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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여호와께 감사하라(II)(시107:23-32) 2014.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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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관리자
작성일 14-12-09 17:48 조회 18,176 댓글 0
 

이 땅에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은 없다. 물론 전쟁을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 악용하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성경은 전쟁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서 쓸 만한 젊은이들이 거의 모두 다 포로로 끌려가고 70년 동안이나 포로의 땅에서 지내야 했던 것도 이스라엘이 약하고 바벨론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고 인간의 욕망에 젖어서 하나님을 멀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는 성경 기록자의 역사관일 수 있으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누군가를 감동시키셔서 쓰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역사와 전쟁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대하게 된다.

1620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탄 범선이 영국을 출발하여 대서양을 건너 지금의 미국 땅에 도착한 것도 종교적인 핍박으로 인한 것이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고 8장에 환란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난 이들 중에서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성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믿는 이의 수가 그 도시에 많아진 것처럼 말이다. 로마 카톨릭의 압력에 저항해서 대립하게 된 영국 교회 안에서도 성경에 기초한 신앙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영국을 벗어나는 이들이 점점 늘어 나고 있었다. 그 들 중에는 네델란드에 자리 잡은 이들도 있었다. 당시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은 교황이나 영국의 국왕의 탄압에 맹종하지 않고 오직 말씀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 섬긴다는 신앙을 지켜 나가고자 영국을 떠나 미지의 멀고먼 항해를 시작한 이들이었다.

저희 가족이 미국 필라델피아에 살던 때에 당시에는 두 아들이 어렸을 적인데 미국 보스턴시가 있는 메사추세추 주의 플리머스라는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교회의 여름 사역을 다 마치고 가족과 함께 며칠간 미국 동부의 해안을 따라서 캐나다  국경의 메인 주를 거쳐서 캐나다의 프랑스 어 사용권인 쾌백 지역까지 여행한 적이 있다. 그 플리머스라는 곳은 1620년 9월 16일에 네델란드에서 살던 청교도 35명과 더불어 102명의 청교도들이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떠나서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곳에 붙여진 지명이다. 그 곳에는 저들이 당시에 타고 온 배인 메이플라워호의 원형을 복원하여 바닷가에 정박 시켜 놓은 역사의 흔적을 둘러 볼 수 있다.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고 이름 붙여진 저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하여 신앙의 자유와 미래를 향한 개척 정신을 가지고 미지의 땅을 향하여 출발한 것이다. 두 달 이상이 걸린 66일 간의 항해 가운데 일행 중의 절 반 이상이 혹독한 추위와 괴혈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저들이 타고 간 배는 무게 180톤 정도에 길이 27미터 정도 되는 범선이었다. 저들은 플리머스 지역에 하선하였으나 영국의 상인들에게 선금을 주고 전세로 빌렸던 배는 이듬해 4월까지 정박되어 있다가 겨우 영국으로 돌아갔다. 저들은 그해 11월 21일에 메사추세추 주의 프로빈스타운의 케이프 타운에서 남성 41명이‘플리머스 서약’이란 서약에 서로 조인하였다. 그 내용은 도착한 미지의 땅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를 이탈하지 말고 정치적 통일체를 구성하며 장차 세워질 법률과 규정을 절대로 순종하며 서로를 보호하고 잘 지켜 나가자는 신앙적인 약속이었다.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겨울을 나고 원주민들에게서 농사법을 배워서 감자, 호박, 옥수수 등을 농사한 후에 하나님께 추수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청교도들의 추수감사예배의 시작이다. 1621년에 3일 동안 추수를 감사하는 축제를 벌였다. 이때 청교도들은 자신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주어 굶어죽지 않도록 배려한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추수한 곡식과 과일과 야생 칠면조와 사슴을 잡아 축제를 했는데 이것이 미국에서의 최초의 추수감사절이다. 그러나 사실 청교도들은 큰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청교도들은 흉년과 식량난으로 고생했다. 미국에 도착할 때 메이플라워 호인 배를 빌리느라 진 빚이 이자가 불어나서 돈에 쪼들리는 경제난에도 시달렸다. 청교도들은 아무것도 없는 맨주먹이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해서 고생했다. 완두콩 농사와 보리농사도 망쳤다. 옥수수도 이십 에이커의 밭에서 난 것이 전부였다. 더구나 전염병까지 유행해서 건강도 해쳤으며, 날씨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인디언들과의 관계도 늘 불안하여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장차 자신들을 돌보아 주실 줄로 믿고 감사를 드리며 축제를 벌이고 하나님께 추수를 감사하는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 후로 추수감사절은 미국 어느 곳에서나 지키는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 240여년이 지난 1864년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11월 넷째 주간을 추수감사주일로 정했다. 그 후 현대에 와서 1941년부터는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여 지킨다. 그러므로 390여년의 역사를 지닌 미국의 추수감사전통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본문의 시작에  인생사를 배들을 바다에 띄우고 큰 물에서 국제 교역을 하고 때로 광풍을 만나고 하는 식의 표현은 갈릴리와 사해만을 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중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바벨론 포로의 고난을 23절에서 큰 물, 25절에서 광풍으로 묘사한 것이다. 바벨론과 메대 바사로 이어지는 타국 생활, 타향살이를 겪고 보니 내 나라 내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생생하게 실감하며 살아 남아 돌아 온 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감사제를 드리며 기도하고 찬송하는 말씀이 이어진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들은 인생길을 말할 때에 바다를 여행하는 항해로 비유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인생을 쓸 ‘고’(苦)자를 붙여서 ‘고해’(苦海)라고 하지 않았나. 오늘도 여전히 동해와 서해와 남해 바다에는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든 목적하는 섬으로 가고 오기 위해서이든 수많은 사람들이 뱃길을 이용하여 이곳저곳을 오고 간다. 지구의 육대주를 연결하는 뱃길은 오대양의 험한 파도를 건너다니며 인류의 긴긴 문명을 발전 시켜 왔다. 태평양과 대서양과 인도양과 지중해와 남극과 북극으로 이어지는 지구상의 먼 바다 뱃길은 언제나 꿈과 동경의 대상이었고 죽음을 각오하는 개척자들의 설렘의 현장이었다. 지구가 육면체라고 여기고 지구의 모양이 구형으로 생긴 것조차 입증되기 이전, 지구가 태양계에 속한 항성 중의 하나인 것조차 과학적으로 입증되기 이전부터 인간은 먼 바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하는 궁금증과 설렘 속에 먼 바다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살아 왔다.

계속되는 시편 107편의 본문에 보면 인생사를 항해에 비유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때때로 광풍이 일어나고 때때로 고요한 바다의 현상을 우연한 일로 보지 않고 2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즉’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고백하고 있다. 감사의 달에 시리즈로 묵상하는 시편 107편의 본문 말씀은 여호와께 감사하는 신앙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위험과 고통 중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사람이 편안하고 평안할 때에는 별로 하나님을 크게 의지하지 않지만 삶이 곤고해지고 어려움이 끊이질 않고 인생에 고통과 역경이 휘몰아치면 하나님을 잘 믿지 않던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어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간처럼 나약한 존재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고통을 당하면 그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셔서 인간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 고통 중에 부르짖는 간구와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는 은혜의 주님이시다.

사람이 서로 남들 살아가는 것을 보면 부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까. 물론 신명기 33장 29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는 말씀이 나온다. 어느 목사님이 행복한 사람에 대하여 화제를 꺼냈다. 누가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 그 질문을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 머쓱한 채 가만히 있자 그가 설명하기를 어린 애기 하나를 등에 업은 채로 둘째를 임신하여 배가 남산 만하게 부른 여인이라고 하였다. 그런 상태의 애기 엄마가 왜 그리 행복한 사람이냐고 하니까.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행복한 것 아니냐”고 말해서 서로 웃었다. 그렇다.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이 추워 가는 계절에 내 등이 따뜻하고 내 배가 부르면 행복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인생 항로에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이 내 인생의 배에 덮쳐 들어오는 그런 때를 피하지 못하고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가야만 할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사고의 문제이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빚더미 위에 앉게 된 다든지 실직한다든지 사업이나 장사가 기울어 어렵게 된 다든지 누가 내 돈을 떼어 먹고 도망가 버린다든지 사기를 당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다든지 가족 중에 남편이나 아내가 앞서 세상을 떠난 다든지 내 나이가 아직 어린데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든지 아니면 지진이나 쓰나미나 화산 폭발과 같은 천연적인 재난을 당하는 나라나 민족들도 있고 전쟁이나 테러 같은 크나큰 역사적인 상황에 휘말리는 경우가 생길수도 있다. 왕궁에 사는 임금이라고 그 삶이 뒤숭숭해 지기 시작하면 거대한 왕궁, 상아로 만든 침상에서 금실로 자수를 놓은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들어도 그 생활이 편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인생살이는 살아가다 보면 별의 별 광풍이 일어나듯이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때에 인생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시편 50편 15절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교훈해 주셨다. 그렇다. 환난 날에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 하고 들으려 하지 말고 전능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위험과 환난에서 건져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자녀 된 성도들을 하나님은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이다.

인생이 곤고할 때에 세상길로 내 닫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인생은 지금 당장은 힘이 들고 어렵고 병약하고 답답하고 곤고할 지라도 복된 인생이다. 시편 84편 12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107:30)는 말씀은 예전 성경인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번역 하였다. 개역 한글의 번역이 훨씬 더 마음에 와서 닿는다. 물론 영어 성경으로 보면 여기서 말씀하는 항구란 지구상의 그 어느 항구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들의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 하신다.”(he guided them to their desired haven.)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출세하고, 아무리 권력을 누리고, 아무리 세상의 부를 엄청나게 소유하고, 아무리 인기를 한 몸에 누리며 살아도 이 세상에서의 인생살이가 전부라면 그런 인생은 한 낮의 햇볕에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 하지 않았나.

조선시대 27명의 왕들의 평균 수명이 47살이었다. 역사적인 세종대왕(1397-1450)도 54년 밖에는 못 살았다. 환갑을 넘겨 산 임금은 단 여섯 명 뿐이었다. 제일 장수한 임금이 제 21대 임금이었던 영조(英祖,1694-1776)인데 82년을 살았다. 영조는 30살에 왕위에 올라 52년간 왕으로 있었다. 왕자인 사도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일 정도였으니 임금 자신인들 그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 왕정을 이어 갔겠는가. 평민들은 왕을 부러워할지 모르나 사실 왕은 국사를 이끌어 나가기 위하여 나랏일을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는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이 얼마나 많겠는가.  때론 신하들이 왕권에 도전하고 역모를 당할까 하는 불안도 적지 않다. 왕비와 후궁과  배다른 왕자들 간의 갈등 등 골치 아픈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에 전해지는 최고로 장수한 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 394-491)이다. 아마 이름을 잘 지어서 장수한 것 같다. 97년을 살았다. 장수왕은 선친인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오늘 날의 만주벌 까지를 다스리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다스리던 왕이었다. 19살에 왕에 등극하여 97세에 죽기까지 78년 동안 왕이었다. 그는 1,500여 년 전의 인물이니 오늘 날로 하면 120년 쯤 장수한 인물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 땅에서 영원한 인생은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로 하여도 다윗은 70에, 솔로몬은 60에 이 세상을 떠났으니 천하를 호령하던 왕인들 이 땅에서 천년을 살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인간의 죄 됨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에 든다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하시던 임금 다윗조차도 아들 압살롬에게 왕권을 찬탈 당하여 맨 발을 벗고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로 울면서 왕궁을 아들 압살롬의 세력에게 내어 주고 감람산 자락을 돌아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도피하고 피신할 때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아니면 이 세상에 자기 스스로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애국가의 가사는 얼마나 성경적인가.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렇지 않나. 개인이든 가족이든 기업이든 나라이든 그 어느 민족이든 하나님이 보우하지 아니하신다면 이렇게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두려운 일들과 재앙이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29절 말씀대로 내 인생 앞에 몰아치는 광풍을 고요하게 하시고 물결을 잔잔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내 스스로에게 풍랑을 잠잠하게 하고 바람을 고요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그러므로 올 한해도 뒤 돌아 보며 험악한 세상 중에서 오늘까지도 복되게 살아오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광풍 중에도 평온함으로 기쁨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인생이란 것이 언제나 슬픔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즐겁고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아랍 사람들의 속담 중에는 “날마다 햇볕만 쪼이면 사막이 되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 않나. 살다 보면 맑은 날도 있고 살다 보면 흐린 날도 있는 법이 아닌가.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밤이 깊어 가면 새벽이 밝아 오듯이 인생살이가 돌고 도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처럼 봄이 가면 여름 오고 여름 가면 가을이 찾아오고 아름다운 가을이 깊어 가면 추운 겨울이 찾아오듯이 말이다. 겨울이 춥다고 해서 인생의 끝인가. 폭풍한설 몰아치는 강추위 속에서도 겨울을 살아가는 우리는 개나리와 진달래꽃이 만발하는 새 봄을 기다리지 않나. 그러므로 30절 말씀처럼 인생이 평온 할 때에는 기뻐할 줄을 알아야 한다. 지금 평안한데 이 평안이 과연 얼마나 갈까 하고 불안해하느라 지금의 평안을 누릴 줄 모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인가.

잠언 15장 13절에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얼굴이 빛나기 때문에 마음이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그 반대가 아닌가.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면 그 얼굴은 자연히 빛이 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그 심령과 그 얼굴이 모두 다 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갖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같은 나이 또래의 그 누구를 만나 보아도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 온 이들은 몇 십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도 그 얼굴이 빛이 다르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다지 않나. 사람이 나이 40이 넘고 나면 자신의 얼굴을 책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시편 30편 5절에 보면,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하였다. 이 시편 30편은 다윗이 고백한 성전 낙성가이다. 다윗은 성막 중심으로 예배 생활을 하다가 인생을 마쳤다. 그러나 항상 그에게는 임금인 자신이 살아가는 왕궁보다 더 좋고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하고 더 귀한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다윗의 시편인 30편 2절에 보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아마도 어느 때에 다윗도 병으로 고생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 같다. 그와 같은 다윗의 기도와 부르짖음을 들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고쳐 주셨다는 간증이 섞인 고백이 아닌가. 다윗은 인생의 우여곡절이 참으로 많았던 주인공이다. 그런 그의 고백은 시편 30편에도 여전히 배어 있다. 시편 30편 11절에 보시면,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께 경배하고 있지 않나.


인생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하며 감사.
찬송은 성도의 특권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족하여 할 뿐 하나님께 찬송할 줄을 모른다. 찬송이란 하나님을 높여 드리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송축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겸손한 행위이다. 그러면 과연 누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송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시편 30절 4절에 보면,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하였다. 주님의 성도된 자들만이 진정으로 여호와를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 된 성도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인 시편 107편에 보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8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라고 하였다. 이 똑 같은 고백이 15절, 21절, 31절에 반복되고 있다. 우리 말 표현에는 찬송하라고 하였지만 영어 성경에 보면 감사하라고 하였다. “Let them give thanks to the LORD for his unfailing love and his wonderful deeds for men.”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391장의 1절과 2절은,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내 모든 짐 벗기시네”
라고 찬송을 시작한다. 그렇다. “A wonderful Savior is Jesus my Lord, A wonderful Savior to me...", “A wonderful Savior is Jesus my Lord, He taketh my burden away..."라고 찬송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이 찬송의 가사를 쓴 파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 여사는 평생토록 앞을 보지 못하고 살면서도 항상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여 기쁘고 즐겁게 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하였다. 태어난 지 6개월 때에 눈병을 치료 받다가 그만 의사의 실수로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다. 그런 불편한 몸으로 95년을 장수하면서 9000여 편의 찬송시를 썼다. 그녀가 두 눈을 실명한지 몇 달 후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늘 곁에서 그를 돌보아 주시며 성경 이야기를 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던 할머니가 그녀가 11살 때에 돌아 가시고 말았다. 그녀가 30살 때에 어느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이런 찬송을 들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그 날 그녀는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과 같은 나약한 여종을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하여 찬송을 따라 부르고 또 불렀다. “이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 날 이후 파니 제인 크로스비는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찬송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의 첫 찬송시는 우리 찬송 531장이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안 받고 점점 더 멀리가나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calling today calling today Jesus is calling, is tenderly calling today)

우리 말 찬송가에만도 그녀의 찬송시가 24곡이나 실려 있다. 그녀는 평생토록 기쁘게 감사하며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며 살았다.

그녀는 항상 부지런한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항상 손으로는 뜨개질로 목욕 수건을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그녀는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의 찬송시를 거의 다 외었으며 찬송가도 보고 부르는 사람들 보다 악보를 더 정확하게 기억하여 불렀다. 성경 말씀도 엄청난 분량을 장절까지 외울 정도였다.
그녀는 항상 검소하게 살면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살았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슬픈 말이나 후회하는 말이나 불평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살았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당신을 알게 되어 매우 행복합니다.”하고 먼저 인사하였고 그의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이 되었다.
그녀는 하나님 안에서 놀라운 영적 평안을 지니고 살았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불쌍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로하고 도왔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녀와 함께 하심으로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꼈다.

그러므로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깨닫아 알고 믿고 따르고 순종하며 여호와께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총을 찬송하며 살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행복의 길이며 이것이 참 인생의 길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찬송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날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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