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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받은 성도의 모습(행2:37-47)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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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6-16 21:55 조회 18,342 댓글 0
 
공기가 없이는 그 어떤 새라도 날아 갈수가 없다. 공기가 없이는 날개가 크고 긴 독수리라도 하늘을 날수 없고 아주 가볍고 작은 참새 한 마리라도 날 수 없다. 또한 물이 없이는 그 어떤 크고 작은 물고기라도 헤엄쳐 다닐 수도 없고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성령의 힘이 없이는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신자라야만 성도인 것이다. 물론 성령 받지 못하고도 교회에 다닐 수는 있다. 교회 안팎의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귀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할 수 있다. 한편 생각하면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출석하는 그 행위 자체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나 자녀들이나 형제자매나 친구의 권위에 못 이기고, 마지못해서 예배에 참석해 주는 식으로 교회 생활을 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을 수 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그 마음 한 가운데에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또한 로마서 8장 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이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다. 이것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내용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진리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는 말씀도 해 주셨다. 그러므로 거듭나야 그리스도인이고, 거듭나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거듭났다는 말은 곧 성령 받았다는 말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거듭 날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부활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십일을 계셨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신 것이다. 승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또한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던 120여명의 무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 중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열 한 제자가 있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고 예수의 아우들도 있었다. 저들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각각 방언으로 기도하였다. 성령 충만을 받은 무리들을 목격한 어떤 이들은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깔보고 무시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서 큰 소리로 설교하였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 2장 14절부터 36절까지에 담겨 있다. 베드로가 전파한 설교의 내용은 명확한 것이었다. “너희들이 핍박하여 죽인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대단히 간단한 사실을 증거 한 것이다. 이처럼 역사와 사건의 사실은 간단한 것이다. 다른 어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살리셨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어떻게 승천하여 앉아 계신지를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예언시의 내용을 차근차근히 인용하여 잘 설명하였다.(시16:8-, 시110:1)

그런데 이와 같은 복음의 핵심과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처럼 듣고 있던 무리들 가운데 마음에 찔림이 일어났다. 그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질문하게 된 것이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다시 짧고 명쾌한 설명으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전하였다. 설교한 것이다. 즉,

·회개하여야 한다.
·각각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성령 받을 약속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천하 만민 들 가운데에 하나님  이 부르신 자들에게 골고루 해 주신 것이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설명해 준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날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신도의 수가 3,000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120여명의 무리에게 바람과 같고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임한 성령의 역사가 3,000여명의 무리들에게 불길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과 부흥의 시작이요 성령 안에서 성도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역사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인 것이다.

자, 그러면 성령을 받은 성도의 모습은 무엇인가. 본문 속에 담긴 역사적인 교훈을 되새기는 중에 새로운 성전의 입당 시대에 참여하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 임하기를 소망한다.


성도다운 경건의 능력.
성령을 받고 난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하여 절대 순종하였다. 저들은 사도들을 통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가르침의 내용에 대하여 절대로 순종하므로 받아 들였다. 사도들을 통한 가르침이란 곧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연속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 계신 동안에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셔서 늘 함께 데리고 다니시면서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과 기사와 이적들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든 행적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계속된 것이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기도 생활을 계속하던 베드로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걸인이 고침을 받았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고 선포하며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킬 때에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일어나 걷고 성전 안에까지 들어가서 기뻐 뛰며 주님을 찬송한 것처럼 말이다.

그 권위의 바탕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대로 성령이 임하여 권능이 주어지는 것이다. 시내에 운전하고 다니다 보면 아들들보다 더 어린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는 경우를 본다. 앳되어 보이고 아주 젊고 어려 보이는 20대 초반의 젊은 경찰들이 사거리의 교통을 통제하는 경우를 본다. 저들이 부는 호루라기 소리와 교통제어 신호봉을 흔드는 그 손길과 방향에 따라서 사거리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려드는 자동차 행렬이 질서 있게 다스려지고 통제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 권위와 권세는 국가 권력의 힘을 통하여 부여된 것이다.

성도의 삶을 성령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끄는 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받은 성도들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복음으로 계속하여 전파되도록 사도들을 통하여 그런 가르침의 지혜와 권세를 덧입혀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고, 사랑의 떡을 떼며, 계속하여 기도생활에 힘쓰는 기도 운동이 불길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성도다운 경건의 능력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가르침의 연속과 성도다운 사귐을 갖는 서로의 사귐과 주님의 피와 살을 마시고 먹는 성찬에로의 참여 가운데 계속하여 기도하는 기도의 연속성과 계속성이 성도들을 경건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요즘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아리듬체조 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의 손연재 선수가 리본, 후프, 곤봉의 세 종목 모두 금메달을 따내서 3관왕이 되었다. 그런 완벽에 도전하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얼마나 고난도의 자기 극복 훈련과 정밀한 반복 훈련을 통하여 그런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결과를 얻었겠는가.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성령을 받은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말씀과 기도와 성도의 교제와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는 그 경건의 훈련이 계속될 때에 성령 받은 성도다운 성도답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왜 성경은 곳곳에서 말씀과 기도 생활을 강조하는 것일까.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전파하고 기도하며 부르짖어 간구하고 성도의 사귐과 교제를 계속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성찬 공동체요, 말씀 공동체요, 기도 공동체의 삶을 사는 힘은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과 부흥의 원리였던 것처럼 오늘날도 똑 같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예외가 없다. 그러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의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삶의 모습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소유한 재물을 공유하는 사랑의 실천.
세상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경제 여건 중심이요 물질 중심이요 눈에 보이는 동산과 부동산 중심이다. 성경의 내용도 그런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에덴동산에 창조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온 동산의 온갖 좋은 것을 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물해 주셨다.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동산이 에덴이 아니었나. 창세기 2장에 보면, 단지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 앞부분에 보면,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하셨다.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이다. 그리고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금하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왜 그랬을까.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소유에 대한 집착에 끝이 없다. 이런 인간의 약점을 뱀으로 등장한 사탄이 공격한 것이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갈라서는 장면을 보라. 그 시작은 조금 더 가지겠다는 소유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갈라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조차 롯보다는 마음에 여유와 안정이 있었다.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이날 이후로 조카 롯은 눈에 보이는 곳,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아 보이는 풍성한 땅을 소돔과 고모라를 중심으로 먼저 선택하였다.

에서와 야곱의 싸움도 마찬가지 아닌가. 쌍둥이 동생인 야곱은 항상 형의 장자권에 대하여도 집착하였고 아버지가 해 주실 축복 기도에 대하여도 집착하였다. 결국 동생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팟죽 한 그릇에 빼앗아 내었고 나중에는 들로 산으로 가서 야생 짐승을 잡아다가 연세 많으신 아버지 이삭에게 별미를 접대하고 축복 기도를 받으려 하던 형 에서를 속이고 먼저 아버지 앞에 들어가 축복 기도를 받고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지 않았나. 창세기 27장 이후에 나오는 장면들이다.

이와 같이 소유에 대한 집착과 성공에 대한 집착, 출세에 대한 집착, 축복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부부의 갈등과 집안의 갈등과 형제의 갈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처럼 소유에 대한 집착의 문제 앞에서는 싸움과 분규와 갈등과 대립과 반목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과거에는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욕심은 지구상의 모든 바닷물을 다 퍼 마셔도 만족함이 없으리만큼 끝이 없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나니까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44절에 보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현상이 생겼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고 하였다. 쉬운 일인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해졌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은혜 받으면 가능해진다. 성령 받으면 가능해진다. 4장 32절에 보면 이와 같은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계속되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하였다. 유무상통(有無相通)하였다는 말이다. 인간의 영이 성령 안에서 일치되다 보니 물질적인 것에 있어서도 일치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일은 그 당시에 있었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하면 안 된다. 45절에 보면,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라고 하지 않았나. 생활필수품을 공유하고 생활의 그 어떤 필요이든 서로간에 공유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재산과 소유까지도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는 삶이 번져 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주에 소개하였던 평양산정현 교회의 유계준 장로는 예수 영접하고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된 후에 자기 땅에 미림 교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평양 숭덕 학교의 재단 이사장으로 학교 발전과 후학 양성을 위해서도 소유와 재산을 쏟아 부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남들이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하던 양로원을 세워서 노인복지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처럼 은혜 받고, 성령 받고,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나면 그 증거가 물질생활의 변화요 동산과 부 동산의 소유에 대한 집착에 변화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요즘 교회 안에서도 확연하게 그 증거가 드러난다.

마틴 루터의 말처럼 ‘지갑이 변화 되지 않은 성도’는 진정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다.지갑이 열려야 진정 은혜 받은 증거요 성령 받은 성도의 삶의 증거인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소유에 집착하고 동산, 부동산, 보석, 패물, 주식, 증권, 비싼 가구, 비싼 장식품 등에 집착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은 가짜다. 아직 한참 거듭나야 한다.

어느 침례교회에서 침례예식을 행하는데 침례조로 걸어 들어오던 새 가족이 머뭇거리더란다. 목사님이 침례조의 깊은 물 한 가운데서 그를 초청하였다. “아무개 성도님 어서 들어 와서 침례를 받으십시오.” 그 때 그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서둘러 들어오려 하다가 그만 주머니의 지갑을 꺼내 놓지 못하고 여기에 왔습니다.”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성도님! 어서 들어오십시오. 성도님은 지갑도 침례를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초청했다고 한다. 

성도는,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는 거듭나고, 다시 나고, 새로워지고, 변화되고, 성령 받은 증거로 물질관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소유와 재물의 씀씀이에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성령 받은 성도의 증거가 있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에 의해서 재산과 소유를 필요를 따라서 나누는 새로운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지나간 이천년의 교회 역사로 이어지고 한국 교회의 역사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처처에 교회와 기독교 학교와 기독교 병원과 기독교 고아원, 양로원, 복지 시설 등이 오늘 날처럼 전국 강토에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번져 갈 수 있었다. 그 힘은 본문에 소개된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성령 받은 삶의 모습이 오늘 날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재현되고 이어져 온 증거이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다. 지난 삼년 반 만에 이와 같은 성전 건축의 대 역사를 이룩할 수 있었던 힘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 받은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의 힘이 아닌가. 

 
마음의 진실을 담은 성도의 사귐.
성령을 받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집집마다 둘러 앉아 떡을 떼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이는 성도 간에 사랑의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는 애찬과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성찬에의 참여를 모두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고, 성도들 간에 사랑의 음식을 나누는 성도의 연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밥상 공동체라는 말이 있지 않나. 가족을 식구라고 하지 않나. 이처럼 서로 간에 먹는 행위는 대단히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우리 언제 만나서 밥 한번 먹자”고 인사하지 않는가. 이는 뭘 먹자는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성도가 서로 만나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먹고 마시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복된 일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요한 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하시는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고 하셨다.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에 나오는 돌아온 둘째 아들의 비유에 보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아버지가 주신 유산을 모두 다 낭비한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왔을 때에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하지 않는가.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15:23)고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여러 해 만에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아라. 이것이 천국이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세상의 하나님을 모르는 수많은 인생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초청하여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거룩한 성도의 사랑의 식탁에 둘러앉아서 기쁜 마음으로 떡을 떼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만족해하고 행복해 할 수 있도록 초청하는 곳이 교회인 것이다.

예수님도 보라. 가시는 곳마다 무리들 한 가운데 둘러 싸여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말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어째서 너희 선생 예수는 늘 먹고 마시고 잔치하느냐.” 그 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신랑이 있는 동안에 먹고  마시고 잔치하는 것이 옳지 아니 하냐”고 말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베다니의 친구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떡과 포도주를 갖다가 놓고 최후의 만찬 음식을 더불어 잡수셨다. 부활 하신 후에도 갈릴리 해변에 새벽 시간에 숯불을 지펴 놓으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서 제자들을 먹이셨다.

성령 받은 성도의 신앙생활은 이처럼 계속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 간에 먹고 마시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먹고 예수 안에서 마셔야 한다. 그것이 성령 받은 성도의 모습이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5)고 하셨다. 그리고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8)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가 성령을 받은 또 다른 성도들과 함께 떡을 먹고 마시는 사귐은 이 세상 식탁에서의 사귐일 뿐만 아니라 영생하는 떡을 먹는 영원한 사귐인 것이다.

부부나 가족들도 보라. 부부 사이가 나빠지면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것부터 뜸해 진다. 부부가 무엇인가. 가족이 무엇인가. 부모 자녀가 무엇인가.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침상에서 자고, 한 집 안에서 울며 웃으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령 받은 성도는 46절의 말씀처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거룩한 성도의 사귐이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골고루 인정받는 성도들의 일상.
43절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고 하였다. 47절에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고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정으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이요 성도다운 성도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계속하여 잘 감당하여야만 한다.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사도들로 인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다 보니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칭찬하고 칭송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주체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드높이고 찬미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번져 가게 되었다. 이것이 진정으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고 맛 볼 수 없고 누릴 수 없는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 세상에는 성도들의 연합인 교회를 대신할 만한 그 어떤 단체도 없고 공동체고 없고 조직도 없다. 오직 교회는 교회를 통하여 말하고, 성도는 성도들을 통하여 말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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