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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예수님을 믿는 믿음(요9:24-34) 2015.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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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2-08 19:43 조회 17,484 댓글 0
 
예수님을 믿는 믿음(요9:24-34)            2015. 2. 8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을 고쳐 보게 하셨다. 이 일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늘  못 마땅하게 여기던 바리새인들에게 더욱 큰 미움을 사는 사건이 되었다. 예수님은 어느 안식일에 만난 앞 못 보는 사람에게 진흙에 침을 뱉어 그의 눈에 발라 주시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오라고 명하셨다. 그 앞 못 보는 사람은 두 눈에 진흙을 묻힌 채로 실로암 못을 찾아 가서 그 물에 눈을 씻었는데 깨끗하게 고침을 받아서 보게 되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본 적이 없던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이었는데 보게 된 것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들은 그 당사자를 괴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심문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부모는 “내 아들이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누가 내 아들의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니 장성한 우리 아들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대답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들은 출교시키던 때인지라 그의 부모도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볼 뿐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아끼던 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바리새인들은 다시 그 앞을 못 보던 걸인을 두 번째로 불러다가 심문하기 시작하였다. 요한복음 8장으로부터 이어지는 이 사건의 내용이 교훈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간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믿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그러나 정작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생활에 있어서 잘 못 믿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예수님이 죄인이라는 오해.
예수님 당시나 오늘 날이나 하나님께 대하여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성령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오해하며 제대로 믿으려고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더군다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공공연하게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저들이 얼마나 예수님께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24절에,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고 하였다. 그렇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통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은 사실이나 예수님은 우리 다른 인간들처럼 죄가 있는 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무죄하신 분이셨다. 사실 이런 점을 바리새인들이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면 왜 저들이 이 앞 못 보며 걸인으로 지내던 중에 예수님을 통해서 치료 받고 보게 된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리라”고 몰아가는가 하면 자신이 고침을 받은 것이 예수님을 통한 일이 아니라고 거짓 증언 하라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표현을 “거짓을 자복하고 진실하게 사건의 전말을 밝히라”는 요구를 할 때에 관용적으로 사용한다. 원어의 뜻을 훨씬 정확하게 번역한 영어 번역에 보면, “진실을 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Give glory to God by telling the truth.)라고 하였다.
 
여호수아 7장 19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죄를 범한 아간에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고 심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 성 전투 중에 시날 산의 외투와 금 덩어리와 은 덩어리를 훔쳐다가 숨긴 아간이 제비 뽑혔을 때에 아간으로부터 죄의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하여 사용한 표현이 바로 “진실을 말하고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는 관용적인 표현이었다.
 
본문의 앞 못 보던 상태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게 된 이 사람은 지금 바리새인들로부터 거짓말로 증언하라고 회유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면서 그의 못 보던 눈이 떠져서 보게 된 이 치유 사건은 예수님이 해 주신 치유 사건이 아니라 우연한 일인 양 거짓말을 하라고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불행은 바로 이것이었다. 요한복음 9장에는 13. 15, 16절에 ‘바리새인들’이 등장한다. 저들 바리새인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대한 못 마땅한 감정을 앞장 세워서 예수님을 타도하려고 호시 탐탐 기회를 엿 보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이 그리스와 로마문화인 이방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이스라엘 고유문화와 신앙을 잃을까봐 우려하였다. 그러므로 저들은 모세의 오경을 중심으로 토라 또는 율법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는데 철저하였다. 유대교 신학을 계승하는데 집착하였다. 종교적으로 천사, 부활, 천국 등을 믿기는 하였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는 못하였다. 천사, 부활, 천국 등을 믿지 않고 현세적인 유대 종교인에 머물던 사두개인들과는 다른 종파였다.
 
바리새파는 기원후 70년, 유대전쟁 이후에 유대교를 이끄는 주요한 유대 종파가 되었다. 유대전쟁으로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지역을 완전히 진압하여 유다왕국은 패망하고 말았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던 유대교는 성전이 없는 유대교가 되고 말았다.  당시 유대교의 주요한 세 종파였던 사두개파와 열심당원이었던 젤롯파와 바리새파 중에서 바리새파만 남게 되었다. 정치적 지배 세력을 지지하던 사두개파와 무력항쟁을 지지하던 열심당원인 젤롯파는 유다 왕국 패망 이후에 사라지고 말았다. 바리새파만이 유대교의 주류가 되었고, 성전 없이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를 형성하였다. 바리새파는 오늘 날 세계 처처에 유대교를 이루는 중요한 종파가 되었다. 바리새파는 초기 기독교도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바리새파는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메시아인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을 회당과 유대사회에서 축출하고, 추방하였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 안에서 예수님을 믿던 기독교인들은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기독교 의 부활 복음전파와 왕성해져 가는 기독교회의 형성을 유대교의 절대 위험요소로 여기서 심하게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본문의 장면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따라 다니며 예수님을 핍박하고 심지어는 잡아서 죽여 없애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다.
 
오해는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온다.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서도 가족 간에 혹은 주변 사람들과의 인관 관계 가운데 오해가 쌓이면 돌이킬 없는 극단적이고 불행한 결과를 가져 오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신학적인 오해는 그 어느 누구의 설득이나 설명으로 쉽게 해결 될 수 없는 신념과 같은 차원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따라 붙어서 사사 건건 예수님의 하시는 천국에 대한 말씀과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는 치유 사건에 대하여 일일이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죽여 없애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오늘 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갖지 못하면 나의 믿음이 성장하질 못한다. 한 번은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께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과 관심에 대하여 물으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그 때에 재자들이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하고 대답해 드렸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다시 물으셨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예수님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지금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있는가. 이것이 곧 나의 신앙, 나의 믿음의 현 주소인 것이다.
 
 
예수님을 통한 온전한 치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가장 많이 하신 일이 각색 병자들을 고치신 일이다. 예수님은 음식 잡수실 겨를이 없을 정도였고 쉬실 시간이 없으실 정도로 인산인해로 몰려드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특히 예수님 때에는 귀신 들린 자들이 그렇게 많았다. 그 많은 귀신 들린 자들을 일일이 다 고쳐 주셨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광야에서 사십일 간 금식하신 후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곳곳마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리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자들을 다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졌다. 사람들이 각색 앓는 자와 각종 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자와 귀신 들린 자와 간질하는 자와 중풍 병자들을 데려 왔는데 그들을 일일이 다 고쳐 주셨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오는 각색 모든 병자들을 못 고치시는 병이 없으셨다. 이는 당시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구나 병들고 약하나 누구나 다 하루하루 주님의 치유의 은총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병들고 허약하고 심약하고 지치고 곤고할 때에 나를 치유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강건하게 하시고 힘 있게 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찬송하고 부르짖는 것은 얼마나 합당한 믿음의 표현인지 모른다. 
 
471장 찬송 “주의 나의 병든 몸을”이란 찬송을 불러 보자.
 
1.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지금 고쳐주소서 모든 병을 고쳐 주마 주 약속하셨네
   내가 지금 굳게 믿고 주님 앞에 구하오니 주여 크신 권능으로 곧 고쳐 주소서
2. 나의 주님 뜻이라면 나를 고쳐 주소서 머리 위에 기름 붓고 날 고쳐 주소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간구 하는 나의 몸을 지금 주의 약속대로 곧 고쳐 주소서
3. 주를 위해 살겠으니 나를 고쳐 주소서 내게 속한 모든 것은 다 주의 것이니
   성령이여 강림하사 능력 있는 손을 펴서 나의 몸을 어루만져 곧 고쳐 주소서
4. 나의 병을 고쳐 주심 내가 믿사옵니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 찬송 하겠네
   나를 구원하신 말씀 어디든지 전하오리 나의 병을 고쳐 주심 참 감사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각종 질병으로부터 고쳐 주시는 치유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사고와 사건과 질병이 많은 이 세상에서 겸손하게 마음 깃을 여미고 주님의 치유의 은혜를 간절히 의지하며 기도하며 살아가는 나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면서도 수 많은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며 평생을 살았던 헬렌 켈러를 보라. 앞을 못 보며 살아야 했지만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이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였던 찬송시인 파인 J. 크로스비 여사를 보라.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그 수많은 은혜로운 찬송가들 중에 얼마나 그의 찬송시가 많은가. 가령 31장 찬송,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백성들아 사랑을 전하세...”
 
40장 찬송,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큰 사랑 주님께 영광 할렐루야 형제자매 모두함께 모여 찬송해 주님께 영광 할렐루야 하나님의 자녀여 크게 찬송 부르며 밝고 거룩한 길로 기쁨으로 나아가 주의 보좌 앞으로 속히 들어가겠네 주님께 영광 할렐루야”
 
같은 찬송의 감동을 보라. 양손에 두 개씩 밖에 남아 있지 않은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자매, 온 몸에 뼈마디까지 파고드는 몸의 통증을 이겨 가며 살아간다는 송명희 자매가 고백하는 ‘공평하신 하나님’ 같은 고백을 보라.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하나님의 치유, 예수님의 온전하신 치유가 무엇이라고 여겨지나. 닉 브이치치나 레나 마리아가 고백하고 믿고 증거 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교통사고 현장의 화재로 얼굴이 숯덩이처럼 타고 일그러졌지만 그 어려운 피부과 수술을 수 없이 받아 가면서 그렇게 밝고 힘차게 이겨내며 긍정적으로 감사하며 지내는 감사 신앙의 전도사인 이지선 자매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일까.
 

체험이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 예수님의 부활 승천, 성령님의 개인적인 임재 체험을 하고 나면 누가 나의 신앙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핍박하여도 나는 나의 신앙이 견고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는 그런 신앙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만 다닐 뿐 예수님을 진실한 믿음으로 믿는 믿음이 아직 생기기 이전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이들은 교회에 적을 가진 교인일 뿐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아직 아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제자의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제자다운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님이 부르셨던  12제자들 중에 가롯 유다는 신분만 제자였을 뿐 그의 나중은 불행한 길로 치닫고 말았다.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가 버린  버림받은 제자가 되고 말았다.
 
본문인 요한복음 9장 27절과 28절에 보면 제자 논쟁이 나온다. “예수님의 제자인가 모세의 제자인가”하는 질문과 반문이 계속된다. 당신은 과연 누구의 제자인가. 무엇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 바리새인들이 말하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는 주장도 사실은 옳은 주장이 못된다. 그들이 진정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깨달아 알고 믿던 제자들이었다면 당연히 모세가 전하여 주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제자의 길로 들어섰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7절의 말씀대로 결코 모세의 율법이나 구약의 그 많은 선자자들의 선지서의 말씀을 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요즘 수요일 밤 기도회 후에 남성 제자훈련 학교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책은 오스왈드 샌더스(John Oswald Sanders, 1902-1992)의 <영적 제자도>라는 책이다. 그는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선교회의 책임을 맡아 수십년을 섬겼다. OMF 선교회는 1950-1960년대에는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로 더 알려진 선교회이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선교의 사람이었고 40권이 넘는 책을 썼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법학을 공부한 후에 성경 훈련 과정을 통하여 지난 20세기 위대한 전도자요 선교의 사람으로 90년을 살았다. 그는 은퇴를 모르는 정열의 사람이었다. 그의 책, <영적 제자도>에서 다루는 제자도에 관한 20가지 주제들 가운데서 가정 첫 번째로 다루는 주제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에 관한 묵상과 도전이다.
 
 그는 여덟 가지 팔복을 개인적인 특징 네 가지와 사회적인 특징 네 가지로 구분하여 묵상하였다. “영적인 가난인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의 애통인 애통하는 자, 영적 겸손인 온유한 자의 복,  영적 갈망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개인적인 네 가지 특징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로서의 영적 긍휼,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영적 화합능력,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로서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인 특징들로 잘 정리하여 주었다. 그렇지 않나. 음악, 미술, 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스승에 버금가고 스승을 뛰어 넘는 탁월함을 가지기 위해서 남다른 노력을 계속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다운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지 않나.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리라”(마10:38)고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고 하셨다.
 
혹시 나는 돈을 절대 권력과 힘으로 여기고 그 지배에 전적으로 매달려 살아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혹은 권력인가. 혹은 젊음인가. 혹은 건강인가. 혹은 인기인가. 혹은 외모인가. 혹은 유산, 부동산, 넉넉하게 확보된 재물인가, 아니면 그 어떤 출세와 성공인가. 나에게 여전히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힘이 과연 무엇인가. 사회적인 그 어떤 나의 그 신분과 지위인가. 그런 것만 가지고는 예수님이 부르시는 제자의 조건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날 때부터 보지 못하고 걸인으로 지내 오던 이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침을 받은 후에 바리새인들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다. 그런 그가 명확하게 대답한 말은 이것이다. 25절에 보면, “그가 죄인인지 나는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신에 찬 간증인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는 고백인“I was blind but now I see." 는 305장 찬송가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양의 가사 중의 일부가 아닌가.1779년 노예선 선장에서 변화되어 목사가 된 잔 뉴톤(John Newton, 1725-1807)의 찬송시인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의 일부 말이다.
 
29절의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이 표현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는 확고하고 자랑스러움이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나이 80이 된 모세가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몰고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가던 중에 호렙산에 이르렀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 떨기나무에 붙은 불은 불이 붙는 것 같기는 한데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희한한 불꽃의 광경이었다. 그 신비하고 큰 광경을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는 모습을 하나님이 지켜 보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자기의 얼굴을 가렸다. 그 때에 하나님은 계속하여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는 이처럼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대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일일이 들을 수 있었다. 이처럼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면은 레위기 1장, 민수기 14장, 신명기 10장 등에 계속하여 여러 차례 소개 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모세에게 나타나시던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그런 장면들을 매우 대단하게 여겼다. 그런 바리새인들이 지금 오히려 당혹스러워 하면서 눈이 떠져서 세상을 밝게 보게 된 이 사람 앞에서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예수님을 비하해 보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롭게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이 멋있는 신앙 고백을 하였다. 31절부터 33절까지에 보면,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들으신다.
나, 앞 못 보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은 종교와 신앙과 이념과 각기 다른 주장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하여 점점 불안해져만 가고 있다. 세상의 많은 종교 들 가운데는 마호멧의 제자 되어 사는 자들도 있고 석가모니의 제자 되어 사는 자들도 있고 공자, 맹자의 제자 되어 사는 이들도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예전에 없던 신흥 종교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이들도 있다.
 
요즘 사람의 목을 닭의 목보다 더 쉽게 베어 버리고 사람을 산채로 불태워 죽이기까지 하는 IS(Islamic State)의 극악한 행동에 대하여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지 않나. 인간의 신앙과 신념이 잘못 되면 얼마나 큰 불행을 부르는 자를 자명하게 교훈하고 있지 않나. IS(Islamic State)는 이슬람 국가이다. 이슬람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 단체는 이슬람 교리에 근거하여 이라크와 시리아를 통일하여 완전한 이슬람국가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 단체는 두 가지 파로 나눠져 있는데 하나는 시아파와 수니파 다. 현재 시리아 사태에서 정부군에 속하는 시아파는 사실 이슬람교에서 약 10~20%정도이다. 나머지인 약 80-90%가 수니파이다. 시리아의 영토중 약 30%이상을 반군인 수니파가 장악하고 있고 그 나머지는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포교활동을 위해서는 폭력도 불사하고 자살테러나 민간인 학살 등의 행위도 성스러운 행위라고 믿고 있다. 전쟁자체가 지하드 즉, 거룩한 전쟁인 성전(聖戰)이라고 믿고 있는 단체이다. 이 중에서 시리아를 통일한 시아파는 매우 호전적인 종파로 이란과 함께 유일하게 시아파이며 나머지 중동국가들은 대개가 수니파이다. 시아파가 처음에 나라를 세우면서 사회주의를 표방하였고 러시아와 이란 그리고 중국의 지지를 받았다. 다시 정리하면 시아파 뒤에는 러시아, 이란, 중국이 있고 수니파 뒤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가 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아파는 페르시아 즉 이란에 기원이 있고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기원이 있는 파이다. 현재의 이슬람의 정통성은 후계 구도 상 시아파에게 있기 때문에 그 막강한 권력도 시아파에게 있다.
 
우리나라에는 1902년에 강일순이란 사람이 시작한 ‘증산교’라는 종교도 있다. 1905년에 동학이란 이름으로 손병희에 의해 시작된 ‘천도교’란 종교도 있다. 서울 성동구 중곡동에 가면 1969년에 박한경이란 사람이 시작한‘대순진리회’라는 종교도 있다. 과거에 권력자의 비호를 받으며 대학교 까지 설립한 신흥 종교의 하나이다. 대순진리회는 증산교(甑山敎) 계통의 민족종단 중의 하나이다. 태극도(太極道)에서 분리되었고 현재 수십 개에 달하는 증산교 계통의 종단 중에서 교세가 가장 크며 활동도 왕성하다.
 
이처럼 별의 별 희한한 종교가 자생되고 그것을 따르는 무리들이 국민들 가운데 적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요즘은 기독교의 이단과 사이비도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극성을 부리는 말세 현상을 보게 된다.
 
시험을 이기고 유혹을 피하고 영적 미혹을 분별하여 건강하고 건전하고 능력 있는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이적 앞에서 영적 혼미와 오해에 휩싸이지 않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는 믿음의 사람다운 참 제자의 삶을 살아가며 권세 있는 복음의 증거자들이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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