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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학고레의 하나님(삿15:9-2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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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10-06 07:36 조회 20,876 댓글 0
 
오늘 말씀의 제목 중에 나오는 ‘엔학고레’란 ‘부르짖은 자의 샘’이란 뜻이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는 원인 제공자가 삼손이란 판단을 하게 된 동족들인 유다 사람들에 의하여 새 밧줄에 결박된 삼손이 블레셋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갑자기 여호와의 영을 삼손에게 부어 주셔서 그 새 밧줄을 불탄 삼베 조각이 떨어져 나가듯이 풀리도록 도와 주셨다. 그 후에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들고 나가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쳐서 죽였다. 그 후에 지치고 심히 목이 마르게 된 삼손이 여호와께 타는 목마름을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을 천명이나 싸워 이겼으나 이제는 자기 자신이 목이 말라서 죽을 것만 같다고 하소연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 곳의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거기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하셨다. 목이 말라 탈진된 상태로 죽을 것만 같던 삼손은 그 솟구쳐 나오는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고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그 후로 그 곳 이름을 ‘부르짖은 자의 샘’이란 뜻으로 ‘엔학고레’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사 삼손은 기도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사사기 13장 8절에 보면 아내에게 나타나서 말씀을 전한 하나님의 사자의 등장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진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나온다.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아들 삼손을 낳기 전에 아버지 마노아는 신앙인으로서 분명한 기도의 제목을 갖고 기도하였다. 어느 날 마노아의 아내가 밭에서 혼자 일하고 있을 때에 다시 천사가 나타났다. 아내는 급하게 이 사실을 남편 마노아아게 알렸고 마노아는 급하게 밭으로 뛰어가서 그가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인지를 확인하였다. 12절에 보면,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라고 물었다. 한 가지 소원과 두 가지 질문을 물은 것이다. 그 한 가지 소원이라 장차 태어날 아들이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실인답게 성장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두 가지를 질문하였다.

첫째,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를까요?
둘째, 부모 될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할까요?

이것은 가정에서이든, 교회에서이든 아들딸 즉 자녀들을 낳아 기르는 부모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때에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 즉 천사를 통해서 장차 태어날 아들 삼손을 나실인으로 키울 것을 명령하셨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
․어떤 부정한 것도 만지지 말라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으로 살아가라.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을 다 지켜라.

이것이 천사를 통하여 삼손의 부모에게 전달된 나실인의 생활 준칙이다. 이는 오늘 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런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싶은 부모의 소원은 사사 시대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말이다. ‘절제, 성결, 헌신, 순종’의 틀 안에서 낳고 성장하길 원하다는 부모의 고백이요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기대가 아니신가.

장차 하나님께 바쳐질 나실인의 삶을 살아가게 될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천사의 통보를 받은 삼손의 부모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제물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이었다. 바위 위에 차려 놓고 제사하던 제물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응답하시는 증거로 기적이 일어났다.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갔다. 그 때에 놀란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얼마 후에 아들이 태어나자 그 이름을 삼손이라고 하였다. ‘삼손’이란 ‘태양, 섬기는 자, 귀한 자, 강한 자’라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그런데 정작 천사를 통한 나실인의 기대 가운데 태어난 아들 삼손의 생애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셨고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다.(삿13:25)

본문 말씀에 보면,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며 이방의 여인인 블레셋 사람의 딸을 보고 좋아하던 삼손은 결국 뜻대로 결혼을 이루지 못하고 아내 될 여인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미 일주일간 계속되는 결혼 잔치로부터 삼손과 블레셋 여 인과의 결혼은 순조롭지 못하였다. 신랑 삼손이 결혼식을 진행하며 냈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블레셋 남자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결국은 블레셋 남자 삼십 명이 삼손의 아내 될 신부를 꾀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 삼손은 울며불며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려고 요구하던 신부의 처세에 실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블레셋의 남자들 삼십 명은 집요하게 삼손의 신부를 꾀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수수께끼를 풀면 삼손이 저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 옷 삼십 벌을 줄 것이고 만약에 풀지 못하면 저들이 삼손에게 그 만큼의 의복을 바쳐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 모든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삼손이 분노하였고 삼손은 딤나에서 40킬로미터 즉 100리 떨어진 아스글론 지역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블레셋 사람 30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저들의 의복 삼십 벌을 구해다가 신부 곁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에게 건네주고는 이스라엘 진영의 제 아버지 마노아의 집으로 되돌아 가 버리고 말았다. 그 과정에 장인 될 사람의 간계도 있었다. 결국 삼손이 이스라엘의 아버지 마노아의 집에 와서 머무는 동안에 블레셋의 장인 될 이는 자기 딸을 블레셋의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보내고 말았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에 삼손은 장인에게 건넬 선물로 염소 새끼를 가지고 장인 될 가정을 찾아 갔다. 그러나 이미 삼손이 신부 삼고 싶어 했던 아내감은 다른 블레셋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장인은 천연덕스럽게 “자네가 좋아하던 내 큰 딸보다 둘째 딸이 더욱 아름다우니 언니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으라.”고 청하였다. 이는 당시에 딸을 낳아 키우던 블레셋 아버지들의 결혼관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의 블레셋 딸들은 친정아버지에게 재산을 늘려 주는 냥으로 시집 보내지곤 하였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당시에 블레셋 나라에서 행해지던 결혼 풍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사디카(Sadiqa) 결혼이란 것이다. 사디카란 ‘애인’ 혹은 ‘여자친구’라는 뜻이다. 이는 고대 아라비아의 결혼 풍습에 근거한다. 이 사디카 결혼이란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결혼식을 행하고 그 후에도 신부는 자기 집에 머물러 산다. 그리고 신랑이 정기적으로 신부의 집에 선물을 들고 가서 신부를 만나는 결혼 제도를 ‘모타’(mota)혼(婚) 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결혼 후에 신랑이 아예 신부 집에 머물러서 살아가는 처가살이와 같은 결혼 제도인데 이를 ‘비나’(beana)혼(婚)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삼손이 아내 될 이의 집에 염소 새끼를 갖고 찾아 간 것을 보면 삼손의 결혼은 ‘모타’ 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결혼 생활조차 거부당하자 화가 잔뜩 난 삼손은 여우 300마리를 잡아서 그 꼬리를 엮고는 불이 잘 붙도록 싸리나무와 갈대 나무로 홰를 만들어 달고 그 홰에 불을 붙여서 밀밭과 포도원과 감람나무 밭을 불살라 버렸다. 추수철에 곡물과 과실의 소득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원주민들은 그와 같은 피해를 입힌 삼손이 분노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삼손의 장인 될 번한 이의 소행이라고 판단해서 삼손의 장인 될 이와 삼손의 아내 될 번한 여인을 끌어내서 불살라 죽이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고 험악해져만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삼손은 더욱 화가 났고 분노를 참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삼손은 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쳐서 진멸하고 에담의 바위틈에 가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본문으로 읽은 9절 바로 앞 절인 8절의 내용이다. 이 곳, 에담은 베들레헴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위가 많은 산악지대이다. 아마도 삼손은 자기 고향 집의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산악지대로 피신하여 숨어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은 삼손의 이런 소행으로 인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땅 레히라는 곳에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동원하여 쳐들어 왔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결박당함을 아시는 하나님.
블레셋이 유다 땅을 쳐 들어오려는 전쟁 위기의 때에 유다 백성 3,000명이 삼손에게로 몰려들었다. 전쟁의 제 1 원인을 제공한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진영으로 넘겨 버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에담의 바위틈에 숨어서 지내던 삼손은 새 밧줄에 결박되었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인계되고 말았다. 이는 당시에 유다 사람들의 상태를 대변하는 장면이다. 아무리 민족적인 위기가 닥치더라도 똘똘 뭉쳐서 한 동족의 생명이라고 보존하고 다 같이 힘을 합쳐서 위기를 극복하려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다인들은 삼손 한 사람 정도만 결박해서 적국에 넘겨 버리면 사태가 안정되고 동족인 유다인들 간에 평안하게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는 매우 위험한 집단 이기주의 현상이 전염병처럼 번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식의 완악한 타락의 실상을 보게 하는 장면이다.

우리가 그동안 대하여 아는 대로 삼손은 3,000명 그 이상의 세력이 달려들어도 능히 이겨 낼만한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용사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순한 양처럼 동족인 유다인들에게 결박되어 블레셋에 인계 되고 말았다. 12절에 보면 삼손은 자기를 결박하려고 몰려드는 동족들에게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고 부탁하는 말을 하였다. 삼손은 대적인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공격적이고 기습적이면서도 정작 동족들에게 대하여는 사랑이 지극하였다. 삼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신 사사였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동족인 유대인을 위하여 보냄 받은 세례 요한을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을 강요하던 유대인들의 모습에서도 역력히 들어난다. 물론 이 같은 모습은 쉽게 회개 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거짓과 위선의 가면 뒤에 숨기고 가리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도 잘 드러난다.

만약의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의(義)와 인(仁)과 신(信)에 대하여 예민한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그 어떤 결박 가운데에서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를 분명하게 선언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라고 하였다. 그렇다. 내 안에 ‘예수의 생명’만 살아서 역사한다면 그 어떤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부족함이 많고 실수투성이이고 나실인의 모습에서 멀리 떠난 것 같은 삼손인데도 여전히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시고 사용해 가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 삼손의 동족들인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새 밧줄로 결박해서 블레셋에 넘겨주자 의기가 양양해진 블레셋 사람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모여 들었다. 항상 블레셋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던 삼손인데 새 밧줄로 꽁꽁 매인 채로 결박되어 블레셋에 인계 되었으니 얼마나 저들이 기뻐하였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그 어떤 결박과 그 어떤 억압이 우리를 압제하고 억누를 지라도 결코 그 어떤 환경이든 조건에 끝까지 억눌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삼손은 여호와의 영이 갑자기 그에게 임하자 강하게 그의 손을 결박하였던 새 밧줄이 불에 타 버린 삼베 조각처럼 술술 풀려 나갔다. 요즘 그 무엇에 결박되어 우울하고 답답한 날들을 지내고 있는가. 결단코 소망을 버리지 말자. 성도된 우리는 그 어떤 악의 세력이 우리를 결박할 지라도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롭게 일어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소망을 잃지 말자.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타 없어졌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도우셨도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시118:10-17)

예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승천하시므로 이룩하시고 다시 오실 재림의 약속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결코 그 어떤 결박에라도 결박되지 않고 영원한 자유와 해방을 누리며 승리하리라는 소망을 갖고 살아가자.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 하나를 손에 들고 나가서 블레셋 사람 일 천명을 쳐서 이겼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전쟁의 승리를 경험한 삼손은 스스로 2행시를 지어서 노래하였다. 16절이 그 내용이 아닌가.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기며 작은 것으로 엄청나게 큰 것을 이기게 하실 수 있다. 우리도 날마다 이런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대 천의 엄청난 싸움에서 이긴 삼손은 몹시 지쳐 있었다. 목이 말라 타 들어 가는 갈증을 느낀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삼손의 기도 내용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손을 빌리셔서 큰 구원을 이룩하시는 전능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삼손이 열심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목말라 죽어 가던 삼손에게 응답하셨다. 부르짖어 기도하던 그의 곁에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거기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해 주셨다. 할렐루야. 그리하여 ‘레히’라는 그 곳 지명을 바꾸어서 ‘엔학고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샘물이 터져 나왔다는 뜻에서 이름 지은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 그대로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자. 우리가 믿고 부르짖고 간구하고 주를 따르며 섬기면 하나님은 시시 때때로 크고 은밀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타는 목마름을 갖고 우상에게 빌고 세상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전능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께 부르짖고 기도하여야 한다. 예수께 부르짖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게 해 주실 것이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구하는 자가 구하고 찾는 자가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반드시 열릴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갖고 인생의 목마른 갈증의 제목을 갖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자.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주님(X2)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마음 다해"

금번 천안남지방 연합 집회에 갔다가 하늘중앙교회 유영완 목사님을 통하여 책 한권을 선물 받았다. 올 2013년 4월에 출간된 정근모 박사의 책이었다. <소명 앞에 무릎꿇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이라는 긴 제목의 책이었다. 그가 알고 있은 국내외 크리스천  지도자 19에 관한 신앙 일화들을 소개한 흥미 있는 책이었다. 그 중에 데이브 럭스 주대만미국 대사에 관한 글을 보았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 곁에서 안보 담당 부수석까지 지낸 요인이고 나중에 대만 대사를 지낸 이였다. 그가 워싱턴에서 비행기로 뉴욕시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허드슨 강을 지나서 통행요금 정산소를 지나는데 택시 기사가 현금이 떨어졌다고 선불을 요구하였다. 지폐를 건넸더니 잔돈으로 1달러 자리를 돌려주었는데 그 지폐에 인쇄된 ‘IN GOD WE TRUST’라는 문구 밑에 누군가가 볼펜으로 “Do you really trust me?"(너는 정말로 나를 믿느냐”)는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묻는 질문을 써 놓은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평소에 신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자임하며 날마다 국가적인 큰일들 앞에서 긴장을 풀지 못하고 대통령의 최 측근 중의 한 사람으로 지내야 했던 그는 그 질문 앞에 처절하게 회개하는 경험을 갖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라고 하면 그 어떤 ‘염려, 불안, 초조, 두려움, 실패, 좌절, 질병, 억울함, 초 조, 억압, 결박’이라도 불에 탄 삼베처럼 훌훌 벗어 던지고 엔학고레의 하나님 축복을 누리는 풍성한 은총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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