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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떡이신 예수님(요6:41-51) 2015.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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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1-25 08:00 조회 18,563 댓글 0
 
영생의 떡이신 예수님(요6:41-51)        2015. 1. 25

김범곤 목사는 서울역 노숙인들의 대부와 같은 분이다. 그는 진나 25년 동안 사단법인 ‘참 좋은 친구들’대표직을 맡아 오면서 언제나 노숙인들 곁에서 사역해 왔다. 그들 곁에서 잠도 자고, 그들과 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을 돌보아 왔다. 그 노숙인들 중에 부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온 형제가 있다.  건축현장에서 일하다가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척추를 다쳐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삼개월 동안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에 그를 간호하던 아내가 같은 병원의 다른 병실에 누워 있던 환자아 눈이 맞아 도망가 버렸다. 도망간 아내와 그 상대방 남자를 찾아내서 복수하겠다고 전국 방방 곡곡을 찾아 다니다가 서울역에서 김범곤 목사를 만났다.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그가 김 목사에게 묻기를 “나 같이 술이나 먹고 폐인이 된 사람도 예수 믿으면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그 때 김 목사가 대답했다. “나는 당신보다 백배 더 꼴통이었소. 부모님이 오십대 초반에 나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실 정도로 못된 놈이었소.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되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도 되었소. 나는 할 수 없어도 예수님은 하실 수 있소.” 그 후 그 형제는 서울 역전의 예배에 참석하던 중에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반신 마비가 풀렸다. 배필도 새로 만나 지금은 큰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 수익금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방에 나누며 잘 살고 있다. 그 김범곤 목사는 <생명의 떡 오직 예수>라는 그의 간증을 겸한 노숙인 사역을 바탕으로 쓴 책에서 “사람은 밥만 먹는 것으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먹어야 변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도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만 만나면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존귀한 인격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고 하였다. 김범곤 목사 자신이 젊은 날 사업 실패 후에 날마다 술로 살던 그가 예수 잘 믿는 부인 만나서 변화되고 오늘날의 그로 변화 되었다.
동서고금의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인간의 싸움은 그 근본이 소유에 대한 것이다. 누가 더 갖고 누가 덜 갖느냐는 싸움이다. 오늘 날의 국제간의 외교, 무역의 바탕도 결국은 어느 나라가 국제적으로 부강해지느냐는 경제적인 줄다리기요 경제적인 씨름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원유의 공급과 수요에 대한 것이다. 요즘 원유 가격이 하락해서 휘발유나 경유와 같은 자동차용 기름 값이 뚝 떨어졌지만 이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소득을 마련하기 위해서 밤잠을 자지 못한다. 24시간씩 내내 근무하기도 한다. 밤에 출근하고 낮에 잠깐씩 쉬는 것으로 피로가 쌓여 가기도 한다. 남이 퇴근하는 그 시간에 반대로 출근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가족의 곁을 떠나서 먼 나라에 가서 근무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일 년의 절반 이상을 바다나 하늘에서 지내기도 한다. 잦은 출장과 잦은 외근과 잦은 지방 혹은 타국에서 근무하여야 하기도 한다. 물론 자기가 하는 일이 좋아서 그 일 자체를 즐기며 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생계 수단으로 별수 없이 일해야만 하는 이들도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충이 적지 않다. 젊은이들 중에는 시급 5580원을 벌기 위해서 마트나 주유소나 카페 등 여러 곳에서 긴긴 시간 일하며 사회생활이 생각처럼 쉽지 아니한 것을 실감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국가에서 정하는 자격시험이나 국가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삼수, 사수, 오수 그 이상의 세월을 고시원의 단 칸 방에 갇혀 지내기도 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분야의 그 무슨 일이든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다른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계의 문제와 소득의 문제와 경제적인 안정에 관한 숙제는 이천 년 전에도 있었고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유대의 각 고을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가던 백성들이 벳세다 광야에서 체험한 어린 아이가 내어 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무리들을 배 불리게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신 표적은 그 혜택을 경험한 모든 무리들을 흥분시켰다. 그래서는 그 다음 날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건너편의 가버나움에까지 예수님을 찾아 따라 나서는 열심을 보였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임금 삼고 싶어 하는 움직임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무리들을 피하여 산으로 가셨고 밤새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의 권력을 잡는 것에 별 관심이 없으셨다. 아니 전혀 그런 관심은 없으셨다.
예수님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보고 싶어서 갈릴리 호수를 배 타고 건너서 예수님께 몰려온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냉정한 말씀을 해 주셨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6:27) 삶의 목적을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데 두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데 두라는 말씀을 무리들은 의아해 했다. 그래서 무리가 예수님께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그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명쾌하게 가르쳐 주셨다. 무리들은 다시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 무리들에게 모세 때의 일을 말씀해 주셨다. 모세 때의 광야 무리들이 날마다 아침이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은 것을 예로 들어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아들 예수님을 믿으며 살면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신다고 설명해 주셨다. 이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도 말씀하셨다.  그 때 무리들이“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하고 요청하였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참 떡에 관심을 보이는 무리들에게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해 주셨다. 배고프지도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는 그런 떡과 음료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보면, 조건이 있다. “내게 오는 자는”(whoever comes to me)이라는 조건 말이다.
이미 이천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결코 주리지도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는 영생의 떡과 음료로 오셨건만 알려고도 하지 않고, 영접하지도 않고, 믿으려 하지도 않는 자들은 영생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과 상관이 전혀 없는 인생들로 이 땅을 살다가 죽어 갔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어떤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 대하여 수군거리는 사람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대하여 수군거리는 무리들이 있었다. 여기 41절에 ‘수군거린다’는 말은 비둘기가 무리를 지어 구구거리는 것이나 곤충들이 떼를 지어서 붕붕거리고, 웅웅거리는 것을 묘사할 때에 사용하는 의성어이다. 헬라어의 ‘공귀조(gong gu jo)라는 단어의 의미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할 때에 모습을 가리키는 똑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불평하고 비난하는 어수선한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달 보름 만에 엘림에서 떠나서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나할 것 없이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말씀의 나중 내용에 보면 모세와 아론을 향한 원망은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하나님도 그 원망의 내용을 들으셨다고 했다. 비둘기가 구구거리고 벌래가 웅웅거리듯이 역사의식이 없이 툴툴거리고 불평, 불만, 원망 정도로 시대 현장의 중심에서 주절주절 입 안의 말로 우물거리며 살아가는 정도로는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에 쓰임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각종 표적을 행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점점 드러내시고 장차 유월절의 때가 되면 예루살렘에 새끼 나귀를 타고 종려 주일에 입성하실 뿐만 아니라 붙잡히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실 뿐만 아니라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만 천하에 드러내실 것이다. 그 주님이 광야의 배고픈 무리들에게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 불리 먹게 하고 열 두 광주리가 남게 하신 표적을 보이셨다. 그 후에 그를 임금 삼고자 따라 다니는 무리들에게 자신이 영생의 떡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인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계셨다. 그러나 적지 않은 무리들은 수군거릴 뿐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가정과 가족 관계를 아는 이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남편인 육신의 아버지 목수 요셉과 그를 낳은 어머니 마리아를 아는데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고 의심하며 수군거렸던 것이다.
이제 삼 주 정도 지나면 사순절이 시작된다. 올해도 절기의 신앙을 갖고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과 좀 더 가까워지는 한 해의 나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스위스의 한 기업은 아기 한 명의 이름을 짓는데 총 13명의 전문가를 동원한다. 수 명의 역사학자와 번역가, 변호사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들의 목표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완벽하게 독창적인' 이름을 짓는 것이다. 부모와 아기의 국적에 따른 문화와 역사를 고려하고, 해당 이름이 다른 나라에 이미 존재하지는 않는지,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를 사용하는 브랜드가 있는지 등을 철저하게 검토한다. 번역가들은 전 세계 주요 국가 언어를 바탕으로 해당 이름에 대한 의미 및 사용 여부를 확인한다. 이렇게 아이 한 명의 이름을 결정짓는데 걸리는 시간은 수 주에 달하며, 비용은 우리 돈으로 무려 3400만원에 달한다. 누가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아기의 이름을 지을까 싶은데 의외로 그 사업에 인기가 높다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좋은 이름 갖고 사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하겠지만 예수님께 대하여 수군거리는 정도로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어정쩡하게 하지 말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깨달아 알고 믿고 물과 불과 성령으로 세례 받아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부르는 96장 찬송에 보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찬송이 있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평화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온 교회의 머리와 온세상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 되고 우리영광 되시네
우리 모두 예수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서 수군거림을 멈추고 예수님을 찬송하고 높이고 경배하고 따르고 순종하며 만방에 증거하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배운 사람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는 자들이다.
다시 출애굽기 16장의 말씀을 좀 더 나누자. 거기에 보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애굽의 고기 가마 타령을 하고, 애굽에서 떡을 배 불리 먹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원망을 터트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 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수16:4) 닷새 동안 날마다 하루치를 거두되 여섯째 날에는 안식일에 먹을 분량을 위하여 갑절을 거두도록 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숝옹하며 살아가는 원리다. 주일을 제대로 잘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일주일과 365일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시간으로 여겨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증거이다. 십일조는 나에게 생긴 소득이 나의 노력과 나의 수고와 내 노동의 열매이지만 하나님이 건강과 여건과 그런 환경을 주셔서 얻게 된 소중한 열매로 여기고 그 소득의 열 개 중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므로 자신의 삶이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이라는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왜 날마다 찬송하고, 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왜 날마다 순간마다 기도하며, 왜 복음을 전하고, 왜 헌신, 봉사, 충성을 다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그와 같은 날마다의 모습 속에 나 자신을 이 세상에 내신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부르심과 사명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나라의 공무원이나 군대의 고위직 장군이나 외무 공관에 근무하는 공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과 본업에 충실하지 않고 날마다 골프장에 나가서 살고, 저녁마다 술 파티나 즐기고 주변의 젊은 부하나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거나 허랑방탕하게 생활한다면 그 나라나 그 군대나 그 외교 관계가 무엇이 되겠는가. 이는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대학 진학을 마무리 하는 때를 만났다. 지난 초중고등학교 시절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고 밤을 새워가며 공부해온 최소한 중고등학교 6년이나 고등학교 3년이나 지난 한 두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애쓰고 수고하며 열심히 공부해온 실력과 성적을 가지고 선후배 동료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결과나 모습에 만족해 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분야마다 실력과 재주와 은사와 역량을 갈고 닦으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성장해 가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하나하나 존귀하게 그 앞날을 지도해 주실 것이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주관하는 아시안 컵 호주 축구경기에서 대한민국이 우즈베키스탄에서 8강전에서 2대 0으로 이기고, 일본은 아랍에미리트에 져서 우리나라는 4강전에 진출하고 일본은 4강전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거기 차두리나 손흥민 같은 선수로 돋보이기 까지 얼마나 많은 축구 꿈나무들 중에서 그 역량과 체력과 기술력을 인정받아서 국제 경기에 거기까지 가고 가는 것인가.
출애굽기를 읽다 보면 모세 중심이다. 모세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모세는 불운한 시대에 태어났다. 자신이 태어날 당시에 애굽의 바로 왕은 태어나는 히브리 노예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환경에서 삼 개 월 숨겨 키워지던 모세를 그의 부모는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발라 그 안에 담아서 나일 강에 버렸다. 떠내려가는 모세를 건져 낸 것은 그 강가에 목욕하려고 나갔던 바로 왕의 딸인 공주였다. 모세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하여 바로 왕궁 교육 40년을 받는 특별한 혜택 가운데 목숨을 건졌다. 40살에 왕궁 밖에 나갔다가 애굽 사람과 동족 이스라엘 사람과의 싸움을 말리던 중에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고 그 다음날 그 사실이 세상에 소문 난 것을 알고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미디안 광야길로 도망쳤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그 곳에서 장인 이드로를 만났고 그의 집에 장가들어 40년간 두 아들 낳고, 장인의 양떼를 치며 목축업으로 늙어가는 긴긴 세월을 지냈다. 그런 그를 호렙산 떨기 나무의 불이 붙는 것 같은 환상 가운데 불러내신 하나님은 그를 동족 구원의 선봉에 세워서 쓰시는 존귀한 지도자의 길을 걷게 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이요 하나님으로부터 계명과 율법의 말씀을 받아 적고 후손에게 전한 말씀의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2000년의 역사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위대하지만 모세를 빼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그 인생과 그 가정과 그 앞날을 존귀하게 하신다.
요한복음 6장 32절에 보면 예수님은 모세와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모세가 위대한 것이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종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동안에 항상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중보자였다.
예수님도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수군거리지 말라”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고 하셨다. 그리고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사 54:13)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교훈해 주셨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듣고 하나님의 그 말씀을 배운 사람이어야 예수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고향에 일찍이 복음이 들어오고, 교회가 세워진 것을 너무나 감사한다. 만약에 고향에 교회는 없고 사찰이 있었다면 어려서부터 종교심이 있던 나는 승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나로 하여금 태어나고 성장하게 하셨고 마을의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 생활 가운데 성장하게 해 주신 것을 너무나 감사드린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으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he who believes has everlasting life. I am the bread of life.)(요6:47-48) 
신명기 6장 4절 이하에 보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예수님도 나사렛에서 자라나는 동안 나사렛의 회당과 절기 때마다 올라가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가지셨다. 예수님은 이미 12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의 선생들과 말씀을 주고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으로 충만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마다 예수님께로 오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런 믿음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영생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요한복음 6장 36절에 보면 불신앙의 시대 현실을 고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보냄 받은 생명의 떡이요 영생수인 것을 알지도 못하고,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불신앙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신 것을 믿고 그 떡을 먹는 사람들마다 영생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교훈을 제대로 잘 깨달아 알고 믿고 증거하며 살아가는 생활은 얼마나 소중한가.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광야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던 모세 시대의 백성들은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자들은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요한복음 6장 47절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지금 가졌다고 소유 개념으로 설명해 주셨다. 영생이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영원한 죽음의 심판과 형벌에서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진 것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신 ‘현재형’의 축복은 장차 천국에서 영생할 뿐만 아니라 지금 이미 영생하는 자로서 그 죄 사함과 구속의 은총이 선물로 이미 지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나에게 주어져 있다는 선언이며 축복인 것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요6:35, 48)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나는...이다’는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 , I am...)의 선언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된 우리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공급을 은혜와 축복으로 받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생의 떡으로 먹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 요한복음 6장 37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증거해 주신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맡겨 주신 영혼이라야 예수님께 올 수 있다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면 예수님은 그 어떤 누구라도 내 쫓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뜻을 이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신 구세주이시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6장 40절에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 속에 그 대답이 들어 있다. 예수님 안에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영생의 떡이요 영생의 물로 먹고 마시는 날마다의 은혜와 평강이 넘쳐 나는 주인공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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