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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내 안에 거하라(요15:1-12) 2014.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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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9-21 20:51 조회 18,046 댓글 0
 
내 안에 거하라(요15:1-12) 2014. 9. 21
 
 
 
포도 수확의 한 창 철이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요즘도 포도 맛이 한창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조생종 포도도 맛이 있지만 노지(露地)에서 수확한 요즘 포도가 사실은 더 달다. 봄철의 딸기도 맛있고 참외, 수박, 자두, 복숭아, 배, 사과 다 맛이 좋지만 포도가 참으로 맛있다. 흑포도, 청포도, 거봉 모두 다 제 각각 당도가 다르고 각기 다 맛이 새롭다. 포도는 주스로 해서 먹는 것도 좋지만 역시 한 알 한 알 따서 입에 넣는 그 맛이 참으로 좋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갈릴리 주변에도 포도가 흔하였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모세 때에 가나안을 정탐한 정탐꾼들은 땅에 끌릴 정도의 포도송이 가지를 베어 어깨에 메고 나올 정도로 대단한 포도송이를 증거물로 메고 모세 앞에 나타난 적이 있다. 가나안은 풍요와 축복의 땅이었다.
 
예수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예수를 믿는 성도의 삶을 교훈해 주셨다. 예수의 비유는 절대로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교훈은 언제나 깊이가 있고 그렇게 살아가려면 수고와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는 포도나무이시다. 하나님은 그 포도원의 포도나무를 농사하시는 농부이시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라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그 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의 가지이다.
 
신앙생활은 곧 관계 생활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 성령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이웃의 관계가 곧 나 자신의 신앙 수준이며 신앙의 현주소이다. 지난 주일에 복음 전도란 예수께 그 누군가를 중매하는 일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후서 편지 말씀을 묵상한 바 있다. 왜 예수께 중매하여야 하는가. 예수 안에 거하면 인생의 모든 숙제들이 풀려진다. 예수만이 인생의 대답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남편과 살면 인생의 모든 필요가 공급될 뿐만 아니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도 소유하게 된다.
 
신앙생활은 계속하여 끊임없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성령님 안에 거하는 생활이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먼저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다. 1643년에 영국 교회가 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안에는 이런 고백이 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서 영원히 나오신다.”
(The Holy Spiri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요한복음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면 요한복음 15장이 어디쯤에 있는 내용인 줄을 안다. 예수는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는 그 유명한 교훈의 말씀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기 전에 오라버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의 누이동생인 마르다에게 해 주신 말씀이시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회 즉 산헤드린 회의로 모여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하는 의논을 하는 내용이 요한복음 11장에 나온다. 53절에,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했다.
 
12장에는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 마을에 가신 내용이 나온다. 그 베다니는 죽었다가 예수로 인하여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사는 동네다. 나사로의 집에서 잔치를 벌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중에 예수께서 거기 계셨고 나사로도 예수와 함께 앉은 자들 곁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여동생 마르다는 음식 준비에 분주하였다. 그 때에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았다. 그 향유의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소문으로 인하여 예수 믿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대 제사장들은 아예 나사로까지 죽여 없애야겠다는 모의를 하고 있었다.(요12:10-11)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는 기도도 드리셨다.“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는 말씀도 제자들에게 하셨다.
 
13장에는 유월절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신 장면이 상세하게 나온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 하나가 예수 자신을 팔 것과 시몬 베드로에게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도 하셨다. 제자들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교훈의 말씀도 해 주셨다.
 
이 때 교훈 하신 말씀이 ‘거하는 것’에 관한 말씀이시다. 제자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좀 보여 달라고 할 때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하느냐”(요14:9)고 하셨다. 그리고 계속하여 강조하신 말씀이 예수 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고, 하나님 안에 예수께서 계신 것의 반복적인 설명이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게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요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 성령에 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고 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령님 안에 거하는 생활이란 반복적인 강조이시다.
 
그리고 해 주신 유명한 비유의 말씀이 포도나무 비유이시다. “나는 참 포도 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 15장의 비유 말이다. 장차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실 것이지만 영으로는, 즉 성령으로는 늘 곁에 계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리라는 강조의 비유 말씀이 곧 포도나무 비유이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이 포도원의 농부이시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가 포도원의 농부이시라고 했다. 아버지가 농부이시다. 그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생들을 바라다보시면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지 않아서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깨끗하게 제거하여 버리신다고 하였다. 이것이 포도 농사법이다. 포도원의 주인인 농부는 포도 농사가 잘되게 하려고 그 원 줄기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를 해마다 과감하게 잘라 낸다. 전지작업을 과감하게 한다. 냉정할 정도로 한다. 그래야 다음 해에 포도 농사가 잘된다. 포도는 해마다 새롭게 싹이 나서 자라는 새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2절 말씀은 포도 농사법을 관찰하셔서 너무나도 자세하게 아시는 예수께서 신앙생활의 원리를 이와 같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3절에 “내가 일러준 말”이란 포도나무의 포도 농사법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답게,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사는 법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포도나무의 원 줄기이실 뿐만 아니라 포도 농사법을 이 땅에 가르쳐 주시는 영농가이시다.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 성도들이 포도나무에 포도송이가 풍성하게 맺히듯이 열매가 풍성한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하려면 어떠해야 할까.
 
 
주께 붙어 있어야 한다.
2절에 “무릇 내게 붙어 있어”라는 말씀은 포도나무의 원 줄기이신 예수와 가지인 나와의 거리와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붙어 있어야 한다. 붙어 있다는 말씀은 0.1밀리미터라도 떨어지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아니 요즘 광케이블의 경우에 그 굵기가 얼마나 가는가. 백만분의 일 밀리미터라도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최첨단 현미경으로 보았을 때에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떨어진 것은 떨어진 것이다. 아주 조금, 즉 백만분의 일 밀리미터만 떨어져 있어도 그것은 붙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붙어 있는 것이다. 주님께 붙어 있고, 하나님께 붙어 있고, 교회에 붙어 있고, 목회자에게 붙어 있고, 신앙이 성숙하고 안정되고 모범이 되고 덕스럽고 주변에 그리스도인의 선한 영향을 미치는 성도들 간에 서로 가까이 밀접하게 붙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병들고 만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 지고 만다. 그렇지 않으면 불 태워지고 죽고 만다. 붙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하면 그 생각과 말과 범사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한 마디로 하면 언행심사에 있어서 예수께 붙어 있지 못하고 마귀에게 붙어 있고 사단에게 붙어 지내면 주님이 금방 알아차리신다. 그 결과는 결국은 주님이 제거해 버리신다. 물론 주님이 경고하시고, 기회도 주시고, 기다리신다. 그 마음에서 귀신이 떠나고, 마귀가 떠나기를 주님이 원하신다. 그러므로 간절하게 주님께 원하여야 한다. 사탄으로부터 벗어나서 예수께 붙어사는 인생으로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여야 한다. 그래야 성도다운 것이다.
 
부부도 붙어 있어야 한다. 떨어져 지내면 위험하다. 사탄이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 온다. 에덴동산의 하와를 보라. 남편에게 붙어 있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혼자 동산을 거닐다가 뱀을 만나서 뱀과 대화하다가 결국은 뱀의 꼬임에 빠져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타락하지 않나. 결국은 제 남편인 아담에게 까지 선악과를 먹게 하여 내외간에 모두 다 불행해지지 않나. 그러므로 붙어 있어야 한다. 붙어 다녀야 한다. 부부는 공간적으로 붙어 있고 시간적으로 붙어 있어야 한다. 물론 공간이나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붙어 있고 사상으로 붙어 있고 생각으로 붙어 있고 사랑으로 붙어 있고 믿음으로 붙어 있고 주 안에서 한 뜻으로 붙어 있어야 한다. 살다 보면 부부라도 떨어 져 지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어떻게 부부라고 밤낮 붙어서만 지내겠나. 물론 연세 들어가는 여성들 중에서 남편 없는 것이 복중에 복이라는 농담들을 하시긴 하지만 말이다.
 
부부가 붙어 있다는 말은 부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동상이몽(同床異夢), 즉 한 침대에 누워서도 생각이 다르고, 마음이 다르고, 사랑이 다르면, 꿈이 너무 다르면 그것은 이미 부부가 아니다. 남남이다. “아이고 저 새끼들이 불쌍해서 이러고 살지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이런 부부가 있단 말이다.
 
제대로 된 부부라면 일 년, 아니 십년을 떨어져 있어도 그 마음과 그 생각과 그 사랑과 그 첫 고백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50년을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부부는 부부인 것이다. 이처럼 제대로 된 성도라면 언제 어디서나 예수께 항상 꼭 붙어 지내야 한다.
 
장기려(1911-1995) 박사의 부인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다. 그는 6. 25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4일, 군대의 구급차를 타고 피난민들로 북적대던 평양의 종로 거리를 달리다가 그때 피난민 대열에 끼어 있던 아내와 다른 자녀들을 발견했는데도 결국은 아내와 함께 남하하지 못하였다. 둘째 아들만 겨우 데리고 남하하였다. 그는 1950년 12월 아내 김봉숙씨와 다섯 자녀를 북한에 두고 월남한 후 45년 동안 아내를 그리며 홀로 살았다. 재혼하라는 권유를 받을 때마다 "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이별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혼자 산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 6월 80세가 된 노인으로 아내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글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그날 아침 당신과 애들을 먼저 대동강변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또 평양의 종로 거리에서 차를 세우기만 했었다면, 여보!”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살아서 아내와 만날 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사실 나이 80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장기려 박사는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그 학교와 병원에서 일할 때 반드시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다.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를 하고 시작했다. 의사로서의 성실함과 신실함이 인정되어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다. 그는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께서 시무 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평생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다. 월남 후에는 부산에 산정현 교회를 설립하고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다. 박사라고 불리는 것도 싫어했다.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섬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장기려 박사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한 평생을 제물로 바치는 삶을 사시다가 1995년 성탄절 새벽 1시 45분에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 때 한국의 언론은 그를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 라고 불렀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나중에는 오늘의 고신의료원이 되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여 명의 간 관련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여서 항상 병원 행정 직원들의 볼 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장기려 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영원한 생명 자체이다.” 장기려, 그는 평생을 예수께 꼭 붙어서 지내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예수께 꼭 붙어 산 사람은 그 생의 나중이 점점 달라진다. 세상 향락에 붙어 산 사람과 예수께 붙어 산 사람은 그 나중 열매가 다르다.
 
 
예수 안에 거해야 한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께 붙어사는 것이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언제라도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는 깨끗한 가지로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 ‘거하다’는 헬라어 원어인 ‘메노’(mevnw)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영어로는 ‘remain’이다. 신약 성경에만도 118번이나 사용되었다.
 
‘거하다’는 ‘메노’는 떠나는 것의 반대 의미인 “머무르다, 존재하다, 남아 있다, 살다”는 뜻이다. 흔들리거나 도피하거나 도망가는 것의 반대 의미로, “반대에 맞서다, 견디다, 굴하지 않다, 굳게 서다, 굳게 지키다.”는 뜻도 있다. 이동하거나 변화되는 것의 반대로, “변함이 없이 여전한 상태로 있다, 그대로 지속하다, 계속 머무르다”는 뜻도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으시고 영원하신 속성을 설명할 때에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파멸, 파괴, 소멸의 반대 의미로, “남아 있다, 존속하다, 계속 살아가다”는 뜻도 있는데 이는 법적으로 유효하게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법적인 협정문서의 내용이나 유언장의 내용이 효력이 있는 것을 설명할 때에도 사용된다. 이는 성경적으로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그를 믿고 따르고 섬기는 자들의 마음속에 계속하여 머물고 거하는 영적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가령 요한복음 1장 32절에,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고 했는데 여기서 사용된 ‘머물렀더라’는 단어가 바로 ‘거하다’라는 ‘메네’이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이미 수 없이 누누이 반복하여 해 주신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미 깨끗해진 인생을 말한다. 지난주일의 말씀처럼 예수께 중매되어 남편 예수를 기다리는 신부된 인생이라면 어른아이 남자 여자 그 어느 누구이든지 얼마나 정결한 신부의 마음가짐을 갖고 신랑이신 예수, 남편이신 예수를 기다리며 살겠나. 이처럼 예수 안에 거하는 생활이란 예수의 말씀으로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이다. 내 안에 열매 맺을 수 없는 불필요한 불신앙의 가지를 다 잘라 버리고 깨끗한 가지가 되어 참 포도나무의 줄기이신 예수께 붙어살고, 예수 안에 거하여야 하는 것이다.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인간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의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 안에 있어야 하고, 참 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 안에 거해야 한다. 5절의 교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는 지극히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이며 연합의 관계이며 관심의 관계이다.
 
이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독생자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으나 부활하게 하심으로 이룩하신 대속(代贖)의 사랑이다.
 
지난 수요일(2014. 9. 17)에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산 서부 아미파출소 경찰관들은 “남루한 행색의 할머니 한 분이 보따리 두 개를 들고 거리를 헤맨다. 한 시간째 왔다 갔다 한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60대 중반이니 젊은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경찰관의 질문에도 “딸이 아기를 낳고 병원에 있다”는 말만 반복할 뿐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치매를 앓고 있던 할머니는 보따리만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경찰은 인근 동네를 수소문해서 할머니를 아는 주민을 찾아 나섰고, 수소문 끝에 할머니를 딸이 입원한 부산진구의 한 병원으로 안내했다. 부산 경찰은 “갓난쟁이와 함께 침대에 누운 딸은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어 다 식어버린 미역국과 나물반찬과 흰밥을 내어 놓는 엄마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고 했다. ‘어서 무라’(어서 먹어라) 치매를 앓는 엄마가 아기를 출산한 딸에게 반복하는 말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조리원 병실의 직원과 간호사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예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그래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 예수의 계명을 지켜야만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들을 향하신 예수의 계명은 이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고 하셨다. 예수 안에 거하며 살아가면 예수의 기쁨이 내 안에 있어서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예수의 계명은 예수 안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딸과 며느리를, 아버지가 아들과 사위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사랑이다.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이웃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을 사랑하며 그 분 안에 거하는 것이 포도 나무인생인 것이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인생은 제거된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서 말라 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그 버려진 포도나무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태워 버리고 만다. 예수 밖에 거하면, 예수 떠나면 버려진 인생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택받은 민족이었지만 참 포도나무 인생으로 살지 못하고 불순종과 타락으로 우상 숭배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에 들 포도나무와 같은 참담한 민족으로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 생활을 하고 온갖 고난을 다 당하여야 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죄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이 죄다. 예수는 요한복음 15장 22절부터 25절 까지 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포도나무 가지이신 예수께로부터 벗어나서 예수 안에 거하지 않고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수 있다고 여기며 세상 적으로 치닫는 것이 죄다. 예레미야 2장 21절에 보면,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게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라는 경고의 말씀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 앞에 자기 자신을 예수 안에 거하는 자로 확증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된다. 예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6)고 하셨다.
 
이 ‘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4, 5, 6, 7, 9, 10절에 6절이나 반복하여 ‘거하라’는 말씀을 하고 또 하셨다. 그러면 왜 예수 안에 거하라고 이렇게도 반복하여 말씀하시나. 그것이 신앙생활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예수 밖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 나가고 세상적인 기준의 복을 받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매사를, 범사를 예수 안에서 행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예수 안에서 남을 섬기고 돌보고 나누고 베푸는 복음 전파와 사랑 실천에 앞장 서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야 예수의 제자가 된다.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가면 수많은 선교사들의 묘지와 묘비가 있다. 그 중에 감리교를 전파한 헨리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새겨 있다. 루비 캔드릭(Ruby R. Kendrick, 1883-1908)선교사의 묘비에는,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라고 새겨있다.
 
루비 켄드릭이 미국 텍사스의 부모님께 보낸 마지막 편지가 역사에 전해진다.
 
이 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 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킬로미터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주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 본부에서는 철수하라고 지시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순교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 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으로 인해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죠?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내겠죠?
 
저는 이곳에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조선에 대한 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선을 향한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딸
Ruby Rachel Kendrik
 
그녀는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캔사스 성경 학교를 마치고 한국 선교를 지망하였으나 나이가 어려서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미국 남 감리교회의 파송을 받아 24살에 한국에 도착하여 선교를 준비하며 황해도 개성의 여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한글 말을 공부하다가 급성 맹장염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으나 그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이 편지를 보내 놓고 죽었다. 그런데 이 편지가 도착하던 때에 텍사스 엡옷 청년회 연합 대회가 모이고 있었다. 저들은 편지 내용을 받아 들고 너무 기뻐하였다. 그런데 이 편지가 도착한 그 다음 날 루비 켄드릭의 사망 소식이 미국에까지 전해졌다. 회의 참석자들 모두는 놀라고 슬퍼했다. 그러나 이 대회 참석자 중 20명이 선교사로 자원하는 놀라운 열매가 있었다. 그 후부터 텍사스 엡윗 청년회는 해마다 선교 헌금을 하여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지원했다. 루비 캔드릭은 죽기 전에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한국으로 오라고 일러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A. K. 젠슨 선교사의 묘비에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고 새겨 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줄기로 하여 그 분에게 가지되어 살고, 그 분 안에 가하며 살면 어떤 유익하고 좋은 열매가 주어질까. 요한복음 15장에서 10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많은 열매를 맺는다.(5)
둘째, 능력(能力)을 부여 받는다.(5)
셋째, 밖에 버려지지 않는다.(6)
넷째,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게 된다.(8)
다섯째, 그리스도의 제자(弟子)가 된다.(8-10)
여섯째,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11)
일곱째, 주님과 늘 교제하는 친구(親舊)가 된다.(15)
여덟째, 구하는 것마다 받게 된다.(16)
아홉째, 주의 택(擇)함을 입은 자가 된다.(19)
열째, 그리스도의 증인(證人)이 된다.(27)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어떤 능력이 열매로 주어질까.
 
-주님을 지혜롭게 전하는 능력(눅21:15, 행 6:10)
-믿음의 열매를 많이 맺는 능력(요15:5)
-다른 사람을 권면하는 능력(롬15:14)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는 능력(고전10:13)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할 능력(고후1:4)
-사단을 대적하여 이기는 능력(엡6:11, 13)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능력(딤후2:2)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능력(딛1:9)
-연약한 중에서도 능력을 발휘하는 능력(히11:34)
-혀를 제어해 말로 실수하지 않는 능력(약3:2)
 
평생토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신앙의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가지 인생 되기를 소망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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