’라는 말씀이 두 차례 반복되었다. 요한 사도는 마지막 때의 특징을 많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고 하였다.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나니’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영적으로 혼란하고 혼미한 시대를 말하지 않나. 세상은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단순하다. 우리 인간은 빛과 어두움, 참과 거짓,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사랑과 미움, 소망과 절망, 믿음과 의심, 보복과 용서 등의 두 가지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냐 사탄이냐, 그리스도냐 아니면 적그리스도냐”가 질문의 대답이다.
 
그러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지혜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
2003년 2월 18일 아침 9시 53분에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기차 안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화재 사고로 양 편의 기차 6량씩, 12량이 전부 불타고 뼈대만 남았다. 순식간에 192명이 지하철 안에서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죽었다. 151명이 심한 화상과 중상을 입었다. 이 화재의 원인은 김대한이란 이름의 56살 된 우울증 환자가 불을 놓은 방화사고였다. 김대한은 뇌졸중으로 오른쪽 팔다리를 제대로 잘 못 사용하는 장애를 입었고 2년 후에 그런 사고를 저지른 것이다. 그 사고 현장에서 죽어간 이들이 죽어 가면서 남긴 핸드폰 문자에 보면 가장 많은 것이 “사랑한다. 보고 싶다. 기도해 달라. 용서해 달라. 더 이상 못 참겠다. 숨을 못 쉬겠다. 나 지금 죽어 가고 있다”와 같은 내용들이었다.
 
이 세상은 어떤 모양으로든 마지막 때가 있다. 그것이 질병으로 인한 마지막 때이든, 사고로 인한 마지막 때이든 아니면 자연 생명수한을 온전히 다 살고 이 세상을 작별하는 순간이든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에게나 반드시 마지막 순간이 다가 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이 마지막 때를 분별하는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 때를 분별하여 아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듣고 깨달아 알고 믿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는 곧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이며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하는 자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믿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들이다.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들은 모든 것을 성령 안에게 깨달아 아는 자들이다. 기름 부으심이란 성령의 충만을 말씀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20절과 27절에서 ‘기름 부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각 사람은 언제나 항상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가득하길 소원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 가족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기름 부으심을 덧입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 받는다는 말과 기름 부으심이란 말은 같은 뜻이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임재, 성령의 충만을 기도한 내용이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 가셔서 저들과 함께 둘러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의 같은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인이 향유 담은 옥합을 갖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다가것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이 때에 예수께서는  곁에 앉아 있던 시몬 베드로에게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물으셨다. “채주에게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는데 두 사람 모두 다 탕감하여 주었다. 그러면 두 사람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배드로는 쉽게 대답하였다. “많이 탕감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면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을 이어 가셨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4-47)
 
그리고 그 곁의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던 자들이 속으로 말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한 마디 말씀을 더 해 주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
 
이 때 이 여인이 가져 왔던 그 향유는 매우 값지고 귀한 것이었다. 나사로의 누이 동생 마리아도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린 적이 있다. 그것은 순전한 나드 향이었다. 당시의 나드 향은 북부 인도에서 비밀스럽게 제조되던 당시 최고의 향유였다. 예수님은 그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드린 일을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사건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장 값지고 귀한 향유를 부어 드렸듯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인 믿음의 사람인 성도들에게 성령의 기름 부음을 충만하게 덧입혀 주시길 원하신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을 칭찬하던 솔로몬의 아가서의 시작은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라고 노래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성령을 기름 붓듯이 부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믿음을 단장하시되 마치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르 왕에게 나아가는 처녀들의 모습과 같에 해 주시길 원하신다. 에스더 2장 12절에 보면, 아하수에르 왕 때에 처녀들이 왕 앞에 나아가려면 여섯 달은 몰약 기름을 쓰고, 남은 여섯 달은 각종 향품을 써서 몸을 단장하였다고 하였다. 그 몰약이란 것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서 베들레헴 말구유에 엎드려 경배할 때에 드렸던 바로 그 예물이다.
 
기름 부음이란 그런 것이다. 출애굽기 30장 23절 이하에 보면 관유라는 거룩한 기름을 만들어서 제사장을 구별할 때에 사용하였다. 이는 나중에 왕을 구별할 때에도 쓰였다. 그러나 사실 선지자를 구별 할 때에는 의미는 그러하나 기름 부음 대신에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선지자들에게 임한 것을 본다. 엘리야가 그러하였고 엘리사가 그러하였다. 엘리사는 엘리야 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기를 원하였고 실제 하나님은 그런 성령의 충만함을 엘리사에게 기름 붓듯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그리스도란 말씀의 뜻이 바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충만한 기름 부음을 받은 분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으로 가득하셨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바 있지만 따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바가 없다. 이는 12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을 기름부음 받듯 하셨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그 요단강에서 하늘 문이 열렸고 하늘에서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예수님께 충만하게 임하였다.
사도 요한 당시에 여기저기서 자기가 그리스도라 하면서 소위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였을 때에 그는 이 편지 말씀을 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27절의 “기름 부음”을 받은 성도들은 그 기름부음 자체로 성령님 안에서 참되고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가르치심을 받아 주 안에 거하는 자들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고라 자손의 시편인 45편 8절에 보면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모든 향기가 있으며”라고 하였다. 왕에게서 이처럼 각종 값비싸고 귀한 향유가 진동하였듯이 예수님은 이 땅에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오셔서 가시는 곳에서 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넉넉하신 사랑의 향기를 발하시던 기름부음 받은 자의 그 모습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충만하게 받아서 그 기름 부음과 향기가 가득한 삶을 가꾸어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고, 빛으로 어둠을 이기고, 소망으로 절망을 이기고, 믿음으로 의심을 이기고, 정의로 불의를 이기고, 선으로 악을 이기고, 진리로 거짓을 이기는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넉넉한 삶을 살아가야 만 한다.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소년 시절에 왕이 되리라는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충만함으로 블레셋 군대의 적장인 골리앗과 싸워 이기지 않았나. 다윗은 그에게 기름 부어 주신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적장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때려 눕혔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증거이다. 사사기 14장 6절에도 보면 사사 삼손은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을 때에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다루었다.
 
다시 요한 1서 2장 27절의 본문을 보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였다. 라인하르트 본케의 책, <강력한 성령의 나타나심>에 보면 그도 그의 책에서 바로 이 본문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본다. 독일 출신인 그는 아프리카 집회에 한번에 160만 명이 모이고 6일간 345만명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제공한 강력한 말씀 선포자이며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각종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다.
 
기름 부음 받은 성도는 달라야 한다. 레위기 6장에 보면 소제를 드리는 방법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아론의 자손이 소제를 여호와의 제단 앞에 드리도록 명하였다. 소제물에는 반드시 기름을 부었고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성경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하나님은 소제물에 기름과 유향을 사용하여 제단 위에서 불살라서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레6:15, 21)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여호와 앞에서 악취 나는 인생이 아니라 소제물과 같이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그런 인생으로 살아가야 만 한다.
 
한국 감리교 선교의 중요한 역할을 한 존 가우쳐(John f. Goucher, 1845-1922) 목사와 같은 그런 삶은 얼마나 성령의 충만함과 기름 부음을 받은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인생인가. 존 가우쳐 목사는 1883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 DC를 향해 달리던 기차 안에서 만난 조선의 고종의 특명을 받고 미국을 방문 중인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의 일행을 융숭하게 환영하고 낯설은 극동아시아의 반도 국가인 조선 땅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당장 미연합감리교회 선교국에 당시 2000불의 선교 헌금을 보내면서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당시 일본에서 선교하던 맥클레이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였고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을 만나고 교육과 의료 선교에 대한 윤허를 받아 내었다. 존 프랭클린 가우쳐 목사는 당시에 발티모어의 역사적이고 유명한 교회의 담임 목사였다. 러브리레인교회는 1772년도에 영국감리교회에서 미국에 파송한 조셉 필모어를 통해서 시작되었고 그 후임인 후렌시스 에즈베리가 이어서 공동으로 목회하던 역사적인 교회였다. 레브리레인 교회는 미국감리교회의 어머니 교회와 같은 교회였다. 존 플랭크린 가우쳐 목사는 부유하던 처가 재산을 가지고 볼티모어 여자 대학교를 세우는 등 인도, 중국, 일본과 한국 등에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선교 업적을 남긴 주인공이다. 지금의 정동 제일 교회 주변의 그 넓은 땅들과 선교 현장의 흔적들도 거의 다 존 가우쳐 목사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선교 업적들이다. 무슨 말씀인가. 주 안에 거하는 기름부음을 받은 성도의 삶은 그 열매가 달라야 한다는 말씀이 아닌가.
 

약속 안에 사는 자의 영원한 생명.
주 안에 거하고, 그의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의 축복이다. 요한 1서 1장 2절의 말씀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영원한 생명’이시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못으로도 창으로도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사십일 후에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이시다. 본문인 요한 1서 2장 25절에 “그가 우리에게 약속 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하였다. 5장에서는,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1서 5:11)고 하였다.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하였다. 그리고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고 하셨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마치신 후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5장 24절에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고도 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8:51),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이처럼 계속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영생에 대하여 반복하여 강조하셨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답게 주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영생의 복음을 전파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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