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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장막 집과 영원한 집(고후5:1-10) 2014.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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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8-31 07:58 조회 19,673 댓글 0
 
장막 집과 영원한 집(고후5:1-10) 2014. 8. 31
 
 
한 여름을 지내다 보면 집을 떠나 계곡이나 강가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하던 젊은이들이 급류에 휩쓸려 불행한 일을 겪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가 더러 있다. 혹은 주택이 산사태가 덮쳐서 불행을 당하기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집은 아무리 좋고, 아무리 안전하고, 아무리 편리하고, 아무리 대단하여도 영원한 세상 집이란 없다. 수 백 년을 대대로 내려오는 종가집이라도 그 주인은 바뀌고 또 바뀐다.
바울이 우리의 육체를 가리켜 말하는 이 땅의 장막 집이란 더더욱 그러하다.
 
강원도 강릉의 선교장이란 곳을 둘러 본 적이 있다. 왕궁이 아니고는 우리나라 안에 개인이 자리 잡고 살아가던 환경 중에 그 만한 곳이 있을까 싶다. 300년 역사를 갖고 있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 그 후로 오늘 날까지 자손 10대에 이르도록 나날이 발전되어 증축 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드리우고 산을 넘어서면 동해 바다가 바라다 보이고 고택의 앞자락으로는 연꽃이 가득한 연못이 자리 잡고 있고 저 만치 호수와 나지막한 언덕과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그림 같은 경치이다. 과거에는 그 앞자락에 경포 호수를 배를 타고 다리처럼 이용하여 건너 다녔다고 해서 선교장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저 멀리 백두대간이 계절별로 한 눈에 들어오는 수려한 경관이다. 99간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의 사료가 될 만한 아름다운 곳이다. 1965년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중요민속 자료 제 5호로 지정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가꾸던 주인을 비롯한 대대의 선조들은 온데 간 데 없고 10대 자손들이 대를 이어 오고 있다. 300년이 지났어도 산천과 기와집은 옛 모습 그대로인대 인걸은 온데 간 데 없다. 몇 해 전에 그 곳을 둘러 본 기억으로는 시설의 한 편에 10여 대를 내려오면서 후손들 중에 누가 강릉 시장을 지냈다든가, 누가 출세하고, 누가 성공하여 세상에서 이런 저런 자리를 차지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였노라고 기록한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이처럼 세상의 집은 300년 혹은 500년 혹은 그 이상으로라도 개수하고 보수하여 그 건물을 유지할 수는 있겠으나 본문에서 말씀하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란 건물로서의 장막 집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인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의 삶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출세하고,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권력을 갖고, 아무리 재물이 많고, 그 아무리 지금 젊거나 지금 외모가 아름답다고 하여도 우리의 육신의 장막집은 영원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1절에서 말씀하는 ‘장막집’은 육체를 말씀하는 것이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집을 말씀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한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란 사실이 믿어지질 않아서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몹시 박해하던 주인공이었다. 그가 다메섹을 향하여 가던 사도행전 9장의 장면까지만 봐도 그렇다. 그런 그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던 예수의 부르심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그의 생이 바뀌었다. 그의 인생관이 변한 것이다. 예수 만나면 변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일날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자족해 하지 말고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를 개인적인 구주로 체험하고 주님으로 영접하는 영적 체험의 사건을 경험해야 한다. 이건 긴 설명으로 해결 될 일이 아니다. 예수를 만나야 한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글로바라하는 제자와 또 다른 한 제자인 두 사람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이십 오리 길을 동행하셨지만 주님이신 줄을 몰랐었다. 그런 저들이 엠마오에 도착하여 집에 함께 들어가시고 음식 앞에서 기도해 주실 때에 저들의 눈이 띄어져서 그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저녁에 식사도 하다 말고 다시 예루살렘까지 25리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숨어 두려워 떨고 있던 예수의 제자들을 찾아 가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과 자기들을 만나 주신 적을 전하였다.
 
바울은 요새 말로 하면 예수 만나기 이전에도 스펙이 좋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에게서 개인적으로 배운 수제자였다. 공부도 많이 했고 똑똑했다.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요 로마의 시민이요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요 히브리말과 헬라말에 능통하였고 모세의 율법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예루살렘에서 자리를 잘 잡고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신앙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란 의도 대단하였다. 그래서는 하나님을 벗어나서 갈릴리 출신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예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초대 교인들을 몹시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초대 교회의 첫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갈 때에도 그는 그렇게 돌탕에 죽어가도 죽어 싸다고 여길 만큼 종교적으로 잔인할 정도로 의협심에 붙들려 있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고린도 라는 도시가 당시에는 오늘 날의 뉴욕이나 런던이나 파리나 북경이나 서울과 같이 대단한 도시였다. 그런 고린도 도시에서 예수 믿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편지를 통해서 교훈한 말씀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땅에 있는 장막 집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집이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을 알고 믿고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2-4절에 보면 이 같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벗고 입는 의복에 비유하여 설명해 주었다. 유대인들은 옷을 벗어서 몸을 남에게 들어내 보이는 것을 어느 민족들보다 부끄럽게 여기는 민족이었다. 특히 2절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는 말씀은 예사로운 표현의 말씀이 아니다. 고린도에 보낸 첫 편지인 고린도전서 15장 53절 이하에서 이와 같은 사도 바울 자신의 신앙관을 분명하게 전해 주고 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15:53-54)
 
이처럼 우리가 옷을 벗거나 입는 것처럼 ‘썩지 아니할 것으로 입고, 죽지 아니할 것으로 입는 날’이 오리라고 선포하였다. 이는 마치도 우리가 추운 겨울날 입고 있는 옷 위에 코트를 덧입는 것과 같다. 이는 당시에 인간의 육체를 부인하던 영지주의자들을 더욱 의식해서 강조한 말씀이기도 하다. 즉 불완전하고 죄된 인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변화를 옷을 입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여 주었다. 이처럼 옷을 덧입는 성도의 소망이란 무엇인가를 4절 하반절에서 너무 명확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얼마나 힘찬 선언인가. 그렇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생의 은총,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인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서 살아갈 성도의 모습이란 이미 이런 것이다.
 
 
자, 그러면 그와 같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서 살아갈 성도의 모습은 어떠하여야 할까.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부활과 영생의 삶을 자녀 된 성도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이를 이루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으로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소망이 헛된 거짓 약속이 아닌 것을 보증하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여기서 ‘보증’(保證)이란 말은 약속을 반드시 이행한다는 뜻의 ‘선불’이란 경제 용어이다. 헬라어로 ‘알라본’(ajrjrJabwvn)이란 “첫 지불금, 서약, 담보, 보증금”이란 뜻이다. 이처럼 성령이 신령한 몸의 보증이 되는 것은 성령이 생명의 원천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려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부활과 영생을 선물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낯 설은 나라의 낯 설은 도시에 호텔을 예약하고 그 사용료를 선불하고 도착하여 예약 번호를 보여주면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숙소를 제공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집에서 살아갈 보증을 받은 성령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7절 말씀처럼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여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 즉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불분명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보여 지는 것에 인생의 모든 기준을 정하고 살아간다. 저들에게는 내일이란 없다. 더군다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이 없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누리고 떵떵거리고 잘 살면 되었지 무슨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하며 사느냐고 반격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머니의 태 안에 양수(羊水) 속에서 어머니에게 태로 연결되어 있다. 그 태 줄로 영양을 공급받고 생명이 자라나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10개월 동안 어머니의 태 밖에 이런 세상이 있는 것을 알았나, 보았나, 미리 답사를 했나. 그러나 ‘으앙!’ 하고 울면서 태어나 세상을 보니 이와 같은 육체의 삶이 70-80년 주어져서 나그네 인생길을 살아가는 것처럼 인간의 죽음 너머에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집이 분명히 있다.
 
우리가 지구의 저 반대편에 있는 지도로 확인하는 나라에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보면 그런 나라, 그런 도시가 존재하는 것처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인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의 실존을 믿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의 영생을 선물로 받은 우리라면 세상 사람들과 그 삶의 차원이 달라야 한다. 생각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힘쓰고 애 쓰는 바도 달라야만 한다. 우리의 시간, 재물, 관심, 취미, 경험, 노력을 기울이는 바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달라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아름다운 예배당 건축하고 이곳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안일에 젖어서 매 주일마다 만나서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먹고 교제하고, 더불어 사귀고 또 한 주간동안 세상에 나아가서 원하는 대로 세상과 짝하며 살다가 한 주일 후에 잠시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그런 일상의 만족으로 신앙생활을 자족해서는 안 된다.
 
9월달 추천 도서인 카일 아이들먼 목사의 <제자는 행동한다>는 책에서 강조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더 이상 믿는다는 말만 하지 말라, 깨달으라, 정직하라, 행동하라”고 도전하고 있다. 당신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하여야 한다. 무엇을 해야겠다고 말하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점프 대 끝에 까지 가서 서 있기는 하지만 실제 뛰어 내리지는 못한다. 아니 뛰어 내리지는 않는다.  신이 나는 경험이고 색 다른 경험일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마치도 그렇다. 번지 점프를 경험하려면 점프 대 끝에 까지 가서 서야 한다. 그리고 용기 있게 뛰어 내려야만 한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만 할뿐 경험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생활,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7절에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행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행동하여야 한다. 교회 생활은 우리의 믿음을 행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 땅 위에 만들어 놓으신 장소이다. 그러므로 내가 성도로서 교회를 중심으로, 성도 들 간에, 믿음으로 행하는 행동을 계속하여야 한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의 곁은 떠나 타국에 갔던 둘째 아들에 관한 비유의 말씀이 나온다. 예수의 천국 비유이다. 그 둘째 아들이 남의 나라에 가서 유산을 다 탕진하고 허랑 방탕하고 주색잡기를 즐기다가 거지가 되었다. 빈털터리로 남의 나라에 불법 체류하면서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었다. 돼지우리에 누어서 자시 신세를 탄식하고 있었다.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어 먹을 길이 없었다. 그야말로 굶어 죽을 신세가 되었다. 그 때 그가 그 돼지우리 안에서 탄식하였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15:17-19) 이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이지 행동이 아니다. 그런 그가 용기를 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되었다. 20절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것이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기도 혹은 묵상의 시간이든 혹은 이처럼 예배 시간에 ‘변화 되어야지, 행동으로 옮겨야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그러나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 깨달음과 행동으로 옮기는 중간 지대에서 서성거리고 망설이면서 시간이 흐르고 해가 바뀌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믿음을 행동화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교회만 들락날락 하면서 세월을 흘려보내고 만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많이 들었고 너무 자주 들었다. 이젠 몰라서 못 믿는 것도 거의 없고, 몰라서 행동하지 못하는 것도 거의 없다. 다만 내 안에 알고 있고 깨닫고 있고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중한 병에 걸려 있다.
 
이제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가 먼저 저 만치 멀리에 오고 있는 아들을 알아보고 동네 어귀까지 뛰어 나와서 측은히 여기며 달려 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비유의 그 아버지가 바로 내가 믿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 분에게로 돌아가면 그 분은 양 팔을 벌리시고 달려 오셔서 우리를 안고 입 맞추실 것이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새신을 신겨 주실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게 하실 것이다.
 
적어도 이 땅에 129년 전인 1885년에 시작해서 지난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현실은 암담한 나라였다. 물론 당시에도 왕족이나 지역마다 권력을 갖고 지배계층에 있는 이들은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도 말고 이 땅에서 살아가던 보편적인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둘러본 선교사들이 남긴 당시의 정황을 본국에 보고한 선교 편지나 저들의 선교 일기에 보면 100년, 110년, 120년 전의 구한말 조선 땅의 현실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그런 이 땅에 복음의 사람들이 들어 와서 배워야 하는 교육열을 불 붙였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 되었다. 인간의 신분을 구분하던 반상 제도가 무너지는 계기가 왔다. 뿐만 아니라 의료, 보건, 복지, 위생뿐만 아니라 술과 담배와 마약과 놀음과 음란과 일부다처제에 대한 경고뿐만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바르게살기운동, 부지런한 생활 운동, 정직하게 살기 운동, 더불어 살기 운동, 남의 말 좋게 하기 운동이 성령의 운동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 처처에 불길처럼 번져 가기 시작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선교사 하디였다.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의 의사요 선교사였다. 그는 성령운동가였다. 한국 이름은 하리영(河鯉泳)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출생한 하디는 고향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곳에서 2년여 동안 교편을 잡다가 1886년에 토론토 의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의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의대 2년 시절 "기독교 외국 선교 학생자원운동"에 가입하면서 해외 선교사의 꿈을 품었다. 1887년 켈리(Matilda Kelly)와 결혼하였고 1890년 의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 캐나다대학 선교회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지금부터 124년 전인 1890년 9월 30일, 가족을 모두 데리고 뱃길로 태평양을 건너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부산에 체류하던 게일 선교사와 함께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애비슨 의사와 함께 제중원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다음 해 4월에 다시 부산 선교지로 내려갔다. 그 다음 해인 1892년 11월 11일에 함경남도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기고 미 감리회 경영의 시약소에서 일하며 선교하였다. 이듬해 봄 전셋집을 얻어 그 스스로 진료소와 시약소를 운영하던 중 1898년 캐나다대학생선교회와의 8년간의 선교 계약 기간이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미국 남감리회 선교회에 가입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계속하여 한국에 머물러 선교 하였다.
 
1901년 10월 20일에는 원산 및 동해안의 미감리회 선교지역이 남감리회로 양도되면서 하디는 더욱 넓은 선교지역을 맡아 활동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미 1901년 3월 31일 김화 지경터에서 장년 15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강원도의 첫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자신의 선교 역량 부족과 영적 능력의 결핍을 글로 남겼다. "나는 3년 동안 남감리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터에서 애써 일을 하였으나 선교사업에 실패하였다." 그 뒤 그는 갈급한 심령으로 1903년 8월 원산에서 감리회 선교사 7명과 함께 모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남감리회 화이트(M.C. White) 선교사를 강사로 기도와 성경사경회를 열었다. 이때 하디는 큰 감화와 은혜를 받는 새로운 체험을 하였고,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하신 실증을 가지고서 나의 부끄러움과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과 믿음의 부족함과 모든 죄악을 자복하니 회중도 강한 죄의식과 믿음의 부족함을 비로소 깨닫고 모두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원산 부흥운동의 시작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1907년 연초부터 시작한 "평양 대부흥운동"은 그곳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이 로버트 하디 선교사를 초청해서 연합 사경회를 개최하면서 비롯되었다. 하디는 자신의 깊은 영적 체험을 간증하고 회개운동을 촉구함으로 한국 교회사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룩하게 한 중심인물이 되었다. 한편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던 중 1909년에는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1922년까지 재직하면서 학교의 기틀 확립과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16년에 〈신학세계〉를 창간하여 본격적인 신학 전문지로서의 문서선교의 틀을 만들었다. 1921~1927년에는 조선예수교서회 총무직을 맡아 활약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45년 동안이나 선교하였다. 그가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에 남매 중에 아들이 10살 때에 먼저 하나님 앞으로 가는 슬픔도 겪어야 했다. 1935년 4월 24일,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미시건 주 랜싱에 거주하며 노년기를 보냈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면서도 틈틈이 성경을 연구하여 신구약 총론과 마태, 마가, 야고보, 다니엘 서 등의 강해집을 출간할 정도로 말씀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이던 기도와 말씀과 성령과 섬김의 선교사였다. 그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생을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선교의 사람이었다.
 
 
늘 주와 함께 있어야 한다.
주일만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주와 함께 있어야 한다. 8절 말씀에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사나 죽으나 항상 예수 떠나지 않고, 하나님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창세기의 요셉이 그런 주인공 아닌가.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다니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이 모든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다 늘 주와 함께 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아닌가. 고린도 교회에 이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이 그런 주님의 사람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마포에 집사님 가게 개업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어느 높은 빌딩에 “주일은 주님과 함께”라고 쓴 선전 문구를 보았다. 아마도 신원 에벤에셀 본사 사옥인 듯하였다. 그 ㈜ 신원 에벤에셀의 박성철 회장은 성결교회의 장로이다. 그는 전남 신안군의 섬에서 태어났다. 6.25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초등학교도 3학년 다니다가 그만 두어야 했다. 그런 그가 옆에 있는 다른 섬인 고하도에 가서 중앙 감화원이란 곳에 들어갔다. 그곳은 고아원이 아니라 불량배 임시 수용소와 같은 곳이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낙심한 그에게 보사부 공무원 안병현 씨가 나타났다. 그가 천사였다. “네가 하나님한테 열심히 기도하고 성실하게 공부하면 정규학교에 편입시켜 줄게.” 그는 이렇게 제안하면서 그에게 살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그날부터 날마다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초등학교 과정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30대 때에 신원통상이란 사업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절대로 믿고 신뢰하였다. 그는 과로로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는 신원통상을 세운 지 10년만인 1984년에 5천만 달러를 수출할 수 있었다. 창업한 지 25년째인 1996년에는 1조2천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물론 (주)신원도 IMF 위기 때에 큰 어려움을 당해야 했다.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10개가 넘는 계열사들이 3개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구조조정 후에는 다시 반석 위에서 든든히 서가고 있다. 2000년에 신원그룹은 525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여전히 국내 의류업계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그의 신원은 박성수 회장의 이랜드와 함께 하나님의 기업다운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는 회사 이름에도 ‘에벤에셀’이란 이름을 사용하길 즐겨 한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7:12)는 성경 말씀에서 받은 은혜를 그대로 생활 속에 실천해 가는 것이다. 그는 늘 하나님께 꼭 붙어 지내는 인물이다. 그는 8절 말씀처럼 항상 주와 함께 지내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의 회사 전 직원은 나라 안팎에서 날마다 아침마다 전 직원 예배를 드린다. 그는 중국에도 “주 예수를 믿으십시요”라는 말씀을 중국어로 볼펜에 새겨 가지고 가서 전도한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그는 언제나 늘 주와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는 주일을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 아니다. ‘주일은 주님과 함께’라는 그의 전도 문구가 그의 사옥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십일조를 드려도 그만 안 드려도 그만이 아니다. 봉사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다. 전도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다. 예배, 기도, 찬송, 말씀묵상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하고 늘 주님과 함께 있는 증거를 나타내 보여야만 한다.
 
 
항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항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힘쓰노라”고 하였다. 기쁨은 복음의 시작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 태어나시자 누가복음 2장에 보면 홀연히 수많은 천국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처럼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들 가운에 평화의 시작이었다. 예수의 탄생을 베들레헴 산언덕의 목자들에게 전하는 천사의 내용도 이것이었다. “무서워하지 말라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그렇다. 예수의 탄생 소식은 천하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하지 않나.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핍박자 사울이 복음 전파자 사도 바울로 변한 후에 강조한 신앙생활의 근본은 무엇인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우리가 부르는 <나 주님의 기쁨> 이란 복음성가의 가사 대로이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우리는 때가 되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선악간에 행한 바를 따라 심판과 상급을 받을 하나님의 아들딸들이다. 그러므로 찬양의 사람, 기쁨의 사람, 감사의 사람,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가짐과 마음의 소원과 입술의 말과 매사의 행동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모습이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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