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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점점 흥왕(興旺)해 가는 주의 말씀(행19:20-4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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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8-04 20:35 조회 17,001 댓글 0
 
기독교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다. 지난 이천년, 교회의 역사가 곧 말씀의 역사란 말이다. 이 땅에 교회가 탄생되고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가능해졌다. 주의 말씀이 임하는 곳마다 믿는 성도들의 수를 점점 더해서 흥왕한 교회를 이루었다. 환난과 핍박이 오면 기독교가 사라지고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없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고난과 핍박의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매를 몹시 때리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수 없이 하고,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다. 사도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3-28)라고 자신이 겪어온 고난의 날들을 간증하였다.

이처럼 고난과 역경과 환난과 두려움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주의 말씀의 힘이다. 말씀은 곧 씨앗과 같은 것이다. 생활 중에도 보면 바위 틈 사이에서 자라 오른 멋진 소나무를 보라. 길가의 틈바구니에서 비집고 올라와서 꽃을 피우는 민들레꽃을 보라. 씨앗은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으므로 세월이 지나면 무성한 숲을 이루고 큰 나무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때가 되어 30, 60, 100배로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원리는 예수님의 유명한 천국 비유 말씀이 아닌가. 요한복음 1장 1절이 무엇인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란 말이다. 그렇다. 말씀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에 흥왕해지고 믿는 자의 세력을 더 해가는 것은 당연한 원리가 아닌가.

운전 중에 극동방송에서 소개되는 생방송의 간증을 들었다. 예수를 반대하고 오히려 예수 믿는 아내를 핍박하고 예수를 조롱하던 남편이 우여곡절 끝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인천이 직장인 남편이 요즘은 출근하다가 말고도 갓길에 차를 세워 놓고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울면서 간증한다는 것이다. 새벽에 묵상한 말씀이 출근길에 다시 생각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감격이 되고, 감동이 되어서 운전하다 말고 차를 세워 놓고 울먹이는 소리로 아내 앞에 간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힘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운동력이 있어서 인생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힘이 있단 말이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뜻과 생각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는 말씀도 이어서 나온다.

내 마음에 주의 말씀이 들어 왔는데도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거짓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씨앗은 병든 씨앗도 있고, 곰팡이가 난 것도 있고 이미 썩어 버린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병들거나 곰팡이 나거나 썩는 경우란 없다. 단지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 밭이 문제인 것이다. 내 마음의 밭 즉, 심전(心田)이 길가나 가시덤불이나 돌짝밭과 같은 심령으로 되어 있다면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밭에 뿌려져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 마음의 자세와 태도인 것이다. 내 마음에 바뀌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은 뿌리를 내리고 겨자나무가 자라서 새가 깃들 듯이 무성한 가지를 가진 큰 믿음의 나무로 자라나게 되어 있다.

최근에 성전 마무리 공사와 본당의 성물과 집기를 제작하는 마지막 과정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연세대학교를 방문한 적이 두어 차례 있다. 정문에서 언더우드 동상이 있는 운동장까지 곧게 뻗은 주진출입로를 몇 백 미터 쯤 가다 보면 왼편의 잔디밭에 용재 백낙준(白樂濬, 1896-1985) 박사의 웅장한 동상이 있다. “그는 1957년에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을 통합하여 오늘 날의 연세대학교로 출발하던 당시에 초대 총장을 지낸 주인공이다. 교육과 학문, 민족봉사와 자유정신의 구현에 뜻을 두고 일생동안 학교와 민족을 위하여 살아간 후학들의 정신적 지주이고 민족교육의 스승이며 겨레의 지도자였고 하나님의 종인 목사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백낙준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백영순은 앞을 보지 못하는 무당이었다. 남자 무당을 박수라고 하지 않는가. 하루는 어느 마을의 한 집에 초청을 받아 굿판을 요란하게 별리고 있었다. 징을 치는 소리에 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지나가던 기독교 전도자 한 사람이 “자식들이 망할 짓 그만 집어 치우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하고 소리를 쳤다. 화가 잔뜩 난 박수가 “너나 예수 믿고 천당인지 백당인지 거가라”하며 버럭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러데 집에 돌아온 그 박수에게 그 날 밤부터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눈만 감으면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하는 말이 너무나도 또렷하고 선명하게 반복하여 들리는 것이었다. 정신은 혼미해지고 잠은 전혀 잘 수가 없었고 음식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여러 날 째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이웃 마을에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은혜를 받았다. 온 가족이 교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가정의 이야기를 들은 선교사 한 사람이 이 백영순씨의 아들들 중에서 낙준이란 아들에게 미국 유학길을 열어 주었다. 아들 백낙준은 평북 선천에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천진의 신학교를 거쳐서 22살 때에 미국의 파크 대학교로 유학할 길이 열렸다. 우리나라에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한해 전인 1918년의 일이다. 당시에 미국 유학이란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파크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프린스턴과 예일대학교에서 계속하여 공부하고 31살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목사 안수도 받았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귀국하였다. 그 후에 그는 연세대학교 총장, 문교부 장관, 참의원등을 지내며 참의원 의장을 지내는 등 교육과 정치의 일선에서 헌신하는 국가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처럼 말씀이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이 흥왕해 지고, 개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구라파인 그리스의 아덴에서 선교하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를 거쳐서 오늘 날의 터키 지역인 아시아의 에베소에 도착하여 선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에베소 지역에서 수많은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도록 사도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셨다. 하나님이 바울을 높이시고 사용하기 시작하시자 바울의 손만 얹어도 각색 병자가 건강해지는 기적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하여도 병이 떠나가고 악귀가 도망치는 기적이 일어났다. 에베소에는 유대인이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기는커녕 마술로 돈 벌이를 하면서 타국 생활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에베소는 마술하는 이들이 많던 도시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능력이 나타나자 그 마술하던 유대인들이 스스로 마술에 관련된 책을 모아다가 불 태워 버리는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사도행전 19장 19절에 보면 그 책을 값으로 환산하면 은 오만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의 화폐단위로 하면 얼마 정도일까 궁금하지 않는가. 은화라는 것이 당시에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그러므로 하루 10만원이 노동자 품값이라고 치면 은 오 만개라는 화폐 단위는 50억 원에 해당한다. 이 쯤 되면 당시에 에베소란 도시가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마술과 같은 비상식적인 일에 운명을 걸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는가 짐작이 되지 않는가. 안타까운 것은 사도행전 19장 13절과 14절에 보면 유대인들 중에서 마술을 하거나 아데미 신상을 섬기는 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우상의 소굴이요 마술과 같은 헛되고 터무니없는 일에 시간과 세월과 재물을 허비하며 꿈이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넘쳐 나던 도시가 에베소였다. 그곳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던 사도 바울의 선교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었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일이 불길처럼 번져 가기 시작하였다. 그와 같은 에베소 지역 선교 열매를 성경은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In this way the word of the Lord spread widely and grew in power.)

(행19:20)고 하였다.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복음 전파는 에베소 온 도시를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처럼 누룩이 서 말의 가루 속에 들어간 것처럼 번져 가고 부풀어 오르게 하는 힘이 있다.


도시를 소동케 한 복음(福音).
그렇다. 복음은 분명히 주변을 소동하게 하는 운동력이 있다. 복음이 한 개인이나 어느 가정에 들어갔는데 그 복음이 그 가정에서 운동력을 갖지 못한다면 정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들어가면 그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과 갈등하고 대립하고 부작용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이는 진리와 거짓의 싸움이요 어둠과 빛의 싸움이며 죽음과 영생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빛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 비추이기 시작하면 어두운 생활을 청산하고 빛의 광명한 삶으로 삶이 바뀌게 되어 있다. 새사람이 된단 말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새사람이 되게 되어 있다. 이것이 복음의 운동력이며 말씀의 힘이다.

내 마음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 왔는데도 내 안에서 전혀 고민이나 갈등이나 번민이나 회의나 위기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나 한 사람이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과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복음에 다하여 싫든 좋든 반드시 반응하게 되어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복음 전파를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도’(道)라는 표현으로 몇 차례 반복하여 표현하고 있다. 사도행전 9장 2절과 18장 25절과 26절, 그리고 본문인 19장 23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도’(道)란 표현은 에베소 사람들이 우상으로 섬기고 있던 아데미 여신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으로 주목하게 된다. 아덴 즉 아테네의 시민들이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고 철학적인 논쟁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름 없는 신’이란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고 비는 어리석은 우상 숭배의 도시였다. 그런데 이곳 에베소도 대단한 우상숭배의 본거지 중의 한 곳이었다. 에베소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섬기는 우상은 아데미라는 신상이었다. 저들이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고 숭배하는 이유는 여성의 상징인 12개의 젖가슴을 만들어 붙여 놓고 일 년 열 두 달 동안 매달마다 이 신이 다산(多産)과 풍요를 주는 신이라고 믿었다.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를 대지의 어머니 신이고 모든 신들과 사람의 어머니라고 믿었다. 그 지역 근동의 소아시아 사람들은 태곳적부터 이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풍요의 신으로 섬기며 살아 왔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그 규모가 길이가 120미터에 폭이 60미터였다. 이 아데미 신은 주변 도시와 이웃 나라에 까지 소문이 나서 아데미 신상 앞에 와서 절하고 경배하려는 순례자들과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하다 보니 자연히 제물을 파는 상점과 음식점과 기념품점과 숙박업소 등이 성업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하다 보니 24절 말씀처럼 은으로 만든 아데미의 신상과 신전의 모형이 불티나게 팔렸다. 사람들은 자기 몸에 아데미의 신상이나 신전의 모형을 지니고 다니거나 집안에 장식해 놓는 것을 큰 위안이요 축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27절에서 거론되는 아데미의 신전은 주전 550년에 건축된 웅장한 건물이었다. 그런데 이 우상의 신전이 주전 356년에 에스트라토스(erostratos)라는 사람에 의해서 불태워 졌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에베소 도시 안에서만 32곳의 아데미 신상을 숭배하던 신전의 터전이 발견되었다. 그와 같은 뿌리 깊은 우상 숭배의 도시에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는 영적 싸움과 소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세속적인 풍족(豊足)과 거룩한 부족(不足).
에베소에는 데메드리오란 이름의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은감실 제조업자들의 조합의 조합장격인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요한 3서 1장 12절에 나오는 ‘데메드리오’와 동명이인이다. 데메드리오는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은장색으로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로 인하여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사업에 위기를 느끼게 되자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은 27절에서 보는 대로 크게 세 가지 주장이었다.

첫째,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행19:26)는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와 우상 숭배 비판으로 인하여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둘째,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가 활발해지면 질수록 아데미 신상을 파는 일이 위축되어서 결국은 아데미 신전의 권위도 떨어지고 말 것이다.

셋째, 그동안 숭배하던 아데미 신상의 권위가 떨어지고 아데미신상이 진노하여 큰 재앙이 닥칠 것이다.

는 등의 주장은 겉으로는 그럴싸하나 그 모든 주장의 바탕은 앞으로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가 안 되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무리들은 일제히 분노가 가득한 폭도들로 변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쳐 대기 시작하였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삽시간에 온 에베소 시내에 가득한 소요가 벌어졌다. 결국은 사도 바울의 선교 일행인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서 연극장으로 끌고 들어갔다. 당시에 노천극장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연극장은 공연장이나 정치적인 회합장소로 쓰이던 곳인데 2, 5000여명이 들어가는 거대한 노천 건축물이었다. 사도 바울의 선교로 인하여 이 큰 도시의 시민들이 얼마나 큰 위협을 받게 되었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연극장으로 붙들려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이 자신도 그 곳에 섞여 들어가려고 하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막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그 지역 근동의 아시아 지역 관리들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이고 바울을 위하는 이들이 나서서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32절에 보면 왜 그 곳에 모여들었는지 사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이 서로 웅성거리고 떠들며 서로 이런 저런 주장을 하게 되자 연극장 안은 큰 분란이 일어나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당시 에베소의 적지 않은 인구는 데메드리오처럼 우상인 아데미 신상을 은제품으로 만들어 판매 수익을 올리며 살아가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업가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깨닫고 신앙을 고백하여야만 할 것이다.
데메드리오는 동업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선동하였다.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활에 있는데” 생업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선동한 것이다. 기독교의 예수 부활과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 바울이란 자 때문에 사업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는 선동이었다. 우리는 오늘 날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명한 직업관과 경제관을 갖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술을 팔아도 좋고, 마약을 팔아도 좋고, 탈세해도 좋고, 사기를 쳐도 좋고, 밀수를 해도 좋고, 돌과 나무로 우상을 깎아 만들어 팔아도 좋고, 그 어떤 불량한 방법으로 벌더라도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식의 경제관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말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순종하는 삶을 사모하는 성도라면 불의한 풍족함보다 의로운 부족함을 더욱 큰 신앙의 만족으로 여기며 살아갈 줄 아는 청빈한 믿음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시편에 보면 악인의 나중과 성도된 의인의 나중에 대한 명쾌한 선언의 말씀이 나온다.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20-31)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더딜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때가 되면 개인과 가문과 민족이 점점 흥왕해 가리라는 소망을 갖고 살아가자. 세상적인 불의한 재물은 때가 되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겸손한 주의 백성들은 그 가지가 마르지 아니하며 열두 달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의 축복과 청청한 은혜와 풍성함을 평생토록 누리고 베풀며 자자손손 누리고 베풀며 살게 될 것이다.


점점 더 흥왕해져 가는 주의 말씀.
그 요란하던 에베소 시가지와 연극장에 몰려들던 수 만 명의 무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고요가 찾아 왔다. 33절과 34절에 보면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고 나섰던 유대인인 알렉산더가 결국은 일제히 큰 소리를 외치며 달려드는 무리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시를 받고 적개심을 갖고 달려드는 무리들 앞에서 결국은 물러서고 말았다. 이 같은 소요는 두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을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온 도시가 술렁거리는 소요가 계속되자 에베소 시의 최고 행정 관리인 서기관이 나서서 무리를 진정시켰다. 그는 행정가답게 차근차근 논리적인 내용으로 무리들의 선동과 소요를 가라 앉혀 보려 하였다. 35절에 보면 서기장은 유창한 화술로 에베소 시민들을 달래기 시작하였다. 에베소 시는 큰 아데미와 하늘의 신인 제우스(Zeus)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인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바가 아니냐고 저들의 자존심을 추겨 세워 준 것이다. 에베소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일은 매우 자유롭고 전혀 그 어떤 제약도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 저들에게 서기장이 나서서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 경솔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권면은 설득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의 선교 일행인 마게도냐 사람들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들인 것은 불법한 일이었다고 차근차근 설명하여 소동을 일으키던 수많은 군중들을 평정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저들이 아데미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 한 것도 아니고 아데미 여신을 비방한 적도 없는데 어찌 저들을 붙잡아 들였느냔 말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하니 적법하게 고발하거나 고소할 일이 있으면 재판의 과정을 거쳐서 총독들에게 고발하거나 정식으로 민회에 상정해서 문제의 진위를 살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설명해 주었다. 아무리 많은 무리가 모였더라고 이는 불법집회라고 규정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서기관의 설명 앞에 폭도처럼 달려들던 무리들은 뿔뿔이 흩어져 해산하고 말았다.

사도행전 20장 1절에 보면 그 같은 거대한 소요 사건이 가라앉고 평온을 되찾은 이후에 사도 바울은 제자들 즉 주를 믿는 성도들을 불러 모아 권면하는 시간을 좀 더 갖고 에베소를 떠나 다시 구라파의 관문인 마게도냐로 건너갔다. 여기 ‘권한다’는 말이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이다. 성도된 우리들은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계속하여 복음을 전파하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주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그 복음이 점점 힘을 얻고 흥왕하여 세력을 더해 가도록 분명히 역사하실 것이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1-2) 사도 바울은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디모데에게 이와 같이 권면하였다. 그렇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항상 힘써야 하는 절대적인 믿는 자의 사명이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Preach the Word; be prepared in season and out of season; correct, rebuke and encourage - with great patience and careful instruction)

어떤 형편과 상황을 만난 지라도 주의 말씀을 꾸준히 전하자
끝까지 참고 가르치자
책망과 훈계와 격려를 균형 있게 하자.

지나는 길에 멋있는 소나무가 눈에 들어와서 차를 세우고 물었다. 시골 뒷산에 가면 눈에 띄는 그런 소나무인데 그 값이 오천 만원이라고 하였다. 억대 나가는 소나무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 소나무들은 오십년 백년 아니 그 이상의 긴긴 세월을 비바람과 눈과 서리의 폭풍한설을 다 맞고 견디고 이겨가며 때론 가뭄도 견디고 때론 병충해도 이기면서 긴긴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나무들이 아닌가.

때가 되면 우리들의 인생과 사역도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나무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종려나무요 감람나무와 같은 축복된 인생들이 점점 넘쳐 나는 흥왕한 사역이 담을 넘는 가지처럼 될 날이 다가 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자기 경영, 자기 관리의 승리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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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먼저 가세요"최고관리자
"주는 피난처"최고관리자
"천 번을 불러도"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